꺽정이 외 여러 사람이 놀란 얼굴로 서로 돌아보는 중에 황천왕동이의 이야기
가 끝이 났다.
이봉학이가 꺽정이를 보고 “서림이 초사에서 일이 난 모양이오.” 하고 말하
니 꺽정이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고개를 끄떡이었다. 황천왕동이는 서림이 잡힌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라 “서종사 초사라니 웬 말씀이오!” 하고 물어서 이봉학
이의 이야기로 김선달에게서 기별 온 것을 알고 “그런 줄 모르구 나는 공연히
이 집 주인을 의심했구려.” 하고 말한 뒤 곧 이춘동이를 돌아보며 “용서하게.
” 하고 치의한 것을 사과하였다. “그까지 한담설화는 고만두구 관군이 지금
대체 어디쯤 오나, 뒤에 곧 오나?” “나 온 뒤에 곧 진이 풀려서 풍우같이 몰
려오더라두 늦은 아침 때 전엔 여기 못 올 겔세.”
황천왕동이가 이춘동이와 수작하는 말을 박연중이는 미심쩍게 생각하여 “여
보, 노형이 온 뒤 진이 곧 풀렸으면 선진은 미구에 들이닥치지 않겠소?” 하고
묻는 것을 꺽정이가 황천왕동이 대신 “저애는 걸음이 희한하게 빨라서 여느 사
람 십리쯤 갈 동안에 이삼십 리 예사루 내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희한한
재줄세. 참 그렇겠네. 요새 같은 짜른 해에 어수동서 여기 오자면 새벽 일찍 떠
나두 한낮 거진 될 거야. 한낮이 되거나 늦은 아침때가 되거나 우리는 얼른 피
신할 도리를 차리는 게 상책일세.” “아침밥이나 재촉해 먹구 이야기합시다.”
하고 꺽정이가 곧 이춘동이에게로 고개를 돌이키며 “여보게, 우리가 접전을 하
든지 피신을 하든지 좌우간 밥은 든든히 먹어야 할 테니 밥을 좀 많이 지라게.
” 하고 말을 일러서 이춘동이는 녜 대답하고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박연중
이가 꺽정이더러 “자네가 관군을 맞아 싸워볼 생각인가?” 하고 묻는데 꺽정이
는 대답을 선뜻 아니하였다. “관군이 오륙백 명이나 쏟아져 온다는데 자네네
여닐곱이 어떻게 당할 텐가? 그런 무모한 생각 먹지 말게. 자네네가 모두 만부
부당지용이 있어서 오륙백 명을 능준히 당할 수 있더라두 이런 때야말루 삼십육
계에 주위상책일세. 두말 말구 달아나게. 공연한 객기를 부리다가 큰코 떼일 까
닭 있나. 우리 아침 먹구 흩어지세.” “나는 도망을 하더라두 관군들 오는 꼴이
나 좀 보구서 도망하구 싶소.” “그게 객기란 말이야. 그런 객기를 부리지 말
게.” “사돈 노인의 말씀을 너무 거역하면 괘씸하다구 하실 테니까 말씀대루
아침 먹구 각각 흩어집시다.” “춘동이네 식구는 어떻게 할까?” “내가 데리
구 가겠소.” 꺽정이가 박연중이의 말을 좇아서 관군 오기 전에 도망하기로
작정한 뒤에는 아침밥을 새로 더 지을 것 없이 먼저 지은 것이 다 되었거든 곧
먹게 내오라고 김산이를 시켜 안에 재촉하였다.
