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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22)

카지모도 2024. 1. 19.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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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동녘골양반은, 죽은 강수의 넋을 달래고 혼인을 시키는 굿을 해 주자는

동녘골댁의 말에 불같이 화를 냈었다.

"미워도 자식이고 고와도 자식 아닌가요. 어떻게, 죽은 놈이라고 무심할 수가 있

단 말이요... 남이야 무어라고 하든 말든, 천금 같은 자식놈이 비명에 죽어서, 천

상으로도 구천으로도 못 가고 이리저리 배회하는 혼신을, 잘 달래서 제 길로 가

게 해 주는 것이 부모된 도리 아니겄소? 자다가도 일어나 앉어 생각허면 내 오

만 간장이 녹아 내리고, 억장이 무너져서 잠이 안 오는데..."

나뭇가지에 바람 소리만 지나가도 동녘골댁은 가슴이 시리었다. 가지에 우는 바

람의 회초리 같은 날카로운 소리는, 그대로 그네의 살을 후려치며 에이는 때문

이었다. 어쩌다가,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의 난만한 시절에 서리를 맞고 시들어

버린 서러운 자식의 혼백이, 그렇게 가지 끝에 걸린 채 곡을 하고 있는 것도 같

았다. (제 명을 못 다 살고 죽은 넋은, 저 살던 동네를 못 떠나고 허공에서 맴돈

다는데, 저 소리는 영락없는 강수 혼신이 우는 소리다.) 그네는 물 소리에도 놀

라 소스라치고, 잎사귀 떨어져 구르는 소리에도 간이 말라붙어 숨을 죽이는 것

이었다. 달이 밝은 겨울 밤에는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지었다. 귀가

떨어지게 매운 찬바람에 가슴을 오그린 채 툇마루에 앉아 언제까지 방안으로 들

어갈 줄을 모르기도 했다. (너는 죽어 얼어붙은 땅 속에 누웠는데, 에미란 것은

다순 아랫목 구들에 몸을 녹이다니, 이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고, 내

자식아, 강수야.) 그러던 동녘골댁이 한번은 드디어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을 하

고 말았다. 무심코 장롱 안을 치우던 그네가 강수의 옥색 대님 한 짝을 발견한

것이다. 강수 살아 생전에도, 가난한 살림이라 사철 옷가지조차 변변히 입히지

못했던 것을, 그나마 마지막으로 널 속에 보공을 하면서, 입던 것을 차곡차곡 덮

어 놓어 보냈었다. 그래서 집안에는 강수의 의복이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

었는데, 어찌 대님 한 짝이 다른 옷 속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밤이 깊도록 울음

을 그치지 못한 그네는, 꿈 속에서, 그 대님짝이 몸서리가 쳐지게 기다란 구렁이

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대가리를 쳐들고 그네에게로 달려들더니, 순식간

에 목을 휘감으며 서리를 틀었다. 끄으윽. 숨이 막힌 그네가, 아무리 두 손을 버

둥거리며 풀어 내려 해도 구렁이는 움쭉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동녘골댁

이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숨막히게 목을 죄는 것이었다. 결국, 컥

커억, 신음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잦아들어가는 그네를 깨운 것은 동녘골양반이

었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난 다음에도 그네는 목에 남은 찬 기운의 섬뜩함을 떨

쳐 버리지 못하고 오슬오슬 추워하더니 드디어 몸져 눕고 말았다. 사람들은, 강

수의 원혼이 어미에게 씌인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굿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동

녘골댁도 죽고 말리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마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네는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먹지도 못하고 잘 마

시지도 못했다. 결국 동녘골양반은, 쓰잘데없는 헛짓이라고 펄쩍 뛰던 일을 하기

로 결단을 내린 것이 오늘 밤의 명혼이었다. 사람마다 이승에 몸을 받아 태어날

적에 하늘이 정해준 천명이 있을 것인즉, 그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비명에 죽은

사람의 영혼은 그 뼈에 한 맺혀 쉽사리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낯설고 물설은

저승으로도 가볍게 가지 못하니,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 영혼을 위로하고 쓰다

듬어 달래어서 좋은 곳으로 보내고자 하는 것이 굿이었다. 귀신 중에서도 가장

원통한 귀신은 처녀와 총각인 채로 죽은 몽달귀신이었으니, 이는 객사하거나, 전

쟁터에서 살을 맞아 죽은 귀신, 혹은 물에 빠지고 불에 타 죽은 그 어느 귀신보

다도 처절하게 원한이 많아, 무서운 복수심으로 이승에 남은 사람들에게 붙어

괴롭힌다고들 하였다. 그것도 가족들을. 그래서 가족들은 이 가엾고도 무서운 원

혼을 위하여, 영혼의 배필을 찾아 성대히 혼례를 치러 주고 부부 인연을 맺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디 해로하고 저희들이 가야 할 것으로 함께 떠나,

