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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23)

카지모도 2024. 1. 20.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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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실아."

강실이는 떼던 걸음을 멈춘다. 그네와 강모의 사이를 무거운 정적이 절벽처럼

가로막는다. 그 정적은 모깃불의 연기와 만수향의 잦아드는 듯한 냄새인 것도

같았다. 아니면 캄캄한 밤 하늘을 가르며 흐르는 은하수의 물결이었는지도 모른

다. 그래서 강실이는 멀고 멀어 보였다. 손을 뻗쳐도 닿을 리 없고, 소리쳐 불러

도 들릴 리 없는 곳에 스러질 듯 그네는 서 있는 것이다. (아아, 내 너를 한 번

보기만 하였으면, 그러면 원이 없을 것만 같더니, 내가 부르는 소리가 너한테까

지 들리었더냐. 네가 어찌 알고 거기서 있는가. 이리 와, 강실아, 이리... 와...) 그

러나 강실이는 그 자리에 돌아서려다 만 모습으로 서 있을 뿐 아무말이 없다.

마치 몇 년 전 강모가 혼행으로 갔던 대실의 꿈 속에서 그러했듯이. 그때는 무

거운 햇살이 조청같이 눅진하여 한 걸음도 옮길 수 없게 하더니, 이제는 어둠이

무거워 손조차도 들 수가 없다. 그때 꿈 속에 보인 강실이는 머리에 자운영 화

관을 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얼마나 눈부신 것이었던가. 화관은 자욱한 햇무리로

도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 강실이는 머리 위에 흐르는 은하수를 이고 있다.

"집이 비어서요."

한참 만에야 그네는 밀어내듯이 말했다. 또 말이 끊긴다. 끊긴 말의 사이가 부풀

어 오른다. 그것은 부웅 팽창 하면서 저절로 두 사람을 밀어뜨려, 자칫, 낭떠러

지 이쪽과 저쪽으로 떨어지게 할 것처럼 느껴졌다. 강모는 순간, 놓치면 안되는

외줄기 나뭇가지를 휘어 잡으며 아찔한 몸의 중심을 지태하려는 것처럼

"동녘골 아짐네 우리도 구경 갈까?" 하고 말았다.

"조끔만 보고 와."

강실이는 대답이 없다.

살으은 썩어어 물이 되에고오 뼈느은 썩어야 흙이 되에니이 한심허어고 가아련

허다 근들 아니 원호온이인가아

당골네의 가락이 두 사람을 감는다. 괭굉 굉괭 굉굉 괘괭 괘앵

"텃밭으로 돌아 나가서, 담장 너머로 조끔만 들여다보고 와."

강실이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붙박인 듯 서 있다. 강모는 그네에

게로 한 걸음 다가서며 재촉한다. 그의 혀끝이 말라 있어 그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입 안에서 맴돈다. 집안은 교교하다. 아래채의 청암부인 방에도 불이 꺼

져 있고, 사랑채 이기채도 잠든 지 오래다. 안방 율촌댁도 아까부터 기척이 없

다. 다만 건넌방의 효원은 아직까지 희미한 등잔불을 밝혀 놓고 있으나, 그 불빛

은 중문 담벽에 가리워져 이쪽까지는 비추지 못하였다. 여치인가. 투명한 풀벌레

울음이 담밑 풀섶에서 째애애 째르르윽 들린다. 강모는 망설이는 강실이의 팔을

잡으며, 제가 먼저 후원 쪽으로 난 샛문으로 몸을 돌렸다. 강실이는 뒤로 한 걸

음 물러선다. 그 주춤하는 기척에 오히려 강모는 잡은 팔에 힘을 주어 당긴다.

텃밭을 지나 명아주 여뀌가 우거진 곳까지는 한 울타리 안이나 마찬가지였다.

크게 소리만 지르면 사람이 듣고 대답을 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강모는

이곳이, 어디 멀고 먼 곳처럼 여겨졌다. 한 번도 와본 일이 없는 것도 같았다.

더욱이나 아직도 잡고 있는 강실이의 팔과, 무너진 흙담으로 넘겨다 보이는 동

녘골댁의 마당이 그를 어지러이 흔들었다. 마당은 관솔불과 종이 등불로 휘황하

게 밝은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마루 끝에 앉아 있기도 하고, 두런두런 이야기

하며 당골네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기도 했다. 마당 한가운데 펼쳐진 멍석 위

에 초례청이 마련되어 있었다. 솔가지와 대나무 가지를 꽂아 놓은 흰 화병이 양

쪽에 세워진 것이며 그 가지들을 청실 홍실로 드리운 모양, 그리고 붉은 보자기

푸른 보자기에 암탉 장닭을 싸놓은 일들이 산 사람의 초례청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사람들이 가득 모여 앉은 것도. 다만 교배상의 이쪽 저쪽에 서 있는 사

람은 살아 있는 신랑과 신부가 아니라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허수아비라는 점만

이 다를 뿐이었다. 강모는 그것을 보는 순간, 울컥, 서러운 심정이 솟구치며 어

금니에 눈물이 돌았다. (저기 서 있는 저 형상이 바로 강수형 혼신이란 말이지...

