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다자이 오사무’에 대하여 -6-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07
728x90

 

 

[‘다자이 오사무’에 대하여] -6-

 

15

 

<자연 속에 안겨 과거의 마른 뼈 속을 더듬어야 하는가. -월든->

인문(人文)은 관습과 제도와 종교, 그리고 사고(思考)의 틀과 기질을 만든다.

세월 따라 본질은 후패(朽敗)하지만, 세월에 의하여 그에서 파생된 더께는 인류의 집단무의식 속에 더욱 강고히 고착(固着)된다.

우리의 자아를 지배하고 있는 도그마(dogma)는 ‘과거의 마른 뼈’, 그것이다.

도그마는 순수(自然)에 대하여 오만하고 타(他)에 대하여 완고하다.

 

개별의 삶에다가 자꾸 능동(能動)과 적극(積極)을 부추긴다.

그건 자연과 조화로운 삶의 방식이 아니다.

자연과의 본원적 관계에 있어서 존재란 본시 수동성(受動性)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과 영화 ‘안경’의 온유함과 평화로움.

 

생각건대, 삶을 대하는 수동성(受動性)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 성정(性情)이다.

그러니까 누구나 내면에는 조금씩 다자이 오사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사무가 과(過)하여 자훼(自毁)의 경지에는 이르지 않더라도 말이다.

 

처처(處處)의 불쌍한 것 부당한 것들을 접할때면 마음이 몹시 불편하여 쩔쩔매는 사람들.

위고가 말한 ‘너의 행복의 넘침에는 언제나 남의 몫이 들어가 있다.’식의 얘기를 들으면 괜히 미안하여 마음이 송구해지는 사람들.

‘이기적 유전자’에 살짝이라도 반기(叛旗)를 들수 있는, 타(他)의 불쌍함에 대한 연민으로 기꺼이 베풀려하는 사람들.

 

적극가치(積極價値)가 지배하는 세상의 구석에서 수동성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세상 속에다 무작정 들이대지 못하는, 마냥 뻔뻔스럽지 못하는 사람들.

엉거주춤 그렇게 어색하게 살다 가는 사람들 어디 한 둘이랴.

그런걸 유독 진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를테면 오사무의 종족들이다.

 

이데올로기

자본(資本)과 공산(共産).

오사무의 종족들은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의 자본주의적 세상에서는 패배자로 살기 십상인 사람들이다.

또한 욕망이 제어되고 관리되어지는, 집단사고가 지배하는 사회주의적 세상에서도 숨쉬기 힘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구의 삶을 체념하고 다른 별을 그리워 한다.

제3의 세상은 없는가하고.

 

아, 모두들 세상에 익숙한 척, 노련한 척, 굳센 척 잘들 살아 내고 있고나.

허세(虛勢)인가, 공갈인가, 혹은 다테마에(建て前)인가.

혹 그대들 내면아이는 신음하거나 울고있는건 아닌가.

 

오사무의 절망과 허무, 그리고 자의식과잉.

자의식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어떤 소년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이 떠오른다.

과잉된 자의식.. 열등감, 수치심, 외로움, 소외감, 결핍감, 부끄러움. 대인기피.

오사무의 죄의식, 자기부정과 자학(自虐)이 똑 자기 것처럼 느껴졌던.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레 가지고 있는듯한 보편적인 사고방식과 생활감각에 적응하지 못하여 짓는 피에로의 웃음.

뻔히 들여다보이는 상대의 ‘혼네(本音)’를 대하는 나의 리액션은 어떻게 해야하냐하는 문제는 실로 고민중의 고민.

‘다테마에(建て前)’에 맞추어 대응해야 하느냐 혼네에 맞추어 대응해야 하느냐...

그 이중구조(二重構造)의 인간성이란 내게 참으로 난해(難解)한 것이었다.

그런 경우의 내 어릿광대는 어쩔수 없는 방어기제인 것이다.

