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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27)

카지모도 2024. 1. 24.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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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쯔즈끼로 가자."

하고 말할 때는

"새 여자가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는 공공연한 속뜻이 숨겨져 있을 정도였다. 그곳의 주인은 검붉은 일본 남자였

다. 도무지 일본에서 무엇을 하다가 조선까지 건너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

만, 아마도 걸식을 하던 부랑배 아니면 사람 장사를 한 것이 틀림없다고 수군거

리기도 했다.

"그놈 눈구녁을 좀 보아. 실배암같이 간교하단 말씀이야."

"듣고 보니 그렇구만. 그 누루꾸룸안 흰자위에서 혓바닥이 날름거리는 걸 나두

봤지."

"아무러면 어떤가. 우리한테야 나쁠 게 없잖어? 한 바퀴 그놈이 조선 팔도를 휘

이 돌고 오면, 방방 곡곡에 파묻혀 있던 이쁜 일색들만 걷어오지 않던가배?"

"허기는 .굴비 두름이 따로 없더라."

언젠가 그는, 보리쌀 한 말에 젊은 처녀를 사 가지고 온 일도 있다고 했다. 길고

긴 봄날의 햇볕이라도 손아귀에 움켜쥐고 베어 먹어야 할 만큼 허기진 보릿고개

때의 일이었다. 그는 해마다 봄철이 되면, 마치 사냥의 때를 기다리던 포수처럼,

허리에 전대를 띄고 며칠씩 길을 떠났다. 그가 도는 곳은 일정하지 않았다. 서해

안과 남해안, 그리고 강원도의 산골짜기, 지리산 기슭이며, 전마선을 타고 가는

손바닥만한 섬조각에도 그는 갔다. 그러나, 그가 특히 좋아하는 곳은 남도 일대

였다. 삼남에 연이은 흉년과 기근이란 무슨 숙명이나 업보와도 같이 끈질겼다.

나찰이 그보다 더 악착 같을 것인가. 몸이 검고 눈이 푸르고 머리털이 붉으며,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그 악한 귀신도 일찍이 본 바 없으니 굶주림보다는 덜 무

서웠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부황난 사람이 죽어갔고, 살가죽이 누렇게 붓고 들뜬

한 무더기 가솔이, 바가지를 옆구리에 하나씩 차고 다리를 절룩이며 어디론가

동냥을 떠나갔다. 발을 둘둘 감은 다 떨어진 헝겊 쪼가리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누런 황토 먼지를 풀석거리게 하였다.

"가만 둬도 죽든지 거러지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납지요. 기왕에 그리될 바에야 저

를 따라오는 것이 백번 낫습지요."

모찌즈끼의 주인은 두툼한 붉은 입술을 번들거리며 웃었다.

"굴뚝의 연기 냄새만 맡아도 저는 그 속에 앉아 있는 사람 냄새를 분별할 수 있

습지요. 틀려 본 일이 없어요."

"바람만 스쳐 가도 사람 냄새가 나고말고요."

"덜 익은 처녀의 풋비린내는 말씀입지요, 봉창을 철벽같이 해 놔도 그게 묘한 거

예요. 저절로 공중에 퍼지는 걸입쇼."

모찌즈끼의 주인은 야마시다 주임이 내미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으며 그런 말을

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강모의 눈에는, 걸붉은 그 남자의

열 손가락이 낙지발처럼 보였다. 지어 부칠 땅도 없거니와, 땅이 있다 해도 공출

로 보리쌀 한 톨 남겨 놓을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대로 죽어가거나 동냥아치가

되는 것보다는, 그래도, 유녀로나마 목숨을 부지하는 쪽이 더 낫기는 나은 것일

까.

"오늘은 누구냐? 얼굴 좀 보자."

