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일은 울적하다. 잠도 아니 오는... 죽음이 그대를 끌어 간 그곳에, 조그만
하얀 꽃 그대를 깨우지는 못할 것이니... 울음이 그치게 하여라... 나는 즐거웁게
죽음으로 나아갈 것을 그들에게 알게 하리라... 죽음은 꿈이 아니리... 죽음에서
내 너를 어루만지리... .
음울하고 적막한 곡조의 음률이었다. 그것은 불길하기조차 하였다. 깊은 구렁
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도, 오히려 그 절망과 어우러들어 평온을 맛보는 듯
도 하였다. 구체적인 무엇에 대한 절망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이 절망의 암담한
녹에 침윤당하여 푸른 듯 회색인 듯 무채색인 듯, 색조조차 삭아 버린 그 음색
들. 그러면서도 그 음색으로부터 달아나게 하기보다는 하염없이 그 색깔에 녹슬
고 싶어지는 곡조. 녹슬어서 마음이 놓이는 그 이상한 안도. 그것은 무덤의 언저
리에 감도는 고적이라고나 할까. 강모는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른다. 일본식 영어
로 부르는 그 구미의 노래는, 서툴렀기 때문에 그만큼 강모에게는 더욱더 애절
하게 느껴졌다. 문득 강실이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하기야 '문득'이라는 말은 맞
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네는 그저 습기처럼, 모습도 보이지 않으면서 무심
코 느껴 보면 언제나 촉촉히 강모를 적시우고 있었으므로. 어린 날, 살구꽃잎으
로 꽃밥을 차려 주던 강실이에게, 강모는 여린 버들가지를 잘라 버들피리를 만
들어 주곤 했었다.
필닐리리 필릴리
필닐리리이 필릴리이
버들피리의 부드럽고 여린 음향은 강실이의 여린 목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다가
아지랑이 속으로 사라져 갔었다. 그 소리는 나훌나훌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버
들가지의 푸른 진이 묻는 가느다란 심이 빠져 나가면 밀짚처럼 둥그런 피리가
앙징스럽게 구멍 뚫렸지. 가지를 잘라서 두 손가락 사이에 넣고 부빌 때는 조심
해야 한다. 일껏 공들여 알맹이를 빼내고 나서 안심하고 부어 보면 픽, 하고 김
이 빠져 보리는 경우가 많았다. 껍질이 갈라진 것이다. 그러던 강모가 매안을 떠
나 이곳으로 와 고보에 다니면서 배운 것은 기타와 만돌린이었다. 맨 처음 그
악기를 보았을 때, 강모는 신선한 호기심과 설명할 길 없는 이상한 위안을 받았
다. 모양은 우선 낯설었지만 기타를 가슴에 가득 끌어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 음률의 구슬픔이라니. 감미롭고 명랑하면서도, 음의 한 자락은 늘 젖
어 있는 듯한 소리에 강모는 말벗으로도 달랠 수 없는 심정을 위로받았던 것이
다. 그는 비단 기타에 대해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전혀 몰랐던 것인데, 그
에게는 악기에 대한 친화력이 있었다. 그의 손이 피리의 구멍이나, 기타와 만돌
린의 줄, 그리고 피아노의 하얀 건반 위에 닿으면 그것들은 조금도 낯설지 않게
한눈에 알아보면서 서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강모 자신
도 의아할 정도였다. 그리고 한 번 들려온 가락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저절로
악보처럼 머리 속에 새겨졌다가 손끝으로 울려나오곤 하였다.
"자네, 음악을 전공해 보지 않겠나?"
일본인 음악선생은 어느 날, 홀로 늦게 남아 피아노를 쳐 보고 있던 강모를
발견하고는, 오랫동안 등뒤에서 소리 없이 그를 지켜 보았다면서 그렇게 물었다.
"뜻이 있다면 내가 돕도록 하지."
음악실의 검은 피아노 곁에서 안경을 닦으며 음악선생이 말끝에다 힘을 주어
눌러 맺었을 때도 강모는 그것이 실감나지 않았었다.
"정식으로 시작하지 않겠나?"
물론 강모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선생의 말은 강모에게, 다만 하나의 충격적
인 발견이었을 뿐이다.
"잘 생각해 보도록, 일본으로 가서 공부하는 길은 이것을 보고, 인생에는 뜻밖
에도 여러 가지 길이 있네."
음악선생은 강모에게 한 권의 책을 건네어 주었다.
음악연감
사단법인 동경음악회 편찬
헝겊을 씌운 책 표지에는 검은 활자로 그렇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
그랜드 피아노가 우아하고도 장중한 자태로 그려져 있었다.
"자네에게 줄 테니... ."
선생은 그 다음 말을 잇는 대신 강모의 어깨를 잡고 몇 번 흔들었다. 그것이
무슨 뜻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동경에는 혹시 아는 사람이 없나?"
음악선생은 물었다. 강모의 머리 속에는, 매안 마을의 문장어른 이헌의의 장손
으로 법학을 공부하러 간 강호가 떠올랐다. 그는 성품이 호방 활달하고 매사에
조리가 있어, 어려서도 문중 아이들과 함께 판관놀이를 잘하던 청년이다. 그는
강모보다 세 살 위였다.
"있습니다."
"아, 그래? 가까운 사람인가?"
"집안 대소가 형입니다."
"잘되었군. 그건 아주 희망적인 일인데? 그런데 내가 물어도 될까, 무얼하는
사람인지?"
"학생입니다. 조도전."
"아."
음악선생은 경탄의 음으로 짧게 말하고는 잠시 한 일자로 입을 꾹 다물고 있
다가, 강모의 어깨를 더욱 의미 깊게 누르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날 황혼의 길
에 음악선생한테 받은 책을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돌아오며 강모는 깊은 생각
속에 빠져들었다. 책 뚜껑을 열자, 그곳에는 일곱 대의 축음기가 섬세하게 그려
져 있었는데, 상자마다 뚜껑을 열어 놓아서 마치 금방이라도 음반의 소리들이
들려나올 것 같았다. 그것은 이상한 감동으로 강모를 사로잡았다.
J1 51형 금 오십 원
J2 4B형 청회색 금 오십 원
J3 92형 E형 금 백십오 원
책장을 한 장 넘길 때마다 강모는 설레었다. 트럼펫, 클라리넷, 호른, 드럼, 그
리고 다시 한 장을 넘기면.
과연!
이라고 큼직하게 찍힌 활자 곁에 하모니카 하나가 가지런히 이를 드러내고 웃
고 있었다.
20혈 복음 1.80엔
21혈 복음 2.00엔
발매원 우야상점
그리고는 다음 장에 나타난 검은 피아노 한 대.
호루겔 피아노
세계적 권위 호루겔 피아노
흑도 88건 상아건반 금 이천이백 원야
동경시 은좌 5정목 3번지 소야 피아노점
전화 은좌 57-501~50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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