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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13)

카지모도 2024. 1. 10.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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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촌댁은 이기채와는 다른 심정으로 말꼬리를 꼬았다. 그네는 아무래도 아까 효

원에게 당한 일을 가라앉히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것은 당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수모였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어머님이 나를 허수롭게 알으시니 이제 겨우 귀때기에 솜털도 안 벗어

진 것까지 제 시에미를 짚신짝같이 아는 거 아니겠소......?"

"이건 또 무슨 봉창 뚫는 소린고? 아니 지금 새삼스럽게 시집살이 하소연을 허

자는 게요, 무어요."

이기채가 역정을 내자, 모처럼 만에 남편 앞에서 속에 응어리졌던 말을 털어놓

으려던 율촌댁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저 오나 가나 나는......) 그네는 웬일인

지 전에 없이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기채는 이기채대로 여편네의 소

가지란 어쩔 수가 없구나 싶어 쓴 입맛을 다신다. 이기채는 온 밤을 앉아서 새

우다시피 하였다. 날이 밝으면 부르지 않아도 기표가 올라오겠지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사람을 보내서 부르고 싶었다. 그만큼 초조하고 불안했다. 무슨 소리

라도 내지 않으면 이 어둠의 무게에 짓눌리어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본디

그는 성품이 느긋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놋재떨이를 새되게 두드르면

두드릴수록, 깊은 밤은 깜짝깜짝 놀라면서 뒷걸음질을 쳐 더욱 깊어지기만 할

뿐, 좀처럼 날은 밝아 주지 않았다. 결국 닭이 첫홰를 치고 나서 숨 몇 모금 마

실 여유도 참지 못하고 그는 붙들이를 내려 보냈다. 기표는 바로 올라왔다.

"안색이 아주 안 좋으십니다."

"안색이나마나."

기표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는 묻지 않으면서도 이기채의 의

중을 환히 들여다보듯 알고 있다. 이기채는 그래서 마음이 놓인다. 일일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쪽 생각을 전할 수 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리오.

"형님. 강모한테 직접 말씀허시기가 난처하면 제가 변죽을 울리지요. 마침 강모

도 이따 전주서 온다고 했다니까 말하기 좋겠습니다."

기표의 말에 이기채는 말끝을 잘라 대답했다.

"그래?"

"이젠 저희들도 내외지간에 흉허물 없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은 어차

피 집안일이니까 질부도 한 속이 되어야 할 것이고요. 시집간 딸은, 친정의 명당

도 훔쳐 온다는데."

"알아서 해 봐."

이기채는 쫓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놈이 이런 일을 경우지게 해낼 수 있을까?

웬만한 자각만 있다 하더라도 이만한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련만. 제가 무슨 집

안일에 뜻이 있으랴. 강단도 없고 무슨 계획도 각오도 없는 자식놈. 아들이 둘만

되었으면 내 심사가 이러지는 않을 것인데......정신이 공중에 떠서 도무지 실속이

라고는 없는 저 허수아비 같은 놈을, 그래도 자식이라고 믿고......도대체 이 집안

이 어찌 되려고......난데없이 앵금을 치켜들고 풍각쟁이가 된다고를 하지 않는다,

동경으로 가겠다고를 않는가......제놈이 어떤 종손이라고, 제 몸 알기를 길가의

돌멩이처럼 천하게 굴리다니......강모가 실하다면 내 심정이 이 지경이 되랴.) 이

기채는 그만 속이 메슥거리면서 휘잉하니 어지럼증이 돌았다. 그것은 이기채에

게 이제는 고질이 되어 버린 병이었다. 워낙 위가 실하지 못하여 삼시를 죽으로

살아온 그였지만 창씨의 일이 있은 뒤 그의 심신은 몰라보게 쇠삭하여, 눈을 감

고 누워 있으면 의식을 놓아 버리다시피 한 청암부인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머리도 허옇게 세어 버리고 수염도 누르께한 빛으로 바래어, 일어나 앉아

