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오주 생각에는 서림이의 떨거지를 얼른 다 보내서 서림이의 관계를 단결에
끊어버리는 것이 아주 시원하여 오가의 편을 들게 된 것인데,
한온이는 미련한 곽오주가 생각이 미처 잘 돌지 못한 줄로 짐작하고 “
이 사람아, 서가놈이 우리 도중을 배반하구 나가면 처자를 볼모루 잡아두구 애
를 태워 줄 텐데 그걸 왜 보내준단 말인가?”하고 깨우쳐 주듯 말한즉, 곽오주
가 눈을 부릅뜨고 “그놈이 배반하구 나가서 우리게 해를 부치면 그놈은 우리
도중의 역적놈이니까 그놈을 어디 가서든지 잡아죽이지, 그까짓 기집 자식을 잡
아두었다가 대신 죽일 텐가?”하고 도리어 한온이를 핀잔주러 들었다. 서림이를
미워하는 곽오주가 서림이에게 두남두는 오가와 합세하는데, 한온이는 독불장군
이 되어서 속이 버쩍 더 상하여 박유복이를 보고 “나는 모르겠소. 박두령 잘
생각해서 오두령하구 처리하시우.”하고 퉁명스럽게 말한 뒤 집으로 가려고 일
어섰다. 박유복이가 치어다보며 “어딜 갈라구 일어서나?”하고 물어서 한온이
는 핑계로 “골치가 아파서 바람을 좀 쏘여야겠소.”하고 대답하였다. “앉아서
내 말 좀 듣게.” “무슨 말이오?” “글쎄 앉아.” 한온이가 다시 앉은 뒤 박유
복이가 한온이더러 “내 생각엔 오두령께 온 편지대루 수남이 어머니 모녀만은
곧 보내주구 수남이 남매는 두었다가 나중 서울 소식을 자세히 들은 뒤 어떻게
든지 처치하는 게 좋을 것 같애.”하고 말하며 오가와 곽오주까지 돌아보았다.
서림이 장모까지 보내지 말자던 한온이와 수남이 남매까지 다 보내자던 오가는
다같이 조금씩 주장을 굽히어서 박유복이의 말을 좋다고 찬동들 하였으나, 곽오
주만은 한꺼번에 다 보내버리자고 내처 고집을 세우다가 박유복이에게 꾸지람을
받고 겨우 수그러졌다.
서림이 안해에게 편지는 주지 않기로 작정들 하여 오가가 서림이 안해를 가서
보고 서울서 이러이러한 기별이 왔는데 모녀분이 같이 간다면 삯마 두 필을 얻
어주마고 말로 일렀다.
금교역말에 사람을 보내서 삯마를 얻어왔을 때 해가 거의 저녁 때가 다 되었
었는데, 서림이 안해보다도 서림이 장모가 몸이 달아서 단 십리라도 가다 잔다
고 곧 떠나기로 하여 오가와 박유복이가 와서 떠나는 것을 보았다. 아들아이 수
남이는 열댓 살 먹은 값을 하느라고 가장 씁쓸한 체하나, 나이 어린 딸 복례는
그 어머니를 차마 못 떨어져서 어머니 치마꼬리에 매어달리며 울고불고 하여 서
림이 안해가 좀처럼 말을 탈 수 가 없었다. 오가가 이것을 보고 “복례까지 보
내주는 게 어떤가?” 하고 귓속말로 박유복이에게 의논하니 박유복이는 처음 작
정을 변하기 어려워서 자저하다가 어머니는 떼어놓으려고 달래고 딸은 안 떨어
지려고 악지부리는 광경을 보다가 못하여 오가에게 눈짓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하
였다. 오가가 복례를 데리고 가라고 말하여 그 외조모가 말 위의 의지성삼아 안
고 타고 가게 되었다. 꺽정이 일행은 떠나는 날 당일 마산리를 대가려고 한 것
이 김치선이 기별로 의외에 지체하고 늦게 떠난 까닭에 어둡기 전에 대갈 가망
이 없었다. 온천으로 작로가 되어서 온천에 오니 해가 벌써 다 저녁때라, 과화숙
식으로 목욕하고 자고 가자고 꺽정이가 말을 내었다. 온천 동네 여러집은 모두
농가들이나 봄가을 난데서 온천하러 오는 사람이 많을 때, 점잖은 행차의 사처
할 만한 집이 더러 있으므로 그중에서도 깨끗한 집을 골라서 주인을 잡고 저녁
밥을 시킨 뒤 바로 주인집 아이를 앞세우고 탕으로 목욕들을 하러 왔다. 날이
찬 까닭에 올라오는 김이 안개같이 자욱하여 처음에는 주위에 돌난간 친 것도
