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에 그런 도깨비가 있단 말은 전에두 있었소?” “전부터 일러 내려오는 말이 온
천의 주인 도깨비가 있어서 온천 효험을 내주기두 하구 안 내주기두 한답니다.
사오 년 전에 한번 온동네가 떠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두 지금 같은 겨울인데
새벽에 자욱눈이 온 뒤 동네 사람 하나가 일찍 온천 앞을 지나다가 탕으루 들어
간 발자국을 보구 누가 이렇게 새벽 목욕을 하러 왔나하구 탕안을 들여다보니까
아무두 없더랍니다. 그런데 눈 위의 발자국은 들어간 것 뿐이구 나온 것이 없어
서 다들 도깨비의 장난으루 믿었습니다. 나중에 알구 보니 그때 동네서 머슴살
이하던 장난꾼 하나가 탕 안에 들어가서 세수하구 나오는데 남을 속일라고 짚신
을 꺼구루 신구 들어갈 때 발자국을 다시 밟구 나왔었답니다.” “신발을 꺼꾸
루 신으면 발이 들어갈까?” "앞총을 찌글트려 눌러 신고 들메를 하면 발에 붙지
야 않겠습니까." "이야기 안주가 훌륭하구려. 술 한 동이 여섯이 먹기 부족하니
한 동이만 더 사오라구 하오." 도깨비 이야기, 호랑이 이야기, 종작없는 이야기
가 술자리를 길게 하여 한밤중이 지난 뒤에 다시들 눕게 되었는데, 꺽정이는 두
번 사온 술의 반 동이 턱을 좋이 먹고 걱정근심 다 잊어버리고 잠을 잤다. 꺽정
이 일행이 이튿날 첫새벽에 온천서 떠나서 환갑잔치집 아침밥이 채 되기 전에
마산리를 들어왔다. 이춘동이는 꺽정이와 김산이가 전날 올 줄
알고 기다리다가 오지 않아서 무슨 연고가 있어 못 오는가 보다 생각하고 있던
차에, 꺽정이와 김산이 외의 다른 두령들까지 온 것이 마음에 고마워서 어려운
길을 하였다고 지재지삼 치사하였다. 이춘동이가 어머니 환갑 때 오리라고 하던
박연중이는 아들아이까지 데리고 이틀 전 기하여 와서 뜰아랫방에 있다고 그 방
으로 꺽정이 일행을 인도하여 꺽정이가 방안에 들어가서 박연중이를 보고 "오랜
간만에 보이니 절을 한번 해야지. 자, 절 받으시우." 하고 절하려고 하다가 “이
사람, 망령의 소리 말구 어서 앉게.” 박연중이가 붙들어서 못하고 이봉학이 이
하 네 두령도 절인사하려는 것을 역시 못하게 밀막아서 입인사로 인사들을 마치
고 각각 좌정한 뒤, 박연중이가 한옆에 비켜섰는 아들아이더러 이 어른들께 보
이라고 꺽정이 앞에서부터 돌아가며 절하도록 시키었다. 박연중이는 외양부터
촌보리동지가 다 되었고, 그 아들아이는 외모도 똑똑히 생겼거니와 응대진퇴에
촌티가 없었다. 환갑잔치에 먼 데서 온 손님은 박연중이와 꺽정이 일행뿐이나
본동, 근동에서 사람이 많이 모여서 동네집 방까지 빌렸어도 방사가 오히려 부
족하건만, 뜰아랫방에는 다른 사람을 들이지 아니하였다. 이춘동이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중에도 아침 밥상이며 점심 국수상을 뜰아랫방에 내갈 것은 낫게
차리라고 잔소리하고 동네 노인들이 모여 앉은 바깥방보다도 뜰아랫방에 상을
먼저 내가게 하라고 재촉하고, 또 상 심부름을 바깥방과 동네방은 일꾼들에게
밀어 맡기고 뜰아랫방은 자기가 친히 하여 뜰아랫방 손님들을 칙사같이 떠받들
었다. 뜰아랫방 손님들이 대체 어디서 온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이춘동이 집 일
