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0. 9

카지모도 2016. 6. 23. 13:37
728x90




15912 1990. 9. 1 (토)


8월의 마지막 날도 역시 찜통 더위.

그 더위 속에서 현장은 헉헉거며 움직인다.


태풍 영향으로 서울을 비롯한 북쪽지방은 큰비가 내려서 난리라는데, 이곳 부산은 너무나 멀쩡하다.

새벽 산의 약수터에서는 가뭄으로 한통의 물 받기에도 인심들이 사뭇 사납다.

좔좔 나오던 물이 쫄쫄거리는 아이 오줌줄기이니 물통은 장사진으로 늘어서 있고.


15913 1990. 9. 2 (일)


어제 어머니께 다녀오다.

부부싸움을 하였는지 집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어, 어머니만 보고 금새 나와 버리고 만다.


웬일로 J가 레코드를 구입하다.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LP 2장.


15914 1990. 9. 3 (월)


英이에게는 지금 목표의식이 없다.

사춘기적 몽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친구들과의 재재거림, 왕자님의 공상, 노래와 만화...

부모의 엄격한 눈초리에 그저 시늉만 하고 있을뿐인데, 그런 부모의 압박감이 비등점에 이르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이제 교회도 나가지 못하게 하는 어미에게 반항과 반발심리로 가득찬 포즈다.

아마 英이의 마음은 온통 교회로 향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딸아이를 다스려야 하는겐가.

안타깝고 답답하다.


15915 1990. 9. 4 (화)


볕은 아직도 따갑지만 그 속에는 선듯한 가을 냄새가 숨어있다.


어제, 운전 주행실기 합격.

주행실기, 4修 만에 붙은 것이다.

이것도 고마운 일.


사상일대, 소규모의 공장들이 즐비한 동네.

한시간 넘어 버스에 흔들려 돌아오면서 숱한 공장, 숱한 자동차, 숱한 집들을 차창 밖으로 내다 보면서 저 풍경화는 행복이 아니다라고 중얼거린다,


오늘 생산성 협의회 개최 예정이다.


15916 1990. 9. 5 (수)


어제, 본관 회의실에서 현대중공업, 한진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 대덕연구소등 참석하여 생산성 협의회 개최하다.

모든 걸 내게 맡기고 박이사, Y부장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

대형조선소의 시스템 앞에 대선조선의 낙후된 시스템이 주눅이 들어서일까?

그들은 무언가 쉬지 않고 개선하고 있다.

관리체계, 현장 유틸리티 체계, 공정체계등...

시스템 용어 자체도 생경한 것들을 구사하는데, 그것이 컴퓨터 용어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목장원 가 점심을 걸게 하고, 회의 끝난후의 뒷풀이는 생략하고 마쳐 버린다.

원래 1박2일의 일정이지만, 기실 대형조선소와 중형조선소와의 시스템 격차 때문에 대선조선의 주관이라는 게 별 내용이 없기도 하거니와, 큰 조선소처럼 우리는 전용 호텔도 갖고 있지 않아 저녁때의 접대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15917 1990. 9. 6 (목)


어제 덕포동가서 안전교육 받고 운전면허증 찾아온다. 1종 보통.


오후부터 빗발 성글게 뿌리다.

퇴근하여 PP갑 등과 술, 2차 동삼동의 맥주집에서는 이욱규씨도 합석.

시나브로 취하여 어떻게 돌아왓는지도 모르게 돌아와 6시 거의 되어서야 부랴부랴 일어난다.


북쪽에서는 연형묵총리등 고위급 사람들 와서 회담중.

북한뉴스를 접할때마다 늘 가슴 아련한 내 아버지.


15918 1990. 9. 7 (금)


모처럼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이제 이것으로 여름의 제국은 무너지는가.


사회적인 환경, 풍토가 천재의 위대함을 창출한다.

스티븐 호킹 박사- 아인슈타인 이래 금세기 최고의 천재물리학자.

루게릭병인가 무언가로 전신마비의 불치병이면서도 강인하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탁월한 물리학의 가설과 증명의 업적을 이루어 냈다.

만일 그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그 천재성의 발현이 가능했을까.


현대의 한국이라는 사회, 미친년 널 뛰듯 두서없이 날뛰는 천민자본주의의 극치.

산업사회의 용광로는 물질주의로 부글부글 끓는 도가니다.

전통적인 윤리가치마저도 전도되고 도태되어 가고 있다.

