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학이의 실없은 말 아닌 발명을 듣고 박연중이는 비로소 “그 신랑감이 어
디 있소?” 하고 물었다. “신랑감은 내 조칸데 나이는 올해 스무 살이구 인물
은 사내답게 생겼습니다.” “함씨를 지금 데리구 기시우?” 이봉학이가 꺽정이
를 가리키며 “이 형님이 데리구 기시지요. 당신 아들이니까.” 하고 말하니 박
연중이는 꺽정이를 돌아보며 “자네가 그런 장남한 아들이 있든가?” 하고 말한
뒤 다시 이봉학이를 보고 “좋긴 좋으나 겹혼인이 재미없소.” 하고 고개를 가
로 흔들었다. “겹혼인이 왜 재미없습니까?” 하고 이봉학이가 재미없는 까닭을
다그칠 뿐 아니라 “오뉘 바꿈이 혼인 중의 가장 재미있는 혼인인데 재미없다는
건 모를 말씀인걸요.” 하고 배돌석이가 재미없단 말을 책까지 잡아도 박연중이
는 아무소리 않고 잠자코 있었다.
박연중이가 마산리 오던 날 밤에 이춘동이의 청석골패에 입당할 이야기를 듣
고 청석골은 불구덩인데 타죽을 줄 모르고 들어가는 것이 정신없는 사람의 짓이
라고 이춘동이를 조만히 책망하였었다. 자기 수하에 있던 사람이 다른 데로 간
다는 데 마음이 격하여 책망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생각을 솔직히 말하자니 자
연 책망이 나왔었다. 며느리는 데려오는 것이라 관계없지만 딸은 들여보내는 것
인데 불구덩이로 들여보낼 마음이 없고, 또 꺽정이의 아들은 양주팔이의 손녀같
이 욕심날 것도 없어서 박연중이가 입을 함봉하고 있었다. 이봉학이가 먼저 꺼
낸 말 뒤를 거두느라고 “연분이란 인력으루 할 수 없는 게지만, 이 다음에 조
카아이를 한번 보시면 그때는 겹혼인 못한 것을 후회하시리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박연중이가 어색한 말로 “장래 병사감이라구 말한 상쟁이가 마전 조
서방이란 사람이오?” 하고 물었다. “그건 어디서 들으셨나요?” “내가 피풍
이 있어서 올 여름에 냉정 물 맞으러 갔다가 삼거리서 그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청석골 잡혀가서 죽을뻔한 일이 있다구 이야기합디다.” “상쟁이가 그
애를 보구 만일 좋은 가문에 태어났더라면 출장입상이라두 하겠지만, 평지돌출
루 나설 테니까 병사쯤 하겠다구 말합디다.”
박연중이가 삼거리서 상쟁이를 만났을 때 자기 상을 보이고 말이 맞는 데 반
하여 집에까지 데리고 와서 식구들의 상을 다 보이었었는데, 지금 혼인말하는
딸을 보고 나서 풍상을 많이 겪은 뒤에 부인직첩을 받으리라고 말하였었다. 상
쟁이 말을 돌이켜 생각하니 꺽정이 아들과 연분이 있는 듯도 하여 박연중이가
꺽정이를 보고 “내외종 사촌이라두 누이 바꿈이 재미가 없는데 자네 생각엔 어
떤가?” 하고 물은즉, 꺽정이는 두말 없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혼인 두 쌍이 한 자리에 작정되어서 좌중 여러 사람이 다같이 좋아하는데, 박
연중이는 좋아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궂은 고기 먹은 것 같은 생각은 없지 아
니하였다.
이춘동이가 술을 내와서 술들을 먹는 중에 꺽정이가 박연중이에게 봉산군수
잡아 죽일 계획을 말하고 장맞이하기 좋은 자리를 물으니, 박연중이가 듣고 한
참 있다가 “내가 자네게 할 말이 있는데 후기 없는 늙은이 말이라구 웃지 않구
들어주겠나?” 하고 정중하게 말을 내었다. “무슨 말씀이오?” “우리가 서루
사돈까지 정해서 그저 친한 처지와두 다른데 진정을 기일 수가 있나. 나는 대체
자네네 청석골 사업이 너무 큰 것을 재미없게 아는 사람일세. 우리가 압제 안
받구 토심 안 받구 굶지 않구 벗지 않구 일생을 지내면 고만 아닌가. 그외의 더
구할 게 무언가. 자네네 일하는 것이 나보기엔 공연한 객기의 짓이 많데. 이번
일만 말하더라두 그게 객기 아닌가? 봉산군수를 죽이면 금이 쏟아지나 은이 쏟
아지나. 설사 금은이 쏟아지더라두 뒤에 산더미 같은 화가 올 걸 어째 생각 아
니하나? 아무리 무능한 조정이라두 지방관원을 죽인데 가만히 보구 있겠나? 말
게, 제발 말게.” “말씀은 잘 알아들었지만 이왕 작정한 일이니까 이번 일은 그
대루 할밖에 없소.” “자네가 고만두면 고만 아닌가.” “칼을 뺐다 그대루 꽂
을 수야 있소.” “잘못 뺀 칼은 그대루 꽂는 게 장살세.” “그건 할 수 없소.”
꺽정이가 말을 듣지 아니하여 박연중이는 길이 탄식하고 말을 그치었다.