가족들에게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으며, 나아가 복을 주어 집안이 태평해지기

를 바랐다. 참으로 혼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강수는 강수대로 기막힌 밤이 아닐

수 없었다. (살아서 뜻을 이룬 사람은 따로 있는데, 이제 그 육신은 죽어 흙이

되고, 넋은 남아 낯모를 처녀와 혼인을 하는구나. 기구한 일이다. 내가 그 넋이

라면 반가울 리 하나 없는 일이로다. 차라리 뼈에 저린 외로움으로 거리 충천을

헤매어 울망정 어찌 마음에도 없는 이와 혼인을 하리. 강수 형 망혼으로 보면,

살아 남은 인간의 일들이 야속 한심하게 여겨지리라.) 강모는 작은사랑의 토방으

로 내려와 마당에서 서성거린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 탓이었다. 아까참에 기

표가 바늘끝 같은 눈으로 쏘아보며 "네 안한테 말을 잘 이르거라." 했던, 그 말

이라는 것이 아직도 가슴에 얹혀 내려가지 않는 탓도 있었고, 초저녁부터 수런

거리던 동녘골댁의 일이 공연히 강모를 사로잡아 진정하기 어려운 탓도 있었다.

(바라보기도 어려운 사람, 태산 집채 모양으로 우뚝허니 솟아 나를 가로막는 사

람한테, 내가 무슨 말을 떼어? 그런 말 아니라도 내 지금까지 몇 마디 해 본일

없는데, 그것도 친정에 가서 전답문서 비럭질해 오라는 말을, 난 죽어도 못한다.

오늘 밤만 어떻게든지 새우고는, 내일 전주로 가 버리면 그만이지.) 그러나 저러

나, 어쩌자고 저 당골네는 저다지도 구슬픈 목소리로 경을 읽는 것일까. 소리는

눈물을 흥건히 머금고 있었다. 그것을 듣는 강모도 저절로 마음이 잦아들어 중

문간까지 걸어 나왔다. 하늘의 복판을 흐르던 은하수의 한쪽 자락이 아득하게

멀어 보인다. 고개를 젖혀 별의 무리를 올려다보고 있는 강모의 귀에 흙을 밟는

발소리가 들린다. 그저 흙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 가벼운 소리다. 온 집안에

대여섯 마리나 기르고 있는 개들이 나서서 짖지 않는 것을 보니 낯익은 사람인

가 보다. 그러나 누가 이런 밤 깊은 시간에 올라올 리가 있는가. 잘못 들은 것이

겠지. 강모는 한숨을 내쉰다. 바람도 없는 여름 밤, 매캐한 생쑥 모깃불 냄새에

섞여 동녘골댁에서 번져 오는 만수향내는, 마치 여기가 어디 저승의 기슭인가도

싶어지게 한다.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다. (가기 전에 강실이나 한 번 보고 갔으

면...) 그러나 강실이는 사립문 밖에도 잘 나서지 않는다. 먼 발치에서나마 그 모

습을 한 번 보면, 다음 번에는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래도 그때까지 안 보고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강실이가, 늘 살던 곳

에서 어디로도 가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일 것만 같았다. (오

밤중에 눈을 떠도, 너는 이상하게 가슴 밑바닥에서 고개를 든다. 웬일인가. 나는

잠을 자고 있었는데 너는 깨어 나를 보고 있는 것일까. 무슨 생손 아리듯이 새끼

손가락 끄트머리 손톱 밑에서도 네 이름이 앓고 있다.) 강모는 머리를 털어낸다.

(부질없는 일, 네가 연기나 안개가 아니고서야 이렇게도 자욱하게 나를 에워싸고

있으면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수가 있느냐.) 그런데, 들리는 듯 스치는 듯 하

던 발자국 소리가 강모의 곁에서 멈추어 섰다. "오라버니." 순간 강모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내려앉는 소리가 쿵, 자신의 귀에도 역력하게 들리었다. 내려앉

은 가슴에서 물레방아 소리가 세차게 울려 온다. 금방이라도 콸콸 쏟아질 것 같

은 피를, 핏줄이, 있는 힘을 다하여 가두고 있다. 그러더니 머리 속이 어지러워

진다. 강모는 차마 돌아서지도 못한 채 그대로 서 있기만 하였다. 강실이도 그냥

말없이 몇 발짝 저쪽에 그림자처럼 서 있다. 그러더니 이윽고 그네는 다시 걸음

을 떼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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