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지, 우리 선생님이 출가할 때 삭발해 드린 중이 그저 살았군.” “대장의 선생
님이 분신술도 할 줄 아시구 호풍환우두 할 줄 아셨소?” “난 모르우. 난 못봤
으니까.”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은 구경 잡술꾼인데 조정암 선생 같은 성인
군자가 잡술꾼을 친구루 사귀셨을 리가 없을 듯해서 나두 그런 말은 곧이듣지
않았소.” “우리 선생님이 잡술은 아셨는지 모르지만 천문, 지리, 의약, 복서 무
엇에구 막힐 데가 없으셨소. 그러구 앞일을 잘 아셨소.” “대장두 앞일을 잘 아
시우?” “내가 앞일을 잘 알면 도둑눔이 됐겠소?” 꺽정이가 껄껄 웃은 다음에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 내게 하신 유서가 있는데 그 유서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없으니 한번 보실라우?” 하고 물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더라두
한번 보기나 합시다.”
꺽정이가 머리맡에 놓은 조그만 손궤짝을 열고 그중에서 쪽종이 착착 접은 것
을 꺼내서 단천령을 주었다. 그 종이는 “삼년적리관산월 구월병전초목풍 부상
서지봉단석 천자정기재안중” 이란 절구 한 수 적힌 것이었다. 단천령이 한참
들여다보다가 그 종이를 접은 금대로 도로 접어서 꺽정이 앞으로 밀어놓았다.
“그 뜻을 아시겠소?” 꺽정이가 묻는데 단천령은 대답 없이 고개를 가로 흔들
었다. “글하는 이들이 모두 모른다니 무슨 글이 뜻이 그렇게 어렵단 말이오.”
“글 뜻은 별루 모를 것이 없지만 유서루는 뜻을 땅띄임두 못하겠소.” “대체
글뜻은 무어요? 아는 대로 말씀 좀 하시우.” “그게 당나라 두보의 글을 모은
것이오. 첫구 안짝은 동쪽에서 서쪽으루 간단 뜻이겠구, 바깥짝은 천자의 깃발이
눈에 보인단 뜻이오.”
단천령이 말을 할 때 밖에서 두세두세하는 소리가 나더니 여러 사람이 사랑
앞마당으로 죽 들어서며 그중의 두 사람은 바로 방으로 들어왔다.
꺽정이가 방에 들어온 두 사람의 절을 받을 때는 “잘들 다녀왔나?” 말을 묻
고 마당에 선 여러 사람의 문안을 받을 때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었다. 두 사
람 중의 얼굴 희고 수염 검은 사람이 자리에 일어섰는 서림이와 수어수작을 하
는데 꺽정이가 “가서 옷들이나 바꿔 입구 오게. 다녀온 이야기는 나중에 듣세.
” 하고 말하여 두 사람은 섰다가 도로 나갔다. 두 사람이 마당의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나간 뒤에 단천령이 먼저 있던 처소로 가겠다고 말하니 꺽정이가 그럴
것 없다고 말리고 나서 “전에 종반 이가에 이학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촌수를
따질 수 있소?” 하고 물었다. “이학년이라니 신사년 안씨집 옥사에 죽은 사람
말씀이오?” “네, 그렇소.” “촌수를 따지면 동고조팔촌일 것이오.” “그럼
그리 먼 일가두 아니구려.” “삼종이 무어 멀겠소. 그런데 그건 어째 물으시우.
” “일가 하나를 찾으시우. 그 아들이 여기 있소.” “그가 자제가 있어요? 그
자제가 이름은 무어구 나이는 몇 살이오?” “이름은 봉학이구 나이는 올에 마
흔이오.” “갓마흔이면 신사생 아니오? 그럼 그 아버지 죽던 해에 났구려.” “
난 지 백 일두 되기 전에 그 아버지가 죽었다는갑디다.” “참말 조고여생이구
려. 가까이 있거든 만나보게 해주시우.” “옷 바꿔 입구 오랬으니까 곧 올 것이
오.” “아까 왔다간 사람이오?”
