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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25)

카지모도 2024. 1. 22.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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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어둠의 사슬

 

캄캄한 밤, 검은 냇물이 흐른다. 누르는 어둠에 기가 질린 듯 물 소리도 나지

않는다. 다만, 잠잠히 몸을 누이고 있는 물의 수면 위에서 비늘처럼 불빛이 번뜩

인다. 어둠의 인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희미한 달빛인지도 모른다. 잠든 도시의

한쪽에서, 소리를 죽이며 남 모르게 흘러가고 있는 냇물은, 이따금 물결을 뒤채

며 번뜩이는 불빛을 날렵하게 삼켜 버린다. 흡사 순식간에 불빛을 잡아먹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럴 때마다, 강모의 어두운 눈 속에서는 불빛이 떴다가 지곤 하였

다. 방천에 오가는 행인도 끊긴 지 한참이나 되었으니, 짧은 여름 밤이라고는 하

지만 시각은 꽤 깊어진 듯하였다. 방천에 줄지어 늘어선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

지 끄트머리가 귀밑에 메마른 소리를 낸다. 아마 이 버들가지도 가뭄을 못 이겨

이파리를 말리고 만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삼십 몇 년 만이라든가 하는 이런

혹독한 가뭄만 아니었더라도, 지금쯤이면 콸콸콸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냇물에

목욕을 나온 사람들로 흥성거리며 넘칠 터인데. 낮에 보면, 냇물은 돌짝밭이 되

어 버린 가슴을 앙상하게 드러낸 채, 목마른 돌자갈의 틈바구니를 간신히 적시

며 흐를 뿐이었다. 그렇지만 밤이 되면, 어둠은 모든 갈증을 덮어 주고 천변을

어루만져 주었다. 어둠은 냇물 속으로 가라앉아 물결을 이루며 서쪽으로 흘러가

고 있다.

"오유끼, 너는 이 냇물이 흘러서 어디로 간다고 생각허느냐?"

강모는 곁에 앉은 여자를 돌아본다. 어둠 속에서도, 여자의 조그만 어깨와, 작은

얼굴, 그리고 둥글고 커다란 눈이 겁먹은 듯한 빛으로 흔들리는 것이 그대로 보

인다. 그네는 대답이 없다.

"금강으로 간다."

강모가 나지막이 말한다.

"금강을 자나, 저 냇물은 바다로 간다더라. 서해 바다, 망망한 곳으로"

그것은, 오늘 처음 한 말이 아니었다. 지난 겨울, 칼바람이 살을 가르며 허공에

서 비명을 지르던 날, 그는 오유끼를 데리고 이곳 다가정으로 왔다.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올 여름 이렇게 가뭄이 들려고 그러하였던지, 유독 겨우내 눈이 내리

지 않은 채, 얼어붙은 지표와 빙판같은 하늘이 시린 이빨을 허옇게 드러내며

떨었다. 그때, 오유끼의 얼굴은 납빛으로 죽어 있었다. 인력거에서 내려 오들오

들 떨면서 어깨를 움츠리고 강모를 바라보는 오유끼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

릴 것 같았다. 발가락까지도 오그리고 있는 오유끼의 어깨를, 강모는 팔을 벌리

어 감싸 안았다. 순간, 애처롭다는 생각이 지나갔다. 정말로 그네는 한줌밖에 안

되었다.

"추우냐?"

오유끼는 황망히 고개만 흔들었다.

"참새 같구나."

고개를 가슴에 박고 추워하는 오유끼의 귓바퀴에는, 보오얀 솜털이 민들레 씨앗

처럼 일어서 있었다.

"가자."

강모는 그 귓바퀴에 대고 말하였다. 그의 입술 끝에, 얼음조각 같은 차가운 감촉

이 부딪쳤다. 짧은 순간이었고, 추위 속에 오래 떨고 있었던 탓으로 당연한 일이

었겠으나, 그것은 이상하게도 써늘한 여운을 남기었다. 그리고,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녹아들지 않고 남아 있는 작은 얼음 조각은, 일종의 낯설음이

었다.

"귀가 얼었구나."

그때 바라본 냇물은 단도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허옇게 드러내며 얼어 있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방천에는 매운 바람이 바늘 끝으로 살을 에이며 지나갔다.

