서림이가 단천령에게로 가까이 나와 앉아서 이런 말 저런 말 붙이다가 “우
리 청석골 자랑을 좀 들어보실랍니까?” 하고 말한 뒤 꺽정이와 길막봉이가 호
도와 잣을 엄지 식지 두 손가락으로 깨기 내기하던 것을 이야기하고 이봉학이와
배돌석이가 을묘년에 전공 세운 것을 이야기하고 박유복이가 원통하게 죽은 아
버지의 원수 갚은 것을 이야기하고 황천왕동이가 여색에 근엄한 덕으로 김산이
칼에 죽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여 단천령의 귀를 흠씬 소승기어 놓고 곽오주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곽오주가 남의 집에서 머슴을 살 때 주인의 아들이 과부
하나를 첩 삼으려고 데려왔다가 연이 없어 같이 살지 못하고 곽오주를 내준 것
과 그 과부가 곽오주의 아들 하나를 나 놓고 산후발이로 죽어서 곽오주가 갓난
애를 안고 동네로 돌아다니며 동냥젖을 얻어먹인 것과 어느 날 밤중에 어린애가
배고파서 우는데 젖은 얻어먹일 수 없고 가로안고 둥둥이를 치다 치다 겁겁한
성미에 동댕이를 친 것과 어린애가 죽은 뒤 곽오주는 심질로 거의 폐인이 될 뻔
하다가 다행히 폐인은 되지 아니하였으나 어린애 우는 소리만 들으면 심질이 발
작되어서 정신모르고 어린애를 해치는 것을 자세히 다 이야기하여 들리었다. 송
도 기생들은 단천령과 같이 이야기를 잠착하게 듣고 그외의 다른 사람들은 가까
이 앉은 대로 서로 웃고 지껄이고 무슨 이야기 하는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아니하
였다. 단천령은 전에 한번 어린애 우는 것이 듣기 싫어서 어린애를 포대기째
방구석에 밀어박질렀다가 어린애의 경기를 고쳐주느라고 달포 애쓴 일이 있어서
자기의 일과 곽오주의 일이 오십보 백보까지 틀릴 것이 없는 듯하여 곽오주가
흉악한 조명을 듣게 된 것이 용혹무괴의 일로 생각이 들었다. 단천령 생각에
흉악한 야차만 여긴 곽오주도 구경 자기와 다름이 없는 사람이나, 사람으로 생
김생김은 도둑놈 밖에 더 될 것이 없어 보이었다. 그러나 이건 곽오주 하나뿐이
아니다. 우선 꺽정이부터 사내답게는 생겼으나 천생 도둑놈이고 그외의 여럿도
목자 불량한 것이 숨길 수 없는 도둑놈들이었다. 어느 모로 뜯어보든지 도둑놈
같지 않은 사람이 한가, 황가, 봉학이 셋인데, 언어 동작이 한가는 왈자요, 황가
는 상것이요, 오직 봉학이만 씨가 달라서 양반 같았다. 단천령이 곽오주로부터
여러 두령들까지 한번 쭉 돌아보며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단천령이 꺽정이 앞
에 앉은 기생을 바라보니 낯은 익어 보이는데 이름은 생각나지 아니하여 “저
사람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하고 혼잣말을 한 다음에 “자네 이름이
무언가?” 하고 물었다. “소홍이올시다.” “소홍이? 자네 장악원에 시사하지
않았나?” “네, 그랬습니다.” “여기서 만나긴 의욀세.” “녜.” 멀리 앉은 기
생과 수작하고 가까이 앉은 기생들을 모른 체할 법이 없어서 단천령은 자기 옆
의 기생들을 돌아보며 약간 말마디를 물어보았다. 꺽정이가 김산이더러 술을
곧 가져오게 하라고 재촉하여 떡벌어지게 차린 주안상 두 상이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자리들을 옮겨앉는데, 이때까지 혼자 교의에 걸터앉아서 거만을 부리던
꺽정이도 교의를 뒤로 물리고 방석 깔고 내려앉았다. 꺽정이가 서림이, 이봉학
이 두 사람과 같이 한 상을 가지고 단천령을 대접하고 그외의 여러 사람은 모두
딴 상으로 몰리었다. 소홍이는 꺽정이 상에서 술을 치며 권주가까지 부르고, 여