꺽정이가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이었다. 서림이는 이학년의 근본을 자세히 알
지 못하여 “아무리 천첩 소생이라두 종반 양반의 아들루 홍문관 관노 노릇을
한 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단천령더러 물어서 이학년이 노는 계집의 몸
에서 난 것을 그 아버지가 찾지 아니하여 모족을 따라서 천인이 된 것과 속량못
하고 천인 노릇을 하였지만 학문이 있어서 당대의 문인학사들과 추축이 많았던
것을 단천령이 간단하게 이야기하였다. 이학년은 기묘년 조정암 옥사에 걸려서
장류를 속 바치고 면하고 신사년 안처겸 옥사에 또 걸려서 처참을 당한 사람이
라 기묘년 이야기도 나오고 신사년 이야기도 나왔는데 꺽정이와 단천령이 서로
돌려가며 말자루를 잡고 서림이도 간간이 말참례를 들었다.
한동안 좋이 지나서 이봉학이가 탕창을 말쑥하게 차리고 왔다. 이봉학이가 서
림이의 비켜주는 자리에 와서 앉은 뒤 “이 양반하구 인사하게. 자네의 일가 양
반일세.” 꺽정이가 단천령과 인사를 붙이었다. “나는 이봉학이란 사람이오.”
“나는 단천령이야. 선장 휘자가 학자 년자시라지. 우리가 촌수를 따지면 사종숙
질간인데 내가 숙항이니 처음 봐두 하게 하겠네.” “일가루 하게할 생각은 마
시우. 나는 일가가 없는 사람이오.” “선장 일을 생각하면 자네가 그렇게 격한
말을 하는 것두 괴상할 것이 없지만 일가를 어떻게 억지루 떼어버리나. 그러구
나두 지체가 자네나 별루 다름없는 사람일세. 증조 익령군은 말씀할 것 없구 조
부 수천부정두 서자시구 나 자신두 서자일세.” “그건 나를 양반의 서족으루
알구 하는 말씀이지만, 아니오. 나는 상놈이오.”
단천령은 말을 더 하지 못하고 한숨을 지었다. 평소에 불쌍하게 생각하던 일
가 학년이 아들이 있단 말만 들어도 반가울 터인데 그 아들 되는 사람을 만나보
게까지 되어서 반갑기가 그지없건만 정답게 수작을 붙일 수 없는 것이 애달팠던
것이다. 꺽정이가 빙그레 웃으면서 “일가간에 정다울 줄 알구 일껀 인사를 붙
였는데 말하는 것이 곧 척진 사이 같으니 인사 붙인 사람까지 무안해.” 하고
이봉학이를 나무라듯 말하니 이봉학이가 단천령을 돌아보며 “처음 뵙는 처지지
만 남과 달리 생각해 주시는 까닭에 진정을 속임없이 말씀한 게니 어찌 알지 마
시우.”하고 부드러운 언사로 말하였다.
시월도 보름이 가까웠건만 일기 따뜻한 것이 봄날과 같았다. 해진 뒤에는 바
람이 좀 차나 장정들은 무명 고의 적삼으로 견딜 만하였다.
하늘에 구름도 없고 공주에 진애도 없으나 산에서 남기가 내리는지 저녁 연기
가 아직 다 사라지지 않고 잠겨 있는지 초저녁 달빛은 조금 흐릿하여 물같이 맑
지 못하고 수은같이 희었다.
조사 때만 지나면 종일 텅 비는 도회청에 이날은 낮부터 저녁까지 사람이 그
치지 않고 들락날락하였다.
모정 같던 도회청을 그 동안 좀 변작하여 뒤와 좌우는 벽을 치고 전면은 양쪽
에 난간을 드리었었다. 난간 중간은 오르내리는 층계인데 층계 위만 틔우고 난
간 밖은 양쪽 다 휘장을 치고 대장 앉는 주홍칠한 큰 교의 하나만 남기고 그외
의 다른 교의는 다 치워버리고 대청 안에 멍석을 들여깔고 멍석 위에 등메를 덧
깔고 층계에서 정면에 놓인 주홍교의 양쪽으로 벌려서 또 좌우로 모꺾어서 보료
방석들을 깔아놓고 대청 앞 추녀 끝에는 사초롱들을 달아놓고 대청 안 들보 아
래는 큰 등롱을 달았거니와 휘장이 바람을 막아서 아늑한 데는 나무 촛대들에
(이 때는 유기 촛대가 없었다) 대초를 붙여서 넓은 대청을 밝히었다.
꺽정이 사랑에 모이었던 여러 두령들이 꺽정이를 옹위하고 도회청으로 왔다.