잘 보이지 않더니 난간 앞에들 와서 섰는 동안에 탕 안에 물 고인 것이 내려다
보이었다. 그러나 물이 정한지 더러운지는 알 수 없었다. 이봉학이가 들떼어놓고
“물에 옴딱지나 없을까? 옴딱지가 있으면 께름칙해 목욕을 할 수 있나. 물을
좀 치구서 들어가야지.” 하고 말하는 것을 주인집 아이가 듣고 “요새는 물이
정합니다. 봄철이나 가을철 같으면 옴쟁이두 많이오구 절름발이두 많이 모이지
만 요새는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탕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모여서 떨어지
는 목에 삿자리로 둘러막은 곳이 있어서 꺽정이가 그곳을 가리키며 “저기는 무
어하는 데냐?” 하고 그 아이더러 물었다. “거기는 빨래텁니다. 사내들 목욕할
때 아낙네 빨래하기 좋으라구 가려 막은 겝니다.” “이 동네 여편네들은 겨울
에 빨래하는데 손이 안 시려서 좋겠다.” “이 동네뿐 아닙니다. 겨울에는 십 리
이십 리 밖에서두 이리 빨래하러 옵니다. 그래서 요새는 종일 방망이질 소리에
귀가 따겁지요.” 그 아이가 촌생장이라도 손님에 치어나서 말대답하는 것이 소
명하였다. 꺽정이가 두령 네 사람과 같이 갓, 망건, 옷을 돌난간 앞에 벗어놓고
내려가서 더운물에 종일 언 몸들을 담갔다. 탕안의 물이 철철 전을 넘어서 밖으
로 흘러나가는데 깨끗하기가 옥수 같았다. 탕에 들어올 때는 아직 환하던 것이
어느 사이에 서로 얼굴들이 분명히 보이지 않도록 침침하였다. 목욕들을 실컷
할 작정하고 혹은 몸을 씻고 혹은 머리들 감고 혹은 옆의 사람에게 등을 밀리고
혹은 노독을 푼다고 물속에 진득하니 앉았는 중에 빨래터에서 찰싹찰싹 방망이
질하는 소리가 났다. “해진 뒤에 방망이질 소리가 웬일이야?” 하고 이봉학이
말에 “아마 도깨빈가 보우. 사람이 어둔데 무슨 빨래를 하겠소.” 하고 배돌석
이가 뒤를 잇자 “도깨빈가 내 좀 가보구 오리다.” 하고 길막봉이가 일어나서
성큼성클 위로 올라갔다. 동네 젊은 여편네 하나가 남이 보는 데서 빨기 난중
한 더러운 걸레를 빨래꾼 없을 때 빨라고 나온 것을 길막봉이는 도개비로 여기
고 벌거숭이 몸으로 가까이 오며 에헴 하고 큰기침을 하니 “아이구머니!” 하
고 여편네가 방망이를 내던지고 천방지축 도망하였다. 길막봉이가 빨랫돌에 가
서 빨래를 들고 보니 비린내가 코를 거슬르는 여편네의 개짐이라 도로 내던지고
탕에 돌아와서 “예 여보, 공연히 도깨비라구 해서 나는 망신했소.” 하고 배돌
석이를 매원하였다. “누가 자네더러 쫓아가랬어?” “도개비라니까 구경하러
갔지.” “그래 인도깨비든가?” “젊은 여편네가 나를 보구 놀라서 당장에 애
를 지웠소.” “누구를 속일라구 거짓부리하나.” “거짓말인가 가보구려. 서답
돌에 피가 벌거니.” “자네 말대루 낙태했다구 하구 낙태한 여편네는 어떻게
했나?” “어떻게 할 수 있소. 그대루 내버려 두구 왔지.” “여편네가 참말 그
저 빨래터에 있나?” “사지가 붙었는지 꼼짝 못합디다.” 길막봉이가 계집 밝
히는 배돌석이를 헛걸음 한번 시키려고 능청스럽게 거짓말하는데, 꺽정이가 옆
에서 “참말이냐?” 하고 물어서 길막봉이는 껄껄 웃고 여편네가 방망이 내던지
고 도망한 것을 이야기하였다. 목욕을 다하고 주인집에 와서 저녁밥을 한 그릇
씩 다 먹고 먹은 밥이 자위도 돌기 전에 잘 자리들을 보았다. 추운 때 길을 오고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또 시장한 끝에 밥을 먹은 까닭에 다들 곤하겠지만,
그중의 이봉학이와 김산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면 기질이 약한 편이라 곤한 것