아침밥이 끝난 뒤 박연중이는 아들아이와 데리고 왔던 심부름꾼과 셋이 먼저
마산리서 서쪽 해주 가는 길로 떠나가고 꺽정이는 이춘동이와 안식구가 행장 다
차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김산이가 이춘동이의 짐싸는 것을 거들어주다가
꺽정이에게 와서 “인제 생각하니 탈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고 말하여 “무
엇이 탈이야?” 하고 꺽정이가 물어보았다. “우리 떠난 뒤에 관군이 와서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구 우리 뒤를 쫓으면 탈 아닙니까?” “우리가 몇십 리 앞서
간 뒤 쫓아오면 무어해? 헛걸음들 하는 꼴 좀 보게 쫓아오라지.” “우리들만
같으면 설마 잡히겠습니까만, 춘동이 어머니하구 춘동이 안해가 걸음을 못 걸을
테니 그래 탈입지요.” “그러니 무엇을 태워가지구 가잔 말이냐?” “태울 것
을 갑자기 어디서 변총합니까. 춘동이 말은 저의 안식구들을 해주 박노인에게루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구 합니다. 그게 어떻겠습니까?” “그럴 것 없다. 안식
구만 떠나보내구 우리는 여기 있다가 관군들 온 뒤에 도망하든지 접전하든지 형
편 봐가며 하자.” “박노인 말씀마따나 삼십육계가 우리의 상책이니까 그건 변
경하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도망을 하더라두 관군 온 뒤에
도망하는 것이 관군 오기 전에 도망하는 것과 다르다. 오륙백 명이 몰려와서 우
리를 보구 못 잡으면 그놈들 낯바대기가 어떻게 될까 좀 생각해 봐라.” “도망
을 잘할 수 있을까요?” “접전해서 승전을 못할망정 도망이야 못하랴. 염려 마라.”
꺽정이가 데리고 온 졸개더러 이춘동이 집 일꾼들과 같이 안식구를 잘 보호하
고 앞서 가라고 마산리서 남쪽 온천 나가는 길로 떠나보내고, 이봉학이 이하 다
섯 두령과 마산리 근방 지리에 밝은 이춘동이를 데리고 뒤에 남아 있었다.
마산리는 사방이 모두 산인데 동쪽, 서쪽, 남쪽은 산골길이나마 통로가 있으되
북쪽은 통로가 없고 초군길 뿐이고, 이춘동이 집은 동네 중의 서녘 끝으로 산봉
우리 밑에 외따로 있는 집인데 집 뒤 산봉우리를 바로 정면으로 기어올라가도
못 올라갈 것은 없으나 동네 복판 뒤 산잔등과 해주 통로 뚫린 산날가지에 초군
길이 나서 동쪽, 서쪽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었다. 이춘동이 집을 북쪽막힌 동네 중
의 제일 북쪽 막힌 집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춘동이 집에 남아 있는 일곱 사
람 중의 이봉학이는 천생 총명보다도 전장 미립으로 막힌 북쪽에 도망할 길이
있으려니 착목하고 대강 지형을 알려고 이춘동이보고 말을 물어보았다. “집 뒤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구 위는 어떻게 되었나?” “앞으루 보기와 달라서 뒤는
민틋해.” “그 뒤에 나무꾼 다니는 길이 있나?” “있다뿐이야?” “북쪽으루
자꾸 들어가면 어떻게 되나?” “이 뒷산을 다 패어 넘어가면 산골에 동네들이
있네.” “그 동네들은 통로가 어떻게 되었나?” “물여울이란 데루 나가면 읍
내 들어가는 큰길이 나서구 궁골이란 데루 나가면 기린역말 가는 길이 나서네.
통로는 여기보다 외려 낫지.” “여보게, 어수동서 여기를 오자면 어느 쪽으루
오나, 동쪽으루 오겠지?” “바루 오면 동쪽으루 들어오지만 남쪽으루 돌아서
들어올 수두 있구 또 이 뒷산하구 자무산성 있는 큰 산하구 사이의 골짜기 길루
빠져나오면 서쪽으루 들어올 수두 있네.” “그러면 관군이 여기를 빽 둘러싸구
들어올 수가 있지 않은가?” “그렇지.” “북쪽으루 산을 패어 넘어가두 도망
할 길이 없겠네그려.” “만일 둘러싸구 들어오면 도망할 길 없네.”“자무산성
있는 큰 산은 이 뒷산에서 산을 타구 갈 수 있나?” “이 산에서 서쪽 골짜기루
내려서서 개울 하나 건너가야 큰 산일세.” “그 산속은 길이 어떻게 되나?”
“그 산은 이 산과는 달라서 장산이니까 첩첩산중일세.” “첩첩산중이라두 역
시 나무꾼 다니는 길은 있겠지?” “그 산속에는 나무꾼 다니는 길두 따루 없네.”
이봉학이가 이춘동이에게 말 물어보는 것을 그치고 꺽정이더러 “형님, 관군
이 오기 전에 이 뒷산 꼭대기에 있다가 약차 하거든 큰 산속으루 들어가십시다.
