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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12)

카지모도 2023. 11. 8.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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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월령

 

비가 흐뭇하게 온 끝에 볕이 나서, 일기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하였다. 모내기

를 하기에는 짜 맞춘 것 같은 날씨이다. 겨울이 끝나고 해토가 시작되면서 겨우

내 얼어 붙었던 땅은 서서히 녹아 내리고 추위에 굳은 흙이 그 살을 풀었다. 그

러고는 엊그제 가래질을 했던 듯싶은데, 벌써 골짜기마다 뻐꾸기 소리가 한창인

것이다. 뻐꾸기가 한 번 울면 진달래가 피어나고, 또 한 번 울면 버들잎이 피어

났다. 그 새 소리에 눈짓하며 꽃들이 진다. 종달이도 명랑하게 지저귄다. 건 듯

바람이 소리와 함께 싣고 들판으로 불어오건만, 논에 엎드린 사람들은 등이 따

갑다. 들판에는 못줄이 색동 헝겊을 달고 금을 긋는다. 사람들은 허옇게 엎드려

못줄에 맞추어 나란히 모를 심고 있다. 바람에 헝겊의 색색깔이 팔락거린다. 못

줄을 잡은 사람은 논의 이쪽과 저쪽 두렁에 서서 손을 높이 흔들며 소리를 질러

서로 신호한다. 이른 새벽, 채 닭이 울기도 전부터 모여앉아 모를 찌기 시작하였

는데도 들일은 이제야 초반이다. 하늘의 해는 아직도 어리고 젊다.

"올 좀생이보기도 어쩠등고."

맨다리에 닿는 논물 기운이 싱그럽고, 발가락 사이에서 미끝거리는 진흙 감촉

이 간지러운 옹구네가 옆에 엎드린 평순네에게 묻는다. 입으로는 말을 하지만

손놀림은 빈틈이 없다.

"아조 나란히 슨 것은 아니라도 별들이 기양 앞스거니 뒷스거니 서로 다투등

만."

"그리여? 그러먼 올 농사는 갠찮겄네?"

"두레 시작헌 날 안서방이 날씨 좋다고 안 그러등갑네. 좀생이나 그날 날씨나

다 좋다고, 좋아라 해쌓등만."

두 사람은 엎드린 채 말을 주고받으며, 모는 모대로 부지런히 심느라고 숨이

턱에 걸린다. 좀생이는 묘성으로, 얼른 보면 육련성이라 나란히 별 여섯 개가 빛

나는 것 같지만, 실제는 백이십여 개 작은 별들이 모여서 성군을 이룬 것인데,

농사에 아주 중요한 점을 쳐 준다. 좀생이와 달이 나란히 가거나 혹은 조금 앞

서 가면 풍년이 들고, 반대로 좀생이와 달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흉조라, 농사를

망친다 했다. 음력으로 이월 초엿새날, 사람들은 별이 뜨기를 기다려 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며, 그 좀생이별들이 부디 풍년을 점쳐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좀생이가 보여 주는 풍흉의 예언은 한 번도 틀려 본 일이 없노라고 노인들은 말

하곤 하였다.

"아, 그렇게 그거이 언제쩍 이얘기여? 기양 달이나 별이나 모도 한발씩이나 떨

어져서 여그저그 사방에 흩어져 갖꼬 어디가 백혜 있능가 잘 찾어지도 않드라

고, 아이고 어쩌끄나, 속으로 걱정은 되지만 설마 별이 그런다고 참말로 흉년

이 들라디야, 그랬드니마는 머엇을, 그해 가실에는 애들 멕일 거도 못 거두고 말

어 부렀제이."

그런데, 동국세시기에는

"이날 초저녁에, 좀생이 별 셋이 달 앞에서 고삐를 끄는 형상을 이루며 그 거

리가 설 멀면 풍년이 든다."

하였고, 또 하통죽지에서는, 좀생이를 낭위성으로 간주하여 적었으니,

"이 별들이 달 뒤 열 자 거리쯤을 따르면 풍년이 들면, 달보다 열 자쯤 앞서면

흉년이 든다."

했다. 그런가 하면 열양세시기의 이월묘숙점세조의 기록에는

"농가에서는 초저녁에 좀생이를 보아 별이 달과 떨어지는 원근으로 그 해의

풍흉을 점치나니, 이들이 나란히 가거나, 또 한 자 안에 있으면 좋다고 하고, 만

일 앞서거나 뒤섬이 많이 떨어지면 그해는 장차 흉년이 들어, 어린아이들도 먹

을 것을 못 보리라 하는데, 징험하건대 아주 잘 맞느니라."

한 것을 보면 서로 말이 다른 부분도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천지의 조화와

일월성신의 움직임에 인간사 길흉과 운수를 걸어 보고 싶은 심정은 다름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청암부인은 늘 그렇게 말했다.

