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말쌈 줄이노라. 오두령이 지금 도중일을 주장 알음할 듯 오두령에게
게서 모녀분을 치송하여 달라 부탁하였노라. 수남 남매는 부탁하지 아니
하였으나 만일 떼어놓고 오시면 큰일이니 게서 오두령을 보시고 미거한 것들을
두고 갈 수 없다든지 그것들이 같이 가고자 한다든지 잘 꾸며 말쌈하면 오두령
은 이곳과 정분이 두텁고 또 마음이 서그러져서 공연히 까다로이 굴지 아니할
듯 수남 남매 다 데리고 수이 좋이 오시기 믿고 바라노라. 이 글월 보고 곧 불
에 넣어 태우시라.” 한온이가 이 편지를 보고는 서림이를 의심 안할 수 없었다.
‘타처루 도망할 준비가 아니면 조정에 귀순한 모양이다. 귀순을 조정에서 그렇
게 쉽사리 받아줄까. 자현두 아니구 잡혔다는데. 옳지 옳지, 자현하면 무사하게
될 길을 뒤루 뚫어놓구 남의 눈가림으루 잡혀간 게로구나.’ 이런 의심이 들며
곧 입에서 “큰일났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서울을 가더라도 들어가서 상의하
고 다시 나오리라 생각하고 한온이는 별배와 교군꾼들을 불러서 도로 들어가자
고 이르고, 또 개미치더러 뒤를 따라오라고 일렀다.
한온이가 산에 들어오는 길로 바로 박유복이의 집에를 오니 박유복이는 안방
에서 쫓아나오며 급한 말로 “웬일인가?”하고 묻고 오가는 건넌방에서 나오며
실없는 말투로 “김치선이게서 또 기별이 왔나?”하고 물었다. 건넌방으로 들어
와서 셋이 솔발같이 앉은 뒤 한온이가 개미치의 가지고 온 편지들을 내서 사연
을 읽어 들리고 끝으로 자기의 의심까지 말하니 박유복이는 말없이 한숨만 뒤고
오가는 “글쎄.”하고 고개를 비틀었다. “내가 의심하는 게 잘못이오?” “나는
그런 의심이 들지 않는걸.” “서종사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구 믿으시우?” “
사람을 믿는 게 아니라 일이 그렇게 될 수가 없을 것 같애. 우리가 ‘귀순하겠
소’하면 조정에서 ‘오냐’하구 받아 줄까. 그럴 리 만무할걸.” “뒤루 주선을
잘했으면 혹시 누가 아우?” “서종사가 서울 가 누워서 일년 이태 근사를 모았
다구 하더라두 잘될 것 같지 않은데 더구나 서울 간 지 불과 오륙 일에 무슨 용
뺄 재주루 그런 주선을 해낸단 말인가. 자네가 서울 반연 많기루 말하면 서종사
따위룬 어림없지. 그렇지만 지금 자네더러 열흘이나 보름 안에 그런 주선을 하
라면 할 수 있겠나? 생각해 보게. 그러구 또 조정에서 우리네 귀순을 받아준다
구 잡더라두 적어두 한번 원악도쯤은 구경시킬 테지. 서울 안에 처자를 모아가
지구 편히 살게 두겠나.”하는 오가의 말에는 한온이도 대답이 막히었다.
