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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20)

카지모도 2023. 11. 18.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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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모는 구석구석 읽어내려 가다가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것은 불안을

데불고 몰아쳐온 흥분이 벅찼기 대문이었다. 미지의 세계와 하나의 가능성, 그리

고 이미 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가문의 피가 상충하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동경음악학교

본교 동경시 하곡구 상야공원 서북

성선 상야 북구 하차 1정

전화 하곡 83-5563번

일본 유일의 관립음악학교로서 문부성 직할 전문학교이다. 창립은 명치 12년

문부성 음악취괘라고 부르는 명칭으로 동경 본향에 있으며... .

 

1. 학과

예과 1년 종료, 본과 3년 종료

본과: 성악부, 기악부, 작곡부

갑종사범과: 3년 종료 중등교원 양성

연구과

선과

을종사범과

 

2. 입학자격

예과는 중학교 또는 고등여학교 제4학년 수료자, 고등학교 심상학과 수료자

전검합격자 등

 

그리고 제3항에 '입학시험과목'과 '정도'가 나와 있는데, 거기서부터는 전문용

어로 씌어져 있는지라 난감하여 무슨 말인지 잘 알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음악

선생이, 기초부터... 정식으로... 공부... 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제3항'에 대한 학

습을 이른 말 같았다.

"전보! 이강모씨, 전봅니다."

갑자기 대문간에서 큰 소리로 강모를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이강모씨, 전보요."

강모는 거퍼 부르는 소리에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 바람에 기타가 한 쪽으로

기울어 떨어지며 뎅그렁 울린다.

"전보요?"

다급하게 장지문을 열어젖히며 강모가 놀라 물었다. 하숙의 부인도 방문을 열

고 내다본다. 얼굴에 주름이 많은 체전부는 빛이 바랜 낡은 가방에서 접은 종이

를 꺼낸다.

"어디서?"

강모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며 창황히 종이를 편다. 가을 햇살은 눈이 부시다.

그 햇살이 되쏘여, 강모가 들고 있는 종이 위의 글자가 아른거린다. 눈을 감았다

떴다 몇 번을 껌벅이며 더듬더듬 읽은 글귀는 천만 뜻밖에도

"조모위독급래고대"

였다. 이것이 무슨 소리일까. 어찌된 일인가. 강모는 느닷없이 이 여덟 글자에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채, 정신이 얼얼하여 얼른 무슨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는

다. 그것은 무슨 충격이라기보다는 몸 속의 기운이 아찔한 현기를 일으키며 새

어 나가는 써늘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슨 전보유?"

하숙의 부인이 마루로 나서며 궁금한 듯 뭇는다. 고개까지 이쪽으로 기웃하면

서, 그네의 눈이 찌그러져 보인다.

"아, 네... ."

강모는 차마 대답이 떨어지지 않아 그렇게만 말하고 장지문을 닫았다. 그리고

벽에 걸어 놓은 옷걸이에서 교복을 내린다. 마음이 급하면 손끝은 더욱 더디어

지는지 단추가 잘 채워지지 않는다. ... 왜 그렇게 별안간. 강모는 아무래도 짐작

하기가 어려웠다. 지난 여름에 매안에 갔을 때도, 청암부인은 정정한 모습으로

엷은 옥색 물을 놓은 모시옷에 태극선을 들고 대청에 앉아, 위토를 좀더 늘려야

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노인의 건강이란 믿을 수가 없는 것. 청암부인도

벌써 예순여덟, 고희를 바로 눈앞에 두었으니. 아무리 기상이 있고, 기세가 높다

하나, 이미 상노인이 아닌가. 그렇다 한들 이렇게도 급작히 무슨 변고를 입으셨

길래. 옷을 다 입고 모자를 쓰며 방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강모는 나선다.

"무슨 일이유?"

아무래도 궁금했던지 하숙의 부인이 다시 마루로 나와 묻는다.