한국은 고귀한 것들을 차츰 잃는 대신 얻는 것은 천박한 것이다.


이 척박한 사회에서 신앙이란 얼마나 그 존재의의가 막중한 것인가.


4시 30분.

어쩐 일로 따님께서는 새벽같이 책상 앞에 앉아있다.


선듯한 새벽공기.

대기는 한결 투명해 졌다.


15920 1990. 9. 9 (일)


토요일의 저녁, 홀로 술마시고 취하다.

그야말로 혼곤한 잠의 늪속에 잠겼으나 일요일 늦게 깨어난 아침, 육체에는 몸살끼가 스물스물 퍼져있다.

초가을의 무더위.


스티븐 호킹은 나와 같은 범부를 부끄럽게 한다.

그 만신창이의 질그릇에 담긴 정신은 얼마나 위대한가.

천재성도 그러하려니와 그의 정신을 이루고 있은 인생관도.

베토벤의 정신에 비견되기도 하지만, 베토벤처럼 불행을 초극한 위대한 정신이라기 보다 그 순수한 낙천주의의 순진무구함이 위대하다.


막스 불르흐의 바이올린.

1악장의 애잔한 선율은 슬프게 아름답다.

정경화는 그 선율을 또한 구성지게도 뽑아낸다.


15922 1990. 9. 11 (화)


어제밤, 英이 학습장을 검사하고는 아연실색.

공부를 하고 있은 학생이 전혀 아니다.

책가방 속에는 소설책이 한권.

그야말로 삼류 학생이다.

무엇에 정신 팔려 이토록 허랑방탕하고 있단 말이냐.

교회냐, 친구냐, 아니면 어떤 남학생이라도 좋아하고 있는 걸까?

아, 그 영특하였던 아이를 이렇게 만드는 정체는 무엇이란 말이냐?


아니 되겠다.

좀 더 강력하게, 좀 더 디테일하게 딸 아이의 범위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15923 1990. 9. 12 (수)


중부 이북은 몇십년래의 호우, 그런데 이곳 부산은 햇빛 내려쬐는 한여름날씨.

좁은 한반도의 날씨가 곳에 따라 이토록 다르다.

호우 특보, 대통령까지 나와서 야단이다.


英이 생각에 뒤척이다가 새벽3시 깨어 일어나다.

퍼부울줄 알았던 빗줄기는 소식이 없고 전깃줄을 울리는 바람소리만 날카롭다.


4시, 英이를 깨워 일으켜 어제 밤 공부한 내용을 검사하였으나 그 빈약함이라니.

욱 치미는 부아 하나를 꾹 눌러삼킨다.


내 방 앉아 로마서 소리내어 읽고 기도드린다.

주님, 英이를 도와주소서. 우리 英이를.

어둠 속에서 눈물 흐르다.


다시 들어 간 英이 방.

이것저것 들려주는 아빠의 얘기가 英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흔들어 깨웠기를.


15924 1990. 9. 13 (목)


60년래의 대홍수.

서울, 충청도, 강원도 일원은 물바다가 되었는데, 이곳은 참 미안할 정도로 멀쩡하다.


어제 아침 어머니 다녀 가시다.

이제 그냥 단순하게 늙어가시는 노파의 포즈를 자꾸 구사하려 하시는 어머니.

그 포즈가 아프다.


노트 두권을 사서 英이와 俊이에게 학습 노트를 만들어 준다.

매일 공부한 내용을 기록하여 아빠의 검사를 받으라는 나의 엄명이다.


英이, 전교 54등, 반에서는 9등.

분발하라. 변하여라.

英씨, 내 따님이여.


15925 1990. 9. 14 (금)


예전처럼 또 입술이 부르터 올랐다.

정신의 안일이 쾌락주의를 부르고, 그것이 육체를 피폐케하여 나타나는 현상임을 내 모르는바 아니다.


꿈- 군대, 거리거리 언덕마다 도열해 서있는 군인들, 헌병은 하늘로 권총의 총구를 향하게 하고 스톱모션으로 있고 그 앞에는 수갑차고 쇠사슬에 묶여 처연하게 서있는 세명의 군죄수.

회색빛 하늘을 배경으로 그것은 풍경화의 정지화면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어제 노조의 조합원 총회.

다소 일찍 퇴근한 나는 그 결과를 알수 없었으나 박대리에게 전화하여 알아본바 조합원들 끼리의 자중지란.

