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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1)

카지모도 2023. 10. 2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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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1)

 

 

1. 청사 초롱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대숲에서는 제법 소리까지 일었다.

하기야 대숲에서 바람 소리가 일고 있는 것이 굳이 날씨 때문이랄 수는 없었다.

청명하고 볕발이 고른 날에도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한 바람이 술렁이었다.

그것은 사르락 사르락 댓잎을 갈며 들릴 듯 말 듯 사운거리다가도, 솨아 한쪽으

로 몰리면서 물 소리를 내기도 하고, 잔잔해졌는가 하면 푸른 잎의 날을 세워

우우우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래서 울타리 삼아 뒤안에 우거져 있

는 대밭이나, 고샅에 저절로 커오르는 시누대, 그리고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왕

댓잎의 대바람 소리는 그저 언제나 물결처럼 이 대실을 적시고 있었다. 근년에

는 이상하게, 대가 시름거리며 마르기도 하고, 예전처럼 죽순도 많이 나지 않아,

노인들 말로는 대숲이 허성해졌다고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하늘을 가리며 무성

한 대나무들은 쉬흔 자의 키로 기상을 굽히지 않은 채 저희들끼리 바람을 일구

는 것이었다. 전에 누군가가 그 소리를 들으면서, 대는 속이 비어서 제 속에 바

람을 지니고 사는 것이라, 그렇게 가만히 서 있어도 저절로 대숲에는 바람이 차

기 마련이라고 말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날씨마저 구름이 잡혀 있는데

다가 잔바람이라도 이는 날에는 으레 물결 소리는 소리를 쏴아 내면서, 후두둑

비 쏟아지는 시늉을 대숲에 먼저 하는 것이었다. 대실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

터 이 대숲에서 일고 있는 바람에 귀가 젖어 그 소리만으로도 날씨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와 몸짓까지라도 얼마든

지 눈치챌 수 있기도 하였다. 그저 저희끼리 손을 비비며 놀고 있는 자잘하고

맑은 소리, 강 건너 강골 이씨네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이쪽 대실로 마실 나온

바람이 잠시 머무는 소리, 어디 먼 타지에서 물어와 그대로 지나가는 낯선 소리,

그러다가도 허리가 휘어질 만큼 성이 나서 잎사귀 낱낱의 푸른 날을 번뜩이며

몸을 솟구치는 소리, 그런가 하면 아무 뜻없이 심심하여 제 이파리나 흔들어 보

는 소리, 그리고 달도 없는 깊은 밤 제 몸 속의 적막을 퉁소 삼아 불어 내는 한

숨 소리, 그 소리에 섞여 별의 무리가 우수수 대밭에 떨어지는 소리까지라도 얼

마든지 들어 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도 그 대바람 소리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에 큰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대소가의 안팎에서는

이른 아침에 채비를 하여 원뜸으로 올라가고, 호제와 머슴들도 집을 비웠다. 어

른들이 그러니 아이들까지도 덩달아 고샅을 뛰어다니며 신이 나서 연방 무어라

고 재재거렸다. 그리고 가까운 촌수의 동서 숙질의 부인들은 아예 며칠 전부터

올라가 있기도 하였다. 그런 마을의 동쪽 서래봉과 칼바위 쪽에 두툼하게 엉키

어 있는 회색의 구름은, 그러나 중천에 이르러는 엷은 안개처럼 희부옇게 풀려

둥근 해의 모양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아무래도 구름에 가려진 햇발이라 온기

