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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21)

카지모도 2024. 1. 18.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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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날이 무덥기는. 강실아, 너 그거 멀었냐?"

"아니요."

"거진 다 했어?"

"예."

"그러면 개켜서 밟어 놓고 나랑 같이 나서자."

강실이는 풀 먹인 빨랫감이 엉성하게 일어서는 것을 다듬고만 있을 뿐, 어디를

함께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까 밖에서 어머니와 수천 숙모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무슨 일에나 먼저 나서서 말하지 않는 성품 탓이기

도 했다. 푸우우. 대답 대신 사기대접의 물을 한 모금 머금은 그네는 옷가지 위

에 안개처럼 그 물을 뿜어냈다. 오류골댁도, 숨이 죽은 빨랫감을 차곡차곡 접으

며 옆에서 거들었다.

"지푸라기를 엮어서 사모관대 시키고 녹의홍상 입힌다고 그게 참말로 무슨 혼인

이 될까마는, 그리도 죽은 혼신 골수에 맺힌 한도 풀어 주고, 산 사람 가슴에 박

힌 못도 뽑아 주고 한다면 오죽이나 좋겄냐. 이런 일이 아주 헛짓은 아니거든.

강수 신부 될 규수도 원통허게 죽은 혼신이라드라. 당골네 말로는 살아 생전에

도 아주 깨깟허게 살다가 비명에 갔다드구만... 어쩌다가들 그렇게 제 명을 다

못 살고 횡사를 했는지. 그나저나 이제라도 서로 연분이 맞어서 짝을 짓게 되었

으니 혼신이라도 잘된 일이기는 잘된 일이지. 이런 일도 다 인력으로는 못하는

일. 무슨 인연이라도 있으니 되는 것이지."

푸우우. 강실이가 다시 물을 뿜어냈다. 그것은 마치 응어리진 한숨을 토해 내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 나무대륜보

살마하살 나무관자재보살마하살 나무정취보살마하살 나무수월보살마하살 나무군

다리보살마하살 나무십일면보살마하살 나무제대보살마하살 나무본사아미타아부울

시어미가 하던 일을 물려받은 세습무 당골네 백단이는 다른 것은 몰라도 목소리

하나는 타고났다. 신들린 무당이 아니라 배운 점이라고, 그 영험에 대해서는 그

다지 신통하제 여기지 않았으나, 낭랑하고 서러운 그네의 독경이며 사설만큼은

과연 구천의 혼백이라도 눈물짓게 할 만했다. 당골네의 천수경이 물 소리처럼

넘쳐난다. 마흔 개의 팔이 있다는 천수관음, 그 팔 하나마다 스물다섯 가지의 힘

을 가지고 있어서 결국 손이 천 개나 된다는 천수관음, 자비롭기도 하시다. 천

가지 손으로 이 가련한 중생의 천만 근심을 어루만져 없애주신다는 보살, 그 공

덕의 광대함을 말로 다할 수 있으랴.

"관세음보살."

오류골댁은 토방에서 내려서며 속으로 뇌인다. 그렇다고 그네에게 무슨 남다른

불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그네는 무엇을 보나 마음에 정성스러운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다. 일.월.성.신, 어느 하나도 경외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들

의 존재는 곧 천지신명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조화로 인하여 내리는 비를 일컬

을 때도 "비 온다." 고 하지 못하고 "비 오신다." 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은

농사꾼의 아낙인 자신을 새삼스럽게 일깨워 주는 말이기도 했다. 때 맞추어 내

려 주는 비야말로 땅의 양식이요 거름이며 보약이었다. 그러나 자칫 때가 엇갈

린 채 사나움을 부린다면 한 해의 농사는 망치게 된다. 거기다 바람이나 거세게

일어 보라.

"내가 무슨 남 못할 짓을 했을까. 하늘이 알고 혹시 노여우신 것은 아닌가."

오류골댁은 먼저 그런 마음이 덜컥 들곤 하였다. 보리쌀 한 톨도 함부로 하지

않은 그네는 곡식에 대해서도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죄 받는다. 수채에 밥티 빠지지 않게 해라."