러 사람 상에 와서 시중을 들게 된 송도 기생들은 상제 오입쟁이 한온이와 만수
받이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그저 술치기에 분주하였다. 좌중 십여 인의 복색들
을 볼작시면 조관의 모습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꺽정이는 진사립에 탕건을 받
쳐쓰고 홍포에 자주띠를 눌러 띠고 여러 두령들은 거지반 주사립 밑에 탕건 쓰
고 남철릭 위에 도홍띠 띠고 단천령은 복건 쓰고 창의 입고 오직 한온이만 상제
노릇 하느라고 두건 위에 평량자를 쓰고 베직령 위에 삼띠를 띠었었다. 여러 사
람 상에서 좌석을 좁히려고 먼저 파탈하기 시작하여 꺽정이, 서림이, 이봉학이 세
사람도 운에 딸려서 의관들을 벗고 끝으로 단천령을 벗으라고 번갈아 권한즉
단청령은 선선하여 벗기 싫다고 방색하였다. 단천령 속에는 무슨 핑계든지 하고
술자리에서 일찍 일어나 볼 생각이 있는 까닭에 파탈까지 하고 싶지 않았던 것
이다. 도회청 안이 별로 소냉하지 않은데 선선하다고 하므로 귀인이라 다르다고
꺽정이가 단천령을 비웃은 뒤 곧 가까이 섰는 신불출에게 손님께 화롯불을 갖다
드리라고 분부하였다. 사람 운김과 술기운으로 실상은 선선치도 않은데다 숯불
이 이글이글하는 청동화로를 옆에도 갖다 놓고 뒤에도 갖다 놓아서 땀이 날 지
경이라, 단천령이 더 방색할 말이 없어서 창의를 벗으려고 술띠를 끄르니 소홍
이가 선뜻 일어나 창의를 받아서 한곁으로 치워놓았다. “복건마저 벗으시지요?
” 하고 소홍이가 권하는데 “맨상투바람으로 앉았는 꼴이 보구 싶은가?” 하고
단천령이 말하는 것을 꺽정이가 듣고 한온이를 불러서 “손님 감투가 집에 있겠
지. 얼른 사람 보내가져오게.” 하고 일렀다. 꺽정이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가 무
섭게 득달같이 탕건을 가져와서 단천령이 복건마저 벗었다.
얼굴들이 불그레할 만큼 술기운이돌았을 때, 서림이가 꺽정이를 보고 “술은
나중에 다시 먹을 작정하구 저 기집들의 음률을 한번 들어보시지요.” 하고 말
하여 꺽정이의 분부로 주안상들을 물리는데 곽오주, 길막봉이 같은 사람은 내놓
기 싫은 상을 억지로 참고 내놓았다. 여러 사람의 상이 놓였던 자리와 그 앞자
리에 송도 기생이 하나는 가야금을 안고 또 하나는 장고를 끼고 앉았다. 단천령
은 초향이의 가야금을 들은 귀가 더러워질 듯 생각하였던지 가야금 들여오란 말
을 들은 때부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가야금 소리 나기 전에 단천령은 슬며
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난간 앞에 나와 앉아서 밖을 내다보려고 휘장을 치어드니
먼저 화로를 갖다놓던 사람이 어느 틈에 뒤에 따라와 섰다가 옆으로 나서며 “
휘장을 좀 거드치오리까?” 하고 물어서 단천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 사람이 휘장끝을 접침접침 접어서 줄 위로 걷어올린 뒤에 단천령이 난간을
의지하고 앉아서 밖을 내다보며 “횃불이 달을 끄슬르는군.” 하고 혼잣말을 하
였다. 신불출이가 단천령의 혼자 하는 말을 듣고 꺽정이에게 가서 품하고 마루
끝에 나서서 마당에 섰는 졸개들더러 홰를 끄라고 소리를 쳤다. 졸개들이 횃불
을 두들겨 끄는 중에 이왕이면 사초롱도 앞으로 두엇만 남기고 다 꺼버리라고
꺽정이가 분부를 내리어서 불빛이 거의 다 없어지니 달빛이 밝게 솟아났다. 초
저녁의 흐릿하던 것이 맑아져서 달빛이 대낮같이 명랑하였다. 가야금 뜯는 기생
