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문장의 눈에는 석양의 붉은 해가 지고 있는 노적봉 봉우리가 황토흙빛
의 북망산처럼만 여겨진다. 그 흙빛에 눈물이 축축하다.
"어허 참, 사람의 한평생이 살었달 것이 없느니, 이러고 옹기종기 앉었다가도
숨 거두고 나면 그뿐이라. 그저 흙덩이 부수어지듯 먼지로 흩어지고 마는 것을,
그래도 살었다고 노심허고 초사하여 마음이 타도록 시달리는 것이 어찌 생각해
도 허망한 일 아닌가. 어허어... . 자식 먼저 죽는 것까지 보고 죽으려고 그렇게
버티었던 말인가."
"그럴라니 그렇지, 이 세상에 상배한 이 그 한 사람 아닐 터인데, 어찌 그리
남 다른 세상을 살다 가는고."
"사람이 났다 죽을 때는 이름을 남기든지 공적을 남기든지 무슨 표시라도 있
어야 그 허망함을 좀 덜어 볼 것인데, 이렇게 한세상을 차디찬 시름 속에서 살
다가, 떠나고 난 자리에는 회한만 수북허게 두고 가다니, 그 발길이 어찌 가볍겠
습니까?"
"생각해 보면 보쌈과수 한평생이 더 기구허지. 그래도 산 사람이 죽은 사람보
다는 좀 나은가... ? 그 사람이 수북허게 두고 간 회한은 어디 가서 쌓이겄나?
산 사람, 애민 과수댁 생가슴에 가서 묻히게 생겼네. 과수댁은 식은 설움만 하나
더 보듬고."
모두들 이번에는 홀로 남은 여인이 대하여 혀를 찼다. 그러한 탄식소리가 들
리기나 하는 것일까. 안방의 보쌈마님 김씨부인은 하늘이 부끄러워 문도 못 열
어 놓고, 제대로 곡도 하지 못하였다. 사람들도 그 심정을 헤아려서 행여 마음을
다칠세라 더욱 조심하였다. 그러나 누군가는 보쌈마님보다 소복 입은 새각시를
더 염려하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저 어린 종부요. 자, 과연 이제 앞으로 이 새사람이 어떻
게 살아가야 옳겄소... . 의지할 어른이 계신가, 소천이 있는가, 아니면 자식이 있
는가, 아니면 한다 할 만큼 재물이라도 있는가. 그도 아니면, 그저 없는 듯이 삭
이면서 살아도 되는 지차도 아니고, 한 집안의 종부로서 이렇게 기구한 처지에
기대어 볼 무엇 하나 없는 청상이, 혼인하자마자 남편상에 시부모상에 쌍초상이
나서, 겹상복부터 겹겹으로 무겁게 입기 시작했으니."
그런 지 얼마 후, 김씨부인은 이런 말을 하였다.
"사람의 필자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요. 내 팔자가 이렇길래 그 어른이 먼저
가신 것만 같아서 마음에 죄가 되는구려. 그냥 그 댁에서 수절하고 있었더라면
한 번만 청상이 되는 것을, 이제는 훼절까지 했는데도 다시 과부가 되니, 남들은
백년을 해로하는 사람도 있는데 상부 초상만 두 번씩이나 거퍼 치르는 팔자도
흔치는 않을 거요."
그때 김씨부인이 애써 웃어 보인 것은, 아마도 어린 청상 청암부인을 위로하
려는 심정에서였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소복을 입은 두 부인이 서로 마주앉은
그 대면은 형상이 기구하기도 하였거니와 설움이 북받쳐, 결국 김씨부인이 돌아
앉아 흐느껴 체읍을 하고 말았다. 청암부인의 귀에, 그때 그 김씨부인의 흐느끼
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돌아앉은 그네의 우는 어깨를 바라보며, 앞날을 어
찌할꼬, 억장이 무너져 내리던 암담함이 지금 바로 그런 일을 눈앞에 보는 것처
럼 가슴을 짓누른다. 이토록 우습게 왜놈의 성으로 창씨를 할 양이면, 무엇 하러
이다지도 애가 잦는 가문을 지키고 핏줄을 보전할 것인가.
