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 속에는, 대실에 혼행 갔을 때
일이 잊혀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대실의 허담은 기표의 예언을 무색하
게 하고 말았었다. 기표는 그쪽의 살림형세로 보아 상당한 인사가 있을 것이라
고 했었다. 그리고 시속으로 보아, 그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행
세하는 집안의 혼수에 논 문서가 끼여오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경우에 따
라서는 만만치 않은 재산이 여식을 통하여 시댁으로 건네지기도 하였으니까. 그
것은 무슨 과잉 혼수라든가 허세가 아니라 비록 여식으로 나서 삼종지도와 여필
종부의 법도를 따라, 연한이 차면 자라던 집과 낳아 주신 부모를 떠나 시집으로
가는 자식이지만, 그도 소중한 자식이 분명한 까닭에 재산 있는 부모로서는 아
들에게 그러한 것과 꼭같이 딸에게도 상속을 해 주었으니, 아들은 부모 임종 후
에 그 재산을 분배받고, 딸은 시집갈 때에 미리 받는다고 생각하면, 논 문서란
천박한 시속의 오랑캐짓이 아니라, 어쩌면 자식이 부모에게서 받는 당연한 지분
일는지도 몰랐다. 근자에는 같은 자식일지라도 남녀를 엄히 구분하여 출가하는
여식을 남 된다, 치부해 버리는 것이 시속으로 퍼져 있으나, 거슬러 선대로 올라
가 선조 임금 때까지만 하여도, 부모의 재산을 상속하여 문서로 남길 때, 출가한
딸이라 하여 조금도 차별하지 않았으니, 시속이 변했다뿐이지 근본 없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강모의 혼담으로 매파가 바쁜 걸음을 치며 안채에 드나들 때,
가장 돋보이는 자리에 대실의 효원이 올려진 내면에는, 이러한 계산이 어느 정
도 숨겨져 있었던 것은 사실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막상 혼인은 이루어졌
으나 그 인사라고 하는 것이 빠진 채 짐꾼, 일꾼, 하인, 하님들이 엄청나게 기다
란 행렬로, 살림살이 농지기만을 싣고 온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어찌 내색을 할 수 있겠는가? 사돈이 딴전만 보면서 고담준론으
로 자신의 청빈을 자랑하는데야 난들 어찌하겠어? 양천 허씨 가문에 청백리가
몇몇이며, 허씨 선조들은 치부나 벼슬보다 낙향은자로 시서화에 능하였다, 하는
선비 앞에서 무슨 흉금을 털어놓아, 털어놓기를, 혼자서 마않이 청백허고 혼자서
도도허게 고상헌 사람한테 말이야."
대실에서부터 내내 심기가 편치 않던 이기채는 매안으로 돌아와 기표에게 내뱉
았다.
"농인 척허고 흉금을 좀 털어놓으시지 그랬습니까?"
하는 기표에 대한 대답인 셈이었다.
"형님 성품이 너무 깐깐허신 탓이올시다."
"깐깐허지 않으면 어쩌라고?이런 일이 어지 말로 해서 될 일인가?"
"안되는 일을 되게 해야지요. 세상 일이 어디 말로 해서 된다면야 오죽 좋겠습니
까?그렇다면 그게 무릉도원이지 누가 인간 세상이라 허겠습니까?"
"답답한 일이야."