간교한 회사의 술책, 어제 내게 마이크를 넘겨달라고 울먹이며 소리치던 위원장 지광혁은 안스럽도록 순진하다는 건가.


15926 1990. 9. 15 (토)


어제 온종일 추적추적 비 내리다.

퇴근길, 모두들 자가용으로 빗속을 휭휭 떠난다.

대부분의 부차장, 반수이상의 과장, 대리 기사 일부, 직반장, 공원일부는 모두 자동차를 갖고 있다.

하릴없는 나는 비맞으며 버스 정류장에 서있는데 현도반의 공원 최상천이 제 차를 세우고 태워 집까지 데려다 준다.


동쪽 수평선 위를 짙게 뒤덮은 짙은 회색 구름의 두께를 살며시 헤치고, 바알간 해가 얼굴을 내밀어 바다에다가 수직선의 여울을 그어 놓는다.


15927 1990. 9. 16 (일)


이 달말경 생산부 사무실은 본관 건물로 옮긴다.

한창 공사중인 그곳은 이곳에 비하면 호텔이다.

그곳 관리부 쪽에 내 책상이 가있으리라는 상상이 요즘 내 일상의 즐거움이다.


이제 두터운 이불을 덮어도 새벽녘에는 선듯한 한기를 느낀다.

따뜻한 구들짱이 그리운 계절이 벌써 왔는가.


새벽같이 일어나 산으로 가버린 J.

남편을 충동하여 함께 가는것보다 여편네들끼리 수다떨며 가는 산행에 재미를 붙이신 마누라님.

그나저나 J의 그 건강함이 미상불 고맙지 않을수 없다.


둥실, 커다란 불덩이가 수평선 위로 떠올랐다.

아이들 깨워 일으켜 그 장관을 보게 하였으나 새벽잠에 취한 아이들은 시큰둥하여 귀찮기만 하다.


15928 1990. 9. 17 (월)


내게는 英이를 올곧게 인도할 자격이 없다.

英이의 부스스한 얼굴, 반항이 가득 담긴 눈길, 불만과 짜증이 덕지덕지 발려있다.

나 또한 그런 딸아이를 대하면 어떤 포용과 연민의 염이 솟기 전에 이미 부아가 불쑥 치미는 것을 어쩔수 없다.

그리하여 아침부터 英이에게 큰소리가 나오곤 한다.


나도 어느새 전형적인 기성세대, 보수꾼의 속성 가득한 아빠짜리.

내 고등학교 시절을 상기해 보면 참 우습지도 않은 것이다.

나 또한 그 힘든 때가 있지 않았던가.


부아가 나서 얼굴 붉어 야단치는 아빠, 英이 눈에 어떻게 비치겠는지.

수양의 문제, 불혹을 넘었는데도 내 인품은 고작 이 정도다.


15930 1990. 9. 19 (수)


아우성치는 바람소리.

먼 바다에는 白波가 흰 이빨을 드러내며 씩씩하게 웃고 있다.

태풍은 비껴갔지만 기온은 뚝 떨어졌다.


英이는 어제 오페라 관람하고 돌아오는길, 시청 앞에서 큰아빠 만났다고.


15932 1990. 9. 21 (금)


한 작가의 두작품의 그 수준차이가 너무나 크다.

박범신의 유치한 소설 '도시의 이끼'와 빼어난 소설 '읍내 떡빙이'.


저녁의 과식을 삼가자.

잠들기 전의 위장 상태는 가볍게 만들어 놓아야 한다.

먹거리 하나 통제 못해서야 말이 아니다.

숙면과 위장의 상태는 유기적인 관계가 있다.

어제 자기 전에 먹은 만두와 배, 부담스런 위장이 몸안의 실핏줄과 세포조직의 어딘가를 자극하고, 이것이 작은 뇌에 작용하여, 알지 못할 무슨 통로를 통하여 의식의 어느 부분과 무의식의 어느 부분과 교감하여, 수면 속에 틈입해 들어와서, 회색수면과 이상스런 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반드시 부담없는 위장의 상태로 잠자리 들 것.


15933 1990. 9. 22 (토)


의장반 사무실에 걸려 있는 월간잡지 '북한'의 화보에 실린 사진들.

