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종항간이면 그게 다 친형제 한가지 아닌가. 더군다나 객지에서 저희 어린
것들이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지, 전주만 해도 그것이 도성이라, 인심이며 습속이
여기허고는 천양지판일 텐데 멋데로 둘 수는 없지. 아무리 두 살밖에는 차이가
안 난다 하더라도 오뉴월 하루 햇볕이 어디냐는 말도 있잖어. 클 적에 두 살이
란 참 큰 것이지. 강태 그놈의 나이 아직 어려도 총명해 놔서 강모가 함께 있으면
의지가 되고말고."
이기채는 그렇게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이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짐을 챙기고 있는 안서방을 불러 전주행을 나서자고 말한 사람은 청암
부인이었다.
"아무래도 내 좀 다녀와야겄다."
놀란 것은 이기채였다.
"어머니, 날씨도 칩고, 길이 멉니다."
"이 사람아, 가마를 타고 남원도 갔다 왔네. 남원뿐인가, 시집올 때는 그보다
더 먼 길도 왔어. 예서 전주가 무슨 몇 천 리 길이겠는가. 거기다가 이제는 시절
도 변해서 기차까지 다니는데 무슨 염려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굳이 어머니께서 가실 게 무엇입니까? 정 그러시다면 제
가 다녀오지요."
"네가?"
청암부인은 이기채를 바라보았다. 이기채는 말이 없다. 그는 웬만한 일이 아니
면 출입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이번 일처럼, 이미 강태가 먼저 가
서 살고 있는 집에 강모를 보낸다는, 별 염려할 것도 없는 일에는 꼭 그렇게 지
금 나서야 할 이유가 없었다. 며칠 후에 강모가 안서방과 함께 전주로 나갈 때,
기표에게 같이 가 보라고 부탁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어머니는 지금 길
을 떠나겠다고 하시는 것인가. 청암부인은 이기채의 그런 심중을 들여다보기라
도 한 듯이
"내가 가마."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안서방과 종자 한 사람을 데불고 정거장으로 나갔다.
그날은 바람까지 있었다. 청암부인의 연치가 있는지라, 일기가 고르지 못한 때 먼
곳까지 출입을 하는 것은 불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걸음걸이는 정정했다.
이틀 뒤 그네가 매안으로 돌아왔을 때,
"강모의 하숙은 다른 곳으로 정했다."
하면서, 그리 알라고 덧붙였다.
"예 그러셨습니까?"
이기채가 물었으나, 긴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네는 다만
"내가 맹모 흉내를 좀 내보느라고."
할 뿐이었다. 그래서 강모의 하숙은 청수정으로 정해졌던 것이다. 청수정은,
동네의 오른쪽으로 넓은 시냇물이 흐르고, 우람한 은행목들이 몇 백 년 수를 자
랑하며 밀밀하게 서 있는 향교, 그리고 전주 부성이 아끼는 팔경 중에 하나로
꼽히는 한벽루를 반달같이 팔에 품어안고 있었다. 대정정, 팔달전, 본정, 고사정
들의 동네에 일본인 관사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양회를 푸대로 퍼 날라서 번
듯번듯한 이층건물들을 짓고, 하는 것에 비겨 청수정은 글자 그대로 아직도 날
아갈 듯한 검은 기와 지붕을 덮고 있는 동네였다. 강태는 지난번 강모의 하숙에
와서,
"아아, 도련님의 하숙, 좋오쿠나."
하고 반절은 빈정거리고 반절은 탄식하듯 내뱉었다.
"너희는 부르조아지야."
강모는 '너희'라는 말이 섬뜩하게 귀에 걸려
"부르조아지?"
하고 반문했다.
"그렇지. 이거 봐, 강모야. 내, 한 가지 물어 보자."
강태의 눈빛이 강모를 향하여 번쩍 빛났다. 강모는 공연히 그 눈빛에 움찔하
였다.
"토지라는 것이 무엇이냐? 너는 그것이 무어라고 생각해?"