"오유끼. 저 냇물이 녹으면 흘러서 어디로 갈 것 같으냐?"

그렇게 묻고서, 그는 말했다.

"금강으로 간다."

강모의 말에 그네가 커다란 눈을 돌려 얼어붙은 냇물을 바라보았다.

"봄이 되면 저 냇물도, 네 귀도 녹을 거야."

오유끼는 웃었다. 그리고 작은 손으로 트렁크를 들었다. 트렁크는 그네의 몸집만

이나 하였다. 그들은 마치 먼 곳에서 떠돌다가 돌아오는 나그네처럼 각각 양손

에 트렁크를 들고, 다가산 기슭에 엎드린 동네 한옥의 골목으로 꺾어 들어섰다.

다가정은 부성의 문밖으로서, 서쪽 동네였다. 전주 부성 동쪽머리 만마관 골짜기

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하는 전주천 물살은, 좁은 목을 지나, 강모가 내내 하숙하

고 있던 청수정의 한벽당에 부딪치며, 각시바우에서 한바탕 물굽이를 이루다가,

남천교, 미전교, 서천교, 염전교를 차례차례 더터서 흘러내리며 사마교를 지난다.

그렇게 모래밭을 누비고 흘러오던 물결이, 긴 띠를 풀어 이곳 다가봉의 암벽 아

래 오면 급기야 천만으로 몸을 부수며 물안개를 자욱하게 일으킨다. 용소에서

소용돌이를 치는 것이다. 그 소리는 암벽을 물어뜯으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검

푸르게 서리를 트는 물살의 몸부림이, 무엇인가를 집어 삼키려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실제로, 벌써 한 이십 년 전 일이지만 신유년 여름, 폭양 아래 훈련을

마친 일인 수비대 병사들이 다가봉의 절경 아래 이곳 용소에서 목욕을 하다가,

대낮에 사람들이 눈 뜨고 보는 앞에서 물에 빠져 죽은 익사자를 한꺼번에 두 사

람씩이나 낸 일이 있었다. 훈련받은 장정 병사들이 그러할 때 일반사람들이야.

강모는 이곳을 좋아했다. 청수정의 한벽당에서부터 출발하여, 다리 건너 천변의

버드나무 그늘을 따라 초록바우 기슭을 끼고는 한참이나 내려오면 남쪽으로 건

듯 완산칠봉 산 능선을 바라보면서 한가롭게 걸으면, 이곳에 당도하였다. 그는

틈이 날 때면 다가봉의 암벽 그늘에 앉아, 제 몸을 제 스스로 산산이 부수면서

시퍼렇게 멍들어 울부짖고 있는 용소의 물굽이 속을, 넋을 놓고 들여다보곤 하

였다. 그럴 때면, 다가봉 기슭의 늙은 느티나무를 지붕 삼고 있는 천양정에서 쏘

아올리는 화살이 과녁에 맞는 소리가 따악, 울려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강모

의 가슴에 와서 꽂히었다. 강모는 스스로 과녁이 되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화살을 맞았다. 그것은 이상한 쾌감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검푸른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가슴 복판에 응어리져 고여 있던 피멍이 터져 나가는 해방감이 그의

몸을 희열에 떨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용소의 물살에 가슴을 씻어냈다.

"버들잎을 화살로 꿰뚫는다." 는 뜻으로 자못 상징적인 이름을 가진 이 정자는

조선조 숙종 때 세운 사정이었다. 이백오십 년이 넘는 세월을 머금고 있는 이

천양정은 강호에 부성팔경의 하나인 그 절경과 더불어 이름이 높아서, 궁술대회

를 열면 오색 깃발이 휘황히 나부끼고 삼현육각은 반공중에 쾌음을 울렸다는데.