 

<저는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는 만족스럽게 말도 하지 못할 만큼 나약한 성격이고, 따라서 생활력도 제로에 가깝다고 스스로 느끼며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염세주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삶에 그다지 의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생활의 공포에서 도망치고 싶다,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고 싶다는 등의 일만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온 성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저의 성격이 저로 하여금 문학에 뜻을 두게 한 동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저것 생각을 떠올리다보면 저는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제 문학관이나 작품이 술에 좌우될 것이라 여겨지지는 않지만, 단지 술은 제 생활을 상당히 흔들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사람을 만나도 만족스럽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걸, 저렇게도 말했으면 좋았을 걸 하며 분해합니다. 언제나 사람과 만날 때면 대부분은 어질어질 현기증이 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성격이기에 끝내 술을 마시게 됩니다. 잠자리에 들어서 여러 가지로 그 개선책을 기도(企圖)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죽지 않으면 고치지 못할 정도로까지 되어버린 듯합니다. -수필 중에서->

 

<이웃사람의 고통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어느 정도의 것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밥을 먹기 위해 사는지, 돈 때문에 사는지. -인간실격->

 

<결국 나는 인간의 영위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 자신의 행복과 관념과 온 세상 사람들의 행복과 관념이 전혀 딴판으로 어긋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불안, 거의 발광상태에 이를 것 같은. -인간실격->

 

아래 글은 다름아닌 바로 나의 내면을 오사무가 대신하여 얘기하고 있는듯 하였다.

 

<나는 화를 내고 있는 인간의 얼굴이 동물 야수의 본성을 보는 것 같아서 너무 무섭다. 이를테면 소가 풀밭에 조용히 누워 있다가 돌연 꼬리를 치면서 뱃가죽에 붙어있는 등에를 후러쳐 죽이는 것 같은, 갑자기 인간의 무서운 정체를 분노에 의해서 폭로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언제나 머리카락이 거꾸로 서는듯한 전율을 느끼며, 이 본성도 인간이 살아가는 자격의 한가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나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을 느꼈던 것입니다. -인간실격->

 

슬픈 위악(僞惡), 혹은 슬픈 어릿광대.

피에로가 되어서 가장하는 미소, 기묘하게 찡그리며 웃고 있는 피에로의 얼굴.

 

<그것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하나의 수단이며, 믿을 수 없고 두렵기만 한 인간에 대한 사랑할 의지를 버리지 않으려는 어린 요조의 ‘익살의 윤리’>

 

오사무의 슬픈 귀족(貴族), 그 한 조각 내게도 없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처럼 세련되고 아름다움에 이르기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것이었지만.

기품과 오만함,

자존(自尊)과 나르시시즘.

고아한 감성과 세련된 기교.

그리고 역설의 미학.

퇴폐스러운듯 순결함.. 화려한듯 소박함.. 수락된 허무와 절망이 주는 따스함 같은,..

그리하여 오사무는 내게 하나의 '쁘띠뜨 프라즈' (일종의 이미지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 나오는 개념)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건대 인간성의 원형질이 희구하는 진짜배기 아름다움이란 ‘적극적인 불사의 욕망’에는 있지 않은 듯 하다.

허무와 멸망과 불쌍함이 내포되지 않은 ‘삶의 욕망’은 내게 아름답지 않다.

랭보, 고호, 슈베르트. 제임스 딘, 오자키 유타카...들은 왠지 아름답다.

흐음, 요절한 예술가들이라 그런가.

 

16

 

<선택된 황홀과 불안 이 두가지 내게 있으니.>

의미심장하고 현란한 아포리즘으로 직조(織造)한 단편 ‘잎’의 서문(序文)으로 오사무가 차용한 ‘베를레느’의 시(詩)다.

 

선택된 황홀, 선택된 불안.

당디의 황홀과 실존의 불안을 말하는가.

 

불안.

오사무에게 있어서 자신의 내면(內面)과 지극히 부조화(不調和)스러운 바깥세상은 불편함을 넘어 불안 그 자체였을 것이다.

불안한 세상속에서 헐떡이는 자신의 생명, 스스로 생경(生硬)하여 마냥 낯설었을게다.

그리하여 존재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 같은게 싹이 터서 불안과 죄의식은 그의 영혼에 실존적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영혼은 깊은 우울(憂鬱)에 잠겼다.

 

<그렇다면 나는 평생 이런 우울과 싸우다 죽게 되겠구나 생각하니 자신의 처지가 애처로웠다. 초록빛 논이 갑자기 뿌옇게 변했다, 운 것이다. -잎->

 

그의 위악(僞惡)은 그러니까, 그의 우울이 세상을 향하여 내지르는 패러독스의 주정(酒酊)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수 있는가? 타인들의 기쁨과 괴로움을 제 것으로 하지 못하면서, 그들과 한 통속이 되지 못하면서 어찌 그들과 함께 살수 있는가? 인생에서 참으로 견딜수 없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그렇다면 오사무가 가납(嘉納)할 세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했을까.