서림이가 간 속에 갇혀서 하룻밤을 지낸 뒤 포도대장께 급히 아뢸 말씀이 있
으니 또 한번 보입게 하여 달라고 누누이 청하여 김순고가 궐내에서 나와서 포
청의 대무한 일을 다 보살피고 서림이를 데려내다가 물어보게 되었는데, 서림이
의 급한 할 말이란 별것이 아니고 꺽정이가 마산리에서 잡히지 않고 도망하면
더 말할 나위도 없고 도망을 못하고 잡히더라도 청석골에 있는 저의 처자는 적
당의 손에 죽게 될 터이니 하해 같은 덕택으로 살려내오게 하여 달란 애걸이었
다. 김순고가 서림이의 애걸을 들을 때 서림이 장래 처치에 처속 있는 것이 혈
혈단신보다 낫거니 생각하여 가까이 있는 포도대장 하나를 돌아보고 서림이의
말을 들어서 그 처자 빼내올 방편을 차려주라고 분부하였다. 그 부장이 대장의
분부를 드디어서 서림이의 말하는 대로 편지들을 쓰게 하여 편지에 다른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전날 압수하여 온 서림이 행구 중에 있는 상목으로 편지에 노자
를 얹어서 서림이가 말하는 개미치란 자를 갖다 주라고 포청 사령 하나를 부리
려고 한즉, 서림이 말이 사령 복색이 개미치의 의심을 사면 일이 와해라고 하여
사령 대신으로 부장 자기 집 하인을 부리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삼백 리 밖에 앉은 한온이가 귀신이 아닌 다음에 알 까
닭이 없었다. 오가가 한온이를 보고 “나더러 의심하라면 외려 이런 의심을 하
겠네.”하고 말머리를 내놓고 무슨 의심이냐고 한온이가 묻기를 기다려서 “포
청에서 서종사를 잡아놓구 그 처까지 마저 잡으려구 꾸민 놀음이 아닐까. 우격
다짐으루 편지를 씌울 수도 있구 글씨체를 본떠서 어주편지를 쓸 수두 있으니까
나는 그 편지를 의심하구 싶어.”하고 말하니 한온이는 대번 고개를 내흔들며
“그건 당치 않은 의심이오. 그것두 대장이나 우리들을 서울루 꾀여다가 잡으려
구 한다면 혹시 모르지만 서종사의 처자를 잡으려구 그런 놀음을 꾸밀 까닭이
무어요? 관비가 지금 부족해서 수남이 어머니를 잡아가구 장래 관노, 관비를 기
르기가 급해서 수남이 남매를 잡아간단 말이오? 포청에서 할 일두 없든가 보우.
”하고 오가의 말을 여지없이 반박하였다. “자네 말을 듣구 보니 참말 그런 의
심두 할 수 없네.” “김치선이 기별이 어제 오지 않구 또 오늘 이 편지가 내
손에 떨어지지 않았더면 우리가 꾀에 빠지는 줄두 모르구 서종사의 식구를 다
보내주었을 것 아니오? 서종사가 서울서 무슨 짓을 하는지 그건 알 수 없으나
좌우간 딴맘 먹구 식구를 데려가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 같소.” 이때
까지 두 사람의 수작을 듣기만 하고 말 한마디 아니하던 박유복이가 한온이를
보고 “편지 글씨는 분명히 서종사의 필적인가?”하고 물어서 “진서구 문언이
구 필적은 조금두 의심없소.”하고 한온이가 대답하였다. “그 편지가 스무나흗
날 난 게라지? 그러면 스무나흗날 잡혔다는 건 헛말 아니겠나?” “스무나흗날
잡혀갔더라두 곧 놓여나왔기에 스무나흗날 편지를 부쳤겠지요.” “포청 안에
잡혀 갇혔으면 편지는 부칠 수 없겠지?” “친한 포교가 있으면 끼구서 편지쯤
부칠 수가 있겠지만 잡혀 갇힌 사람이 식구를 보내달랄 리가 있소?” “서종사
의 식구를 어떡하면 좋을까. 보내 달라는 대루 보내주는게 좋을까.” “서종사가
우리 도중을 배반하구 간다면 그 식구를 볼모루 잡아 두는 게 좋을 텐데 그걸
왜 보내준단 말이오?” 한온이의 말을 박유복이가 가타부타 말하기 전에 오가가
나서서 “서종사가 우리 도중을 배반하구 간다면 그 식구를 되려 선뜻 보내주는