"창씨개명이라니... 말이 안된다."
청암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힘주어 다문다. 눈매에 푸른 서리가 서린다.
청암부인의 다문 입술 위로 경련이 지나간다. 그 입술 빛깔이 가무스름하게 죽
어드는 것이 그네의 몸이 식어내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푸르륵, 어깨가 떨린다.
그네는 문득 동구에 서 있는 열녀비에 가 보고 싶어진다. 그곳에 가 보면 좀 속
이 뚫리려는가. 그 까마득한 선대 할머니 한 분의 비석이 살아 있는 사람의 숨
결보다 더 위안이 되어 줄 것만 같다. 그러나, 다리가 후들거려서 걸음을 떼어놓
을 수가 없다. 이미 내가 힘이 다하였는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갈 생
각은 접어두고 장롱을 연다. 장롱의 서랍에서 그네가 꺼낸 것은 누렇게 바랜 종
이 뭉치였다. 영조 31년 을해, 문형국의 따님으로 태어나서 이씨 집안의 며느리
가 되시었던 그 어른의 육필 유서였다. 군데군데 얼룩이 진 것은 이백여 년의
세월 동안 유서의 먹빛에서 배어난 한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가슴이 짓무르는
심정이 그렇게 번진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 어른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특하여
일찍이 소학을 배우고 시문을 지으니, 영묘한 문장이 아름다웠으며 행실 또한
요조숙녀였다. 거기다가 가을 바람에 씻기운 달이라고나 할까, 고고한 천품이면
서도 그 용색의 그윽함을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러나 어이하랴. 그 어른은 꽃다운
나이 스물하나에 매안의 이씨 문중으로 시집을 왔으나, 불행히도 신랑은 홍역을
치르다가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누가 그리도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의표를
찌른 말을 하였던고. 재사와 가인은 단명 박복하다더니, 그 어른을 두고 한 말이
었던가 보다. 그네는 가슴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용모였고, 글을 배워 문장에 능
하였으며, 여인의 할 일로 침선을 가까이하여 바늘질에 날렵한 솜씨를 자랑하였
으니, 무엇을 나무라리오. 거기다가 더욱이 그 심덕 또한 바르고 원만하였다. 그
런데 하늘은 이와 같은 여인을 내시면서 무슨 복을 어디에 숨겨 두었길래, 혼인
하자마자 신랑을 잃는 설움을 먼저 던져 주었는가. 원통하다든가 슬프다든가 하
는, 향간의 필설이 모두 다 한갓 말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도대체 어느 누
가 그와 같은 정경에 이르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심정을 어디에 비
할 곳도 없고 위로받을 길 또한 없었다. 그네는 하늘을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사람을 대하지 않은 채 망부의 상을 치렀다. 부부사별이란, 말이 쉬워 네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쉬운 일이랴. 세상에 남자로 나서 그 아내를 잃은
것도 설움이 아닌 것은 아니지마는, 비유컨데 그것은 나무의 가지가 꺽이는 것
과 같다면, 남편을 잃은 여인은 뿌리가 잘린 것과 같으니, 아녀자의 통한에 비길
수는 없으리라, 전생에 무슨 죄를 모질게 지고 이승에 나왔길래, 그와 같은 쓰라
린 업고를 치르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피눈물로 망부의 제사를 마친 그 어른
은, 이승에서 못다 한 부부의 인연을 다시 내생에서나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면
서, 마침내 장문의 유서를 남겨 놓고 자진하였다. 이후 정조 때에 상께서 그 어
른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가히 고금에 없는 열녀의 기상이라 크게 칭찬을 하셨
다. 물론 정문까지 세우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청암부인은 침중한 손길로 유서의
첫머리를 펼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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