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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24)

카지모도 2024. 1. 21.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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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실아. 너 강수형 생각나?"

강모는 어두운 텃밭 담장을 짚고 허수아비를 내려다보는 채로 소리를 죽여 강실

이에게 묻는다. 그네는 고개를 끄덕인다. 퍼드득, 어둠 속에서 손가락만한 누에

나방 한 마리가 강실이의 머리를 차며 날아오른다. 강실이 오르르 어깨를 떤다.

나방이는 허물어진 담을 넘어 종이 등불 쪽으로 날아간다. 등불은 흰 종이술을

가닥가닥으로 늘어뜨리고 있다. 마치 연꼬리를 달고 있는 것도 같은 등불에 나

방이 부딪친다. 등이 소리 없이 흔들린다. 그 아래 신랑과 신부는 술을 마신다.

종이 바른 얼굴의 꽃잎 같은 입술을 기울여 한 모금 한 모금 술을 마시는 신랑

은 강모였다. 그리고 신부는 꽃무지게 에일 듯 아련하게 두른 강실이였다. 강실

이는 혼백보다 더 투명하고 선연하고 아득하였다. 강모는 어질어질 취한다. 풀숲

에서 날개를 비비며 청랑하게 우는 여치의 울음 소리가 발을 젖게 한다. 저 숲

속에서 우는 새는 두견이인가 쏙독새인가. 자기가 집을 짓지도 않고, 다른 새의

둥우리에다 알을 낳고는 품어 주지도 않는다는 두견이는, 한이 많아 그다지도

매정한 것일까. 제 속에 겨운 설움, 제 피에 맺힌 원한이 그렇게도 무거울진대

알은 무엇 하러 낳는단 말인가. 어미가 못다 푼 한을 대물려 받는 두견이 새끼

는 또 무슨 업고를 지고 났을까. 아니면 저것은 쏙독새일는지도 몰라. 눈 밝은

대낮은 다 두고 어두운 밤에만 움직이는 새. 온 산을 목쉬게 하는 젖은 울음 소

리. 저미어드는 저 소리. 아아, 시름 많은 새들의 서러운 울음. 강모는 응어리졌

던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누른다. 그러나, 눈물은 속으로 잦아들더니 손바

닥에 배어난다. 쥐고 있는 주먹이 축축해진다. 그것은 식은땀도 같다. 아까 어두

운 중문간에서 강실이와 마주쳤을 때부터 참아온 심정이 손바닥 안에 흥건하게

고인다.

"강실아."

강모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당골네의 독경 소리가 아득하게 먼 곳에서 물맴이를

돈다. 그 물맴이 저쪽 은하수의 물살이 소용돌이를 치며 거꾸러진다. 괭굉 괴굉

괭굉괭굉 괘굉괘앵. 핏속에서 징소리가 울린다. 징소리에 가슴이 빠개지는 것만

같다. 아아. 강모는 강실이의 어깨를 쓸어안고 무너진다. 마치 절벽 아래로 떨어

지듯이. 붉은 꽃이 핀 닭이장풀의 달개비 같은 꽃잎사귀, 밭두렁에 줄기를 뻗고

있는 참비름의 연두꽃, 습지에 눅눅하게 핀 자귀풀의 황색꽃, 난쟁이처럼 땅바닥

에 엎드린 채 피어오른 질경이의 흰 꽃과, 길가에 버려지듯 피어 있는 바랭이의

실가닥 같은 꽃줄기의 꽃잎들이, 단단하게 뭉쳐진 어둠의 돌멩이에 정수리를 맞

으며 소스라친다. 민들망초의 흰 꽃, 담자색 꽃이 새끼손톱만한 꽃모가지를 부러

뜨리며 쓰러진다. 가문 여름의 들판에서 하찮은 비노리풀, 갈퀴덩굴까지도 아우

성치며, 꽃대가 부러진다. 그리고 꽃잎이 찢어진다.

저기 앉어 좌정허신 조상들도, 운명이 그뿌운이라 가셔었으니, 뼈아프고 애달프

게 가셨는디, 어느 부모를 원마앙허며, 어느으 형제지가안 원마앙허며, 어느 동

기지가안 원망허리요오. 이왕지사아 가셨으니이, 설워헌들 무엇 허며, 통곡해도

소용없고 슬퍼헌들 소용없네. 이왕지사 가셨으니, 설워 말고 슬퍼 말고 참혹다

말으시고오, 원이 지면 원을 푸울고, 한이 지며언 한을 푸울고, 왕생극락하옵소

사. 왕새앵극락을 가실 적으, 차담 진상을 걸게 받고오, 염불 받어 품에 품고, 노

자 받어 손에다 들고, 왕새앵그윽락하옵소사. 왕생극락을 가실 적으, 화초밭을

귀경허고, 만사조화를 얻으시고 이승으 저승으 지은 죄가 홍로점설 재가 되야,

불티 날아 재가 날아나고, 시왕님전으 꽃이 피어, 호호탕탕으 도리 되야, 왕새앵

극락을 하옵소서아. 나무아미타아아불.