두령 중의 아니 온 사람이 오가와 한온이와 김산이 셋인데 김산이는 음식을 보
살피고 올 것이고 한온이는 손님과 같이 올 것이나 오가는 두통이 나서 못 오겠
다고 아니 왔다. 오가가 상처한 뒤로 그전 놀기 좋아하던 풍치가 없어져서 노는
자리에는 모피를 잘하므로 두통이 심하거든 머리를 동이고라도 오라고 꺽정이가
박유복이를 보내고 또 서림이를 연거푸 보내서 오가를 억지로 끌어오다시피 하
였다. 오가까지 마저 온 뒤에 꺽정이가 한온이에게 사람을 보내서 손님을 뫼시
고 오라고 하여 단천령이 한온이를 따라왔을 때 꺽정이가 일어서니 여러 두령이
모두 따라 일어서서 단천령을 정중하게 맞아들이었다.
꺽정이의 걸터앉은 교의 양쪽에 보료가 하나씩 깔렸는데 왼쪽 보료에는 서림
이와 이봉학이가 앉고 바른쪽 보료에는 오가와 박유복이가 앉았다. 또 좌우편으
로 모꺾어서 보료 하나, 방석 둘씩 깔렸는데 왼편에는 단천령을 보료에 앉히고
황천왕동이와 한온이가 방석에 앉고 바른편에는 배돌석이와 곽오주가 보료에 앉
고 길막봉이가 방석 하나를 깔고 방석 하나를 김산이의 앉을 자리로 남겨놓았
다. 좌정한 뒤에 낮에 서로 보지 못한 오가와 단천령을 꺽정이가 인사를 붙이었
다. 오가가 인사를 마치지마자 곽오주가 꺽정이를 바라보고 “나두 인사 못했소.
” 하고 인사 붙여달라고 말하는 것을 꺽정이가 못 들은 체하니 곽오주는 바로
단천령을 건너다보며 “우리두 인사합시다.” 하고 제대로 인사 수작을 건네기
시작하였다. “나는 성은 곽가구 이름은 오주요.” “나는 단천령이오.” “서울
은 단가가 많소? 나는 단가 성 가진 사람을 처음 보우.” 꺽정이가 곽오주의 말
을 듣고 “이눔아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 하고 나무랐다. “무에 미친 소리라
구 공연히 호령을 하시우?” “이 양반 성이 이씬 줄을 모르느냐?” “단천령은
벼슬 이름이다.” “모두들 단천령이 단천령이 하기에 나는 성이 단가구 이름이
천령인 줄 알았소.” “그렇기에 너 같은 무식한 눔은 인사할 생각두 말구 국으
루 가만 있지.” 꺽정이가 곽오주를 윽박지른 다음에 곧 단천령을 돌아보며 “
저눔의 행적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소. 요새 여인네들이 우는 애를 혼동시킬 때
곽쥐라구 한답디다. 그 곽쥐가 곧 저눔이오.” 하고 말하니 단천령은 깜짝 놀라
면서 “어린애를.” 하고 말하다가 말을 중동무이하고 곽오주를 바라보았다.
단천령 생각에 곽오주의 얼굴은 보기 흉악하기가 야차의 화상같아야 할 것인
데 이목구비가 여느 사람과 다름없는 것이 마음에 송구스러운데다가 죄없는 어
린애를 해치는 곽쥐와 같은 전고에 없는 흉악한 도둑놈과 마주 대하고 앉았는
것이 진저리가 치이도록 불쾌하여 말도 않고 웃도 않고 고개를 숙이고 앉았었
다. 꺽정이가 계집들을 곧 불러오라고 재촉하여 김산이가 계집 셋을 데리고 왔
다. 셋 중에 둘은 송도서 온 기생이요, 나머지 하나는 소흥이었다. 소흥이는 전
에 단천령과 안면이 있다고 하여 꺽정이가 밤에 와서 같이 놀게 하라고 미리 일
러두었던 것이다. 꺽정이의 지휘로 소홍이는 꺽정이 교의 앞에 들어앉고 송도
기생들은 단천령 좌우에 갈라 앉았다. 단천령은 초향이를 생각하여 마음과 뜻이
멀리 영변으로 가고 가까이 옆에 앉은 기생들은 눈도 잘 거들떠보지 아니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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