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이만한 날씨라면 큰일 치르기에 그다지 애석

한 것은 아니었다. 벌써 마당에는 넓은 차일을 치고 그 아래 멍석을 깔아 두었

으며, 멍석 위에 펼 화문석까지도 깨끗한 행주질을 몇 번이나 하여 대청마루에

내다 놓았다. 그리고 교배상을 챙긴다. 서래봉의 줄기에서 갈려 나온 낮은 동산

이 집터의 뒷등을 이루어 주고, 앞쪽은 툭 트여 마을이 내려다보이며, 마을 건너

강골과의 경계를 내고 있는 강 줄기가 비단 띠처럼 눈에 들어오는 남도 땅의 대

실, 이 집의 안팎은 지금 며칠째 밤을 세우고 있었다. 며칠째라고 하지만, 그것

은 꼬박 밤을 세우면서 방방이 불을 밝히고 장명등이 꺼지지 않은 날수만을 그

렇게 말하는 것이요, 실상 분주하여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 혼인하자는

말이 오간 의혼이 있고, 청혼서가 오가면서부터였다. 그러다가 지난 초여름, 살

구가 막 신맛을 올리며 단단하게 여물고 있을 때 도경을 넘어 북도의 남원군 매

안에서 사람이 당도하였다. 그는 신랑 될 사람의 사주를 가지고 온 것이다. 주인

허담과 부인 연일정씨는 대청에 돗자리를 까고, 정갈한 상을 앞에 하여, 정중하

게 사주 단자를 받았다. 상 위에 놓인 사주보는 네 귀퉁이에 금전지를 달고, 간

지에 근봉이라 쓰인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 다홍의 비단 보를 조심스럽게 펼치

자 안쪽은 빛깔 고운 남색인데, 거기 흰 봉투가 들어 있고, 봉투는 봉함 대신 길

고 가느다란 싸릿가지를 젓가락처럼 모두어 물리고 있었다. 싸릿가지는 본래 어

른의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가늘지만 상서로이 날렵하게 뻗은 것을 반으로 쪼개,

봉투 앞뒷면으로 나누어 봉투를 물게 한 것이다. 봉투보다 길어서 뚜껑 위아래

양쪽으로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씩하게 솟아 나와 있는 싸릿가지 머리에는, 청실

홍실의 둥근 타래실이 얌전하게 묶였는데, 그것은 휘황하고 요려하게 굽이쳐 나

뭇가지 앞면을 타고 내려오다가 꽁지를 휘이 감으며 뒷면 위쪽으로 올라가 서로

합해졌다. 역시 매듭이 지지 않게 동심결로 묶여 있는 것이었다. 허담은, 그 청,

홍의 타래실을 보며 눈에 웃음을 띄웠다. 그러고 나서부터 집안은 그야말로 대

문, 중문은 말할 것도 없고 방문이며 부엌문, 곳간문들이 제대로 여닫힐 겨를도

없이 분주해진 것이다. 정작 오늘은, 뒤안에서 흰떡이며 인절미를 만드느라고 내

려치던 떡메 소리와 장작 패는 소리, 그리고 밤낮을 모르고 집안을 울리던 찰진

다듬이 소리 같은 것이 멎어 놓아 차라리 조용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사람들이 안채, 사랑채, 뒤안, 부엌, 앞마당, 중마당, 마루, 대청 할 것 없이

그득그득 들어차 오히려 더욱 들떠 있었다. 콩심이는 안채 사랑채의 댓돌에 놓

인 신발들을 가지런히 하느라고 조그만 몸을 더 조그맣게 꼬부리고 손을 재빠르

게 놀리면서 정지 뒷문으로 가서 어미에게 적 소작 얻어먹을 생각에 바빴다. 콩

심어미는 부엌 뒤문간 곁의 뒤안에서 굵은 돌 세 개를 솥발처럼 괴어 놓고 가마

솥 뚜껑을 거꾸로 얹어 연방 기름을 둘러가며, 한 손으로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소맷자락으로 씻어 올리면서 전유어를 지지고 있었다. 그 고소한 냄

새 때문에 콩심이의 손을 더욱 빨라지고, 작은 콧구멍이 자꾸만 벌름거려지는

것이었다. 전유어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연한 살코기를 자근자근 칼질하여 갖가

지 양념을 넣고 고루 간이 잘 밴 쇠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석쇠에 굽는 냄새, 같

은 쇠고기가 들어가는 음식이라도 도라지가 들어가 참기름에 섞이는 냄새들이

집 안팎은 물론 온 마을에까지 바람을 타고 내려갔다. 솜씨가 좋은 서저울네는

생도라지를 소금물에 살짝 삶아 건지며 맛을 본다. 그리고 간간한 도라지를 옹

백이의 찬물에 우려내는 동안 후춧가루, 소금, 깨소금, 파, 마늘을 언뜻언뜻 챙긴

뒤에, 다시 도라지를 건져내더니 순식간에 옥파같이 곱게 갈아 놓는다.