당골네의 서러운 소리굽이가 중간에 창자가 잘리듯 끊어지며, 동녘골댁의 곡성

이 터진다. 아마도 동녘골댁이 대를 잡고 있나 보다.

"니가 강수냐아?"

허물어진 토담을 넘어 눈물로 목멘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강실이의 귀에도

역력히 들린다.

"어머니이."

"아이고오, 니가 참말로 강수여어?"

"어머니이."

"어디 보자, 이놈아, 어떻게 왔어어? 어떻게 왔어... 이 무심한 놈아... 아이고오...

내 자식아... 이놈아..."

마당에서 곡성이 낭자하게 울려온다. 그 울음 소리가 물살처럼 토담을 무너뜨리

며 강모와 강실이를 뒤덮는다. 두 사람은 그대로 아찔하게 떠밀려 어디론가 까

마득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당골네가 무어라고 하는 소리에 섞인 오류골댁의 목

소리가 들린다.

"강수야, 나 알어보겄냐...?"

어머니. 강실이는 가슴 밑바닥이 찢어지는 통증에 오류골댁을 부른다. 이 담 하

나가 무슨 성벽같이 높고 높아서, 이제는 어머니와 다시는 만나지도 못할 것 같

은 절망이 금을 그어 놓고 있었다.

"아짐, 오류골 아짐 아니신가요."

강수의 혼신이 대답한다. 그 혼신은 동녘골댁의 몸에 실리어 있다. 동녘골댁은

강수의 목소리며 몸짓 손짓을 그대로 박은 듯이 시늉하는 것이다. 동녘골댁은

대를 잡고 있다.

"그래, 오늘 밤이 니 혼인허는 날인 것을 알고 왔지야?"

"예."

"그래애. 니 맘에는 어떠냐... 흡족하고 흐뭇허냐아?"

강수는 대답이 없다. 마당에는 긴장이 감돈다. 강수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신방

을 차릴 수가 없는 것이다. 설령 억지로 나란히 뉘어 놓아도 하릴없는 공방이

들고 마는 일이다.

"아짐, 정이라 하는 것도 사대육신 있었을 때 애달픈 것이지요. 이제는 이렇게,

살도 썩고 벼도 썩어 검은 물 검은 흙이 되었는데, 아직도 육신의 미망에서 못

벗어났다면 귀신이라도 어디 온전한 귀신이겠습니까. 바람 자락 혼백이야 무슨

싫고 좋은 것이 있겠어요... 그게 다 몸 가진 사람들의 헛된 꿈이지..."

"그러엄. 그렇고말고. 나가 잘 생각헌 것이다. 잘 생각했어, 강수야. 다 잊어 버려

라, 다 잊어 버려. 응?"

아마도 신랑과 신부는 신방으로 드는 모양이었다. 마당의 만수향내가 뭉글뭉글

담을 넘어오고, 들판의 꽃잎들이 진액을 뿜으며 별을 삼킨다. 꽃술에 내려 꽂힌

별들의 심지가 불꽃을 일으키며 숨막히는 화승처럼 터진다. 이윽고 귓전에서 울

던 풀섶의 여치 풀벌레의 울음 소리도 숨이 멎고 물살을 뒤채며 사납게 소용돌

이치던 은하수도 아득하다. 천지간에 이만한 고요와 적막이 어디에 숨어 있었을

까. 모든 것이 이렇게도 짧은 한순간에 조용해지다니. 발끝에서부터 써늘한 냉기

가 스며들어 강모는 몸을 일으켰다. 하마터면 그는 힘없이 쓰러질 뻔했다. 마치

살을 모조리 파 먹힌 게의 껍질처럼 헐거운 몸뚱이가 무슨 허물만 남은 듯 어지

러운 탓이엇다. 그 빈 속으로 쓰라림이 약물을 삼킨 것 같이 번진다. 그것은 이

상한 설움이었다. 살을 베인 자리에 멍울멍울 검붉은 피가 엉기며 흘러 나오는

것을 어쩌지도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을 때와도 같은 속수무책의 설움. 누가 나

를 다치게 하였을까. 강모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강실이 쪽을 차마 바라보지

못한다. 엄청난 두려움이 어깨를 짓누른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더욱 그를 짓누른

것은 허망함이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좋았을 것을.

