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네가 공명심이 저리 많아서."
"지맥을 건드려 공연한 동티가 나면 어쩔 것인가?"
"이 난리 안 쳐도 지금까지 농사 못하지는 않었네."
"과숙의 몸으로 이날까지 모은 재산, 남 보라고 호기롭게 한 번 써 보자는 것
일 테지."
"농토나 더 늘릴 일이지."
"이제 보게. 빚 지고 말 것세."
구로정에 모이거나 사랑에 마주앉으면 그런 뒷공론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
것은 이웃 동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까닭없이 어수선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른아홉이면 아직도 중년도 여인인데, 그네가 열아홉에 빈 집으로 신행
온 지 만 이십 년, 그 사이에 이루어 놓은 그네의 치부에 내심 기가 눌린 탓도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종부는 하늘이 내리시는가, 저렇도록 큰일을 아낙의 몸으로 일으키다니. 우리
같은 사람은 몇 세상을 다시 나도 못할 일을."
"참 놀라운 일이지, 없는 사람은 서로 콩 한쪽을 나누어 먹지만, 부자는 땡전
한 푼에 사람을 죽인다는데, 당신 재산을 다 내놓고 저렇게 저수지를 만들다니,
본받을 일이네."
"이제는 살겄구먼. 한 시름은 덜었지."
하고 칭송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다가 한 해 겨울을 나고, 이태에 걸쳐 하
던 일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 일하던 사람들이나, 구경을 나온 사람들 모두가
입을 쩍, 벌리고 만 일이 생겼다. 마지막 일손을 서두르던 삽끝으로 퍼올려지는
흙 속에 뭉시르한 바위등이 묻혀 있었던 것이다. 삽은 바위에 부딪쳐 튕겨졌다.
그 튕겨지는 서슬에 놀랐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일은 다 제치고 한 속으로
달려들어 진흙을 떠내기 시작했다. 뒷산 발치에 검은 등허리를 보일 듯 말 듯
드러내고 있던 바위는 한 삽 한 삽 흙을 파내는 동안에, 그 몸이 벗겨지고 있는
셈이었다. 수지면에서 온 장정들 중 하나가 머리에 동이고 있던 무명수건을 끌
러 들고 진땀을 닦아냈다.
"대관절 이거이 머엇이당가?"
"바윗뎅이 아니여?"
함께 삽질을 하던 남정네도 일손을 놓고,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훔치며 말을
받았다. 둘러선 사람들은 여남은 명이 넘었다.
"아니, 무신 놈의 바윗뎅이가 이렇게 나잘반이나 파도 파도 뿌랭이가 안 뵈능
고?"
"참말로 벨 일이네, 헛심만 팽기게 이게 무신 일이여?"
"어디 한 번 더 해 보드라고. 지께잇 거이 짚어 봤자 얼마나 짚이 들어 있겄능
가. 장정이 몇이라고 이거 한나 못 치우겄어?"
사람들은 손바닥에 침을 ㅂ어 따악, 소리가 나게 두드리고는 다시 삽을 들이
댔다.
어영차, 영차, 어영차.
목소리에서도 땀이 배어났다. 세 사람씩 한 조가 되어서, 가운데 사람은 삽자
루를 쥐고 좌우의 두 사람은 삽날에 새끼줄을 매어 양쪽에서 잡아당기니, 마치
가래질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다시 한나절이나 진땀을 흘렸는데도 바위는
더욱더 둥실한 몸의 등허리만을 드러낼 뿐 캐내어지지 않았다. 점차 사람들은
삽을 들고 바위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일이 하루 꼬박 걸려 어
둑어둑해지면서야 겨우 끝났는데,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낸 바위는 영락없는 조
개의 꼴이었다. 엄청나게 커다란 조갑지를 엎어 놓은 것과 너무나도 여실하였다.
그 형국은 동쪽편으로 머리를 돌려 둥두렷이 불쑥 솟아오른 곳이, 높이가 거의
일고여덟 자 남짓이나 되고, 거기서부터 갈라 퍼져 부드럽게 내리깔은 가장자리
로는 대여섯 치 높이로 둘러나가 있는데, 보면 볼수록 엎어 놓은 조갑지 형상이
었다. 한 사람은 줄자를 들이대고 길이를 가늠해 보니 동서로 열다섯 자 네치,
남북으로 열넉자 두 치에 이르는, 실로 거창한 바위돌이었다. 사람은 두렵고도
놀라워 한동안 할 말을 잊고 망연히 서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소문은 마
을과 들녘 너머 재 너머 퍼져 나갔다.
"세상에... 천산 같은 흙더미에 짓눌려서 숨도 못 쉬고 죽어가던 신령님을 구해
내셨구만... 어쩌면... ."
"누가 아니라는가요? 그러니까 꿈에 미리 현몽을 하셨든가? 그렇게 기어이 일
을 시작허시드니."
