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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권 (22)

카지모도 2023. 11. 21.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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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아무 일 없이 몇 백 년을 살아왔는데, 대대로 조상께서도 안하신 일을

어머니께서 왜 시작하려 하십니까?"

청암부인은 웃었다.

"그보다 더 몇 백 년 전에는 저 방죽마저도 없었느니라. 그냥 민틋헌 산기슭이

었지."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가요?"

"누군가 거기 처음으로 지맥을 끊고 삽을 댄 사람이 있었겠지. 그 사람도 몇

백 년 세월 동안 아무도 안한 일을, 조상께서도 안한 일을 했을 것이니라."

"그렇지만 어머니, 선대 어르신네분께서 이 마을에 저수지 필요한 일을 왜 모

르셨겠습니까? 뜻이 있어도 일의 절차가 그만큼 어려우니, 손을 못 대신 게 아

닐까요."

"쉬운 일은 아니다."

"살던 집터의 울타리만 고칠려고 하여도 계획이 서야 시작을 하는 것이온데,

하물며 그런 큰 일을 어떻게 어머니 혼자서 하실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어머니

께서는... ."

"아녀자란 말이냐?"

청암부인은 이기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기채는 민망하여 고개를 돌린다.

누가 감히 청암부인을 '아녀자'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올시다."

"그럼 무엇이냐?"

"그 많은 품을 어디서 다 불러오며 얼마나한 시간이 들어야 하겠습니까? 또

그 비용은 다 어떻게 감당하고?"

"연고 없이 다만 품을 팔러 온 사람에게는 삯을 쳐 줄 것이요. 소작을 하는 사

람은 그 삯으로 소작료를 탕감하여 줄 것이니라."

"예에?"

그때 이미 청암부인은 천 석 추수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탕감하여 주신다면?"

"내가 한 해 실농을 한 셈 칠 것이다."

"실농을요?"

"실농을 하면 내 집 곳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소작인의 밥솥도 비어 버리지

않겠느냐? 허나, 이런 일을 하면서 탕감을 해 준다면, 나는 실한 저수지를 얻게

되어 그곳에 물이 넘치고, 일한 사람들은 양식과 품삯이 생기니 일거양득이라,

모두 얻기만 하지 않느냐?"

이기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나이 아직 어리었지만, 그는 조숙하고 영

특하며 이미 이재에 밝았다. 그래서 청암부인도 기채를 어리다 하지 않고, 어른

을 대신하여 속마음도 털어놓고 의논 상대를 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을 시작한다면, 이것이 저희 한 집 일만은 아닌즉, 종중에서

도 말씀이 있을 것이고, 또... ."

"짐작하고 있느니라."

"저수지를 파고 넓히는 것은 일개 백성의 뜻이나 힘으로 하기에 벅차고도 분

에 넘치는 일 아니겠습니까? 나라에 조정이 있고 고을에 원이 있으며 관이 있는

데, 함부로 나설 일도 아니거니와 허락을 얻기도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예전에도 다 뜻 가진 어른들이 사재를 기울여. 나라에서도 나서기 어려운 일

을 한 예가 많이 있느니라. 재물과 공력과 시간을 들여 나라에서 할 일을 대신

맡아 한다는데 관장의 허락이 나지 않을 리 있겠느냐. 염려하지 말아라. 관찰사

의 이름으로 임금에게 상신을 하고 일을 한다 해도, 재물을 대서 실제 주관하는

사람이 뜻있는 장자였던 경우는 얼마든지 있느니, 나는 공명이나 이익을 얻겠다

는 나라의 재산이 되어 관이 저수지를 관리한다 해도, 저수지를 얻으면 결국 그

물은 누가 쓰느냐."

"그렇다 할지라도, 이것을 저희가 단독으로 감수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그

러니 추렴을 의논하도록 해야지요."

청암부인은 이기채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저수지를 넓히고 깊이 파서 물이 넘치고 고이면, 저희만 쓰는 것입니까? 모두

가 쓸 것인데, 가세에 따라 층이 진다고 해도 성의를 모아서 해야 할 것입니다."

"네 말이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자기 몫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한 섬지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근면하게 일하고 절약하여 자기 가솔을 굶

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열 섬지기 짓는 사람은 이웃에 배 곯는 자 있으면 거

두어 먹여야 하느니라. 백 섬지기 짓는 사람은 고을을 염려하고, 그보다 다른 또

어떤 몫이 있겠지. 우리 집은, 집이라도 그냥 집이 아니라 종가다. 장자로 내려

온 핏줄만 가지고 종가라고 한다면, 그게 무에 그리 대단하겠느냐? 그 핏줄이

지닌 책임이 있는 게야. 장자란 누구냐? 아버지와 맞잡이가 되는 사람 아니냐?

아버지를 여의면 장자가 어버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장자는 소중하고 귀한 사

람이지. 그렇다면 그런 장자로만 이어져 내려온 종가란 문중의 장자인 셈이다.

어른인 게지. 어른 노릇처럼 어려운 게 어디 있겠느냐? 제대로 할라치면, 이 세

상에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것이 어른 노릇이니라."

이기채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청암부인의 심중이 움직일 수 없도록 굳

어져 있는 것을 느낀 때문이었다.

"내 이일을 어제 오늘 생각한 것이 아니니, 그리 알아라."

청암부인은 한 번 더 뜻을 밝히었다.

