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4. 9

카지모도 2016. 6. 24.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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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3 1994. 9. 1 (목)


여전한 더위.

사무실을 벗어나면 사뭇 찜통이다.


윤정모 '그리고 함성이 들렸다'

일제시대 소록도 이야기.

문둥이라는 천형의 실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민족적 반제국주의의 시각으로 소록도를 그리고 있다.

윤정모답게.


서면기업 KS용 사장.

일본 다녀왔다고 양주 한병을 선물한다.

몇 올의 머리카락을 캪으로 감추고, 웃으면 양쪽 입꼬리가 애교스럽게 말려 올라가는, 조선쟁이치고는 드물게 음악과 사진등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그.

그가 나를 좋아하듯이 나도 그에게 짙은 호감을 갖고 있다.


17374 1994. 9. 2 (금)


어제부터 영도지역도 통근버스 운행.

이른바 모찌꼬미의 관광버스는 에어컨 바람도 시원하고,

승차인원이 적을까봐 염려하였지만 영도를 한바퀴 도는 동안 차안은 가득 찬다.


이것도 노조의 강력한 협상 덕분이다.

그동안 태워준 PP갑 의 차에게 감사.


늦더위 더욱 기승.

대구는 37도를 웃돈다고.

정말 올해의 더위는 유별나다.


GUARANTEE ENGINEER로 승선하여 지금 태평양 항해중인 노재희, 부친 간암말기로 장남을 찾고 있다.

선주와 교섭하여 급히 귀국 시켜야 한다.

텔렉스 넣고 노재희와 교신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꿈- 손철수, 서울사람, 부산문둥이.

고상함, 저급한 정서.


17345 1994. 9. 3 (토)


어제 9월의 기온으로는 부산 기상대 생기고 나서 처음이라는 35도.

올 더위는 미증유의 그것이다.


고베에 있는 'JIN TENG'호와 교신.

노재희와 통화하다.

오늘 요코하마에서 하선 귀국할 것이다.


英이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모습이다.

공부보다는 서클.

약속한대로의 새롭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17378 1994. 9. 6 (화)


비는 어제도 내리지 않았다.

한반도 이 좁은 땅덩이에도 곳곳마다 비의 양이 천차만별하니, 지도로써 보듯이 그렇게 좁은 면적도 아닌 모양이다.

아니, 내게는 이 나라 반동강이 땅일망정 좁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어디를 가 보았다고?

어느 땅을 제대로 밟아 보았다고?

서울과 부산 이외 어느 고장을 제대로 체험한 적도 없으면서.

아니 아니 서울이라고 부산이라고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이 있던가.

서울이라는, 부산이라는 거대한 이미지로서, 하나의 관념으로서, 하나의 선입관으로서 알고 있을 뿐.


나처럼 실로 나처럼 썩은 물처럼 고여있는 게으름은 없을 것이다.

그러하니 편협한 보수꾼, 쇼비니즘의 사고영역에서 허위적거릴 밖에.

움직이지 않는 자. 행위하지 않는자.

관념론자.


4시도 안된 새벽.

쏴-하는 빗소리.

반가움.


내 방 불밝혀 앉아 성경도 뒤적이고, 불 꺼 어둠 속에서 기도 드린다.


17379 1994. 9. 7 (수)


아침저녁 제법 선선한 기운이 감돈다.

한때는 盛夏, 생명이 환희의 절정을 구가하던 계절, 초록의 오르가즘의 여름, 그 여름도 두서너달 군림하고 나면 그만 지겹고 짜증이 나는데 올 여름은 더욱 유난을 떨었다.


남녀의 사랑이라는 것, 연애감정도 결국 이에 다름 아니다.

무릇 사랑을 꿈꾸는 이여, 말하노니 사랑이란 초록과 같음이노라.

영원을 꿈꾸는 이여.

영원의 본령은 감성의 영역에 존재치 않노니, 보이지 않는 그 곳에 있겠노라.


俊이 시험중.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

유홍준의 미적 안목은 대단하고, 금상첨화로 글솜씨 또한 매우 뛰어나다,

게다가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씨가 있으니.


17381 1994. 9. 9 (금)


신변잡사.

먹고, 씻고, 자르고, 누고, 후비고, 닦고, 바르고, 깎고 하는 것들에 나는 유별나게 과도한 부담을 느낀다.

일종의 정신신경 질환이 아닌가 할 정도.

결벽증.

