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1 1990. 8. 1 (수)
이 여름.
내가 웃으면 주위의 사물도 웃는다.
내가 기쁘면 길모퉁이에 버려져 있은 저 돌멩이 하나도 기쁘다.
그러나 내가 우울하면 저 짓푸른 하늘, 저 초록 나무까지도 음울하다.
내가 괴로우면 새들의 영롱한 지저귐도 고통에 찬 신음으로 들린다.
이 속박, 슬픈 속박.
주관의 세계여.
어제 SB-376 진수.
진수 CEREMONY에서 도끼를 찍는 선주 딸내미의 늘씬한 각선미.
그 각선미에도 여름은 머문다.
15882 1990. 8. 2 (목)
어제, 회사 책상 정리하고 타이프 라이터도 손을 본다.
고작 4일정도의 휴가이지만 휴가 끝난 첫 출근길의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고자하는, 이른바 심리적 단도리이다.
휴가 첫날, J를 깨워 산에 올라 도착한 약수터에는 장사진을 이룬 물통들.
게다가 터줏대감 격인 영감 할마시들의 텃세로 그곳을 떠나 더 윗쪽으로 산을 오른다.
함짓골.
벌레소리 울창한 골짜기의 숲.
두통의 물을 길어들고 땀범벅이 되어 돌아온다.
아침 먹고.
레코드 정리, 책정리, 책상 서랍정리.
근 2시간에 걸쳐서 청결예배의 의식을 치르다.
이제 샤워 끝내고 치과에 다녀오려 한다.
15883 1990. 8. 3 (금)
어제 치과 갔다가 시내나가려는 계획은 포기한다.
남포동을 생각하면 그저 더울뿐이어서 엄두가 나지 않아서.
맥주 사들고 퍼지고 앉아서 俊이와 공포 영화 본다.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
기름값은 또 들먹거리고 주가는 떨어진다.
이 더운 날.
존 서덜랜드가 부르는 '비올레타'의 코로라투라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고, 양희은의 노래는 무당의 신내림같은 아름다움이 있고, 패티김은 에조틱한 아름다움이 있다.
15884 1990. 8. 4 (토)
어제 俊이와 시내나가다.
속으로 익은 아이, 내 아들 俊.
약사고 레코드 한 장 '칼멘'
여러 레코드 가게를 헤매었으나 모차르트의 청아한 모데트 '엑슐타테 유빌라테'는 구하지 못하다.
휴가 3일째.
15884 1990. 8. 5 (일)
어제 밤1시 넘어까지 프란시스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보다.
월남전의 광기, 그 열대 전장의 윤리란 오직 광기뿐이다.
후반부 말론 브란도의 꽤 철학적인 명제의 대사가 노리는 바는 월남전의 미치광이 주제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이 영화는 참 난해하다.
15886 1990. 8. 6 (월)
베낭에 고기싸넣고, 술 넣고, 텐트 얹고.
J와 고갈산 한지골에서 한나절 보낸다.
맑고 차가운 샘, 녹음과 풀벌레소리에 둘러 쌓인 텐트 속에서.
고기구워 소주마시고 음악을 틀고, J는 낮잠도 자다.
우리 집 근처의 산에도 이만한 피서지가 있음이 고마운 일이다.
아이들과 둘러앉아서 데이빗 커퍼필드라는 아주 핸섬한 마술사가 연기하는 마술을 혀를 내두르며 보다.
카메라 장난도 아니라는데 자유의 여신상을 깜쪽같이 사라지게 하는가 하면, 폭파되는 건물의 금고 속에 묶여있다가 홀연히 탈출하기도 한다.
참 대단한 엔터테인먼트.
휴가 마지막 날.
내일이면 다시 가열찬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
그것이 조울증의 '울'기에 집어 넣는다.
그 주관이 주위를 우울하게 물들이고.
15888 1990. 8. 8 (수)
올 여름의 더위는 그 量과 質에서 월등하거니와 그 長에 있어서도 대단하다.
어제 첫출근.
역시 현장은 부산스런 몸짓으로 나를 맞이한다.
오늘 어머니 생신.
이른 한번째.
어제 나만 빠진 가족들과 목사님등과 해운대 무슨 한식 뷔페.