은 그 동안에 줄을 다 고르고 향악에 밑도드리부터 시작하여 벌써 이장을 마치
고 삼장을 뜯는 중인데 수단이 과히 망측하든 아니하나, 초향이의 수단과는 천
지 상격으로 틀리었다. 단천령이 초향이를 생각하고 산 너머 먼 하늘을 바라보
며 휘파람을 불었다. 단천령은 휘파람도 잘 부는 까닭에 소리가 초군 아이들의
초적만 못하지 아니하였다. 꺽정이가 서림이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은 뒤 입과
손으로 피리부는 시늉을 내고 턱으로 단천령을 가리켰다. 휘파람보다 피리를 불
게 하란 뜻이다. 서림이가 꺽정이의 뜻을 받고 단청령 옆에 와서 앉으며 “피리
선성은 익히 듣조왔지만 휘파람까지 용하신 줄은 몰랐소이다.” 하고 말을 붙이
니 단천령은 휘파람을 그치고 한참 있다가 “오늘 밤 달이 좋소.” 하고 딴청으
로 대답하였다. “저 기생의 가야고가 어떻습니까?” “어떻다니?” “잘하느냔
말씀입니다.” “잘하는구려.” 이때 가야금은 밑도드리 칠장이 다 끝나고 돌장
이 시작되었었다. “밑도드리가 인제 끝났구먼요.” “음률을 아시우?” “어수
귀나 겨우 떴다구 할까요.” “어수귀라니 무슨 말이오?” “눈에 어수눈이 있
으니 귀에 어수귀가 없겠습니까?” “훌륭한 재담이구려.” “대체 피리를 어떻
게 잘 부시면 고금무쌍이라구 칭찬을 받으십니까?” “누가 고금무쌍이라구 칭
찬합디까?” “세상 사람이 다들 그렇게 칭찬하지 않습니까?” “모르구 하는
칭찬이 대중 있소. 그러구 그까지 피리가 정말루 고금무쌍이면 좋을게 무어요?
율객 천명이 수치나 될 뿐이지.” “율객 천명이라니 천만의 말씀이지요. 우선
선조부 영감께서두 거문고를 잘하셨다는데 세상에서 율객으루 친단 말씀은 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으루 보든지 학문으루 보든지 나 같은 불초손이 어디 있겠
소. 그러구 또 거문고는 점잖은 악기라 여느 악기와 다르니까.” “왜 거문고를
배우시지 않구 피리를 배우셨습니까?” “배우려구 배운 것두 아니오. 장악원
악공의 피리 잘 부는 사람이 우리 조부 때부터 집에를 다녀서 아이 적에 장난으
루 배운 것인데 그럭저럭 조명이 널리 나게 되었소.” “오늘 밤 이런 좋은 달
밤에 피리를 한번 안 부르시렵니까?” “달은 좋아두 흥이 나지 않소.” “내가
귀뜸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서림이가 갑자기 가는 목소리로 소곤거리
듯 말하니 “무슨 말이오?” 하고 묻는 단천령의 말소리도 따라서 낮아졌다. “
오늘 밤 이 잔치의 속내를 아십니까?” “내가 알 까닭이 있소.” “대장이란
사람이 피리가 듣구 싶어서 일부러 이 잔치를 차렸습니다. 가야고 끝난 뒤에는
필경 한 곡조 듣자구 청할 테니 처음에 좋은 낯으루 청할 때 선뜻 허락하십시
오.” “그 청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할 모양이오.” “아까 잔치 차릴 공론을
할 때 일껀 잔치까지 차렸다가 피리를 안 불면 어떻게 하랴 말이 났었습니다.
오복전 조르듯 조르자구 말하는 사람두 있었구 한 달이구 두 달이구 붙들어 두
었다가 그예 한번 듣자구 말하는 사람두 있었는데, 대장이 이 말 저 말 다 듣구
나서 하는 말이 한번 불래서 불지 않으면 창피하게 조를 것두 없구 또 나중에
듣자구 붙들어 둘 것두 없구 피리를 다시는 불지 못하두룩 입살을 짜개서 쌍언
청이를 만들구 두 손의 손가락을 끊어서 조막손이를 만들어 놔보내겠다구 합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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