꾼들더러 물어보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일꾼들은 알고 모르고 덮어놓고 모
른다고 대답하였겠지만, 청석골대장 임꺽정이가 친히 부하 두령들을 데리고 온
줄은 사실로 일꾼들 역시 분명히 알지 못하였었다. 먹는 빛과 떠드는 소리 속에
경삿날 하루해가 저물었다. 근동 사람은 말할 것 없고 본동 사람도 거진 다 돌
아가서 동네방과 바깥방은 비고 뜰아랫방의 먼데 손님들만 남았다. 이춘동이가
뜰아랫방에 들어와서 등잔불을 켜놓을 때 “벌써 불을 켜게 되었는데 이애가 이
때까지 안 오니 웬일일까?” 하는 꺽정이 말에 “알아보러 간 일을 자세히 알구
오려구 오늘 못 오는 게지요.” 하고 이봉학이가 대답하는 것을 듣고 이춘동이
가 불을 켜놓고 와 앉아서 꺽정이와 이봉학이를 아울러 보며 “올 사람이 누구
요?” 하고 물으니 꺽정이가 “내 처남아이를 오늘 이리루 오라구 했는데 안 오
네그려.”하고 대답하였다. “일이 있는 걸 제치구 오셨소?” “일을 제치구 온
게 아니라 하러 갈라네.” “어디 다른 데루 가실 테요?” “해주땅이나 재령땅
에 잠깐 갔다가 자네게루 다시 와서 전날 말한 대루 자네하구 동행할 작정일세.
” “해주땅이나 재령땅이나 갔다온다니 그게 대체 무슨 일이오?” “일은 나중
조용히 이야기함세.” 꺽정이 말끝에 박연중이가 슬그머니 일어나서 밖으로 나
가려고 하여 “어디 가실랍니까?” 하고 이춘동이가 물었다. “밖에 잠깐 나갈
일이 있네.”“뒷간에 가실랍니까? 어두우니 불을 가지구 가시지요.” “아니 고
만두게.” 박연중이가 밖으로 나갈 때, 그 아들아이까지 뒤를 따라나갔다. “박노
인은 형님이 자기를 꺼려서 일 이야기 안 하는 줄루 알구 자리를 피해서 나간
모양이오.” 하고 이봉학이가 말하여 무심하였던 꺽정이도 개도가 되어서 “의
뭉스러운 늙은이가 정녕 그래서 나간 겔세.” 하고 곧 이춘동이를 내보내서 박
연중이 부자를 청하여 들인 뒤 박연중이더러 “우리가 해주, 재령 지리에 밝지
못해서 말씀을 들어보구 일자리를 정하려구까지 생각하는데 당신을 꺼려서 이야
기 않는 줄루 아시는 건 지릅이 너무 과하시우.”말하고 웃었다. 밤이 들어서 잔
치 뒷설겆이 해주는 동네 여편네들까지 다 갔다. 낮에 사람이 북적북적하던 끝
이라 집안이 괴괴하고 쓸쓸하였다. 그러나 뜰아랫방에는 담화가 그치지 않고 떠
들썩하게 웃을 때도 간간이 있었다. 박연중이가 아들아이 눈에 잠이 가득한 것
을 보고 “졸리냐?” 하고 물어서 “아니오.”하는 대답을 듣고도 “졸리거든
한구석에 쓰러져 자려무나.” 하고 일렀다. 이춘동이가 아이더러 “오늘 밤에 너
는 우리 어머니 방에 가서 자는 게 좋겠다.”하고 말한즉 아이는 그저 들을 만
하고 있다가 그리하라는 저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비로소 “네.” 하고 대답하
였다. 이춘동이가 박연중이 아들을 안에 데려다 두고 나와서 청석골 두령을 보
고 아이가 신통하다고 칭찬을 시작하자, 여럿이 받고 채기로 ‘얼굴이 동탕하다
’ ‘눈에 정기가 있다.’‘열네 살로 숙성하다’‘딸 있으면 사위 삼겠다’
이런 말로 칭찬들 하여 박연중이는 입이 헤하고 벌어졌다. “자제 혼인을 어디
정하셨소?” 꺽정이가 묻고 “아직 못 정했네, 어디 좋은 혼처있거든 한 군데
일러주게.”박연중이가 대답하는데 묻는 사람이 무슨 유의하고 물은 것도 아니
요, 대답하는 사람 역시 지나가는 말로 대답한 것이었다.
