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잘 알다시피, 이씨 문중 대종가가 그리 평탄한 명맥을 이어온 거 아니지
않느냐. 까딱하다가는 다시 풍비박산 되고 말 것이야. 네 아버님의 심기를 편안
케 해 드리고, 실섭하신 할머님께도 위안을 드릴 수 있는 길이라면 오직, 가산이
느는 일이니라. 언뜻 생각한다면 선비의 집안에 비럭질 같은 해괴한 일이라고
비난하겠지마는 세상 일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우
왕좌왕 혼란에 혼돈이 겹쳐 있는 판국이야. 이럴 때일수록 민첩해야 헌다. 수단
을 다하여 좋은 결과를 이루어야지. 너도 나이 한두 살이 아니다. 이 집안을 이
끌어 갈 종손 된 입장으로 그만한 안목쯤은 네게도 있을 것인즉, 내 말을 허수
로이 듣지 마라. 내가 내 임의로 이 말을 너한테 허는 것이 아니라 집안 어른들
의 뜻이고, 너로서도 집안을 돕는 일이 된다. 결국 누구를 위해서 이런 일을 획
책하는 것인고. 따지고 보면 너를 위하는 것이고, 집안을 위한 것이고, 문중의
번성을 위한 것이니라."
기표는 조근조근 말을 해 나갔다. 그러나 막상 기표의 말을 들은 강모는 다만
난감하고도 어이없는 낯색으로 일언반구 아무런 대꾸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 아버님께 문안 여쭐 때 달리 묻지 않으시더라도 네가 자세히 말씀
여쭈어라. 대실 질부가 어찌 하겠다고 허는지를 말이다."
강모는 기표가 오금을 박는 말에 일종의 표기와 체념 같은 것이 어둡게 얽히는
얼굴로
"말을 해 보지요."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버리고 말았다. 그런 강모의 뒷등에 대고
"단단히 일러 두어야 헐 것이다. 적당히 네 생각대로 얼버무려서 말씀드렸다가는
아버님 노여움만 사고 말 게야. 말이 서로 앞뒤가 다르다가 실없이 되면 안된다.
그랬다가 공연히 집안 분란 일으키지 말고. 지난번 일도 있고 하니, 각별히 유념
해라."
기표는 다시 한번 단서를 붙였다. 지난번 일이란 바이올린 사건을 말하는 것이
다. 강모의 표정이 구겨진다. 굳이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강모는 자신을 가누어
견디기가 어려운 데다가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을 뿐더러, 무슨 절실한 문제
로 느껴지지도 않는 일이 짐덩어리처럼 자기를 짓누르는 것이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을 비릿하게 한 것은 비루하다는 느
낌이었다. (무엇이라고 발라붙여도 이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더러운 비럭질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것인가? 아무리 할머니께서 실섭을 하셨다고 그 어른 눈앞
에서 당장에 이렇도록 비천해질 수 있을까. 있는 위에 더 있게 하여 기왕에 있
던 것을 더 공고하게 다지고자 하는 것은, 없어서 기진맥진 위태로운 지경을 면
하고자 무엇을 원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 이것은 오직 욕심이다. 탐욕, 그것
도 남의 것을 빌어서 내 것을 채우고자 하는. 아아, 참으로 역겨운 일이로다.) 그
런데도 그는 그런 말을 끝내 입밖에 내지 못하고 말았다. 또한 강모는 어떤 일
에 부닥쳤을 때 그것을 간추리는 힘이나 강단, 혹은 맞서서 싸우는 담력, 아니면
그런 것들이 아닐지라도 질기고 뻔뻔한 당위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한없이 무기력한 사람... 나는 왜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을까. 그저 나는 키우
는 대로 자라났다. 그리고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나는 없다.) 그는 고
개를 떨구었다. (살아 보기도 전에 왜 나는 이다지도 미리 지치는 것일까...) 그
의 가슴에는 무엇이라고 집어 내어 말하기 어려운 허무가 안개처럼 자욱하였다.