이튿날 아침에 뜰아랫방 여러 사람이 겨우 소세들을 마치고 앉았을 때, 일꾼
하나가 들어와서 밖에 손님이 왔다고 연통하자마자 “형님 나 왔소.” 하고 황
천왕동이가 소리를 앞세우고 방문 앞으로 대들었다. “어제 올 줄 알구 기다렸
다.” 하고 꺽정이가 말한 다음에 “어디서 자구 이렇게 일찍 왔나?” “밤길
걸었나?”
이봉학이와 배돌석이가 연달아서 말 묻는 것을 황천왕동이는 대답 한마디 않
고 부지런히 들메 풀고 신발 벗고 방안에 들어와서 인사들도 건둥반둥 하고 주
저앉았다. 꺽정이가 박연중이를 가리키며 “이 어른께 절하구 뵈어라.” 하고 이
르는데, 박연중이가 절 말라고 손을 내젓고 “그대루 앉아 인사합시다. 나는 박
연중이란 사람이오.” 하고 말을 붙이는 것을 황천왕동이는 대답도 않고 일어나
서 절을 한번 시늉내듯 하고 도로 않았다. “절을 공손히 하지 못하고 그게 무
어냐?” 하고 꺽정이가 나무라니 “이야기할 일이 급한데 언제 인사 범절을 늘
어지게 차리구 있겠소.” 하고 황천왕동이는 말대답하였다. “이야기할 일이 무
에 그리 급하냐? 이흠례가 벌써 떠났다느냐?” “이흠례가 오늘 이리 옵니다.”
“무어야?” 하고 소리치는 꺽정이뿐 아니라 좌중 여러 사람이 다같이 놀랐다.
“내가 처음부터 찬찬히 이야기할게 들으시오. 그저께 봉산 가서 장인보구 온
사연을 말하니까 장인은 자기 일이 바빠 알아봤는지 잘 알구 있습디다. 군수가
그믐 전에 못 가구 새달 초생에 가는데 닷샛날쯤 떠나갈 모양이라구 합디다. 그
래서 나는 어제 첫새벽 떠나올라구 막 일어나 앉았을 때 별안간 관문 앞에서 취
군 나발 소리가 야단으루 나구 읍내 일판이 곧 난리 난 것같이 술렁술렁합디다.
장인이 진둥한둥 나가서 알아본즉 서울서 선전관 하나, 군관 둘이 내려와서 불
각시루 군병을 조발하는데 평산 땅으루 청석골패를 잡으러 간다구 하더랍니다.
우리가 평산 땅에 모이는 것을 서울서 알 까닭두 없으려니와 설혹 알았다구 하
더라두 기병하자면 평산이 있는데 봉산까지 올 까닭이 없으니까 우리를 잡으러
오려구 기병한단 말은 곧이가 잘 들리지 않습디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구 그대
루 올 수가 있습디까. 봉산 군사들이 어디루 가는 것이나 알구 올라구 아침때까
지 봉산 있다가 봉산군수가 서울서 온 선전관하구 같이 이백여 명 군사를 거느
리구 검수역말 길루 나갔단 말을 듣구 봉산서 떠나서 후진 뒤를 멀찍이 따라오
다가 노량으루 걷기가 갑갑증두 나구 생각해 보니 뒤따라올 맛두 없어서 샛길루
빠져서 선봉대보다두 앞질러 왔습니다. 어제 좀 늦더라두 여기까지 대올 수 있
었지만, 봉산 군사들이 과연 이리 오나 혹 다른데루 가나 아주 보구 올라구 안
성역말쯤서 자려구 맘을 먹었더니, 봉산 군사들이 안성와서 경야한다구 선참이
와서 집들을 치우는 중입디다. 그래서 안성을 지내놓구 총수령 넘어와서 고개밑
동네서 잤습니다. 오늘 새벽 동트기 전, 봉산 군사들이 지나갈 때 자다가 놀라
일어난 동네 사람들은 ‘관군이 도적 잡으러 가니 놀라지들 마시오’ 군중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구 안심이 되어서 밖에 나서 구경들 하는데, 나두 동네 사람들
틈에 섞여서 구경하다가 그대루 나서서 진 뒤를 청처짐하게 따라왔습니다. 어수
동이란 데를 오니까 연기가 자욱한 중에 사람이 와글와글하는데 그 사람이 다
군삽디다. 누구든지 붙잡구 말을 좀 물어보구 싶으나 군사 천지에 발을 들여놓
기가 서먹서먹해서 동네 밖 길가에서 서성거리는 중에, 마침 여편네 두엇이 동
이들을 이구 논귀 샘으루 물 길러 나가기에 쫓아가서 말을 물었습니다. 여편네
들이 말대답 잘 않는 것을 구슬려서 물어본즉 평산부사하구 어디 찰방하구, 여
편네들은 어디 찰방인지 모릅디다만, 찰방이면 금교찰방이겠지요. 어제 밤중에
군사 여러 백명을 끌구 나와서 동네 사람들은 건밤을 새웠다구 말하구 오늘 남
면으루 도적을 잡으러 간다는데, 도적은 아무개라구 형님 이름까지 말합디다. 여
편네들이 더 자세히 알지두 못하거니와 평산 군사가 봉산 군사하구 합세해 가지
구 남면으루 오는줄까지 안 바에는 더 물어볼 것두 없어서 여편네들이 물동이
이구 돌아선 뒤 곧 두 주먹 불끈 쥐고 내달았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길
을 묻느라구 좀 지체하구 그외에는 잠깐 쉬지두 못하구 달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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