아아,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한 육신에 혼신이 운감하면, 죽은 사람도 산사람같이

혼례도 치를 수가 있단 말이지...) 허수아비 신랑의 몸집은 어린아이만 했다. 그

저 한 발 길이나 될까. 두 팔을 내리고 선 그는 사모관대를 하고 검은 물 들인

태사혜 창호지 신발까지 신었다. 그리고 창호지를 입힌 허연 얼굴에 붓으로 그

리어 둥그렇게 뜬 두 눈이며, 꽃잎처럼 붉은 입술이 선연하고 섬뜩하다. 신부의

모습은 뒷등만 보인다. 그 뒷등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열아홉에 죽었

다면 내 나이인데, 혼신은 나이를 먹지 않는가.) 동녘골댁은 징을 두드리는 당골

네의 옆에 누런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앉아서 하염없이 울고만 있다.

"혼신이 오기는 왔당가?"

저것은 바로 담 밑에서 수군거리는 평순네 소리다.

"안 오면 어쩔 거이여? 아까 총노장수 불러대는 소리 못 들었능가?"

"그런디 총노장수가 무섭기는 무선갑제? 귀신도 꼼짝을 못허게."

옹구네는 평순네의 말에, 팔짱을 끼며 목소리를 낮춘다.

"떼쓰는 귀신, 굿허는 디 안 올라고 허는 귀신, 트집잡는 귀신, 헐 거 없이 말 안

듣는 귀신을 잡어딜이는 거이 총노장수 임무 아니여? 오늘 저녁으도 신랑 혼신

이 안 올라고오 안 올라고 버티능 것을 뽀도시 끄집어 왔당만 그리여. 암만해도

이 혼인, 귀신이라도 공방 들릴랑갑서. 억지로 허는 굿인디 무신 효험이 있으까

아?"

"아이고, 이노무 예펜네야. 입방정 떨지 말어. 부정 탈라고 왜 그렇게 방정맞게

쌧바닥을 놀린당가아."

"좌우지간에 이따가 동녘골댁 대 잡는 거 보먼 왔능가 안 왔능가 알거잉게, 어디

좀 두고 보드라고."

그것은 그럴지도 모른다. 신랑과 신부를 위한 신방에 새로 꾸민 아부자리까지

깔아 놓았지만, 참말로 허수아비들만 나란히 누워 있을 뿐, 혼신은 혼신대로 우

두커니 바람벽만 바라보며 돌아앉아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총노장수가 강수

의 혼신을 허공에서 잡아 왔다니 오기는 왔을 테지만, 그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강모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신랑 강수가 절하는 모양을 물끄

러미 바라본다. 신랑 강수의 허수아비는 동쪽에, 신부의 허수아비는 서쪽에 서

있다. 그들은 홀로 서지 못하고 부축을 받는다. 일렁이는 관솔 불빛이 창호지 바

른 허연 얼굴과 검은 점 찍은 두 눈 섬뜩하게 선연한 붉은 입술 위에서 그늘로

흔들린다.

"진과안진세에."

여느 혼인이라면 그럴 리가 있을까만, 죽은 이의 일이어서, 당골네가 말꼬리를

끌며 왼다. 곁에 서 있던 수천댁이 세수대야와 무명 수건을 받쳐 들고 멍석 위

로 올라선다. 그네가 신랑 쪽에 서자

"부과안우우부욱"

신부의 세수대야는 북쪽으로 하라는 당골네의 처참한 음령을 따라 오류골댁이

소리 없이 또 그렇게 세수대야와 무명 수건을 들고 신부 쪽에 선다.

"서부각세수식거언."

신랑과 신부의 허수아비들은 기우뚱 몸을 기울이며 세수하는 시늉을 하고, 무명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시늉도 한다. 그 하는 양이 지극하고 정성스럽다. 살아 있

는 사람들의 혼인과는 달라서 억울하고 원통한 설움에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절차만은 산 사람과 다름없이 갖추어, 신부 혼신 집에서는 현으로 저고리를 훈

으로는 치마를 챙기고, 신랑의 바지.저고리.버선에 대님까지 옥색으로 일습을 장

만하였으며, 신랑 신부 금침까지 장만해서 물목을 적어 보냈다. 그리고 시부모

예단이라고 동녘골댁 양주의 옷 한 벌씩도 곁들이었다. 그러나 이 옷을 빼고는

모두 다 태우기 좋게 홑겹으로 만들어, 그 헐렁한 무게가 받는 사람을 철렁하게

하였다. 이 기구한 혼인의 혼주인 사돈들은 처음 상면을 하는 순간 그만 와락

두 손을 부여잡고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통곡을 쏟고 말았다. 순서를 다 갖춘 전

안례가 진행되는 동안, 백단이는 일일이 신랑 신부 허수아비를 붙잡은 수모 오

류골댁과 대반 수천댁한테 낮은 소리로 몸짓을 가르쳐 주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순서로만 본다면야 누가 이것을 귀신들의 혼례라고 하겠는가. 범절을 다한

반가의 대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푸라기 혼신들의 허수아비 움직임.

허수아비. 강모는 소리를 삼키며 뇌었다. 살아서 교배례 행하며 육신이 마주서도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한 사람도 있으려니와, 죽어서 혼백으로 흩날린 넋이나마

한 자락 애오라지 맺어지고 싶은 사람도 세상에는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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