사람들은, 여름밤이면 이 냇기슭 천변으로 몰려나왔다. 노인들은 버드나무 아래

평상을 끌어다 내놓고 부채질을 하면서 기우는 별자리를 바라보았고, 젊은 사람

들은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용소의 위쪽에서는 남자들이 자멱질을 하였다. 여자

들의 자리는 용소 아래쪽이었다. 달이 없는 밤에는, 수면 위에 미끄러지는 별빛

이 등불이 되어 주었고, 달이 뜬 밤에는 물 소리가 달빛을 감추어 주었다. 사람

들은 상쾌한 비명을 지르며 물 소리에 섞여 휩쓸려 들어갔다. 그때 천변에까지

울려오던 낭랑한 웃음 소리. 한 무리의 사람들은, 물 속에서 나와 냇가의 자갈밭

에 앉아 있기도 하였다. 그들은 도무지 아무런 경계심도 없었다. 어두운 천변으

로 행인들은 지나가고, 버드나무 아래 앉은 노인네들이 밤이 깊도록 생쑥 모깃

불의 매캐한 연기를 쏘이며, 이미 몇 번씩이나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어둠 속에서도 얼마든지 드러나는 흰 몸뚱이를 벗은 채 자멱질

을 하고 있는 그들을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냇물 속의 사람들도 거리낌없이 밤

목욕을 유쾌하게 즐기고 있을 뿐, 방천 위를 오가는 사람들이나 혹은 용소의 이

쪽 저쪽 사람들에게 마음을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만큼 냇물의 골짜기는 깊

었고, 어둠은 부드러운 검은 안개로 모든 것을 가리어 주었다. 거기서는 누구나

자유로웠다. 다가봉의 암벽에서 입하꽃나무 육도화의 향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냇가의 자갈밭에는 눈부신 달맞이꽃들이 지등처럼 피어났다. 그때마다

강모는 황홀한 슬픔을 느끼었다. 차마 그 속에 첨벙 뛰어들지 못하면서도, 그 물

소리와 웃음 소리 그리고 눈빛 같은 흰 꽃무리, 육도화의 숨막히는 향기가 핏속

으로 흘러드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어두운 자신의 핏속에, 달맞이꽃이

피어나는 소리가 들리었다. 꽃이 피는 자리에 핏줄이 터지면서, 응어리져 고여

있던 끈끈한 검은 피가 흘러나와 물 소리에 섞여, 사람들의 웃음 소리에 섞여,

아득하게 아득하게 서쪽으로, 금강으로 흘러가는 것을 그는 아찔한 현기증과 더

불어 실감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제 이곳으로 와서 살게 되었다. 물론, 잠시 동

안의 불안한 거처에 불과한 곳이겠지만. 오유끼. 그녀는, 모찌즈끼의 젊은 여자

였다.

"망월이라. 아하, 애달픈 이름이로다."

일본인 관사가 많은 일본인 거리, 눈 내리는 고사정의 요리집 문등에 번지는 부

우연 불빛을 바라보며, 함께 갔던 주사가 고개를 꺾고 한탄조로 하던 말이 떠오

른다. 그것은 무슨 암시라도 되었던가. 강모는 그날의 술상 머리에서 오유끼를

만났던 것이다. 내가 너를 만난 것은 흉이냐, 길이냐. 인간이 태어날 때, 하늘에

서 살성이 비치면 열두 가지 살 중에 어느 화살인가를 맞게 된다지. 그래서 조

실부모하거나, 불구의 몸이 되거나, 가산을 잃고 식구가 흩어지며 고질 신병을

앓게 된다. 그러나 복록이 무궁한 사람에게는 길성이 비친다. 한평생의 부귀공명

을 예언해 주는 그 별은 누구의 머리 위에 뜨는 것이다. 겁살,재살,천살,지살,언

살,월살,망신살,장성살,반안살,역마살,육해살,화개살. 인간의 한 생애에 재앙과액운

은 많기도 한다. 인생이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피할 길 없는 열두 가지 제살을

제 몸에 받고 겪으면서 언덕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고, 때로는 소용돌이에 휘말

리며, 때로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양이란 어쩌면 가련하고 어쩌면 어리석기

만 하다.

"사람이 아무 살도 안 띠고 평생을 순탄하게 살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법이란다,

누구라도 한두 가지 살은 맞게 되어 있지마는, 그러더라도 어쩌든지 제가 미리

알고, 조심허고, 뛰어갈 거 걸어가고, 소리칠 거 어루만지고, 그렇게 삼가면, 설령

코 앞에 삼재 팔난이 닥칠지라도 가벼이 자나간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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