이봉학이가 꺽정이를 보고 “애기하구 혼인하면 좋겠소. 아주 천생배필이오.
내가 중매를 들리까?” 하고 말하는 것을 꺽정이가 대답 아니하니 박연중이가
꺽정이더러 “애기가 누군가, 자네 딸인가?” 하고 물었다. “내 딸이 아니고 우
리 누님 딸이오.” “자네 매부가 누군가?” “우리 선생님이라니 동소문 안에
사시던 양선생 말씀인가?” “그렇소.” “자네 생질녀가 이인의 손녈세그려. 그
래 자네 누님이 지금 어디서 사시나?” “우리 누님이 그애 낳던 해 과부가 되
어가지구 내게 와서 오늘날까지 같이 지내우.” “그래 자네 생질녀가 올해 몇
살인가?” “열다섯 살이오.” “내 자식하구 자치동갑일세그려. 나이두 좋군.
다시 더 말할 것없이 자네 생질녀를 내 며느리루 주게.” “좋은 말이오. 그러나
급한 일이 아니니 이 다음 다시 의논합시다.” “자네 누님의 의향을 몰라서 지
금 대답을 못하나?” “우리 누님 의향은 들으나마나지만 혼인에는 보는 것이
많으니까 더 좀 생각해 보잔 말이오.” “보는 게 무언가, 궁합 말인가?” “생
질녀를 들여보냈다가 댁 안식구들이라두 혹 근본을 들쳐서 정가하면 재미없지
않소.” “이인의 손녀요, 호걸의 생질녀니 친가와 외가의 혈통 좋기가 내 자식
에다 대겠나? 근본으루 정가란 게 무슨 소린가? 자네가 당치 않은 염려를 하는
것이 아마두 전날 속에 든 은혈병이 아직두 남아 있는 모양일세.” “그런지두
모르겠소.” “내 평생에 진정으루 우러러본 인물은 김사성 영감두 아니구 조대
헌 영감두 아니구 갖바치 노릇 하시던 양선생일세. 그 선생의 손녀를 며느리삼
게 되면 내겐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겠네.” “그러면 혼인합시다.” “혼인은
인제 아주 완정일세.” “두말이 돼 있겠소.” “내 생각엔 개춘한 뒤 대사를 곧
지냈으면 좋겠는데 자네 바쁘지 않겠나?” “바쁠 것 없소.” “그럼 개춘하거
든 곧 하세.” 박연중이 말끝에 “따님은 놔두구 역혼하실랍니까?” 하고 이춘
동이가 말하여 “지금 혼인 말하는 데가 두어 군데 되니까 어디루든지 정해서
세전에 치우겠네.” 하고 박연중이가 대답하는 것을 이봉학이가 듣고 “내가 중
신애비루 나선 김에 장래 병사 사위를 하나 중신해 드리리까?” 하고 웃으며 말
하니 박연중이는 실없은 말로 알고 “늙은 사람을 놀리려구 하는 말이오.” 하
고 불쾌스러운 내색까지 보이었다. “좋은 낭재가 있어서 중매해 드리려구 하는
데 놀리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장래 병사라구 말하니 장래 무엇 될 걸
미리 어떻게 아우? 그게 실없은 말이 아니오.” “어떤 용하다는 상쟁이가 상을
보구 장래 병사감이라구 말하는걸 들은 까닭에 솔구이발루 그렇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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