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춘복이는 기어이 옹구네를 다그쳐 자기를 부축하게 하고는 농막에서
막 나오는 중이었다. 피떡이 지게 엉겨 붙었던 봉두난발이 이제 좀 더부수
수 가닥이 흩어지는 대가리로 변한 것이, 일어설 만한 것 같았다. 제법 날
이 간 것이다.
기력이 웬만하여 아까는 개울가에까지 나가 모처럼 시원하게 머리도 감았
는데, 그 수발을 들던 옹구네가 무슨 방정으로
"아이, 옹구네 시앗잉가 애긴씽가 작은아씽가 머잉가가 어디로 갈란다고
나보고 차표 끊어 도라고잉, 치매 저구리감이랑 얹어서 표값주데?"
라고 한 것이 그만 화근이었다.
찬 개울물에 머리통을 담그었던 춘복이가 푸우우, 그대로 물젖은 대가리를
살모사처럼 쳐들어올리며 홰액 털어내더니
"아고고, 왜 이런당가, 잉?"
깜짝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물러앉는 옹구네를 향하여
"머시 어쩌고 어쩌?"
후려쳐 잡아먹을 듯 벽력 같은 고함을 치며 대들었다.
"어매, 벨일이네에. 그 빨래 누구보고 허라고, 저 저, 엊그저께 꼬맨 새옷에
물 다 묻네, 저, 저, 뚝, 뚝, 뚝. 아이고, 이렇게 해 바 좀. 아 그렇게 안허고
는 말 못헌당가? 말은 머 입으로 허제 대그빡으로 히여어? 원, 참말로. 오
뉴월에도 넘의 물은 차당만 기양 이렇게 나한테다 다 쳐뿌레 놓고는잉."
무안한 김에 춘복이를 나무라면서 다음 말을 추리려는데, 춘복이는
"누가 뀌민 일이여? 이? 누구냐고. 누구냐고요오."
하며 조금도 윽박지르는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저 썩을놈으 냐고요, 냐고교오."
춘복이 말꼬리를 잡고 토라져 '요오'에다 심을 박아 매차게 반격하는 옹구
네 입술에 독이 오른다.
"아직도 말을 못 놔? 내가 넘이냐? 내가 넘이여? 저 오살놈으 냐고요. 사
램이 천냥 빚도 말 한 마디로 갚고, 아 다르고 어 다르단 말도 있는디, 똑
저렇게 공든 탑 발로 차는 소리만 개레감서 히여. 그래 바. 어디. 무신 이
문이 그렇게 많이 남능가."
트집 잡을 일이 생겨서 얼씨구나 싶어 물고 늘어지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
런 순간을 당하면 예나 지금이나 한치도 더 가까워진 바 없는 춘복이와 자
신의 거리 절벽에 분통이 터져, 옹구네는
"에라이, 잡녀르 세상, 어뜬 년은 잘 먹고 잘 사능 거이여, 시방. 다 뚜드러
깨부러 기양. 나도 머 서 발 장대 휘둘러도 걸릴 것 없는 노무 인생잉게
어디 막보기로 해 보까아아?"
춘복이 턱밑어다 제 고개를 흔들며 사납게 들이밀었다.
그런데 이런 협박이 오늘은 통하지 않았다.
강실이가 어디로 멀리 아무 곳으로나 몰래 떠나련다고 소문내지 말고 차표
구해달라 했다는 옹구네 말에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춘복이는
성난 짐승 같았다.
하지만 옹구네는 금방 몸짓을 바꾸어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 주고, 젖
은 옷은 벗겨 내어 갈아입힌 뒤, 언제 그랬느냐는 낯꽃으로 옹구네가 춘복
이 농막의 정짓간에서 솔가지를 툭, 툿, 부러뜨리며 저녁 죽쑬 준비를 하는
데.
"나 좀 붙들어 주시오."
춘복이가 방에서 정지로 난 지게문짝을 탕 열어제치며 우악스럽게 말을 내
뱉었다.
"왜, 멋 헐라고? 칙간에 갈랑가?"
옹구네가 무릎에 묻은 솔이파리 검불을 털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칙간은 무신. 상놈이라고 처먹고 똥만 싸능가?"
지랄허고 자빠졌네.
"긍게 왜 그러냐고. 시방 밥 허는디 때 맞춰서 어디 마실 갈라간디? 다리
도 성찮음서, 어쩔라고. 머 말 못헐 디여?"
"그렁게 붙들어 도라고 안허요?"