감회는...
피에르 푸르니에가 연주하는 베토벤 '첼로 소나타 2번'
첼로의 유장한 선율로 어머니께 축하를 드린다.
15889 1990. 8. 9 (목)
어제의 그 바쁜 현장.
SB-361 경사시험, SB-370 下架등.
땡볕은 조금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제가 입추라는데.
페르시아만에 전운이 감돈다.
시시각각 미국과 이락은 전쟁으로 접근하고 있다.
거인과 어린이의 싸움일터.
주가폭락, 650선 무너지고.
광복절 북한방문 신청자수는 6만이 넘었다.
15890 1990. 8. 10 (금)
잇빨 끼우다.
이제 음식을 씹을수 있다는 기대와 몇십년동안 빵꾸난채로 있던 어금니를 수리했다는 사실이 너무 대견하다.
잠시 후두둑 비내린다.
퇴근하여 새 잇빨의 성능을 시험한다는 핑계로 술마시다.
문득 어머니께 들르다.
이빨 자랑, 맥주에 취하여 택시잡아 타고 서쪽 해안을 돌아서 돌아온다.
5시 넘어 기상.
천둥과 번개.
번갯불이 번쩍한 순간부터 천둥소리가 울리는 순간까지의 사이를 하나 둘 셋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헤아리면 번개가 발생한 곳과 나와의 거리를 계산해 낼수 있다.
훈련소에서 배운 지식, 빛의 속도와 소리의 속도.
俊이는 제 친구 지석이와 새벽산에 오르려고 나갔다가 천둥소리에 놀라 그냥 돌아오고만다.
어른이라도 왈칵 무서웠을 것이다.
15892 1990. 8. 12 (일)
이곳은 연일 쩌대는 무더위이고 중동은 일촉즉발의 전운 가득.
어제 퇴근하며 파마.
俊이는 요즈음 제 친구 지석이와 새벽 산에 올라 약수길어온다.
기특 기특 기특한 녀석.
일요일 여전히 여름은 식을줄 모르는 절륜한 정력을 과시하고 있고, 현장은 일요일에도 땀을 팥죽처럼 흘릴 것이고, 나는 그곳에 나가봐야 한다.
15893 1990. 8. 13 (월)
확실히 이상기온이다.
일본출장 며칠 다녀온 문대리 말에 의하면 요코하마의 기온은 37도를 넘나들고 있어 일본도 야단들이란다.
일요일, 불볕더위의 현장 갔다가 오후 2시경 현장을 벗어난다.
이덕찬씨와 뚱집에서 차가운 맥주 마신다.
딸 인숙이가 경찰대학 입학하였다는 자랑.
아침, 안개 자욱하지만 수묵화처럼 안개를 붉게 번져 물들이고 있는 태양은 오늘의 무더위를 예고한다.
구약 뒤적이고, 내 주 나의 하나님께 기도.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베드로 전서-
새벽, 승즌이는 지석이와 함짓골 약수터로.
요즘 우리집 식수는 俊이에게 의존하고 있다.
내 방 커튼처 따가운 아침 햇살을 차단하고, 시편 34편 읽고 기도드린다.
시큰한 콧등.
아버지 나의 하나님. 다시 한번 붙들어 주소서. 사로잡아 주소서. 나를 지배하소서. 나의 존재와 일상을 주장하소서.
15895 1990. 8. 15 (수)
어제 밤, 내 책상 앞 앉아 모처럼 소주잔 기울인 탓인지 간밤은 편한 잠 이루다.
새벽 빗소리 들리는데 성기게 듣는 비다.
비는 뜸하여 俊이와 새벽 산을 오른다.
약수터의 장사진, 할마시들의 텃세에 울컥 화가 치밀었으나, 아빠의 성난 포즈를 눈치챈 우리 사슴새끼같은 俊이의 몸짓신호로 가라앉히고 목장원 뒷산으로 장소를 옮긴다.
졸졸 흘러 더욱 귀해 보이는 물, 산길을 이리저리 걷다가 두시간 넘어 짐에 돌아온다.
풍부한 물을 확보한 J는 만족한 웃음.
