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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4)

카지모도 2023. 10. 29.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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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초를 다 심어도 대는 아니 심으리라

 

진주, 산호, 비취, 청옥, 백옥 밀화의 구슬들은 일룽거리는 촛불빛을 받아 오색

의 빛을 찬연하게 뿜는다. 금방이라도 좌르르 소리를 내며 쏟아질 것처럼 소담

한 구슬 무더기가 꽃밭이라도 되는가, 실날같이 가냘픈 가지 끝에서 청강석 나

비가 날개를 하염없이 떨고 있다. 큰비녀를 감으며 양 어깨 위로 드리워져 가슴

으로 흘러내린 고운 검자주 비단 앞댕기도 보이지 않게 떨리고 있다. 앞댕기에

물려진 금박과 진주, 산호 구슬들이 파르르 빛을 떤다. 마당을 가득 채우며 넘치

던 웃음 소리, 부산한 발자국 소리, 그리고 사랑에서 간간히 터지던 홍소의 소리

들도 이제는 잠잠하다. 온 집안을 뒤덮던 음식 냄새조차도 싸늘한 밤 공기에 씻

기운 듯 어느결에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점봉이네가 부엌 바라지를 걸어 잠그

는 삐이거억 소리가 난 것도 벌써 한참 전의 일이다. 밤이 깊을 대로 깊은 모양

이다. 그러나 방안의 두 사람은 아직도 말이 없다. 오직 밀촛불만이 촛대 앞에

놓인 작은 술상과 그 술상 위의 흰 술병, 술잔, 그리고 밤, 대추 등을 비추면서,

신부의 등뒤로 펼쳐진 백수백복 병풍에 그네의 그림자를 드리워 주고 있다. 신

랑 강모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림처럼 앉아 있기만 한다. 얼마 동안이나 지금

이렇게 마주앉아 있는 것일까.

(크다... .)

강모는 다만 아까부터 까닭을 알 수 없는 심정에 짓눌리어 몇 번이고 이 말을

삼키는 것이었다. 눈이 부시게 찬연한 오색 구슬로 덮인 화관이며 다홍의 활옷,

그 활 옷에 수놓여진 길상의 문양들이 커다란 소매의 푸르고 붉은 노란 색동과

더불어 오직 마음을 어지럽게 할 뿐, 곧다든지 어여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아까 이 신방에 들었을 때 불빛 아래 앉아 있는 그네를 본 순간,

그 눈부시게 현란하여 울긋불긋 빛나는 색깔들이 덜컥하는 소리를 내며 가슴에

부딪혀 왔었다. 겁이 났다. 섬뜩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그 섬뜩함의 찬 기운이

몸의 낮은 곳으로 스며들면서, 자기도 모르게... 어찌할꼬... . 싶은 심정에 사로잡

히고 말았던 것이다.

"신방에 들거든 조금도 서두르지 말아라. 겁을 내서도 안되지. 몸을 맡기면 그

저 자연스러운 이치와 음양의 흐름이 있으니 모든 일은 저절로 이루어질 게다."

남원의 매안에서 행장을 차리고 상객이 되어 대실로 길을 떠나며 부친 이기채

는 혼행하는 강모에게 그렇게 일렀다. 강모는 지금 그 말을 상기해 본다. 음양의

흐름이 있으니... 저절로... . 그는 다시 한 번 가슴이 막힌다.

"신방에 촛불은 꼭 손가락으로 꺼야 한다. 입김으로 불어 끄면 복 달어나. 알

었지?"

길떠날 채비를 마치고 안방에 인사를 들어갔을 때, 할머니 청암부인은 장가들

러 가는 손자 강모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감개 어린 목소리로 당부하였다. 그러

나 아직도 촛불은 꺼지지 않은 채 가끔씩 타악, 소리를 내며 튀어 올라 흔들리

면서 타고 있다. 촛농이 한쪽으로 기울어 흘러내린다. 신랑이 그러고 있으니 더

욱더 굳은 침묵으로 입을 무겁게 다문 채,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무슨 갑옷에

싸인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다만 화관의 구슬들과 푸른 빛으로 떨리는

나비 날개들만이 불빛에 영롱할 뿐이다.

"... 참. 이 마을엔 대가 많드구만요."

드디어 강모는 입을 떼었다. 깊은 강물 한가운데 가라앉은 것 같은 침묵의 물

살에 그대로 떠내려가 버릴 듯한 위태로움을 무슨 말로든지 깨야만 할 것 같아

서였다. 그는 아까,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서 검푸르게 울창한 대나무숲을 보았었

다. 마치 그 숲은 몸을 솟구치며 함성을 지르는 것 같았었다. 그때 그는 왜 이

마을의 이름이 대실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무엇이라고 입이 떨어지지 않는데

문득 그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신부는 대답이 없다. 물론 첫날밤의 신부가 신랑

의 말에 얼른 대답을 할 리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신부가 무슨 말에 얼른 대

답을 할 리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신부가 무슨 말을 좀 해 주었으면 싶었다.