"얼매나 좋으까이? 연지 곤지에다."

옆에서 떡시루 번을 뜯어내고 있던 점봉이네가 혼자말처럼 탄식하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신랑이 에리단디 신방이 멋인지나 알랑가?"

뒤안의 콩심어미가 어느 결에 듣고 말꼬리를 치켜세우며 참견을 하는데 히히

히 하고 웃음을 깨문다.

"저리 가. 아이고 웬수녀르 것."

웃음 끝에, 곁에 다가선 콩심이를 보더니 전유어 한 쪽을 찢어 주며 손짓으로

밀어낸다. 그리고 나머지 쪽을 자기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전유어를 뒤집는다.

콩심이는 적 조각을 공중으로 치켜들어 혓바닥을 내민다.

치지지이이 치직.

찬모 서저울네도 번철에 도라지와 쇠고기와 갖은 양념을 넣고 참기름을 두르

면서, 간장, 후추, 깨소금, 파, 마늘이 서로 섞이며 익어가는 냄새에 양미간을 모

은다. 그리고 찌푸리는 것 같은 미소를 머금는다. 이것은 음식 익는 냄새로 맛을

느끼면서, 잘 되어가고 있을 때 보여 주는, 괜찮다는 표시이다. 그네는 도라지

크기로 잘라서 소금물에 살짝 데친 당근에 잣가루와 후춧가루, 참기름을 버무리

고는 번철에 익은 것들을 채반에 내놓고 가지런히 챙기면서 색색깔로 빛깔을 맞

추어 꼬챙이에 꿰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마당에서는 웃음 소리와, 부산하게 사람

들 왔다갔다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어느새 점봉이가 부엌 문간에서 기웃 안

을 들여다보며 제 어미 눈치를 살핀다. 어미는 얼른 시룻번을 한 줌 집어 주면

서 쥐어박는 시늉을 한다. 그러나 무리마다 고운 물을 앉힌 무지개떡이며, 김이

천장을 가리는 붉은 시루떡, 그리고 떡가루 사이에 팥고물, 콩, 녹두, 계핏가루,

석이 밤, 잣 들이 곁들여 있는 갖은 시루떡을 네모 반듯하게 썰어 상에 쓸 것을

챙기고는, 부스러진 귀퉁이를 따로 모아 삼베 보자기에 싸둘 생각을 점봉이네는

한다. 어깨뼈는 빠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 많은 음식을 보고, 만들고 눈치껏

먹으며 새끼들한테 먹일 수도 있으니, 어쨌든 잔치는 자주 있었으면도 싶었다.

물론 상객과 신랑이 받는 큰상에 쓸 음식과, 함진아비나 수행한 사람들이 먹을

상에 쓸 음식들은 감히 아랫사람들이 손대지 못했다. 큰상은 우귀 때 신랑 집으

로 싸서 보내는 까닭에 그 때깔이나 맛이 출중해야 하는지라, 문중의 부인들이

손수 나서서 온갖 솜씨와 정성을 다하여 만들었지만, 잔치에 쓸 그 많은 음식을

모두 그 부인들이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이렇게 찬모와 행랑어멈들이 더운 숨

을 뿜고 있는 것이다. 부엌은 사람이 돌아설 자리도 없었다. 결코 더운 날씨가

아니건만, 부엌에 들어찬

+ 사람들의 훈김과 아궁이마다 타고 있는 장작불의 후끈

후끈한 화기, 그리고 입도 벙긋할 틈 없이 정신을 못 차리게 분주한 음식 준비

때문에 아낙네들은 저마다 땀을 흘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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