청결예배, 세척강박


오, 거듭 깨닫노니 나는 이 육신의 사소한 사육에서조차 벗어날 수 없는 천품이노라.

그러하므로 꿈꾸는바 창공은 드높을수 있으나 버러지의 껍데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숙명에 수시로 절망하노라.


가을은..


17383 1994. 9. 11 (일)


작취미성의 토요일.

SB-408 재시운전.

3시 넘어 귀환.


한낮에는 아직도 올여름 맹위의 흔적이 남아있다.


집에 돌아와 마루에 퍼질러 앉아서 맥주를 마신다.

쓰린 속을 달랜다는 뱃속의 핑계.


俊이.

학급 5등, 계열에서 9등.

전국 계열에서는 92.5% 수준.

국어는 껑충 뛰어 1등.

수리탐구 1,2는 여전하고.

이번 성적은 좋았다.

俊이 왈 '자기는 수능에 강하다고.

글쎄..

부산대학 영문과는 꿈일까...


17384 1994. 9. 12 (월)


스스로에 엄격하고 단정한 자세.

이것은 뚜렷한 가치관에 의해 교육되는 가정교육에서 비롯된다.

내 가정에는 이것이 없다.

물론 이는 나의 탓이다.


자상하고 부드러운 품성.

부드러움, 웃음, 배려, 편안함..

내 가정에는 이것이 없다.

이것은 거의 J의 탓이다.


무력감-

부모 자식간의 척박한 일상의 언행들.

명색 가장짜리는 무력함과 자괴감으로 자포의 술이나 마실 뿐이다.

나의 가정은 정녕 실패하려는가.


선뜻 가을이 온다.

가을은 오는데 나는 생명의 의미 속으로 침잠할수 있을까.


내가 실존의 참담함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궁구하여 도달한 철학적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표피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17385 1994. 9. 13 (화)


가을은 찾아온다.

그리하여 여름의 혼곤함에 익숙해 있는 정신들을 홀연히 일깨워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한다.


잠자리의 한기 때문에 아주 낮은 등급의 회색수면.

꿈- 여자가 되어 일본거리를 헤매다 치근대는 일본 영감을 칼로 찔러 살해한다.

그 섬뜩함과 쫓기는 공포감이 너무 리얼하였다.

빳빳한 지폐뭉치를 세는데 그건 지폐가 아니고 양말짝 뭉치...


이동도서관에서 스테판 킹 '부적'빌리다.

소설이란 그렇다.

일단은 아이디어다.

주제나 구성이나 문체는 다음 문제이고 우선은 아이디어다.

그 아이디어를 창출케 하는 것은 재능도 중요하겠지만 관심과 노력의 결과일것.


17386 1994. 9. 14 (수)


어제 총무상무와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전라도 길을 달린다.

순천, 나주, 다시면 월태리 월명부락.

P상무의 모친상.

교통사고, 78세.

홀로 남은 80넘은 영감님, 마누라를 보내고 허허 웃는 그 뒤에 숨은 절절함을 나는 느낄수 있을 것 같다.


전라도-

전라도의 흙은 과연 붉었다.

그리고 관계의 정은 "~잉"하고 붙는 어미의 발음과 같이 끈적하다.

전라도 시골의 그 관계 관계의 모습들은 내게는 울고싶은 그리움의 무엇이다.

고향이라는 단어.

나는 전라도를 사랑한다.

고작 이틀 동안의 전라도 붉은 땅의 체류였지만 나는 전라도 땅을 사랑한다고 느낀다.


돌아와 다시 부산.

살이들.

모듬살이들.

그 모듬이란 단어의 따숨이여.


17388 1994. 9. 16 (금)


한가위 닥아온다.


어머니 뵌지도 오래되었는데 추석때 찾아 뵐 것을 핑계로 미루고 있는가.


스테판 킹 '부적'

1권은 일단 시시하다.

스릴과 서스펜스는 아직 뵈지 않고 어설픈 S.F의 지루함만 가득하다.


17389 1994. 9. 17 (토)


P상무 모친 장례 마치자마자 4일만에 출근.

어지간한 사람이다.

일중독이 아니고서야.


칠십여덟, 차에 치어 비명횡사한 어머니라는 의미는 그에게 있어 무엇일까.

P상무에게는 생과 사라는 개념은 그저 하나의 일상적인 흑백구도일 뿐인 듯 싶다.

그 생사관은 어찌 보면 백번 옳으신 생각.