야마시따는 호기롭게 소리치며 좌중의 젊은 여자들을 돌아보았다. 오유끼는 야마

시따와 강모의 사이에 앉았다. 그네는 얼굴을 공손하게 숙이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절을 했다. 수그린 고개의 뒷목이 깊이 파아고, 앞쪽의 깃은

가슴의 흰 살이 거의 드러나보일 만큼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오유끼는 황금

빛 공단 바탕에, 화려한 꽃무늬가 수놓인 보라색 오비를 매었다. 그 오비의 빛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연지의 탓이었는지, 그녀의 입술에도 보랏빛이 돌았다. 그

래서 추워 보이기도 했다. 얼굴로 보아서는 아직 어린 여자가 분명한데, 표정은

측은할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강모가 오유끼의 모습을 일별하며 미처 시선을 거

두지 않은 그 순간에, 투박한 손 하나가 불쑥 침벌하듯 시야로 튀어 들어왔다.

야마시다의 손이었다. 손은 오유끼의 기모노 앞에서 흡반처럼 붙더니 깃을 헤치

며 안쪽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강보는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못 볼 것을 보았

다든가 하기에는 이미 농탕해져 버린 자리였다. 다만 그가 상기된 것은, 방해를

받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야마시따는 아예 오유끼를 감싸

안더니 흰 목에 붉은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오유끼는 야마시따보다는 더

어른인 양 그가 하는 짓을 내버려 둔다. 별반 거역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받아

들이는 것 같지도 않은 몸짓으로 조그맣게 앉아 있는 그녀에게 강모가 이름을

묻는다.

"오유끼입니다."

야마시따에게 잡힌 몸을 풀며 그네가 대답한다. 힐끗 강모를 돌아본 야마시따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무어라고 큰 소리로 농을 지껄이며 오유끼를 강모 쪽으로

떠밀어 넘겼다. 강모는 엉겁결에 그네를 받아 안았다. 그네는 따뜻하게 감겨 왔

다. 그네에게서는 복숭아 냄새가 났다. 후끈 더운 기운이 끼치면서 입술에 까스

라기가 일어난다. 혀끝이 안으로 말려들어 말이 목젖 너머로 넘어가 버린다. 강

모는 당황하여 오유끼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런데도 오유끼는 반대였다. 오히려

팔을 감아 강모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네의 살이 닿는 곳이 뼛속까지 저르르 우

리면서 녹아내리는 듯한 노곤함에 어지러웠다. 오유끼는 한 마리의 계집이었다.

강실이나 효원이 같은, 막막하고 사무치는 존재가 아니라, 뭉클 손 안에 잡히는

실물인 것이다. 조금 전에 야마시따가 마음대로 만지며 노닥거렸으나, 어디에도

흔적이 남지 않은 오유끼, 바로 그 전에는 또 누군가가, 또 이 다음에 어느 이름

모를 사람이 어루만지고 희롱하고 떠나간다. 아무나 찾아올 수 있고, 아무에게도

죄를 묻지 않는 여자, 희롱이 죄를 묻지 않는 오유끼. 짓밟은 값을 돈으로 치를

수 있는 계집. 밟히려고 작정하고 이렇게 나와 앉은 사람. 서러운가, 오유끼.

"오유끼...좋은 이름인데...? 나가이 가후의 여인이로구나."

강모는 나지막이 숨소리로 말했다. 오유끼는 강모의 턱 밑에서 고개를 갸우뚱하

며 미소를 지었다. 말의 뜻을 알 수는 없었으나 손님이 하는 말에 대한 인사이

며 교태였다. 그네의 눈빛은 신열이 돌아 붉게 물든다.

"너, 그 여자를 아느냐?"