게 득책일세.”하고 말하여 “무엇이 득책이란 말이오?”하고 한온이가 뒤받았
다. “옛 성현네 말씀에 남은 나를 저버리더라두 나는 남을 저버리지 말란 말씀
이 있다네. 주체궂은 남의 식구를 맡아두어 무어하겠나. 성현네 말씀대루 우리는
저버리지 않는다는 표나 내지.” 한온이가 말 같지 않은 말 듣기 싫다는 듯이
오가의 말을 듣는 체 만 체하고 박유복이를 돌아보며 “서종사의 식구를 보내든
지 안 보내든지 대장 오신 뒤에 품하구 작정합시다.”하고 말하니 오가가 증을
내면서 “대장 안 기신 동안에 우리는 무슨 일이 있든지 처리하지 못하나?”하
고 탄하였다. “누가 처리 못한다우? 급한 일이 아니니 대장 오신 뒤에 처리하
잔 말이지.” “서종사 편지에 식구를 급히 보내달랬다며?” “서종사가 급하다
는 것이야 우리가 알 까닭이 있소.” “대장이 가시면 우리는 부하(부하란 말에
오가는 힘을 주었다)니까 무슨 일이든지 자의루 처리 못하겠지만 지금 대장이
안 기시구 안 기신 동안 일처리를 우리게 맡기셨으니까 이만 일은 우리끼리 처
리해두 좋지 않은가.” “글쎄, 누가 처리 못한다우? 아직 보내지 않기루 처리해
둡시다그려.” “아니, 나는 두구 볼 것 없이 곧 보내구 또 수남이 남매까지 다
보내기루 주장하네.” “그런 주장을 나는 찬동할 수 없소.” 한온이가 오가와
말다툼을 하는 중에 “서울 가다 말구 왜 왔나?”하고 소리치며 곽오주가 방으
로 들어왔다. 한온이는 오가의 객기 부리는 것이 속상하고 박유복이의 우물쭈물
하는 것이 답답하던 차에, 서림이와 앙숙인 곽오주가 와서 자기 말의 편역 들
사람이 생긴 것을 든든하게 생각하여 얼른 자리까지 비켜주며 “어서 이리 와서
앉게.”하고 곽오주를 자기 옆에 앉힌 뒤에 서림이의 편지 석 장 사연을 낱낱이
일러 들리니 곽오주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홀저에 껄껄 웃었다. “무에 우스
운가?” “그 불여우에게 속은 사람들이 우습지 않아? 대장 성님이 지금 있으면
펄펄 뛰며 야단법석을 했을걸.” “믿는 도끼에 발을 찍히면 누구는 분하지 않
겠나.” “불여우에게 오장 빼먹힌 걸 생각하면 도끼에 발을 백번 찍혀두 분할
것 없겠네.” “그런데 여보게, 지금 서종사의 식구들......” “지금두 서종사야?
서가놈이면 알아봤지.” “아따 자네 말대루 서가놈의 식구를 어떻게 처치할까
의논이 났는데, 오두령은 보내달라는 대로 다 보내주자구 하구 나는 보내주지
말구 보내주더라두 대장 오신 뒤에 말씀이나 들어보구 보내주자구 했네.
자네 생각엔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하고 한온이가 곽오주에게 물을 때, 곽오
주는 보내주자는 것이 쓸개 빠진 소리라고 오가를 면박이라도 하려니 생각하고
물었는데 “제 기집 제 자식 보내달라는 걸 우리가 안 보내줄 턱이 있나. 보내
주는 게 좋지.”하고 곽오주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와서 자기 편으로 헛 믿은
한온이가 어이가 없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꺽정 9권 (32) (0) | 2023.09.03 |
---|---|
임꺽정 9권 (31) (0) | 2023.09.01 |
임꺽정 9권 (29) (0) | 2023.08.30 |
임꺽정 9권 (28) (0) | 2023.08.28 |
임꺽정 9권 (27) (0) | 2023.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