"내가 견문 좁은 아낙으로, 들은 바는 별로 없지만, 멀지 않은 전주에 완산팔

경으로도 유명한 덕진 연당 삼만삼천이백여 평, 끝간 데 없이 연꽃이 핀, 넓으나

넓은 호수의 둘레 육천여척, 그 연당 호반을 걸어서 돌게끔 일주 도로를 수축한

이도 있다더라. 혼자서, 그게 부성의 갑부 박기순이라 하던데, 그 사람은 무엇

하러 자기의 온 재산을 기울여 문전옥답도 아닌 물가에 제방을 쌓고 도로를 냈

겠느냐. 제 몫을 삼으랴고 그리하였으리. 아닐 것이니라. 그 절경을 완성하여 누

구를 주자고 그리했을꼬."

그러나 이기채는 여전히 입을 가늘게 다물고만 있을 뿐, 언뜻 대답을 하지 않

았다.

"전에, 옛적에 한 고명허신 어른이 주유천하를 하셨더란다. 그 어른이 하루는

이 고을 매안에 머무시면서 시방산세를 두루 짚어 살피신 연후에, 과시 낙토로

서 경우진 곳이로다. 하고 경탄을 하셨는데... ."

청암부인은 중간에 잠시 말을 멈추고 이기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만 서북으로 비껴 기맥이 새어 흐를 염려가 놓였으니, 마을 서북쪽으로 흘

러내리는 노적봉과 벼슬봉의 산자락 기운을 느긋하게 잡아 묶어서, 큰 못을 파

고, 그 물을 가두어 찰랑찰랑 넘치게 방비책만 잘 강구한다면, 가히 백대 천

손의 천추락만세향을 누릴 만 한 곳이다, 하고 이르셨더란다."

"어머니, 설령 그런 말씀을 정말로 그 어른이 하셨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갓

지나가는 행인의 도참사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큰일을 경영하

면서 어찌 그런 허무맹랑한 설화에다 근원을 의지한단 말씀입니까?"

청암부인은 이기채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지 않고 눈에 미소를 띄웠다.

"허나 꼭 그렇게 허무하고 맹랑한 일만은 아닐 것이니라."

끝을 눌러 맺은 청암부인의 말은 그 길로 온 마을에 퍼졌다. 마을뿐만 아니라,

들녘을 가로질러 바람처럼 재를 넘어 날아갔다. 남원도호부 부사가 집무 거처하

는 동헌 근민당에 이 공사의 재가를 맡으러 가는 일은, 풍헌이 재빠르게 뛰어다

니며 서둘렀다. 풍헌은 조선 행정의 최말단인 방, 그러니까 동네 마을 일을 보는

관원으로, 남원부 같으면 사동방, 매안방 등을 비롯하여 48방이 있으니, 각 방마

다 한 명씩 마흔여덟이 있었다. 매안방에는 풍헌말고도 향약 단체의 임원인 약

정과 방을 통솔하는 동영장, 그리고 죄인을 잡아들이고 치안을 살피는 기찰장이

있었으며, 도연장을 보좌하는 도장에 기찰장을 보좌하는 막장, 또는 이정, 감고

가 각 한 사람씩 있어 매안의 안팎에 생기는 크고 작은 일들을 보았다. 이들은

눈금같이 손금같이, 다섯 가호가 한 묶음이 되어 일통을 이룬 마을 속을 환히

알고 있어서, 여차하면 단걸음에 긴밀히 연락, 기동하였다. 이 일은 다 이씨 집

안간에서 맡아 했다. 물론 이들은 심부름꾼이요. 다스리는 권한은 없었다. 마을

단위의 방이 몇 개 모인 현에는 현감, 혹은 현령이 수령이었으며, 군에는 군수

가, 부에는 부사가 관장으로서 백성을 돌보고 다스렸는데. 백성이 무슨 일을 하

려면 반드시 위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남원의 48방은 도호부 직할 구역이었다.

그래서 도영장은 풍헌을 데리고 여러 차례 순서를 밟아, 부사 계신 근민당 출입

을 하였던 것이다. 순종 임금 융희 3년, 기유, 서력으로 1909년. 새 임금이 등극

을 하셨다고 하나, 세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흉흉해지고 시절은 수상하여, 실제

의 관직도 아닌 허직을 팔고 사는 공명첩이 흔전만전, 얼핏 보면 이름칸이야 비

어 있든 말든 벼슬 아니한 사람 없고, 면천 아니한 자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

나 매안방 관수 공사에 관한 일은 아무리 세상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다 해도,

좀 더디어서 그렇지 까다로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남원의 매안 이씨들이 하는

말은 비록 부사 관장일지언정 함부로 할 수 없는데다가, 터무니 없는 생떼 억지

를 써서 안될 일을 되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요, 조상 대대로 세거하는 마을의

농토에 물 대던 사유 저수지를 제 돈 들여 넓히겠다는데야, 어느 누가 트집을

잡으리오. 오히려 구휼에 버금가는 큰일이라 반색 칭송을 할 일이었다. 더욱이나

어지러운 시기에 잠깐 왔다 머물고 가는 벼슬아치들은 너나없이 마음이 공중에

떠, 우선 자기 잇속을 따지고 사후 처신에 급급하니. 그까짓 동네 저수지 하나

생짜로 판다 해도 별 문제 아닐 터였다. 손해는커녕 치민에 생색이 난 일 아닌

가. 이런 판에 오랜 세월 한 판에 살아 서로의 사이가 농익어 이골난 지방 관속

아전들을 끼고, 얼마 걸리지 않아 공사 허급을 맡아 온 도영장이 풍헌과 함께

청암부인을 호기롭게 찾은 날, 부인은 이들에게 한 상을 걸게 차려 내주었다. 그

리고서 일으킨 저수지 공사는 참으로 볼 만한 것이었다. 남, 여, 노, 소, 안팎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몰려와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일꾼들은 산밑과 온 마을에

허옇게 덮였다. 한 삽씩 흙을 파내고, 쌓인 흙을 져다 내버리고, 둑을 다듬고, 제

방을 쌓느라고 돌 깨는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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