오사무는 때로 고전적 그리스를 꿈꾸었나 보았다. (고대 그리스가 그토록 순수하고 낭만적 세계관에 합당한 세상이었는지 천학(淺學)의 나로서는 모르겠다.)

 

<낭만적 완성 또는 낭만적 질서라는 개념은 우리를 구원한다. 아 고전적인 완성, 고전적 질서, 그러나 그리스를 동경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분명 세상에 두번 다시 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단념해야 한다. 나는 너에게 죽을만큼 괴로운 연정을 담아 경배한다. 그리고 말한다. 안녕이라고. -수필 중에서->

 

좀 시니컬한 유모어를 곁들여 이렇게도 썼다.

 

<완전히 새로운 사조의 대두를 열망한다. 그 말을 하려면 먼저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지금 꿈꾸는 경지는 프랑스의 모럴리스트들의 감각을 기반으로 하고 그 윤리의 의표를 천황에 두고 우리 삶은 자급자족하는 아나키즘풍의 도원경이다. 나는 새로운 윤리를 수립하는 거야. 미와 예지를 기준으로 하는. 아름다운 것은, 영리한 것은 모두 옳다. 추함과 우둔은 사형이다. -수필 중에서->

 

어쨌든 오사무는 개별적 욕망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사회의 이기적 인간성을 못견뎌 하였음은 분명하였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의 이념지향적 인간성에 동조하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사무와 같은 영혼이 아이디얼(ideal)한 이념가치가 지배하는 집단사고의 현장에서 어찌 숨을 쉴수 있었겠는가.

 

<하나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헌과 아홉의 부르주아에 대한 공헌이라고 넌 말했지? 뭘 가리켜 브루주아에 대한 공헌이라고 말하는지? 자본가의 호주머니를 살찌우게 하는 점에서는 우리든 프롤레타리아든 마찬가지야. 자본주의 경제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배반이라면, 투사는 어떤 신선이 되는 거냐구? 그런 말이야말로 극단주의라는 거야. 소아병이라 부르는거다. 하나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헌, 그걸로 충분해. 그 하나가 소중한거야. 오로지 하나를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살아 가야 하는거야.>

 

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적 실패를 예견(豫見)하였을까, 이런 아포리즘도 남겼다.

<밖은 진눈개비, 무엇 때문에 웃고 있나, 레닌 동상은...>

분명한건 그가 변증법적 역사발전 따위를 믿었을 리가 절대로 없다는 점이다.

 

거듭, 오사무가 동경한 것은 순수(純粹)였다.

 

<나는 순수를 동경했다 무보수의 행위. 전혀 이기심이 없는 삶. 내가 가장 증오한 것은 위선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지난한 일이었다 나는 그저 홧술을 마실 뿐이었다. -수필 중에서->

 

그가 말하는 순수란 무엇일까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련다.

‘과거의 마른 뼈’에 오염되지 않은 착(善)한 마음, 이를테면 ‘마태복음 5장과 6장’의 ‘예수의 마음’이다,

조직신학(組織神學)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예수의 마음'.

사랑, 연민, 친절, 가난, 무욕, 온유, 화평, 기쁨,...

 

다시 말하건대, ‘과거의 마른 뼈’는 더께를 더할수록 탐욕스럽고 추악해 진다.

그것이 ‘삶의 방식’의 도그마(dogma)가 되어 시대(時代)를 사는 인류를 장악한다.

도그마는 ‘늘 새로운 예수’의 ‘안터(오사무의 언어유희, 대의어)’이다.

‘예수 마음’의 적(敵)이다.

그 적을 향하여 ‘비둘기의 순결함과 뱀의 지혜’를 가지고 나아가라고 예수는 말씀하였다.

 

아뿔사, 그런데 오사무는 비둘기의 순결함은 지녔으되 뱀의 지혜가 결여되어 있었구나.

좀 더 교활하였으면 좋았을걸.

 

소신공양(燒身供養).

그리하여 오사무는 스스로 번제물(燔祭物)이 되었다.

 

오사무의 자아가 꿈꾸었을 혁명(革命).