"인력이 지극하면, 천재를 면하나니... . "

오늘, 이 들일은 청암부인의 논에서 하고 있는 중이다. 문중에 다른 논에도 물

론 모내기를 해야 하지만, 청암부인댁의 일에 비할 수가 없었다. 이 댁 농사는

그만큼 엄청났다. 우선 매안 근처뿐만이 아니라, 보절, 산동, 삼계, 임실, 동계, 덕

과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주생, 금지, 곡성 일대, 그리고 경상북도와 접경을 이루

고 있는 동면, 산내에까지도 사음을 두었다. 그러나 청암부인으로서는 항상, 이

매안의 지세가 서운하였다. 토질이 척박하고 평야가 없었으며 물이 모자라는 점,

그리고 들이 더 넘쳐갈 수 없도록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산이 흙덩어리와 잔솔

밭 이외에 크게 쓸모가 없는 것들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부인의 위세와

기상으로는, 산이라도 허물어서 옥토를 만들고 싶었으나, 그도 어쩔 수 없는 일

이기는 했다. 하지만 때때로, 무너져 가는 고가의 지붕과 묵은 흙냄새를 풍기며

푸슬푸슬 먼지를 날리던 행랑채, 덩그마니 집채만 남았을 뿐, 거기 사람의 훈김

없던 열아홉의 시절을 회상하면, 이만한 정도라도 위안이 되기는 되었다. 청암부

인이 '이만한 정도'하고 하는 것은, 삼천 수백 석을 이름이었다 소문에는 그네가

오천 석을 한다고 하였지만, 아주 대풍이 든 해라면 거의 사천 석을 바라볼 때

도 있었으나, 그것은 드문 일이고, 대체로 평년작이면 그쯤되었다. 그네는, 머슴

이 발로 힘없이 한 번 찼을 뿐인데도 그냥 주저앉아 버리던 행랑의 벽을 생각하

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더욱이 형식뿐인 외양간이랴. 기구하게도 흰 덩을 타고,

처음 이 대종가의 문턱에 들어설 때 코에 훅 끼쳐 온 것은 곰팡이가 끼인 흙냄

새였다. 그리고 그네를 집안에서 맞이해 준 사람은, 마님이라고도 불리지 못하던

한 과수댁이었다. 그 여인은 허물어지고 있던 검은 고가의 대청마루에서 그림자

처럼 내려와, 어린 청상 청암부인의 손을 부여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

만, 손등을 어루만지며 쓰다듬기만 하는 그 과수댁의 소복이, 청암부인의 흰 댕

기와 더불어 이가 시리게 푸른 빛을 뿜어냈었다. 그때의 그네로서는, 이씨 가문

의 선대에서 무슨 이유로, 다른 곳의 산수를 다 두고 이곳에 자리를 하였는지

알 까닭이 없었다. 다만, 낙향하여 토반이 된 문중의 대종가로 십오륙 대를 면면

히 이어내려온 몇 백 년의 세월이 마을에 가라앉아 고여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학문은 높았으나 벼슬에 탐욕하지 않았던 은사의 가르침이 그 세월 속에 땀내처

럼 절어 있는 것도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선비의 집에서 올바른 가풍에

젖어 단아하게 성장한 청암부인으로서 가군의 문중에 대하여 그런 고지식함과

일종의 남루를 느꼈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단순히, '묵신행'을 온 자

기를 신부로 맞이해 줄 신랑이 이미 타계하고 없는 빈집으로 자기가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일까. 더욱이 여러 부인을 기구하게 잃고 빈 등걸이 다 되어 버린

시아버지 홀로 퇴락한 사랑에 그늘처럼 음울하게 누워 있는, 그야말로 텅 비어

버린 듯한 집채를 향하여 열아홉의 나이로 신행을 하는 걸음이었으니 그렇게 보

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네의 시부는 처덕이 박복한 사람이었다. 본인 자신 영민

하여 일찍이 시재에 능하였고, 성품도 활달했던 그는 부모가 물려준 재산과 스

스로 닦은 학덕으로 가히 일가의 종손다운 풍모를 지키기에 부족하지 않은 사람

이었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칠팔백 석 추수는 실히 되는 농토를 위토와 함께

남겨 주었다. 그러나 그의 운이 그뿐이었던가. 초취의 여인 반남박씨는 슬하에

아무 소생도 남기지 못한 채 어이없게도 스물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네는 행

실이 음전하고 심덕이 깊은 사람이었으나, 몸에 찬 기운이 있어 늘 수족이 저리

는 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었다. 여름이면 맨발로도 땀이 나는데, 겹버선을 신고

도 발이 시리다고 하였다. 박씨의 나이 열여섯에 혼인하였으니 스물세 살 까지,

만 육년이 넘게 산 셈이었다. 소생이 있으려면 얼마든지 있을 법도 한 나이였지

만, 늘 추운 듯한 얼굴로 방안에만 있다가 먼저 가고 만 것이다. 그네가 이승을

떠날 때, 시부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혈기 방장하고 포부가 남다를 때였다.

"사람이 음양으로 한번 만나 작배하였으면 백년을 해로하고 갈라져도 길다고

는 못할 세월이건만, 그 양반의 운수가 사납고 내외 이생에서의 인연이 그것뿐

이셨던 모양이오. 만나는 배필마다 그리 못 만날 사람 같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전생에 지어 놓은 연분이 그렇게밖에 없으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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