강모는 그네가 태산 같기만 하다. 내가 사는 매안에도 대는 많으나, 이름이 대실

이라 그런가, 이곳 대가 더 무성한 것 같습니다. 매안은... 매화 '매'에 언덕 '안'

자를 쓰니, 매, 난, 국, 죽, 사군자에 매화와 대나무 상응 조화가 실로 아름다울

만한데... 매화 언덕에 대나무 수풀이 우리 만난 인연의 그림이라면 얼마나 좋으

리오. 그렇게 말 머리를 떼어 보려 하던 강모는 웬일인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 말들을 그냥 삼키고 만다. 그리고는 대신에 다른 말을 어렵게 꺼낸다.

"옛노래에 이런 게 있는데요. 내 언뜻 생각이 나니 들려 드리리다."

 

백초를 다 심어도 대는 아니 심으리라

살대 가고 젓대 울고 그리나니 붓대로다

어이타 가고 울고 그리는 대를 심어 무삼하리오

 

그러다가 강모는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첫날밤의 덕담으로는 걸맞지 않은 실

책을 저지른 것 같았다. 젓대(피리) 소리 구슬픈 것은 가을 밤이 아니어도 가슴

에이고, 살대(화살)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은 비호보다 빨라서, 살대같이 떠난

님, 젓대로 흐느끼며 부르다가, 기어이 어쩌지 못하고 붓대 들어 그리운 정 적어

가는 그 누구의 심경을 어찌하여 이 밤의 첫마디로 읊고 있는가. 당황하여 얼른

말 끝을 거두어 들이는 그의 얼굴이 굳어진다.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도 있었으

련만 어찌 하필 이름도 알 길 없는 사람의 그 육자배기 가락이 떠올랐단 말인

가.

"대를 말한 글이라면 또 이런 시조도 있지요."

강모는 변명이라도 하듯이

 

나모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엿는다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하고 읊조렸다. 그러나 웬일인지 공소한 느낌이 들고, 절벽 앞에 혼자 앉아 있

는 것처럼 막막한 생각이 드는 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이제 너는 한 여자의 주인이 되었으니 부디 어른으로서 갖추어야 할 풍모를

잊지 말고, 말씨부터도 점잖게 대하여라. 명심해라."

하던 어머니 율촌댁의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 아버지 이기채와 엇비슷한 모습

으로, 체수도 작고 단단하면서 소심한 얼굴이다. 그러나 그 용색은 단정하다. 그

리고 바로 뒤미처 강실이의, 돌아서려다 말고 고개를 갸웃하며 이쪽을 보고 있

는 뒷모습이 보인다. 비칠 듯 말 듯 분홍이 도는 귀를 스치며 등뒤로 땋아 내린

검은 머리 끝에는 제비부리 댕기가 나붓이 물려 있다. 붉은 댕기가 바람도 없

는데 팔락 나부끼는 것 같다. 수줍은 귀밑의 목 언저리에는 부드러운 몇 오라기

의 머리털이 비단 실낱처럼 그대로 보인다. 그 실낱같은 머리털은 햇빛 오라기

인가. 둥글고 이쁜 어깨가 손에 잡힐 듯하다. 강모는 터지려는 한숨을 눌렀다.

강모는 터지는 한숨을 눌렀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가슴이 크게 내려앉고 말았다. 신부의 뒤편 병풍에 드리워진 시커먼 그림자를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엄청나가 커다랗고 무서웠다. 장식이 현란한 화관에 큰비

녀, 비녀를 감아내린 앞댕기 같은 것이 기괴한 모양으로 비죽비죽 솟아나고 부

풀어 보이고 하여, 활옷을 입은 둥실한 몸체와 더불어 엄청나게 커다란 그림자

가 촛불을 따라 흔들리는 것이었다. 촛불이 흔들리자 그림자는 순식간에 천장으

로 오른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강모를 덮어 누르려고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손

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온 방안이 그 그림자에 먹혀 버리고 말 것만 같았다. 그

림자는 어둡고, 크고, 기세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올가미처럼 강모의 목을 조이

며, 강모를 그 어둠 속에 가두어 버리려 하는 것만 같았다.

"그만 잡시다."