자연 그네의 밥그릇은 따로 씻을 것도 없을 만큼 말갛게 비워졌다. 그것은 그네

를 본받는 강실이도 마찬가지였고 기응 또한 그랬다. 심지어는 강실이가 막 부

엌일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나이에, "염라대왕이 수챗구멍에 웅크리고 있다." 고

오류골댁이 이야기를 해 준 일이 있었다. 누구든지 밥티를 버리는 사람을 잡아

가려고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는 강실이는 무서워서 그릇 씻은 옹배기의 기명물

도 제대로 버리지 못하고 했었다. 오류골댁은, 절사와 기제사에 메(밥)와 갱(국)

을 올릴 때도, 무.숙주 나물을 올릴 때도, 마치 거기 어려운 조상이 앉아 계시기

나 한 것처럼 깨끗하고 정갈하게 진설하였다. 그러면서 언제나 이른 새벽 눈을

뜨자마자 새암의 첫물을 길어 정화수를 부뚜막 한가운데 조앙에 조심스럽게 올

렸다. 그리고 사립문간에서 탁발의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에게는 종지 쌀이나마

꼭 보시를 하였다. "관세음보살." 그네는 삼라만상의 정령을 진심으로 믿었다. 강

실이가 방안의 불을 끄고 토방으로 내려선다. 불이 꺼지자 집안은 별안간에 먹

물 같은 어둠에 먹히듯 쏠리었다. 어디선가 생쑥 연기가 매캐하게 건너왔다. 모

깃불 연기에 밀려 날아온 반디가 꽁무니에 싸라기만한 불을 밝힌 채 지붕 너머

쪽으로 사라진다. 반딧불이 사라지는 여름 밤하늘은 북청이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쪽빛조차도 느껴지는 하늘의 복판에 은하수가 흐르고 있다.

"굿허기에는 좋은 날이다마는, 이제 그만 비가 좀 오셔야 할텐데잉. 그렇지야?"

오류골댁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침 유성 하나가 긴 꼬리를 그으며 오류골댁

초가지붕 귀퉁이로 진다. 별이 스러져 숨은 자리에 박꽃이 하얗게 피어나 있어

소담하게 보인다. 그 함초롬한 모양이 어쩌면 청승스럽기조차 하다. 흰 박꽃 때

문에 그런지 살구나무 둥치와 무너질 듯한 잎사귀의 무성함이 더욱 검은 것 같

다. 가뭄이라 제대로 물도 못 먹었을 나무가 그래도 뿌리 덕으로 저렇게 우거진

것이 신통하였다. "가자." 오류골댁은 강실이를 앞세우고 사립문을 나선다. 고샅

에도 생쑥 모깃불 연기가 자욱하다. 이런 가문 날에도 어디 개구리 먹을 물은

있었던지, 온 논바닥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볼멘 것처럼 왁왁거린다.

"큰집에 가서 눈 좀 붙이고 있거라. 내 동녘골댁 일 좀 봐 주고는 먼저 일어나서

중간에 나오께."

강실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러나 어둠 속에 선 오류댁골에게는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할머님 혹시 주무시거든 큰방에는 들르지 말고. 수선스러운데."

"예."

"그럼 나 갔다 오마."

오류골댁은 큰대문 앞에서 강실이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왼쪽으

로 꺾어 담을 끼고 간다. (딸자식은 애물이라, 키우는 공도 몇 배나 더 들고, 다

큰 다음에 지키는 공은 그보다 더 드니. 내가 전생에 죄 많아서 여자로 나고 그

것도 모자라 무엇을 더 갚을라고 또 저렇게 달랑 딸 하나만을 낳고 말았을꼬.

그저 자나께나 물만 먹을래도 가슴에 저것이 걸려서.) 오류골댁은 반공중에 솟아

있는 큰집 대문과 용마루 쪽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걸음을 재촉한다. 동녘골댁

에서 들려오는 당골네의 해원경이 귀 가깝다 강수는 지금 열아홉에 세상을 버리

고 떠난 뒤 일곱 해가 넘어서, 그 혼신이 사모관대를 입으려고 하는 것이다. 옥

같은 얼굴을 어디 두고, 헌헌장부 기둥 같은 두 다리를 어디에 두고, 한 발짜리

지푸라기로 엮은 허수아비의 몸을 빌어, 이 칠흑 같은 밤, 남 다 자는 삼경에 서

러운 걸음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일이 있기까지도 결코 쉽지는 않았었다.

문중의 잔일 궂은 일에 치성도 드리고 굿도 하는 당골네가, 몇 날 며칠을 일 삼

아 수소문하고, 그도 잘 안되어 달포가 지나고, 그러고도 한 해 겨울을 그냥 넘

기더니, 지난 초여름에야 겨우 강수와 맞는 한 규수의 혼신을 찾아냈던 것이다.

"별 넋 떨어진 소리를 다 듣겄네. 어느 나라 법으로 무슨 그런 해괴한 일을 한다

는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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