” 하고 말하니 꺽정이는 한참 생각하다가 “산속에서 만일 여러 날 나오지 못
하게 되면 어떡하나? 이 엄동설한에 며칠씩들 굶구 견디겠나?” 하고 물었다.
“오륙백 명이 이 산골에 들어와서 무얼 먹구 며칠씩 있겠습니까? 양식들은
가지구 온댔자 하루 이틀 양식밖에 더 가지구 오겠습니까. 우리두 한 이틀 요기
할 것은 준비해 가지구 가십시다. 어제 환갑 나머지 음식이 있거든 있는 대루
싸가지구 가면 되지 않습니까?” “어디 자네 말대루 그렇게 해보세.” “관군
이 와서 우리가 산 위에 있는 걸 보구 쫓아올라올 때 혼뜨검을 내주자면 활이
제일인데 활이라구는 나 가진 것밖에 없구 그나마 살이 한 벌뿐이니 그거야 함
부루 쑬 수 있세요? 돌덩이, 나무토막, 도깨그릇 깨진 것 같은 것을 많이 산 위
에 날라다 놨다가 위에서 내려치면 한번 혼뜨검은 낼 수 있을 듯합니다.”
길막봉이가 옆에서 “그거 좋수. 우리 얼른 벗어붙이구 날라올립시다.” 말하
고 나서는데 이봉학이는 여전히 꺽정이더러 “우리가 날라올리면 얼마나 날라올
리겠습니까? 동네 사람들을 잡아내서 울력을 시킵시다.” 하고 말하였다.
꺽정이가 황천왕동이는 관군이 어디 오는 것을 알러 보내고 이춘동이까지 다
섯 사람은 무기들을 들려 내보내서 동네 사람을 잡아다가 부리는데, 무기보다도
청석골 임꺽정이란 성명에 동네 사람은 놀라고 겁이 나서 꿈쩍 못하고 시키는
대로 다들 하였다. 덩이돌, 토막나무, 깨진 질그릇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잿독
과 장항아리를 재 담기고 장물 담긴 채 올려가고 길막봉이의 청으로 절구통들까
지 올려갔다. 이춘동이 집의 올려갈 만한 물건은 얼추 다올려가고 동네 사람의
집 물건까지 더러 올려가서 동네 사람들이 산 위에를 두서너 고팽이씩 오르내렸
을 때, 황천왕동이가 달려들어와서 관군의 선봉대가 십 리 밖에 왔다고 알리었
다. 꺽정이가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춘동이의 땅과 세간은 너희들을 내줄
테니 오늘 품삯으로 노놔 가져라. 그러구 지금 관군이 우리를 잡으로 오는데 만
일 동네에서 하나라두 나서서 관군을 조력하면 우리가 나중에 다시 와서 너희
동네를 도륙을 낼 테니 그리 알아라.” 하고 일러서 흩어보낸 뒤, 일곱 사람이
다같이 주체궂은 갓을 벗고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질끈 동이고 행세건의 웃옷도
벗어버리고 바짓가랑이를 치키고 오굼이를 가뜬가뜬하게 동이고 미투리에 들메
를 단단히 하고 산 위로 올라들 갔다. 어수동서 내려오는 관군 오백여 명이 삿
바위란 곳에 와서 제각기 싸가지고 온 밥으로 늦은 아침에 이른 점심을 겸하여
먹은 뒤 두 진으로 나뉘어서 한 진은 삿바위서 바로 남으로 내려오고 또 한 진
은 물여울까지 더 나가서 남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삿바위서 오는 진은 부장 연
천령이 평산 군사 오십 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앞서 오고, 그 뒤에 봉산군
수 이흠례와 선전관 정수익이 봉산 군사 오백여 명을 거느리고 오니 마산리 동
쪽으로 들어올 것이고, 물여울로 오는 진은 부장 이의식이 역시 평산 군사 오십
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앞서 오고 그 뒤에 평산부사 장효범과 금교찰방 강
려가 두 진 선봉대로 나누어 주고 나머지 평산 군사 이백 명을 통솔하고 오니
마산리 서쪽으로 돌아들어올 것이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꺽정 9권 (36) (0) | 2023.09.07 |
---|---|
임꺽정 9권 (35) (0) | 2023.09.06 |
임꺽정 9권 (33) (0) | 2023.09.04 |
임꺽정 9권 (32) (0) | 2023.09.03 |
임꺽정 9권 (31) (0) | 2023.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