오랜 가뭄에 시달리는 대지를 간밤의 비는 살짝 맛뵈기만 보이고는 아침, 다시 태양이 작열한다.
광복절 휴일.
15897 1990. 8. 17 (금)
아침 저녁의 선듯한 바람 한줄기.
드디어 숨가쁜 고개는 넘어섰는가.
J의 생일, 몇몇 게스트를 초대하여 뷔페 식사를 나는 계획하고 있었으나, J는 아이들을 꼬드겨 아빠에게서 그 돈을 빼앗아 토스터를 사려고한다.
현명한 생각.
15898 1990. 8. 18 (토)
여름 그 욱일충천의 기세는 이제 한풀 껶였는가.
가을 냄새 실은 바람,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하여 변하는데 인생의 흐름은 순환할줄 모른다.
그래서 계절을 살아가는 인생은 고단하다.
이해인의 책 두권, 시형어머니로부터 J의 선물.
써서 그 책갈피 사이에 끼어 놓은 명문의 좋은 글.
그 분의 글솜씨는 대단하다.
우리 식구의 고마운 이웃.
시형어머니의 여장부다운 씩씩함 뒤에는 정신적인 고결함이 숨어 있다.
가수 장현 죽다. 그 누이도 얼마 전 죽었는데 그도 결국 설암으로 누이의 뒤를 따라갔다.
오누이- 장덕과 장현.
그 남매가수를 생각하면 늘 마음 어느 구석이 아리다.
15900 1990. 8. 20 (월)
여름은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일요일 오후, 소주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책을 뒤적이다가 깜빡 마루에 누운채 그대로 잠들어 버린다.
나 잠든 사이 J는 英이와 俊이를 데리고 함지골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맑은 샘물을 길어 오다.
그때까지도 뜨거운 햇살.
가리라. 가리라.
기어코 가고야 말리라.
그 기이한 나라.
말없는 것들의 말을 들을수 있은 완전한 그 나라.
하나님, 내 창조주의 나라.
15901 1990. 8. 21 (화)
어제는 발악처럼 습기찬 무더위가 고함을 질러 대더니 그예 늦은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잔서를 거두어가기에는 역부족이지만.
꿈- 나는 위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기탁이와 또다른 친구 한명과 술상을 둘러 앉아있다.
곧 죽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꿈 속에서도 매우 실제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참 담담하였고 오히려 엷게 번져오는 깨달음이 점점 뚜렷해 지기 시작한다.
영혼과 어떤 영원한 존재와의 COMMUNICATION.
생명이 끝나는 지점, 스스로의 절멸을 감수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존재의 유한성을 인정하게 된다.
온유와 사랑, 주님의 덕목, 그 진리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모든 피조물의 영혼 속에 반짝이고 있은 그 보석을 비로소 발견하고, 만족한 미소를 지을수 있게 된다.
15903 1990. 8. 23 (목)
어제도 불볓더위.
태풍이 하나 북상한다고 하더니 슬며시 동쪽으로 지나가 버리고, 더위에는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틈을 내 치과에 들러 왼쪽 윗 어금니를 슈퍼본드로서 완전히 고착시키다.
이제 이 금속잇빨은 죽을때까지 내 몸의 일부가 된 것이다.
늘 부담스럽던 국내 조선소 생산협의회의 개최를 9월 4일 하기로 기안해 올려 버린다.
꿈, 대훈 고모부님이 대선의 Sh 씨 로 부임해 오다.
오늘 운전 면허 주행시험.
벌써 몇번째 실패하였는가.
오늘 편안한 마음으로 침착하게...
15904 1990. 8. 24 (금)
회사 빠져나와 덕포행.
주행실기 시험.
또 미역국, 이번에는 경사코스에서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내 딴에는 미끄러지지 않고 멋진 기어 변속으로 통과하였는데.
새벽의 바다풍경은 점점 추색의 절묘한 풍경화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J는 함지골에서 물길어 베낭에 질머지고 땀 범벅이 되어 돌아오고.
15905 1990. 8. 25 (토)
따가운 볕살 속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가을의 촉감.
그러나 아직도 무더위의 위광은 찬란하다.
중동, 일촉즉발.
자연이 주는 여가의 즐거움과 과학이 주는 여가의 즐거움.