"예. 저, 조모님께서, 위독하시다고요."

"온 저런, 저를 어쩌누? 아니 어찌 그리 난데없이?"

부인은 혀를 끌끌 차며 얼굴을 찌푸린다.

"마침 공일날이라 집에 있기를 다행이우."

"예."

강모는 툇마루 끝에 걸터앉아, 등을 구부린 채 구두끈을 매며 건성으로 대답

한다. 그의 머리 속은 벌썬 매안에 가 있었다.

"찻시간 맞추겠수?"

"예, 나가 봐야지요."

"그럼 메칠이 걸릴지는 가 봐야 알겄구만... ?"

"예."

"댕겨와요. 방은 내가 잘 보아 줄 것이니."

구두끈의 매듭을 잡아 묶은 다음 일어서서 발을 눌러 본다. 그리고는

"저 그럼."

하고 부인에게 목례를 한다. 다녀오겠다는 표시의 인사다.

"그래요. 얼른 가 봐. 찻시간이 간당간당 허겠네에."

부인은 댓돌에 내려서며 한 손에 들어, 어서 가라는 시늉을 한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문밖에 나서서는 바람같이 빠른 걸음으로 정거장을 향하여 내

닫던 강모는

"강태형은?"

하고 비로소 강태한테 생각이 미쳤다. 강태와 강모는 하숙을 따로 하고 있었

다. 물론 강태가 강모보다 두 살 위였으므로 전주부로 그만큼 먼저 나오게 되었

었다. 강태는 성품이 날카로웠지만, 그 성품값을 하느라고, 학업에도 그만큼 남

다른 두각을 나타냈다. 청암부인의 뜻을 따라, 사숙에 이태씩 다니었던지라, 강

태와 강모는 둘다 취학연령이 넘어서 입학하였는데, 나이도 있었겠지만, 강태는

보통학교 내내 뛰어난 등급으로 선생의 기쁨을 샀으며 학동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았다. 부친인 기표의 심정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고, 이기채도 그런 강태를 신

통히 여기며 귀여워하였다.

"저 아이는 믿을 만하지."

그것이 강태에게 주어지는 선생들의 칭송이었다.

"그러나... 성격이 너무 강팔라서."

이 또한 그들의 염려였다.

이런 두 가지의 엇갈린 칭송과 염려는 종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강태는 고보

에 들어간 뒤 전주로 나가 혼자 지내면서, 그런 성품과 능력이 더욱 두드러져

가는 것 같았다. 그 강태의 뒤를 따라 이 년 뒤, 강모는 전주부로 나와 전주고보

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물론 청암부인의 재력이나 포부, 그리고 이기채의 담력

으로 보아 금지옥엽의 강모에게 동경 유학이라도 못 시킬 바는 아니었으나, 그 '

금지옥엽'이기 때문에 강모는 오히려 전주보다 더 먼 곳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

다. 내보내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게 어떤 자손인데... ."

싶으면, 물가에 서 있어도 위태롭고, 언덕에 서 있어도 가슴이 조여졌으니, 청

암부인이 강모를 육지로만 가는 길도 아니고, 검푸른 물 바다를 건너야 하는 동

경 같은 먼 곳으로 유학을 보낼 리 만무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에 바

로 안 보이니 전주도 먼 곳이었다. 하여, 문중의 강호가 일찍이 법률을 공부하러

일본의 대학으로 떠나고, 또 같은 문중의 강식이 경서의 전문학교로 떠나는 것

을 옆에서 보면서도, 부인은 강모를 다만 전주까지만 내보냈던 것이다. 뜻이 제

아무리 크고 높다 해도, 만에 하나, 행여 모를 일로 강모를 잃을 수는 결코 없었

던 것이다. 절대로. 그런데 그때 하숙 때문에 난처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처음

에는 강태가 하숙을 하고 있는 학교 근처 노송정에 강모도 함께 있도록 하자고

의견들이 모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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