그리고 엷은 얼음 조작이 녹아 스러지듯, 심정 한 구석이 그 허무의 안개에 잠
식당하면서 스러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자리의 살도 뼈도 그렇게 스러져 강
모는 빈 가슴을 지탱할 길이 없었다. 그는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종잇장처럼 하
얗게 말리며 이글거리고 있는 마른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 자신도 내리쬐는 뙤
약볕에 그대로 말리어 버릴 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굴레를 쓰고 태어난
것을 어찌하랴. 나는 나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무서운 집념의 조직 속에 한
수단으로 세상에 난 것을.) 강모는 대낮의 폭양에 희부연 회색으로 빛이 바래 버
린 골기와 지붕을 올려다본다. 암키와 수키와가 이를 맞물고 골을 만들어 빈틈
없이 엉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현기증이 나고 어지러웠다. 울컥 토할 듯
한 어지러움이었다. 기왓장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질서정연하게 행렬을 짓고 자
리를 지키면서, 몇 십 년 몇 백 년을 두고 그렇게 그물코처럼 얽혀 짜여져있다
는 것을, 그는 처음으로 본 것 같았다. (그물. 저 그물에 걸려 꼼짝없이 나포되어
버린 불쌍한 사람. 내가 저 치밀한 그물코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속
절없는 몸부림을 뿐이다. 날마다 저 그물을 머리에 쓰고, 자고, 깨고, 먹고... 저
속에서 숨진다.) 강모는 하늘로 머리를 치켜 올린 용마루의 탐욕스러운 대가리를
본다. 거대한 검은 몸뚱이를 서리 틀고 앉은 채로 그것은 목에 힘줄을 돋우고
줄기차게 무엇인가를 탐식하려 하고 있다. 그 용마루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허망할 만큼 텅 빈 하늘이 무심하고 아득하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몇
조각의 구름이 아무 뜻없이 떠서 모였다 흩어졌다 하였다. (차리리 내 저 하늘을
떠도는 바람 같은 구름이나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리.) 방랑과 자유. 그 말은
사무친 음향으로 강모의 가슴에 울려 왔다. 그것은 어쩌면 신음 소리와도 같았
다. 아니면 반란의 음모처럼 숨막히게 그리고 음험하게 숙덕이는 것도 같았다.
강모는 유유한 구름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그의 커다란 눈에 구름은 그림자
를 드리우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불안은, 강모의 내부에서 두꺼운 각질을 뚫
고 터져 나오는 욕망이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만큼, 질기고 끈끈하게 내리누르는
어떤 힘과 부딪치면서 뒤흔들리는 파문이었다. 강모는 그 불안을 지그시 참기라
도 하는 것처럼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의 한복판에 깨진 거울 조각
같이 날카로운 태양이 메마른 빛을 내뿜고,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한
조각의 구름은 망설이며 유유히 부드럽게 나훌나훌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든지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다. 이 질긴 그물의 코를 물어 뜯고, 저 한 조각의 구름처
럼 나는 방랑하고 싶다.) 강모는 홀린 듯이 구름을 바라보았다. 구름은 그 어떤
그물로도 잡을 수 없는 흰 바람이었다. 으아아앙. 넋을 놓고 서 있는 강모의 귀
에 난폭하고도 순간적인, 숨이 깔딱 넘어가는 어린아이의 울음 소리가 터지는
것이 들려왔다. 중문간에서 나는 소리였다. 강태의 아들 희재다. 다섯 살인 희재
는 세 살바기 제 동생 영재와 큰집 중문간의 그늘에서 놀고 있었던 것이다. 희
재는 두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버둥개질을 하며, 엉거주춤 서 있는 붙들이에게
정신없이 흙을 내뿌린다. 붙들이는 지고 있던 물지게를 벗어 내려놓더니 당황하
여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럴수록 희재의 울음 소리는 앙칼지게 찢어지고 붙들이
는 울상이 된다.
"이께잇 거 흙인디 멋 땀새 그렇게 우요? 내가 아까맹이로 새로 맹글어 주면 되
잖어요오, 예에?"
"으아아앙. 죽어. 너 죽어."
붙들이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다. 희재 앞에 쭈그리고 앉은 담살이 새끼머
슴 붙들이의 면상에다가 희재는 홱 홱 흙을 뿌린다. 물지게를 지고 오느라고 땀
투성이가 된 붙들이의 얼굴은 황토흙을 함빡 뒤집어 써서 호물호물한 늙은이처
럼 보였다. 아직 중머슴이 되지 못하고 물을 지어 나르는 물담살이 노릇을 하는
그는 열네 살이 되었건만 몸집이 작고, 무엇이 시원치 않아 그런지 물외 꼭지
마른 것 모양으로 힘이 없이 시들어져 보이는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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