어쩌란 말이냐? 따라 죽지 못할바에야 어쩌란 말이냐.

피할수도 회복할수도 없는 절대절명의 그 개념을 어쩌란 말이냐.


나 또한 그 죽음이 내 어머니에게 어느 날 닥처 온다고 하여서 그래 어쩌란 말이냐고.


내일부터 추석 연휴.

한가위.

오십을 바라보는 중늙은이는 관계의 따스움이 없어 즐겁지 아니하다.


척박하고 황량한 이 영혼을, 저 영혼을 도우소서.

주재여.


17390 1994. 9. 18 (일)


연휴 전일.

울긋불긋 포장꾸러미도 요란한 선물 꾸러미들.

상품권, 티켓봉투들 여기저기서 오간다.

대선조선에 빌붙어 사업하는 거래처, 협력업체, 메이커, 납품업체.

그들은 명절때마다 골치가 아플 것이다.

영업의 누구누구, 생산의 누구누구, 검사의 주구누구, 구매의 누구누구, 경리의 누구누구...

전해주는 방법도 연구해야 하고.


쓸쓸하다.

명절의 울긋불긋한 들뜸 속에서 나는 오히려 쓸쓸하고 고독한 것이다.


집에 돌아와 패스포트 양주 한병을 내 방에 앉아 비우고,나의 쓸쓸함을 취하게 한다.


새벽 1시 30분 기상.

목욕, 닭우는 소리.


17392 1994. 9. 20 (화)


고향, 연어와 같은 회귀생물처럼 귀향하는 무리 무리들.

땅과 산과 강 그리고 피로서 얼기설기 얽힌 그 짙은 관계의 서러움...


눈을 감는다.

출렁거림으로 닥아오는 저것은 빛인가 어둠인가.

덩더꿍 덩더꿍 춤추며 닥아 오는 저것은 절망의 몸짓인가 소생의 카니발인가.

까르르 까르르 목젖보이는 웃음으로 닥아 오는 저것은 오오, 한낱 감각의 마스터베이션인가.

술잔 부딪는 소리인가.


오늘은 한가위.


17393 1994. 9. 21 (수)


추석.

어머니, 형, 형수, 조카, 가야숙모, 동은이, 주은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다.

화창한 날씨.


택시타고 사직동.

장인, 장모, 처남, 처남댁들, 조카들...

장인의 전립선.

지난 번보다 신색이 한결 좋으시다.


17394 19940. 9. 22 (목)


4일차의 휴가.

J는 S형이 집 마실, 英이는 어김없는 외출.

두 부자만이 남아 밥을 차려 먹고..


20세를 갓 넘은 야수의 집단들.

장난처럼 사람을 죽인다.

담을 키운다고 인육을 씹고 시체를 소각한다.

한적한 곳에 살인공장을 차려 놓고.

더 못죽인게 한이 된다는 인터뷰에서의 그 증오의 눈빛.

아무런 원한도 없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그들의 증오심의 근거는 무엇?

끔찍함을 넘어서 어떤 짐승의 경지에 들어선 동물세계의 신기함...


17398 1994. 9. 26 (월)


가을.

한낮은 무덥다.


범일동 상록회관.

사내 커플인 이종엽과 백화승의 결혼식.

하얀 턱시도를 입은 젊은이.

정년퇴직한 염효동씨도 만난다.


다시 지하철 타고 남포동으로.

책방들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철학'.


그리고 J와 英이 만나 용문각 중국집.

탕수육과 고량주.


인파, 인파.

큰길은 물론 골목마다 범람하는 사람의 물결.


꿈을 기록하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웬일인지 꿈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드러내기 싫다는 무슨 방어기제가 작용하는지.


슈베르트 현악사중주.

알레그리 사중주단.


가을.

기도.


17401 1994. 9. 29 (목)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상당히 재미있다.


한낮에는 아직도 덥지만.

하늘은 투명하다.

돌담집, 잠자리, 코스모스 그리고 아련한 사념 한줄기.


PS곤, JN영, KH근 만나 흠뻑 취한다.

PS곤, 옷가게 곧 개업.

1억이 훨씬 넘는 투자.



17402 1994. 9. 30 (금)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한 작취미성의 몰골로 허둥지둥 통근버스 오른다.


태풍의 간접 영향권.

온종일 바람은 으르렁거리고.


꿈- 갈대 우거진 한강변, 무당집의 아들, 사나운 개, 여자 택시 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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