이 여름에 사람들은 전자의 즐거움을 추구하여 바캉스를 떠나지만 기실 피서지에서 기를 쓰고 얻고자하는 것은 후자의 즐거움이다.
에어커, 모타보트, 아이스박스, 선풍기....
바캉스는 집안에서 보내도 동일하다.
단지 배경의 그림만 다를 뿐이다.
15906 1990. 8. 26 (일)
사랑과 온유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지극히 단순하며 간단명료한 것.
도를 닦거나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획득할수 잇는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사고하여 추론해서 도달하는 그런 지식이 아니다.
무릇 이해하여 파악하고 인식해야할 그런 객체가 아니다.
물 스미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품성이다.
옛날, 팝송.
칸타비레,수다방, 코지코너.
당시 들었던 음악을 나는 대부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 아무리 구상유취했을지언정, 나는 지금 아름다움으로 그 노래들을 느낄수 있다.
이런 비유는 적절할까.
날달걀은 흰자와 노른자의 구별은 있으나 얼마든지 혼화할수 있으나, 삶아 버리면 그 구분은 이제 너무나 명확하여 혼화할수 없게 된다.
방충망, 무수히 작게 나뉘어진 사각의 격자를 통하여 보는 풍경화.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그 풍경화를 보라.
그곳에는 동화가 있다.
평화로움이 있다.
모기에게 뜯기지 않으려고 처 놓은 방충망을 통하여 보이는 세계는 훌륭한 동화이다.
15907 1990. 8. 27 (월)
어제 일요일, 현장서 돌아오면서 이덕찬씨와 맥주.
결국 그의 집까지 간다.
헌헌장부의 아이들, 이덕찬씨 마누라의 괄괄 웃는 활달한 웃음에서, 헐렁뱅이인 듯한 이덕찬씨 팔자의 다행스러움 엿보인다.
가장은 가장으로서, 주부는 주부로서,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어떤 한국적인 구조의 안정감.
또는 가정적 시스템의 효율적인 세련됨(?).
나나 J는 이토록 세련되지 못하였다.
돌아 온 집, 가스폭발로 J는 혼비백산.
俊이가 허겁지겁 수습하였다고.
J의 호들갑스러움, 俊이의 침착함.
월요일, 아이들 오늘부터 개학.
마침 선선한 바람이 분다.
오늘 현대, 삼성, 대우, 한진, 타코마, 신아, 대덕연구소등에 FAX 띄어야 하고, 회의 자료도 만들어야 한다. 출근도 하기전 마음부터 바쁘다.
15909 1990. 8. 29 (수)
진수공정의 초단위의 TIME SCHEDULE에 의하여 급박하고 정밀하게 진행되는 과정은 긴장의 시간이다.
조선공학과 관계없는 구조역학과 유체역학과 타이밍의 기술.
배는 스르르 미끄러져 간다.
조선현장에서 FAT진수는 하나의 예술적인 이벤트.
따가운 한낮의 햇살.
하늘은 푸르게 높고, 가녁으로는 보기에도 너무 풍성한 흰 뭉게구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퇴근하면서 세동, 철수등과 소주 마신다.
그들은 나름대로들 내게 무언가 생활철학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지만 나는 진지하게 듣고 있지 않는다.이것이 내 술마시기 폼의 건방진 전형이다.
芝蘭之交- 참 아름다운 숙어.
나의 지란지교의 그대는 어디 있는가
15910 1990. 8. 30 (수)
감사. 감사.
생산관리부로 전보된다는 인사이동의 소식이 포착된다.
감사 감사.
3년의 질고 끝에 주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기쁜 이벤트다.
현장을 벗어 남.
현장은 현장에 맞는 기질이 있는 법인데 나는 전혀 아니었다.
이 악물고 견뎌낸 3년의 현장은 그야말로 질고의 세월이었다.
곧 나의 기질에 익숙한 곳으로 보내 주신다는 주님의 메시지.
이 직장에 더 붙어있어도 좋은 것이다.
이제 견딜수 있겠다.
그 의미는 이제 주님이 가르처 주실게다.
부디 칼자루 쥔 그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게하여 고이 관리부서로 옮겨주시기를.
여름도 나의 현장과 함께 소멸되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