알 리가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물어 본다. '오유끼'는 그 허무한 냉소주의자

나가이 가후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여자였다. 일찍이 히로쓰 류우로의 문하에

들어가 습작을 한 그는 일본 고래의 춤과 피리, 만담 등을 공부하다가, 1903년에

는 미국으로, 또 4년 후에는 불란서로 마음껏 떠돌던 사람. 나가이 가후는 세기

말 문예에 도취되어 그 아름다움을 글로 썼다. 그는 에도 예술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향락 퇴폐를 문단에 불러일으킨 사람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의 향락

주의는 인생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이었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고 스러지는 것들

에 대한 애절한 사랑과, 무너지게 하고 스러지게 하는 것들에 대한 무력한 증오

가, 차라리 그를 냉소적인 시인으로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퇴폐와 윤락의 밑바

닥에, 닿으면 나가이 가후는 느끼었다. 그래서 에도 문화를 찬미하고, 그 자신의

나날을 향락에 내던지며, 화류계에서 소재를 취하여 시문을 썼던 것이다 .강모는

그를 좋아하며 즐겨 읽었다. 그 중에서도 묵동기담. 아마도 그것은 틀림없이 작

가 자신의 이야기이리라. 오유끼는 그 소설 속의 여자이다. 사창, 거리의 여인.

그러나 순진하고도 열정적인 오유끼. 동경 뒷거리의 인정과 풍속이 서글프게 물

들어 있는 배경에 나타난 한 문사는, 허무의 세계에서 그림자처럼 배회한다. 그

는 보잘것 없는 창부 오유끼에게 끌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차츰 진정

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는 그녀와 끝내 동화되지를 못한다. 진창에 날리는 흰 눈

은, 꽃잎처럼 내려앉아 짓밟히며 진창이 되고 만다. 질척거린다.

"결국 인생에는 달콤한 조화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생에 대한 그

리움이거나 한낱 꿈에 불과할 뿐."

이라고 쓸쓸히 체념하고 마는 주인공. 그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렇다면

'오유끼'는 바로 너이냐? 너는 책 속에서 걸어 나왔느냐? 강모는 실소한다. 그리

고 안겨 있는 오유끼의 흰 손목을 잡는다. (손목을 잡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사람이 있다. 바라보아도 안되는 사람이었지. 그래서였던가. 나는 그 사람의 얼

굴을 바로 본 일이 없고, 그 사람도 나를 바로 본 일 없었다. 언제나 돌아설 듯

빗기어 그 자취마저도 아련했던 사람. 그런데 나는, 손목보다 더한 것을 부러뜨

리고 말았었다. 그러고도 그 사람을 버리고... 짓밟은 그 자리에 말 한 마디 남겨

놓지 않은 재 도망치고 말았느니. 그다지도 애절하던 이름이 이제는 이대도록

두려워 꿈길에서조차 들릴까 무섭기만 하다. 그뿐이냐. 알 수 없는 손아귀에 덜

미를 잡힐까 봐 허둥지둥 기껏 숨어든 곳은 또 어디였던가. 허울은 아내였으되

마음은 가지 않던 여인에게 내 허망함을 부려 버리려 했었다. 나는 비겁한 사람.

허깨비. 어느 것 한 가지도 떳떳하게 행하지 못하고 누리지도 못한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누군가는 한 사람이 능히 열 가지 일을 하건만, 나는 한 가지도 제

대로 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나에게 바라는 바는, 백 가지 천 가지가 넘는다.

이 무슨 고달픈 운명인가. 그저 나 하나 소리 없이, 내생긴 대로, 막힌 데 없이,

걸린 데 없이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오유끼. 너의 이름이 오유끼라

고 했느냐? 내가 네 손목을 잡는 것쯤이야 죄 될 리도 없으려니와, 너 역시 내

모가지를 조이지는 않을테지? 너는 계산하면 그만이니까.) 자욱한 안개는 숨겨진

넋을 짓누르고, 우뚝한 태산은 사람의 숨통을 짓누른다. 오로지 누르고, 누르고,

누르는 것들. 강용한 자들의 악력은 질긴 나무의 뿌리처럼 억세다. 모가지를 틀

어쥐고 놓아 주지 않는다. 그럴 뿐만 아니라 덜미를 잡힌 재 버둥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덤벼들면 덤벼드는 꼴을, 주저앉으면 또 그 주저앉는 형상을 낱

낱이 들키면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내가 나도 싫다. 진저리난다.

"오유끼."

오유끼가 대답 대신 눈빛으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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