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동네 삼좌올시다.” “그래 할 말은 무어야?” “저희 동네는 자래
루 빈동이온데다가 더구나 올해 같은 재년을 당하온 까닭에 지금 동네에 조석
끼니를 바루 먹는 집이 열의 두세 집두 안됩니다. 저희 동네 형편으루는 각항
지공두 하기 어렵솝지만 우선 산성 안 열세 집 식구를 맡아서 먹일 도리가 없소
이다.” “내 분부를 거행하지 못하겠다구 방색하는 말이냐.” “방색하려구 여
쭙는 말씀이 아니올시다.” “그러면 무어냐?” “산성 전후 좌우에 있는 동네
가 여럿 아니오니까? 다른 동네는 다 고만두구 여기서 가까운 마산리.사주리 두
동네만 가지구 말씀하더라두 두 동네가 다 저희 동네보다 호수두 많구 또 동네
두 포실합니다. 이 두 동네 사람을 부르셔서 저희와 세 동네가 산성안 사람들을
갈라 맡고 각항 지공을 같이 하라구 분부합시면 동네 부담두 좀 수월하려니와
첫째 분부 거행이 잘될 듯 생각하옵는데 처분이 어떠실지 여쭤보는 말씀이올시
다.” 삼좌의 말이 유리하여 이봉학이는 그 말을 쫓아 마산리.사주리 사람들을
불러오려고 생각하고 “두 동네 사람을 아침 전에 다 불러올 수 있겠나?”하고
묻는데 사람 대접으로 하대하던 언사를 고치었다. “두 군데가 다 오리 좀 남짓
합니다. 지금 곧 사람을 보내면 아침때 지나기 전에 올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곧 사람을 보내서 두 동네 동임들만 오라구 부르게.” "저희 동네 사람만
가두 불러오긴 하겠솝지요만 단단할 성으루 수하 사람들 한둘씩 같이 가게 해주
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사람은 아직 아침밥들을 안 먹었을걸.” “분부만 합
시면 먼저 입시들을 시켜서 같이 가게 합지요.” 이봉학이가 두목 둘을 불러서
각각 졸개 둘씩 데리고 동네 사람들과 같이 가서 마산리, 사주리 동임들을 불러
오라고 분부한 뒤 방에 들어와서 도평 삼좌가 사람이 똑똑하다고 창찬하였다.
아침밥들을 먹고 한동안 지났을 때 마산리와 사주리에 보낸 사람들이 두 동네
동임들을 데리고 와서 도평까지 세 동네 동임들을 한데 모아놓고 이봉학이가 먼
저 도평 사람에게 이르던 말을 다시 되풀이하여 일렀다. 사람 겨우 일곱이 관군
오백여 명 대적하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과 귀로 들어도 본 이나 진배없이 잘
들을 사람들이라 일 분부 시행으로 녜 녜 대답들 하였다.
이봉학이가 다른 두령들과 상의하여 군량, 마초 기타 물품을 아쉬운 대로 쓸
만큼 몇 섬 몇 짐 또는 몇 개 아주 작정하여 발기로 적어서 세 동네 동임들을
내주며 빨리빨리 수합하여 산성으로 올려보내라고 이르고 일행을 거느리고 산성
에 올라와서 열세 집에 사는 사람들을 세 동네로 몰아 내려보내는데 살림살이
제구중의 긴한 것은 아직 두고 쓰고 긴치 않은 것은 세 동네 사람과 소가 왔다
가는 회편에 보내주기로 하였다. 열세 집의 방 면색이 통히 스물여섯인데 그중
의 가장 널찍한 방이 전에 와서 하룻밤 자던 집 안방이라 이것을 대장의 사랑
겸 두령의 도회청으로 정하여 맥질한 벽에 종잇장을 붙이게 하고 삿자리와 기직
자리를 새 것으로 바꾸어 깔게 하고 그 나머지 방들은 비질만 정하게 시키었다.
두령들로부터 졸개들까지 잠시 편히 앉았지 못하고 이집 저집으로 왔다갔다 하
는 중에 저녁때가 다 되었다. 미처 자리도 잡아놓지 못한 양식섬도 풀고 된장독
도 열고 새로 걸어놓은 가마솥들도 부시어서 칠십여 명이 먹을 저녁밥을 준비하
기 시작하였다. 이봉학이가 곽오주와 이춘동이는 산성에 남아서 두목과 졸개들
의 저녁 준비하는 것을 보살피게 하고 그외의 두령들은 다 데리고 사주리로 내
려왔다. 사주리와 도평과 마산리에서 각각 홰꾼을 열명씩 내서 사주리 홰는 해
주서 오는 길로 나가고 도평 홰는 사주리로 오고 마산리 홰는 산성 너덜에 와서
기다리도록 지휘하였다. 꺽정이는 전날 길 떠날 준비를 다 시켜서 이날 첫새벽
떠났건만 내행이 많은 까닭으로 길이 마냥 늦어져서 사주리도 홰 없으면 캄캄하
여 못 올 뻔하였고 산성은 밤이 삼경이 다 된 때 들어왔었다. 백손 어머니가 산
후탈로 못 오게 되어서 해산 구원하는 애기 어머니도 못 오게 되고 애기는 어머
니와 같이 온다고 아니 오고 백손이는 어머니 옆에 있으라고 못 오게 하고 의원
허생원과 심부름할 졸개 내외를 남겨두고 또 이춘동이의 가족 세 식구를 그대로
남아있게 하여 열 명이 줄어서 상하 소솔이 육십여 명이 되었다. 이날 밤은 되
는 대로 방을 빌려서 자고 이튿날 방들을 정하는데 꺽정이가 자기 방과 소홍이
방으로 방 둘을 쓰고 방이 서넛이나 있어야 겨우 식구를 주체할 한온이에게 방
셋 있는 집 한채를 주고 내외 가진 두령 다섯과 시위 들에게 매 일 명 방 하나
씩 주고 홀몸 두령 셋에게 방하나를 주고 방 스물 여섯의 나머지 방 열셋을 두
목, 졸개 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청석골서 바로 자모산성으로 왔던들 방들이 좁
아서 불편하였을 것인데 해주서 된통을 치르고 온 까닭에 불편하단 소리들이 없
었다. 꺽정이가 이와 같이 자모산성에 와서 구차스럽게나마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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