"이제 두고 보게. 가운이 창성할 것이네."
"정말로 청암아짐 뵐 적에마다 예사 어른이 아니다, 아니다, 싶드니마는, 이런
제세 인물도 다 타고나는 것이지요이?"
"그렇고말고, 참말이지 이번에 큰일을 두 가지나 한꺼번에 허신 것 아니요? 저
수지 쌓아서 치수하고, 신령님 구해 드리고."
"어청안 조개바우지. 그 큰 조개가 흙에 묻혀 물을 못 먹었으니... ."
"이제는 양껏 잡수시고 맑은 물에 부디 편히 지내소서."
문중의 부인들은 그 조개 바위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심정을 빌었다. 어느덧
거멍굴이나, 건넛마을 둔터, 구름다리, 배암골 그리고 고리배미 쪽에서는 그 바
위의 영검에 대해서까지도 소문이 나고 있었다. 어쨌든 그것은 대단한 조짐이었
다. 작년부터 시작한 일이 해가 바뀌어 순종 임금 융희 5년, 경술, 서력으로
1910년 여름, 공사가 막바지를 향하여 치달을 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청
천벽력, 천만 뜻밖에도, 팔월 스무아흐렛날,
"조선은 망하였다."
했다. '한일합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미처 실감도 하기 전에 매안에
저수지가 완성되었다. 오랜 공사 끝에 숙원하던 저수지를 얻은 매안은, 통곡 소
리 진동하는 대신, 거꾸로, 짙푸른 하늘 아래 부시도록 하이얀 열두 발 상모를
태극무늬 물결무늬 휘돌리며, 북 치고, 장구 치고, 꽹매기, 징소리 한바탕 흐드러
지게 어울어. 하늘에 정성껏 고사 지내고, 넘치는 기쁨을 부둥켜 안았다. 그리고
울었다.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 망했다 하지만, 내가 망하지 않은 한 결코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비유하자면 나라와 백성의 관계는 콩꼬투리와 콩알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콩껍질이 말라서 비틀어져 시든다 해도, 그
속에 든 콩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콩은 잠시 어둠 속에 떨어져 새 숨을
기르다가, 다시 싹터 무수한 열매를 조롱조롱 콩밭 가득 맺게 하나니."
백성이 시퍼렇게 눈 뜨고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남의 나라를, 망하였다. 할
수 있단 말이냐.
"우리 저수지 저 푸른 물 남실남실, 달고 시원하게 세세년년 솟아나서, 메마른
농토를 흠뻑 적시고 풍요로운 곡식을 생산해 낼 것이니."
아무도 우리를 망하게 할 수는 없다. 청암부인은 저수지를 완성한 날 밤, 이기
채와 단 둘이 마주 앉아 만감을 누르고 그렇게 말했다.
"생산의 근원이 여기 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그 이튿날 이른 새벽, 물안개 자욱히 피어 오르는 수면 너머 제방에 어떤 아
낙 하나가, 두 손을 정성껏 모으고 경건하게 서 있다가 무릎을 꿇고 깊이 엎드
려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었다. 그 뒤로 사람
들은 그 저수지에 존중하는 뜻으로 호수 호자를 붙이고, 청암부인의 택호 첫머
리를 따서, 청호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과연 조개바위 음덕을 입어서 그런지,
웬만한 가뭄이 들어도 푸른 물 찰랑이는 청호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할머니, 저 물 속에 정말로 신령님이 살고 계신가요?"
강모가 아직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 눈부신 은빛으로 물비늘이 반짝이는 호
면을 보고 물었을 때
"그러엄."
하고 청암부인은 대답했다. 그때 강모는 반짝이는 물비늘보다도 더욱 충만하
게 빛나는 그네의 눈빛을 보았었다. 어린 강모의 눈에, 호면을 바라보는 그네의
충만한 얼굴과 지그시 웃음을 물고 있는 입술, 그리고 힘차게 위로 솟구친 검은
눈썹들은 이상하게도 황홀하게 비쳤다. 그리고 그때의 그 모습은 어떤 순간 생
생하게 살아나곤 하였다. 그 생생함 속에는 사무침이 있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아, 할머니. 달리는 기차의 차창에 제 얼굴이 비치는 것을 바라보며,
강모는 햇빛을 받는 호면의 물그림자가 청암부인의 얼굴에 어른거리는 것이 그
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정거장에 내렸을 때는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다. 매안까
지는 정거장에서도 한식경이나 걸어 들어가야 한다. 기차에서 내리자 비로소 그
는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럴수록 발걸음이 땅에 붙어 걸음은 제자리에서만
허우적이는 것 같았다. 아랫몰로 들어서는 냇물을 지날 때는 웬 검은 치마 입은
아낙이 공손히 손을 맞잡고 허리를 굽혔으나 알아볼 경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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