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석골에 남아 있게 된 두목과 졸개들이 대개 다 순경사 소문에 놀라고 안식
구 피난에 겁이 났지마는 대장과 두령들을 태산같이 밑어서 겨우 안심들 하고
있었는데 대장과 두령들이 버리고 가니 믿음의 태산으로 진정되었던 마음이 흔
들리고 들뜨고 뒤집히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꺽정이가 떠나기 전에 술렁술렁
하던 청석골이 떠난 뒤에는 곧 난장판같이 떠들썩하여졌다. 오가는 사방 초막에
서 떠들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방문을 닫아 걸고 혼자 누워서 억제할 수 없는
고적한 생각을 마음속으로 곰새기었다. 청석골을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 다 정
이 든 곳이요, 수하 사람은 어중이떠중이나마 수효가 자그마치 팔십여 명이건만
웬 셈인지 자기 신세가 게발 물어던진것 같았다. 처음에 마누라와 딸을 끌고 산
속 깊이 들어왔을 때 딸은 말할 것 없고 마누라까지 호젓하여 못살겠다고 사설
이 많았으나 자기는 지금같이 외롭고 쓸쓸하지 아니하였었다. 자신은 팔자에 없
기에 딸자식 하나 있던 것까지 없어졌겠지만 마누라만 살아 있었으면 이 산속은
고만두고 온 세상에 사람의 새끼가 하나 없더라도 외롭고 쓸쓸할 리가 만무할
게다. 마누라가 죽을 나이도 아니고 죽을 병도 아닌데 죽은 것이 생각할수록 불
쌍하나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사는것은 차라리 죽는 것만도 같지 못하니 살아
있는 자기가 죽은 마누라보다 더 불쌍하였다. 오가가 술로 시름을 잊으려고 생
각하고 자리에 일어 앉아서 눈물을 씻은 뒤 문간편을 향하고 홍록이를 불렀다.
홍록이는 오가가 하인같이 가까이 두고 부리는 졸개의 이름이다. 문간방이 엎드
려지면 코닿을 데 있는 데 한번 불러서 대답이 없고 두번 세번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이 자식이 첫잠이 깊이 들었나.” 자는 사람이 초풍하여 일어날 만큼
소리를 질러서 불렀다. 그래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허, 이 자식두 떠드는
판에 한 참례 들러 간 게로군.” 오가가 목촛대의 촛불을 떼어들고 마루에 나
가서 찬탁자에서 술병과 데울 그릇을 찾아서 한손에 겸쳐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술을 데우려고 화로를 잡아당겨서 헤쳐보니 불이 거의 다 사위어서 데우기는 고
사하고 냉기도 가실 수가 없었다. 술을 불이 없어 데우지 못하고 안주는 다시
나가 찾기가 싫어서 찬술을 강술로 한 병 다 먹으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가
저리고 속이 떨려서 한병의 반의반도 다 못 먹고 불불이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고만 술이나마 술기운이 몸에 돌며 바로 흔곤이 잠이 들어서 자는 중에 방 밖에
서 소리가 나서 잠결에 “어떤 죽일 놈들이 여기까지 와서 떠드나.” 괘씸하게
생각하고 정신을 차린 뒤 다시 들어본즉 방 밖은 고사하고 초막들에까지 떠드는
소리가 없어진 듯 사방이 괴괴하였다. “꿈을 꾸었던가?” 하고 생각을 돌리고
번듯이 누워서 기지개를 치며 하품을 소리내서 하였더니 방 밖에서 인기척하는
기침소리가 났다. “그게 누구냐?” “소인이올시다.” “누구야?” “홍록이올
시다.” “너, 어디 갔다 왔느냐?” “지금 자다가 나왔소이다.” “아까 내가
목청이 떨어지두룩 불렀는데 그래 자느라구 몰랐단말이냐. 그런 쇠귀신 같은 잠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밀이냐.” “아까는 초막에서들 하두 기탄없이 떠드옵기에
무슨 일이 있나하구 한번 돌아보구 왔소이다.” “너는 지금 무슨 일루 내 방
앞에 와서 기탄없이 떠들었느냐?” “떠든 일 없소이다.” “떠드는 소리에 내
가 잠이 깨었는데 떠든 일이 없다니 무슨 소리냐.” “서산 패두 천이가 소인을
깨우느라구 혹시 소리질렀는진 모르겠소이다만 소인은 들어와서 주무십니까구
두어 번 여쭤보다가 대답이 없으셔서 고만두구 도루 나가려구 하던 차이올시다.
” “천이가 왜 왔더냐? 서산에 무슨 일이 있다더냐?” “여간 일이 아니올시
다. 한 시간쯤 전에 두목 두 놈과 졸개 세놈이 어디루 도망할라구 서산을 넘어
가는 것을 파수꾼이 가루막구 어디들 가느냐구 힐난하온즉슨 그놈들 말이 우리
는 대장께루 간다하구 파수꾼을 미리 제치구 나갔답니다. 천이가 지금 그 말씀
을 여쭈러 왔답니다.” “알았다. 나가 자거라.” “천이가 지금 소인의 방에 있
솝는데 들어오라구 부르오리까?” “고만두구 가라구 그래라.” 다른 처분이 있
기를 바라는지 홍록이가 나가지 않고 한동안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가 “도망질
하는 놈들을 가만 내버려두실랍니까?” 하고 묻는 것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으
면 네가 쫓아가서 붙잡아 올라느냐?” 하고 오가는 평소에 흔히 하는 실없는 말
투로 대답하였다.
-未完으로 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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