그것은 에고이즘, 인색함, 위선(僞善)과 허위의식(虛僞意識) [일본인의 다테마에(建て前)는 얼마나 장식적(裝飾的)이면서 치명적인가, 그들은 ‘다테마에’로 스스럼없이 자기 배(腹)를 가르고 죽는다] 을 타파하려는 도덕혁명이었다.

전후(戰後), 엄청난 비극과 희생을 겪고서도 조금치도 변치 않는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인간성의 모습.

 

혁명은 낡은 가치관의 멸망과 새로운 도덕관의 도래(到來)를 꿈꾼다,

그리고 혁명에는 희생이 따른다.

 

<사생아와 그 어머니. 그러나 우리는 낡은 도덕과 끝까지 싸우면서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입니다. 혁명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깝고 고귀한 희생이 더 많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지금 세상에 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희생자입니다. -사양->

 

‘사양’은 낡은 것의 멸망을 그린 아름다운 엘레지였다.

그러나 ‘인간실격’은 아름답지 아니하였다.

오사무는 철저하게 자아(自我)의 밑바닥까지 내려갔고, 처절하게 내면과 격투(格鬪)를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구원은 찾지 못하였다.

 

오사무는 자신의 자아를 탐구하여 도저히 개선(改善)될수 없는 인간성의 추악한 보편성(普遍性)을 발견하였을까.

또는 자신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이 추악한 세상을 살아 낼수 없는 사람임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던 것일까.

나는 후자(後者)로 생각하련다.

 

오사무는 세상에 드문 착한 심성의 사람이었다.

‘축견담(畜犬談)’이라는 단편에서 자신에 대하여 짐짓 외면여보살(外面如菩薩) 내면여야차(內面如夜叉) -겉으로는 보살같은 사람이지만 안에는 야차가 들어앉아 있다-라고 하였는데 아니다, 오사무야 말로 그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외면여야차(外面如夜叉)’라고 한다면 그것은 위악(僞惡)의 레토릭일 터이다.

 

오사무는 겉은 물론 속까지도 실로 보살과 같은 사람이었다.

뉘에게나 다정하고 유머러스하고 취향이 아름다운 보살(菩薩).

 

<“그 사람 아버지가 나빴어요.”마담은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짱은 정말 솔직하고 재치있는, 그런데 술만 마시지 않았으면... 아니, 술을 마셔도 하나님같이 좋은 사람이었어요.”-‘인간실격’의 마지막 대목->

 

인간의 자격을 잃어버린 폐인(廢人) ‘오바 요조’.

 

<아버지의 별세를 알고 나서 나는 더욱 쓸개도 없는 멍청이처럼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이제는 없다. 나의 가슴 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저 그립고도 무서운 존재가 이제는 없다, 나의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고뇌의 항아리가 무던히 무거웠던 것도 그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던가 생각되었습니다. 평생에 맞서는 상대가 없어져서 맥이 풀렸습니다. 괴로워 하는 능력조차 상실했습니다. -인간실격->

 

생각건대 ‘인간실격’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하나의 메타포이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진부(陳腐)한 어떤 것들’, 말하자면 ‘과거의 마른 뼈’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진부한 것들의 ‘진부하게 긴장(緊張)하는 삶’.

그 통속성과 그 던적스러움과 그 헛된 무거움을 생각해 보라.

진부하게 긴장(緊張)하는 삶은 인간성의 추한 면을 드러낸다.

오사무의 소설 ‘뷔용의 아내’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의 진부함같은...

저 아버지에는 오사무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오사무가 말한 ‘가정의 행복은 제악(諸惡)의 근원’이라는 의미에 대하여 좀 지껄이고 싶지만 그만 두련다.

 

<이제는 나에게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다만 모든 일체의 것은 지나갑니다. 내가 이제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하나 진실처럼 느낀 것은 그것 뿐입니다. 다만 모든 일체의 것은 지나갑니다. 나는 금년 27세가 됩니다. 흰 머리가 많기 때문에 대개의 사람들이 40세 이상으로 보나 봅니다. -인간실격->

 

창작집 ‘만년’을 발표한 27세 즈음 이미 오사무는 죽음을 앞둔 늙은이였다.