허망이란 이다지도 무거운 것이었던가. 내가 무엇을 얻겠다고 이런 일을 하고

말았을까. 얻는 것이 바로 잃는 것임을 내 몰랐구나. 얻으려 안타까이 마음 두고

있을 때는 내 것이었던 것이, 온통 나를 가득 채우고 있던 그것이, 소유하는 그

순간에, 돌처럼 차디 차게 식어 버린 덩어리로 내 속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내

미처 몰랐었구나.) 강모는 웅크리고 앉은 채 두 손을 무릎에 깍지 끼고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아, 진실의 하찮음이여...) 그의 가슴팍을 파고 들어온

날카로운 톱니가 뼈에 부딪친다. 나무 막대기같이 마른 뼈마디에 박히는 톱날이

뼈를 켠다. 사람의 몸이란 동굴에 불과한가. 텅 빈 동굴의 천장을 울리는 톱 소

리에 소름이 돋는다. 머리를 털어내도 좀처럼 그 소리는 멎지 않는다.

하릴없고오 하릴없네에. 인간 백년을 다 살아도, 병든 날과 잠든 나알과, 걱정

근심을 다 제허며언, 단 삼십을 못 사아나니, 어제 오날 성튼 몽이 저녁나절 병

이 들어, 부르나니 어머니요, 찾는 것은 냉수로오다.

당골네의 목소리가 흥건한 눈물을 머금고 톱 소리를 적신다. 신랑과 신부의 원

혼들은 신방에 들었는가. 청홍의 이부자리 속에 지푸라기 몸을 누이고 오색 등

불 현란한 마당의 곡성을 덕담 상아, 못다 살고 간 육신의 희롱을 흉내내고 있

을까. 대문간에 놓여 있던 반야용선은 저승으로 가는 험한 길목의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널 때 타고 가라고 마련한 것이겠지. 이제 이 밤을 고비로 강수는 이

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간단 말인가. 강모는, 동녘골댁 툇마루 끝에 허깨비처럼

턱을 고이고 앉아 있던 강수의 형상이 누렇게 떠오른다. 넋이 나간 얼굴로 물끄

러미 발끝을 내려다보던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그는 자신의

넋을 비워 내고, 그 빈 자리에 사무치는 진예를 대신 채워 넣고 죽어 갔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부러운 일이로다.) 강모는 순간 자신을 마구 으깨어 부수고 싶

은 심한 모멸감에 얼굴이 후끈해진다. 깊은 어둠도 그 모멸감을 감추어 주지는

못한다. 어디에고 부딪쳐 쪼개져 버리고 싶다. 못나고 못난 사람. 나를 어찌하리.

강모는 아직도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강실이를 허물어진 담 밑에 그대로 버려 둔

채, 휘청이며 일어섰다. 강모의 한쪽 살이 식은 땀으로 젖어, 마치 해토가 흐무

러지듯 버그러진다. 발을 딛고 선 땅이 허방 같다. 그리고 간신히 지탱되는 한쪽

의 힘줄에 설움이 차 오른다. 아까 이 텃밭을 가로질러 걸음을 재촉할 때는, 발

밑에 밟히는 풀섶에 이슬이 맺혀 있는 것도 모르겠더니, 지금 돌아오는 발등에

는 습기가 축축하다. 마치 질퍽한 진흙을 밟는 것 같다. 한 걸음이 무거워 다음

발짝을 떼기가 어렵다. (내일 아침 새벽녘에 통학차를 타고 가 버려야지. 아무와

도 마주치기 싫다. 도대체 이 어두움이 지나고 동이 트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나는 모르겠다. 사람의 심정이란 것이 이대도록 하잘것없는 검불 같다면, 심정을

따르는 육신은 또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리오.) 후원의 샛문을 아까 열어 놓고 나

간 대로 비쭈룸히 열려 있다. 그것은 꼭 옆눈질하며 눈치를 보는 형국이었다. 검

은 가지에 우거진 감나무의 무성한 잎사귀와 은행나무 둥치, 대추나무의 휘청이

는 가지들이, 우뚝우뚝 선 채로 후원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데, 나무 아래 엎드려

잠들어 있던 누렁이가 발소리로 주인을 알아보고 크엉하며 꼬리를 흔든다. 집안

은 교교하다. 모두가 잠들어 있다. 여름밤이 짧다고는 하지만 삼경이 기울었는지

라, 물 밑바닥처럼 캄캄하게 잠겨 있는 밤은 무겁다. 다만 이 어두운 가운데 불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곳은, 효원이 거처하고 있는 건넌방뿐이었다. 그 불빛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강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써늘한 손이, 내려앉은 가

슴을 훑고 지나간다. (저 사람이 아직도 잠들지 않고 있는가.) 저것, 저 커다란

그림자. 강모의 가슴팍으로 그림자가 무너진다. 대실에 혼행 갔을 때, 첫날밤의

바람벽에 태산처럼 우뚝했던 그네의 모습. 그것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

늘한 냉기를 뿜으며 강모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검은 휘장처럼. 내 저

것을 찢어 버리리라. 강모는 방문을 왈칵 잡아당기며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섰다.

그리고 사나운 힘으로, 놀란 효원을 떠다밀며 난폭하게 넘어진다. 등잔 불빛이

까무라친다. 어둠이 두 사람을 한 입에 삼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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