강모는 얼결에 무엇인가를 털어 내는 듯한 소리로 말을 토했다. 그러지 않고

서는 이 침묵과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 신방에

들거든, 우선 작은 주안상이 들어올 게다. 신부가 술을 따른 것이니 마시도록 해

라. 신부 가슴을 먼저 만지면 유종을 앓게 되니 삼가야 헌다. 그러니 화관을 먼

저 조심해서 벗기고, 머리 뒤에 큰댕기, 비녀에 앞댕기를 풀어 내려라. 그러고

나서는 활옷의 대대를 끌러 주고, 저고리는 옷고름만 풀어 주면 된다. 신부가 몹

시 부끄러워할 것인즉, 놀라게 하지는 말아라. 버선도 겉버선만 조금 잡아당겨

주면 되느니. 강모는 부친의 당부를 떠올리며 신부 머리 위에 얹힌 화관을 벗기

려 하자 신부가 고개를 떨어뜨린다. 신부의 큰댕기는 참으로 장엄하도록 찬란하

였다. 뒷들을 덮으며 방바닥까지 기다랗게 늘어뜨려진 검자줏빛 비단 댕기에는,

색색을 맞춘 비단실로 꽃송이 모양을 엮어 꾸미고 있고, 자잘한 칠보 꽃이 한바

탕 화려하게 가장자리를 장식하였는데 석웅황과 옥판, 민화, 그리고 금패의 매미

다섯 마리가 앙징스럽게도 두 갈래 진 댕기의 가운데를 맞물고 있었다. 강모는

큰댕기까지만을 풀어 내리고는 손을 멈춘다. 더는 손이 가지 않는다. 뒤안 대밭

에서 들리는 소리인가. 손이 멎는 방안의 정적을 일깨우기라도 하는 듯, 댓잎을

씻는 바람소리가 솨아아 창호에 밀린다. 강모는 잠시 바람 소리를 듣는다. 그리

고 신부를 그대로 두고 두 손을 올려 자기의 사모를 벗었다. 그것을 방바닥에

내려놓는 소리가 방안에 크게 울린다. 촛불이 자색 단령 자락의 바람에 펄럭 흔

들리며 꺼질 듯하더니, 검은 연기 한 가닥만 그을음으로 오르다가 다시 고르게

자리를 잡는다. 그을음의 그림자. 강모는 촛불을 내려다본다. 밀초의 투명한 미

색 불꽃은 언저리에 푸른 서슬을 품으며 작은 새 혓바닥처럼 날렵하게 빛을 내

밀고 있다. 두 손가락으로 그 빛을 누르자 이내 힘없이 촛불은 꺼지고 말았다.

어둠이 순식간에 방안을 점령해 버린다. 강모는 단령의 띠를 따가락 벗기고는

겉옷을 벗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그냥 자리에 눕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고 조용해진다. 한 발은 실히 될 것 같은 베개의 한쪽 모

서리에 머리를 얹으면서 속으로 이 자리가 동쪽인가 서쪽인가 헤아려 본다. 금

침에서의 자리도 부친을 일러 주었건만 도무지 번거로울 뿐 생각도 나지 않고

영념이 되지도 않는다. 아무러면 어떠랴... . 오늘 하루 지난 일이 꿈만 같다. 이

상도 하지. 아까 대실의 동구 앞을 지날 때도, 큰 대문에 들어설 때도 그러지 않

았었는데. 그보다는 큰 대문 앞에 당도하여, 나이 어린 팔머리의 영접을 받으면

서는 오히려 알 수 없는 설렘에 가슴이 후끈하며 쿵쿵 뛰기까지 하였지 않은가.

그런데 모른 일이었다. 허리를 굽히며 어서 오시라 하는 팔머리를 따라 청사등

롱을 들고 서 있던 안서방이 성큼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잇달아 머리에 빨간

갓 주립을 쓴 기러기아비 안부는 붉은 보자기에 싸서 받들고 있던 나무 기러기

를 앞세우고 흑단령 자락을 나부끼며 호기롭게 발을 떼었다. 그때 마당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오며 와그르르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었지. 웬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얼굴이 붉어졌었다. 워메에. 신랑 이쁜 거어어. 그것은 누구였을

까. 에워싸며 구경하는 사람들 틈을 지나 신부의 방문 앞 마당에 이르지 그곳에

는 이미 병풍이 둘러져 있고, 탁자를 놓아 둔 화문석 위에 장인 허담이 서쪽으

로 서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풍채 좋은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베어나고 둘

러선 사람들은 저마다 흥겨움에 출렁거리고 있었는데... . 강모는 혼인할 때 신랑

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 집으로 가, 상 위에 놓고 절하는 전안례를 드리던 때

가 벌써 까마득한 옛일 같기도 하고 남의 일 같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되짚어

몇 걸음만 돌아서면 금방이라도 돌이킬 수 있을 듯한 아까 참의 일이건만 그렇

게 느껴진다. 시중 드는 이는 기러기를 들어 건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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