미술, 포스터, 연극등의 사진인데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짙은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

그곳에는 전 세대의 색감과 정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분홍빛과 푸른빛의 앙상블, 꽃무니의 무대장식, 북한의 가옥의 실내를 찍은 사진- 구닥다리 소파와 탁자, 물방울 무늬의 커튼, 사각의 나무 창틀.

현대의 미감으로는 촌스럽기도 그지없지만 얼마나 소박하고 정겨운지.

한 세대전, 내 기억 어느 서랍 속에 간직된 정겨움이 무지개처럼 피어 오른다.


새벽 책상 앞에 앉아서 로마서 5,6장 소리내어 읽고, 어거스틴의 고백록의 우연히 펴진 구절 '악의 근원에 대한 생각' 을 또 소리내어 읽는다.

기도.

어머니의 여생동안 기쁜 자식들, 내 가슴부터 활짝 열기를..

모처럼 솟는 눈물.


어머니 내일 서울 가신다.


15934 1990. 9. 23 (일)


어제 본관으로 사무실 이사.

퇴근하며 이제 과장으로 승진할 정시영씨와 마신다.

북경 아시안 게임 개막식은 보지 못하고.


어머니 서울 가시다.

오랜만에 J와 오르는 산.

함지골까지 2시간여 코스.

새벽 가시버시 오르는 산행은 얼마나 유익한가.

술찌꺼기는 땀이 되어 배출되고, 헐떡이는 심장은 신선한 피를 펌프질한다.


15936 1990. 9. 25 (화)


어제 종일 비 내리다.

옮긴 사무실은 전에 비하여 파격적으로 정돈되고 안온하고 깨끗하다.

단지 현장을 오르내리기가 다소 불편하겠으나 직원들 모두 좋아하는 표정들이다.


그러나 동원산업의 SB-368, 369 인도 공사 때문에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고.

본관의 다른 층에 까지 들릴 정도의 소음에 아마 다른 부서에서는 '역시 생산부의 노가다들'이라고 하였음직 하다.


차가운 포즈의 형제소식을 전해듣는 내 마음은 쓰리다.

형네, 媛이.

그들을 벗어나자 벗어나자하여도 이 쓰라림은 웬건가.

이 쓰라림은 무연치 못하는 나의 더러움일 것이다.


3시 기상.

로마서.

불꺼, 기도.

떼를 써.. 떼를 써...

나로 하여금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어 주소서. 나의 주님.


15937 1990. 9. 26 (수)


순간의 어떤 기분, 엑조틱하기도 하고 낯익기도 하고하여 일상의 기분과는 전혀 다르게 찾아오는 그 미묘한 기분.

그것은 어떤 풍경을 접할때일수도 있고, 어떤 말투를 들을 때, 어떤 표정, 어떤 소리를 접할 때 나타나는 기분이다.

데자뷔- 이런 걸 기시감이라고 하는지.

그 맛은 달콤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여하튼 미묘한 정서를 자아낸다.


3시 30분 기상.

새벽 어둠을 휘돌아 달리는 말 탄 바람군대.

저 어둠 속에서 음험하게 출렁대고 있을 海原을 휘돌아 달려와 창문을 덜컥거린다.

그 기상.


15938 1990. 9. 27 (목)


사무실 전자 타자기의 매뉴얼을 익히다.


어제 SB-377 2공장에서 진수.

현장은 번잡하지만 나는 생산관리부서로의 전보발령을 기다리며 마음이 안온하다.


명절이 임박하니 무언가 들뜬 분위기.

보너스... 선물과 상품권....

그 기대심리는 나 역시 다름없다.


15939 1990. 9. 28 (금)


어제 화신기업 김사장과 둘이서 늦도록 마시다.

횟집, 룸살롱을 돌면서.

말하자면 현장을 떠나는 내게 송별연을 베푼 것이다.

소박하였던 그도 이제 돈을 벌기 시작하니 제법 부르조아의 속성을 푹푹 뿜어낸다.

12시 넘어 귀가.


15941 1990. 9. 30 (일)


명절 연휴의 시작.

어제는 양주등의 꾸러미, 상품권 들고 돌아와 정종 마신다.

명절 선물은 J의 기쁨이다.


높은 하늘, 새털 구름.

가을 풍광, 바다는 거울처럼 햇빛을 받아 번득인다.

기도.



'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 > 部分'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90. 11  (0) 2016.06.23
1990. 10  (0) 2016.06.23
1990. 8  (0) 2016.06.23
1990. 7  (0) 2016.06.23
1990. 6  (0) 2016.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