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지나친 것 하나도 없다. 네가 무얼 잘했다고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게야? 지
금"
"어른 말씀에 대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한 일로 친정 부모한테 욕이 돌아
가니 민망하여 그렇습니다."
"민망? 민망할 일을 왜 해?"
"어머님. 놉이 누군가요? 놉은 남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집 농사를 지어 주는
우리 손이요, 우리 발 아닌가요? 놉을 남이라고 생각하면 놉도 우리를 남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일에 제 몸을 부릴 때 누가 성심을 다 허겠어요. 눈치보고 꾀
부리고 한눈 파는 게 당연하지요. 우리가 놉한테 주는 밥그릇을 애끼면, 놉도 우
리한테 주는 힘을 애끼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 아닌가요? 아무리 종리라도
신분이 낮아 천한 대접을 받을 뿐, 사지에 오장육부는 똑같이 타고났고, 그 속에
마음이 있는 것은 양반이나 무에 다르겠습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야 몸이 움직여
지는 법인데, 배를 곯리고 마음을 상하게 한 뒤에 무슨 정성을 바랄 수 있을까
요? 많이 먹고 즐거워서 힘이 나면 결국은 내 집 일을 그만큼 흥겹게 할 터이
니, 한 그릇의 밥을 더 주고 한 섬지기 쌀을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낄 것
이 따로 있지 밥심으로 일하는 일꾼들한테다 몇 숟가락 밥을 아낀다고, 그것이
쌓여 노적가리가 되어 주겠습니까......"
눈을 내리뜨고 침착하게, 낯색 하나도 변하지 않고 말하는 효원의 모습에, 율촌
댁은 가슴이 벌벌 떨려 턱이 다 흔들렸다. 앉은 채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만 자리를 차고 일어나 버리고 싶은 것을 율촌댁은 기어
이 참는다. 내 이날까지 어머님께 눌리어 산 것도 어느 순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거는 이제는 며느리 시집까지 살아야 한다니, 무슨 놈의 한세상이 돌아가
며 시어머니뿐이냐. 아니 저런, 저 눈꼬리 저 입귀퉁이 좀 보아라. 저것을 ......저
것을 어쩔꼬. 말로 해서 다스리기는 이미 틀렸다. 제가 감히 누구 앞이라고 또박
또박 끊어 가며 말대답을 한단 말인가. 무어? 놉이 누군가요오" 놉이 놉이지 누
구란 말이냐. 타고날 때부터 그런데 무엇이라고? 오장육부는 다 똑같으니 무엇
이 어쩐다고? 어히구우. 율촌댁은 드디어 한숨을 터뜨렸다.
"너 아주 말 잘허는구나. 그렇게도 소견이 훤허고 뜻이 분명하다면 삼정승 육판
서도 돌아가며 허겄다. 터진 입이라고 아무 앞에서나 앞뒤가릴 것도 없이 말을
잘해. 그래서, 네가 지금 이 시에미를 가르칠 작정이냐? 훈장 노릇을 해 보기로
마음에 아주 작정을 세웠어?"
그네가 무릎 위에 얹고 있는 주먹이 저도 모르게 안으로 오그라지면서 푸르르
떨린다. 효원은 그런 율촌댁의 서슬에도, 앉은 자세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방바
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네는 할 말을 했다는 듯 조금도 당황하지는 기색이 없
다.
"옛말 그른 데 하나도 없구나. 하나도 없어. 개같이 버는 놈 따로 있고 정승같이
쓰는 놈 따로 있다더니, 바로 이 집안에서 그 꼴이 날 줄이야 누가 알았든고. 이
날 이때것 싸래기 한 토막이라도 쪼개서 애껴 먹은 사람 따로 있지 않은가. 도
대체 이것이 무슨 징조란 말인가."
율촌댁은 좀처럼 심사를 가리지 못한다. 효원은 요지부동하고 앉아 있으니 그네
의 끓어오르는 심정은 더더욱 다스리기가 어려워진다. 그런데도 효원은 그런 율
촌댁에게 무슨 변명조차도 하지 않는다.