"아 자개 혼자는 한 발짝도 띠여 놓도 못헐람서, 말을 해야 데꼬 가제."
"와서 붙잡기나 허란 말이요."
"곧 죽어도잉, 오기는 있어 갖꼬. 탕탕 큰소리 쳐감서 시게묵을 마느래 있
어서 큰 뵉이네, 뵉이여. 나 없었으먼 어따가 저렇게 외장을 쳤이꾜. 누가
저 꼴을 바?"
근래에는 안 그러다가, 지금 무엇이 튀틀렸는지 꼬박꼬박 말을 올려붙이는
춘복이 속셈을 언뜻언뜻 헤아리던 옹구네가 일부러 자신을 '마느래'라고 오
금박는다.
그 말에 춘복이는 낯색을 좀 구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별 토를 달지는 않
았다. 그것만 해도 옹구네로서는 다행이었다. 이쯤해서 누그러져야지 더 뻗
대면 아무 이득이 없는지라, 옹구네는 솔가지를 놓고 낫낫하게 춘복이 팔
을 끼며 일으켜 세운다.
"어디로 행차를 허실라고? 우리 서방님. 아조 머리끄장 깨애깟이 빨어서
고실고실 해 갖꼬. 한량맹이로. 날 다 저무는디 등 잡어 디리까아?"
옹구네가 잔뜩 아양을 떨며 춘복이를 한 팔로 둘러 보듬어서 부축한다. 춘
복이는 농막을 벗어나 고샅으로 나설 때까지 화를 참는 사람처럼 뚱한 주
둥이를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앗따아, 무섭네잉. 어디 가냥게."
제 볼따구니를 춘복이 어깨에 살그머니 얹어 부비며 옹구네가 물었다.
"옹구네 집이로 가요."
"엥?"
퉁명스러운 춘복이 대꾸에 소스라쳐 옹구네는 하마터면 휘청 헛발을 디딜
뻔하였다. 춘복이는 그런 옹구네를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옹구네 가슴이 퉁게퉁게 뛴다.
"왜? 멋 헐라고 안허든 짓을 헌당 거이여?"
"내가 거그 가서 헐일이 있소."
"나 여그 있는디, 나 없는 집이 가서 먼 일을 헐라고?"
"앞장 스시오."
"뒷장을 스드래도 영문을 알어야제."
옹구네 음성이 긴장에 퍼득인다.
"나 시방 가서 애기씨를 좀 만날라고 그러요."
오, 그러먼 그렇제. 내 그럴 지 알었다.
"만나서 멋 허게?"
"그렁 것은 내 소관잉게 상관 말고."
"시방 자개허고 내가 니 소관 내 상관이 따로따로여?"
"말꼬랑지 붙잡지 말고. 헛기운도 없는 놈잉게."
"헛기운도 없는 사램이 무신 기운으로 넘의 심끄장 빌려감서, 이 밤중에
그 사람을 만나로 가냐는디. 왜 말을 못허까? 아니 왜, 머 내가 알먼 깨방
노께미, 애끼니라고 고렇게 엿 붙잉 것맹이로 입 딱 닫고가? 잉?"
옹구네가 발을 구른다.
"우리 집이로 뫼시고 갈라고 그리여."
"누구를? 나를?"
"작은아씨를."
그 짧은 말에 옹구네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왜? 멋 때미?"
"안되겄어, 인자 더 이상은."
"머이 안된디야?"
"나 긴 말 헤기 싫고, 시방 당장 내가 우리 농막으로 뫼시고 가서, 내 눈앞
으다가 딱 앉혀 놓고 조석으로 디다바야만 안심을 허겄다고요."
"보듬고 앉어서?"
옹구네 눈구녁에 새파란 인광이 뻗친다.
"보듬고 앉었든지 이고 섰든지."
"그건 자개 알어서 헐 일이당거이여?"
"인자는 그만치 상관했으먼 내 일은 상관 마시오."
툼벙, 내뱉는 춘복이 말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옹구네는 춘복이를 감고 있
던 팔을 잽싸게 풀어내더니, 그만 눈 깜짝할 사이에 뒤로 확, 밀어 자빠뜨
려 버린다.
아구구우, 아이구 주쿠.
밭고랑으로 자빠진 춘복이가 나뒹구는 소리를 하며 비명을 지른다.
"죽을래? 죽을 티여? 참말로 기양 칵 죽어 부릴 거이여어? 죽을라먼 상감
님 턱을 못차? 니가 나를 차고 살 것 같으냐아? 이이잉? 야, 이, 웬수놈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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