을 억지로 참다가 누우며 곧 속잠이 들어서 정신들을 모르고 배돌석이와 길막봉
이는 마주 누워서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서로 씩둑꺽둑 지껄이고 꺽정이는 눈
을 감고 잠을 청하였다. 꺽정이가 잠이 오랴마랴 하는데 옆에서 지껄이는 것이
듣기 싫어서 “고만들 지껄이구 자지.” 하고 말하여 배돌석이와 길막봉이가 일
시에 “녜” 하고 대답들 하더니 불과 잠시 동안에 길막봉이는 코를 드르렁거리
었다. 사내 주인이 밖에서 “여게 김서방, 자네 잠깐 가서 백손이 큰아버지더러
좀 오라구 하게” 하고 머슴을 심부름시키는 말에 귀에 들리어서 꺽정이는 속으
로 “이때까지 백손이 동명을 못 봤더니 여긴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백손
이 이름에서 백손이를 장가들여야 할 목전 걱정과 백손이는 도적놈 소리를 듣지
않게 해주어야 할 장래 근심으로 생각이 번져나가서 꺽정이는 잠이 번놓이었다.
벽에 걸린 등잔은 심지가 타느라고 찌찌 소리가 나고 머리맡 문틈으로는 찬바람
이 들어와서 덜미가 서늘하였다. 삽작문께서 안방 앞으로 들어가는 신발 소리가
나며 곧 말소리들이 들리는데 “김서방 왔나?” 하고 묻는 것은 주인이요, “녜,
갔다왔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은 김서방이란 머슴이었다. “백손이 큰아버지
는 뒤에 오마든가?” “술이 억병 취해서 정신을 모릅니다.” “술 먹을 밑천은
여일 어디서 나노? 고만 나가 자게.” 꺽정이가 그러지 않아도 술생각이 나는
것을 참고 누웠던 차에 술소리를 듣고는 더 참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나 앉으니
배돌석이가 설잠이 들었던지 눈을 떠보고 “왜 안 주무시구 일어나십니까?” 하
고 물었다. “잠이 어째 아니 오네. 술이나 좀 사다 먹세.” 꺽정이가 배돌석이
에게는 하게도 하고 해라도 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였었다. 배돌석이가 일어
나서 머슴방에서 자는 졸개를 부르러 나가려고 하는데, 꺽정이가 주인을 불러서
사다 달라고 청하라고 말하여 배돌석이가 방문을 열고 주인을 부를 때 길막봉이
도 눈을 떠보고 일어났다. 노자로 가지고 나선 상목 중에서 자투리 한끗을 주인
에게 내주고 술 한 동이를 사다가 먹게 하여 달라고 청한 뒤, 자는 사람들을
마저 깨우는데 이봉학이는 정신이 맑은 사람이라 대번 일어나고 김산이는 잠주
정을 하여 여럿이 웃었다. 주인이 술을 데워서 내올 때 안주로 처음에 김치를
한 그릇 내오고 나중에 다시 메밀묵 무친 것을 한 양푼 내왔다. 꺽정이가 주인
더러 술을 같이 먹자고 들어오라고 하고 사양하는 것을 길막봉이 시켜서 끌어들
이다시피 하였다. 주인이 술 한 사발을 받아먹은 뒤 “아까 여러분 목욕들 가셨
을 때 어떤 분이 빨래 나온 아낙네을 놀래신 일 없습니까?” 하고 물어서 “우
리가 그런 장난했다구 누가 말합디까?” 하고 배돌석이가 되물었다. “아니오.
내 생각에 그럴 듯해서 여쭤보는 말씀입니다. 술집 며느리가 더러운 옷을 남몰
래 빨라구 석후에 나갔다가 온천 도깨비를 만났다구 술집 있는 윗말서 떠들더랍
니다. 도깨비는 벌거벗었는데 키는 하늘까지 닿구 몸집은 몇 아람드리라구 하더
랍니다.” 주인의 말끝에 꺽정이가 웃으며 “그 온천 도깨비가 여기 있소.” 하
고 길막봉이를 가리키니 “그러면 그렇지요.” 하고 주인은 손뼉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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