"말을 해 보아, 말을. 찍소같이 그렇게 버티고 앉아 있지만 말고. 네가 아직도 잘
했다고 생각허는 것이냐?"
그제서야 효원이 고개를 든다. 물론 감히 똑바로 시어머니를 바라보는 것도 아
니요, 목소리 또한 불손하지 않았다.
"어머님.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는 큰일이든 작은일이든 자기 속에 심중을 가지
고 할 것입니다. 심중을 가지고 한 일이라면, 남이 무어라고 한다 해서 쉽사리
부화뇌동, 주견도 없이 남의 의견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아예 처음부
터 하지 않음만 못합니다. 이번 제가 한 일이 설령 어머님 보시기에 잘못 되었
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평소에 제 생각이 그랬던 것이라 아직은 잘못이라고 깨
닫지 못하겠습니다. 속으로는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만 용서를 빈
다는 것은 오히려 어른께 욕되는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속으로는 비웃으
면서 겉으로만 아부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니,어른을 능멸하는 일입니다.
그저 앉은 자리만 모면하자는 얕은 잔꾀로 어머님께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드리
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효원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율촌댁의 주먹은 방바닥으로 내려앉았고, 그 주먹으
로 효원을 후려치고 싶은 것을 억누르는 율촌댁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강모가 불쌍하다. 강모가 불쌍해. 그렇게도 여리고 순한 사람이 어쩌자고 너같
이 대찬 사람을 만났을꼬. 여자란 그저 위아래로 순탄해야 집안이 화목한 법이
거늘, 꼬챙이 같은 그 성정으로 어떻게 남편의 마음을 잡는단 말이냐. 어히구우,
가련한 인생이로다."
율촌댁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허공을 향하여 혼자말처럼 탄식한다. 이번에는
효원의 얼굴이 벌겋게 된다.
"너 그래 가지고 평생 공방 면허기 어려울 것이다."
드디어 율촌댁은 그 한 마디를 뱉는다. 마치 벼르고 별러 오기나 한 것처럼. 그
러더니 바람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미닫이를 거칠게 열어붙이고 대청으로 나
가 버린다. 효원은 앉은 자리에서 움쩍도 하지 않고 바람벽을 쏘아본다. 그네의
뒷등에서 쩌엉, 소리라도 날 것 같다. 그날 밤 율촌댁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소상
히 전해들은 이기채는
"못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더니 집구석 되어가는 꼴 허고는. 참 잘헌다 잘
해....... 시애비도 아껴 먹는 곡식을 그렇게 함지로 퍼다가 놉이나 멕이고. 공덕비
를 세워 주겄그만."
하고는 죄없는 놋재떨이만을 두드리며, 불편한 속을 어떻게도 다스리지 못하였
다.
"무엇 하나 변변한 것이 있어야지. 한 톨 양식이라도 보태기는 커녕, 도리어 물
퍼내듯이 퍼내기는."
"그저 대만 세어 가지고, 어디 보드랍에 스미는 구석이라고는 눈씻고 봐도 없으
니 강모가 그렇게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바깥에서 떠돌 수밖에요......."
"허허어, 이거 집안 어찌 되려고 이 지경인가. 온 식구 권속들이 손발같이 한 속
으로 정신을 채려도 눈만 뜨면 도척이가 천지에 시글거리는 이 마당에, 이건 식
구마다 각동 삼동으로 흩어져서 제멋대로 논다니.......어머니 쾌차하시기는 바랄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었는데. 여기다가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기나 하면 대체 이
집안은 무엇이 될꼬."
이기채의 일그러진 얼굴은 마치 덮쳐 오는 불안과 씨름을 하는 사람처럼 어둡고
침울하였다.
"무엇이든 어머님 혼자서 다 해오셨으니까 이렇게 어머님 한 분 실섭하시자, 아
무 일도, 아무도, 어떻게 손을 못대 보는 게지요."
"이게 어디 어머니 탓으로 그런가? 그 어른은 또 왜 들먹이는 거요?"
"그전에도 그런 말 있답디다. 큰 나무 그늘에서는 풀 뿌리도 다리를 못 뻗는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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