"가문, 가문 하지만 그도 다 선대쩍 말입니다. 팔한림에 열 두 진사가 나고 정승,
판서 즐비하게 했다는 족보가 자랑이 아닌 것은 아니올시다마는 이 당장에 그
후손인 우리는 무엇으로 가문을 빛냅니까? 벼슬을 하려니 조정이 있기를 합니까
아,충신이 되자니 임금이 계시기를 합니까. 거기다가 선비로서 갈고 닦은 학문으
로 후학을 기르자니 학동이 있기를 합니까. 죽림칠현이 되자 해도 대밭이 없는
세상 아닌가요?도대체 무얼 가지고 이 가문을 번창하게 할 수 있게습니까?체면,
체면,지금 이 세상 돌아가는 난국이 어디 체면 있는 세상인가요? 상놈이 상전
되는 세상 아닙니까아. 왜놈들이 상감노릇 허는 것을 눈 뜨고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백성이라면, 솔직히 무력헌 것을 인정하고 쓸데없는 양반 체면 따
위에 매이지 말 일입니다. 힘도 없는 주제에 정신만 살어 가지고 앉은 방석을
못 돌리면 결국 앉은뱅이 노릇밖에 더 헐게 무에 있단 말입니까?이럴 때는 시대
를 이용해야 합니다. 시대를 거슬러 산 사람치고 성명 삼 자 온전허게 보존헌
사람이 없습니다. 형님. 도대체 지금 이 가문에 구체적인 힘이 될 수 있는 게 무
업니까? 형님 당대에 와서 무얼로 대종가의 명맥을 이어 놓으실 겁니까?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에 무엇으로 반석을 만들어 강모한테 물려주시려고 하
시는 건가요? 큰집 재산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다 청암백모님
자수로 이루신 것인데, 형님 대에 와서 얼핏 안심한다면, 이런 난세에는, 그 재
산이 하루아침에 남의 것 되기란 일도 아닙니다. 가세란, 명성으로든지 재물로든
지 창성해 나가야지, 기울기 시작하면 그도 또한 순간의 일이올시다."
기표의 음성은 꼬챙이처럼 이기채의 심정을 아프게 쑤신다. 그럴수록 이기채는
정신이 헛갈릴 만큼 어지러워 저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움켜쥐고 있
는 것들을 송두리째 누구에겐가 떠맡겨 버리고 싶어진다.
"대장부로 태어나서 일세를 풍미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내가 나이 마흔여섯이
라 오십을 바라보는 이 마당에, 공명을 떨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바라지게 가
세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유야무야 한평생이 허퉁하기 짝 없는 일인데. 무엇으
로 이 세상에 왔다 갔다 갔다는 점을 찍으리. 그것도 명맥이 끊기다시피 된 종
가에 종손으로 들어와서 제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어찌 나
라고 생각이 없고 중정이 없겠는가......? 다만 선조에게 누가 되지 않고 사람 사
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가산을 늘리자니,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는 게 제
일이라. 피가 나게 절약하여 살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신통치가 않어. 한 살
이라도 젊었을 때는 모르겠더니만 이제 나도 나이 오십 줄에 들어 서려니. 몸
속에서 가랑잎 소리가 나.......어디 평지를 걷다가 허방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현기증이 나게 초조한 생각이 나서, 나도 내 정신이 아닐 때가 많다."
대실에서 돌아온 이기채의 심기가 그러하였으니,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한테서
나온다는 말도 있었으나, 불편하게 구겨진 그의 심정이 쉽게 풀릴 리가 만무하
였다. 그때 만일 청암부인이 재촉과 채근만 아니었다면 효원의 묵신행은 삼 년,
혹은 몇 삼 년이 미루어졌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막상 신랑인
강모의 태도도 왠지 대실에 두고 온 신부에 대하여 서먹한 것 같은데다 좀체 어
울리려 들지 않아서, 아무리 나이 어려 음양을 모르고 부부의 도리에 서툴다 하
나, 그것만으로 보아 넘기기 섭섭한 면면이 남의 눈에도 드러났으니. 대실 말만
나오면 강모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기미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알아차린 청암
부인이 서둘러서 효원을 불러온 사실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집안으로 들어온
며느리인지라, 사사건건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거기다가 며느리는 터무니없
이 손만 컸다.(제 구실도 못허는 주제에 대갓집 마나님 흉내부터 배운답시고) 그
것은 ,이기채에게는 심히 못마땅한 구석이었다. 지난번 일만 해도 그랬다. 물론
곳간의 열쇠꾸러미는 율촌댁이 지니고 있었지만, 살림을 가르칠 요량으로 논에
내갈 놉밥 양식을 효원에게 맡겨 보았다.