강모가 말문이 막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도 모른다. 그것은 한번도 토지와 자신을 분리시켜서 따로 그긋에 대해서만 생
각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토지, 그것은 그에게는 하나의 '존재'였다. 강모
가 알든지 모르든지, 그 자리에 광활하게 엎드려 있는 넓은 땅은 언제나 변함없
이 강모를 향하여 다소곳이 순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소유'이기도 하
였다. 철 따라 익어 넘치던 곡식과 채소와 과일들의 무더기가, 곳간에, 헛간에,
마당에 쌓이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던가. 그런데 그것에 대하여 무엇
을 말하라는 것일까.
"토지란, 분명히, 하나의 사회적 환경이야. 그것은 사유재산이 될 수 없는 것이
다. 어느 한 특권 개인이 제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이것
은, 이 지표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에게 태초부터 공으로 거저 주어졌던 공공환
경이란 말이다. 누구나 필요한 자가 필요한 만큼 누릴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다. 토지는 모든 인간의 생존 단위이고 생활 기반인즉, 토지
는... ."
강태는 말을 잠시 끊고 있더니, 잇사이에 물린 깡깡한 소리로
"만인이 고루고루 같이 누리고 나누는, 만인의 공유여야만 해."
하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강태가 다시 한번 강모를 번쩍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실제로는 어때? 토지 없는 농민이 대다수다. 실제로 땅바닥에 엎드려서 고개
들 날이 없는 사람은 제 땅이라고는 한 뼘도 없는데, 하얀 주먹 쥐고 앉아 소출
을 고스란히 받아먹고 있는 몇몇 사람은 아무 일도 안하고 불로소득이야. 손가
락 까딱 않고 앉은 자리에서 받아들이는 재산이 얼만 줄 알어? 이게 모순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단 말이냐?"
강모가 무어라고 미처 하기도 전에 강태는 손바닥으로 밀어내듯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던진다.
"강모 너도 나면서부터 가진 게 너무 많아. 그러니 부르조아 맛이 너무 들어
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느니 알아들을까?"
"형."
"그렇게 해서 자연히 인간 사회에 계급이 생길 수밖에. 서로가 서로에게 적대
심을 품고서 말야. 낡은 부르조아지 사회의 근원적인 모순이지. 있는 자는 없는
자를 경멸하고, 그러면서도 노동력을 착취한다. 반면에 없는 자는 있는 자를 증
오하고, 그러면서도 생존을 위하여 노동력을 바친다. 이게 얼마나 야비하고 비굴
한 상태냐. 이런 체제는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 무너뜨려야 한다."
강태는 강모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침착하고도 날이 선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었다.
"동경의 강호형도 누구보다 이런 일을 잘 알고 있지."
"강호형이요?"
"방학이면 다니러 올 때마다, 우리는 밤을 세워 이 세상의 구조가 가진 모순에
대해서 토론했다. 너는 잘 몰랐겠지만."
순간 강모는 무안했었다.
"계집아이같이."
라고 놀리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서였다.
"형이 가진 생각은, 혼자서 하게 된 건가요? 아니면 강호형... ."
"배우기도 하고 책도 읽지. 또 나 혼자서 골똘히 생각하던 일들이기도 하고.
무릇 사상은, 제 속에서 그런 소양이 있을 때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니
까."
강태는 입귀를 칼끝같이 다물며 말했었다. 강모는 정거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학교 부근에 살고 있는 강태가 혹시 전보를 받고 지금 나와 있지 않은가 싶어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대합실에는 낯 모른 사람들만 서성거릴 뿐, 그는 보이지
않았다. 강태의 하숙으로 가서 함께 갈까도 싶었지만, 기차 시간이 촉박하여 그
것은 힘들 것 같았다. 바로 앞차로 먼저 갔는지도 모르지. 혹 전보를 지금쯤 받
았다면 다음 차로 오겠고. 그러면서 강모는 열차 시간표를 올려다보았다.
뛰이이익.