있는 모습조차도 종잇장처럼 얇아 보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신경은 파랗게

긴장되어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한 가지 일에 골몰하는 것이었다. (위태하다.) 이

생각은 한시도 이기채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위태하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서서 방안을 서성거리거나 연신 마른 기침을 했다. 아랫사람들

도 사랑 근처에서는 발걸음을 조심하여 더욱 숨죽였다. 이기채가 그러하니 자연

집안 사람들은 물론이고 대소가에서도 마음이 어지러워, 모여앉기만 하면 낮은

소리로 술렁거렸다. 바둑판같이 네모 반듯하던 판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

은 창씨의 일이 있은 후, 지난 대서를 고비로 끝내 청암부인이 자리에서 못 일

어나고 만 뒤, 급작이 더하여진 증세였다. (위태하다.......) 그날 아침 안서방이 사

랑에 와서 더듬더듬 청암부인의 실섭을 천할 때 이기채는 뒷머리를 번개처럼 후

려치는 이 생각에 아찔하였다. 그리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길, 낭떠러지를 향하

여 치닫고 있는 어떤 운명을 절감하였다. 그것은 청암부인의 임종에 대한 예감

이었다. 그와 더불어 이 집안과 자신에 대한 소름 같은 예감이기도 하였다.

드디어.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일이 이다지도 순식간에 닥쳐 오다니. 이기채는 오

한이 났다. 그리고 그 오한을 감추려고 짐짓 심상한 체 꾸미었으나, 청암부인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암부인의 와병 소식은 그날로 거멍굴에

까지 번져갔다. 그리고 전주에 있는 강모에게도 다녀가라는 전보가 날아갔다. 바

이올린 일이 있고 나서, 다시는 매안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강모가, 급한 연

락을 받고 단걸음에 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데. 기표는 미리 안서방한

테 귀띔을 해 두었다가 강모를 수천 댁으로 불러서, 이기채와 논의하였던 일을

말한 것이다. 본디 강모는 수천 숙부 기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까닭 없이

어색하고 마음에 경계심을 품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표는 이야기

를 하다가 도중에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의 눈 속을 지그시 들여다볼 때가 있

었다. 그것은 어쩌다 한번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말이 고비에 이르거나

꼭 관철시키고 싶은 확신이 전신에 팽팽하게 차 오를 때, 마치 상대방의 속셈을

한눈에 캐내려고 하는 것도 같고, 자기의 계획을 상대방에게 심지 박으려고 하

는 것도 같은 지긋함이었다. 지긋함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눈빛은 오히려 바늘

끝같이 예리하여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런 눈빛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눈까풀로 눈동자를 가리는 형국이라는 편이 옳았다. 계산과 집념. 강모는

기표의 그런 눈빛에서 자갈의 차가운 번뜩임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파

충의 비늘이 자신의 살갗에 밀착하여 휘감기는 섬뜩한 감촉을 어쩌지 못하였다.

허나 강모는 누구에게라도 허심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내색을 하지 않은 채 그

저 기표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

"대실 질부한테는 네가 눈치껏 운을 띄워 봐라. 할머님 저렇게 실섭하여 누워 계

신데 핑계야 얼마든지 댈 수 있지 않으냐? 약차 하시라는 친정의 성의라고 해도

좋고 다른 무슨 구실이라도 좋겠지. 그 질부가 남달리 명민하다면 이런 일쯤은

본인이 먼저 나서서 일을 추진하련만, 그 사람 마음이 곰살가운 데가 없어 무뚝

뚝하기가 쇠망치 같은 성품이 아닌가. 기왕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대대로 내

려오던 성씨마저 잃어 버린 마당인데, 무엇으로든지 집안의 기둥을 탄탄하게 붙

들어 매야 할 것이 아니냐."

말을 하고 있는 기표와 말을 듣고 있는 강모는 서로 시선이 빗겨 있었다. 물론

그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의례적인 인사말고는

할 말이 별로 없었던 강모로서는, 이런 자리의 이런 이야기가 더욱이나 귀에 들

어올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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