"네가 장차는 이 집안을 꾸려갈 사람 아니냐? 쌀 한 톨이라도 허비하지 말고 규
모 있게 살림을 해야 헌다. 아무리 바깥 어른이 천석꾼 만석꾼이라 해도 안에서
살림을 흘려 버리면 모조리 허사가 되고 마느리라. 집안 살림이 불어나고 줄어
드는 것은 오로지 안사람 손끝에 달린 것. 손끝이 곧 재산이라. 쓰러져가는 초가
삼간 누옥일지라도 안식구가 바지런하고 아껴 살면 훈김이 나는 법이요, 천하
없는 부호 갑부라도 손끝에서 살림이 새 나가면 빈 집이나 한가지다."
한평생 이 생각을 명념해라.
율촌댁은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면서 곳간을 열어 주었다. 그네의 마음속에
는 시험을 해 보자는 심산도 들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주에서 함지에 쌀을
퍼내는 바가지를 보고 놀란 사람은 율촌댁만이 아니라 안서방네도 마찬가지였
다.쌀에 보리와 콩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고, 듬뿍듬뿍 반찬거리를 담
아 내줄 때는 아예 율촌댁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날 논에서는 경사가 났다
고 할 만큼 양껏 포식들을 하고 나서 놉들이 신바람이 나, 평소보다 곱절이나
일을 많이 하였다.
"너, 무슨 심산으로 그렇게 양식을 퍼냈느냐? 그렇게도 대중을 못하겠더냐?그릇
수 따라서 알맞추어 양식 대중하기가 그렇게 어려워?"
율촌댁 음성에 모가 섰다. 효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앉아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래서야 어디 대궐 살림이라고 견디어 낼 재간이 있겠느냐? 허허어. 네가 시
에미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구나. 한 끼니 놉밥이 세 끼니 모가치가 넘는 것
이 어디서 배운 요량이란 말이냐? 그렇게 네가 표시내지 않어도 천석꾼 만석꾼
대갓집 따님인 것은 내 알지만, 가난헌 집으로 출가해 왔으면 이 집 가풍대로
다소곳이 따러야지, 참으로 괴이하고 알 수 없는 일이로다. 인심을 얻을 데가 따
로 있지 놉들한테 인심얻어 무슨 일을 꾀아겠다는 것이냐? 누구는 칭송을 들
을 줄 몰라서 쌀 한 톨을 애끼는 줄 알았더냐?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효원이 고개를 수그린 채 가만 있자 율촌댁은 할 말을 한꺼번에 다하겠다는 듯
이 다긋쳤다.
"우리집은 그런 집 아니다. 수챗구멍에 밥티가 허옇게 쏟아지고, 돼지 구정물토
에도 쌀밥 붓는 집이 아니야. 친정에서 그렇게 배웠거든 여기서는 그 버릇 고쳐
라. 놉한테 퍼 주고 하인, 머슴, 계집종 멕이자고 농사짓는 거 아니다."
그제서야 효원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눈은 아래를 보고 있었다. 어른
앞에서 눈을 똑바로 뜨지 않는다는 공손한 예의로 다소곳이 내리뜨는 것이었는
지 모르겠으나, 효원의 꼿꼿한 고개와 곧추세운 허리로 보아 오히려 그렇게 내
리뜬 눈이 율촌댁으로서는 불손하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2권 (13) (0) | 2024.01.10 |
---|---|
혼불 2권 (12) (0) | 2024.01.09 |
혼불 2권 (10) (0) | 2024.01.07 |
혼불 2권 (9) (0) | 2024.01.06 |
혼불 2권 (8) (0) | 2024.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