북쪽에서 소리가 먼저 들리더니 이윽고 검은 석탄 연기를 온 하늘에 뿜어 올
리면서. 시커먼 기차 화통의 대가리가 역 구내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들어오던
기차가 치이익 칙 포오옥 폭, 가쁜 숨을 내쉬며 멈추어서자 화통은 쐐액, 하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부연 증기가 터져 나온다. 강모는 김에 어리어 안개 속
처럼 보이는 승강구로 올라섰다. 통학차가 아니어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윽고 출발한 기차는 오목대를 옆구리에 끼고, 전주천 맑은 물에 그림자 드리
운 한벽루를 슬쩍 바라보면서 컴컴한 굴 속으로 들어간다. 몇발 안되는 길지 않
은 굴이었지만 후욱, 열기가 끼쳐들며 석탄가루가 매캐한 냄새에 섞여 열차칸으
로 날려든다. 순간 강모는 암담하였다. 머리 속이 캄캄하여진다. 가슴의 갈피 사
이로 석탄가루가 점점이 날아 앉는다.
할머니.
강모의 캄캄한 머리에 청암부인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 떠오
른다. 나이 어렸을 때는 잘 몰라서 느끼지 못했었지만, 어느 날인가 문득 올려다
본 청암부인의 눈매에 서려 있던 그 서리의 기운, 그것만으로도 그네의 장수를
의심해 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뿐이랴. 매안의 청호만 하여도 그렇다. 언뜻
그 이름만을 들으면 무슨 넓은 호수를 연상하게 되지만 실상은 마을 뒤의 저수
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마을의 뒤쪽으로는 몇 겹의 산봉우리가 우뚝우뚝 솟은
채 마을을 에워사고 있었는데, 그 중 높은 봉우리인 노적봉, 팔봉산의 검푸른 웅
자, 앞자락에는 탄금봉과 선녀봉, 낮은뫼들이 날렵하게 혹은 나직이 엎드려 있었
다. 그리고 그냥 뒷산이라고 불리는 한 봉우리가 수굿하게, 아주 마을 가까이에
당겨 앉아 있고, 그 아래 방죽이 있었던 것이다. 산이 그렇게 많으면, 그 골짜기
마다 저절로 흘러내리는 물만 한자리에 고여 주어도 참으로 흐뭇하련만, 본디
이 근처의 토질이 척박한데다가 산자락의 계곡물조차도 그다지 수량이 많지 않
았다. 그리고 여름에는 몹시 가뭄을 탔다. 오죽하면 여름 농사철에 한 보름만 비
가 안 오면, 사람들이 저마다 목을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하는 말은,
"산이 먼저 목마른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건넛마을 '둔덕이'에서는 으레
"매안 굴뚝에 연기 나는가 보아라."
하였다. 그러나 그나마도, 어지간한 저수지만 하나 있다면 그렇게 염려할 일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산이 먼저 목말라하면서 그만 뒤미처 둠벙만한 방죽의 바닥
이 갈라져 버리는데, 사람들은 거북이 등짝처럼 터지는 방죽 밑바닥을 보고 있
으면 심정도 따라서 터지고, 입술이 말라들어 허연 꺼풀이 일어났다. 본디, 사액
서원이었던 매안서원의 서원답을 경작하는 데 쓰려고 팠던 손바닥만한 방죽 하
나에 의지하여, 여름마다 고초를 겪으면서도 달리 어쩌지 못하고 농사를 지어왔
으니, 굳이 농수만이라고 할 것인가. 마을은 늘 물이 모자랐다. 샘 바닥마저도
걸핏하면 뒤집혀 붉은 흙탕물이 되고 말았다. 그런 판이지만 자작일촌이니 염치
를 불구하고 물 싸움을 일으키는 일은 없는 셈이었다.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으
나, 그래도 그 작은 둠벙같은 방죽을 소중하게 간수하고 정성들여 아꼈다. 그러
나 그것만으로는 언제나 허덕여지고, 그러자니 자연히 농사가 신통치 않을 수밖
에 없었다.
"저수지를 넓게 파도록 허자."
고 청암부인이 영을 내린 것은 부인의 연차 서른아홉일 때였다. 그때 막 홍안
의 소년이 된 열네 살 이기채는
"어머니, 저수지를 넓히다니요?"
하고 놀라 물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1권 (23) (0) | 2023.11.22 |
---|---|
혼불 1권 (22) (0) | 2023.11.21 |
혼불 1권 (20) (0) | 2023.11.18 |
혼불 1권 (19) (0) | 2023.11.17 |
혼불 1권 (18) (0) | 2023.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