그의 의식은 언제나 죽음을 수락(受諾)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사무는 ‘인간실격’의 집필을 마치고, 39세때인 1948년 6월13일 밤 ‘야마자키 토미에’와 타마가와 죠스이(玉川上水)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아, 오사무의 죽음은 자연사(自然死)였다.

 

오사무의 혁명은 무망(無望)한 것이었을까. 실패하였을까.

허무로 스러진 허망한 존재, 한 예술가의 얘깃거리만이 문학으로 남았는가.

 

<인간은 살고 타락(절망)해야 한다. 타락 할 때까지 타락해서 자기를 발견하고 구원되어야 한다.>

 

'과거의 마른 뼈'로 우리의 내면은 위장(僞裝)되어 있다.

자아(自我)의 ‘다테마에(建て前)’에 우리의 인식(認識)은 속고 있는 것이다.

모래성(어중간한 타락,절망)은 파도(과거의 마른 뼈)에 의하여 금새 휩쓸려 사라지고 만다. (타락이 타락이 아니고, 절망이 절망이 아니고, 악이 악이 아니게 되고 마는 것이다.)

'모래성'정도로 절망해서는 아니된다. ‘벽돌성벽’으로 절망하라.

철저하게 타락하고 철저하게 절망하라.

그런 연후에 자아를 헤집어 들여다 보아라. 그곳에 무엇이 보이는가.

인간의 자격을 박탈 당하고 나서 보라, 그래야 비로소 보일 것이다.

인간성 원형질에 깃든 그 순수(純粹)가.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

그것은 순수(純粹)에 꽂히는 비수(匕首).

아픔.

그것으로 족하다.

 

오사무의 혁명은 실패하지 않았다.

 

 

-끝-

 

 

[[사양, 인간실격]] -6-

 

 

 

14

 

<자연 속에 안겨 과거의 마른 뼈 속을 더듬어야 하는가. -월든->

 

인문(人文)은 관습과 제도와 종교, 그리고 사고(思考)의 틀과 기질을 만든다.

세월 따라 본질은 후패(朽敗)하지만, 세월에 의하여 그 더께는 인류의 집단무의식 속에 더욱 강고히 고착(固着)된다.

우리의 자아를 지배하고 있는 도그마(dogma)는 ‘과거의 마른 뼈’, 그것이다.

도그마는 순수(自然)에 대하여 오만하고 타(他)에 대하여 완고하다.

 

개별의 삶에다가 자꾸 능동(能動)과 적극(積極)을 부추긴다.

그건 자연과 조화로운 삶의 방식이 아니다.

자연과의 본원적 관계에 있어서 존재란 본시 수동성(受動性)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과 영화 ‘안경’의 온유함과 평화로움.

 

생각건대, 삶을 대하는 수동성(受動性)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 성정(性情)이다.

그러니까 누구나 내면에는 조금씩 다자이 오사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사무가 과(過)하여 자훼(自毁)의 경지에는 이르지 않더라도 말이다.

 

처처(處處)의 불쌍한 것 부당한 것들을 접할때면 마음이 몹시 불편하여 쩔쩔매는 사람들.

위고가 말한 ‘너의 행복의 넘침에는 언제나 남의 몫이 들어가 있다.’투의 얘기를 들으면 괜히 미안하여 마음이 송구해지는 사람들.

‘이기적 유전자’에 살짝이라도 반기(叛旗)를 들수 있는, 타(他)의 불쌍함에 대한 연민으로 기꺼이 베풀려하는 사람들.

 

적극가치(積極價値)가 지배하는 세상의 구석에서 수동성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세상 속에다 무작정 들이대지 못하는, 하냥 뻔뻔스럽지 못하는 사람들.

엉거주춤 그렇게 어색하게 살다 가는 사람들 어디 한 둘이랴.

그런걸 유독 진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를테면 오사무의 종족들이다.

 

이데올로기

자본(資本)과 공산(共産).

오사무의 종족들은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의 세상에서는 패배자로 살기 십상인 사람들이다.

또한 욕망이 제어되고 관리되어지는, 집단사고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숨쉬기 힘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구의 삶을 체념하고 다른 별을 그리워 한다.

제3의 세상은 없는가하고.

 

아, 모두들 세상에 익숙한 척, 노련한 척, 굳센 척 잘들 살아 내고 있고나.

허세(虛勢)인가, 공갈인가, 혹은 다테마에(建て前)인가.

혹 그대들 내면아이는 신음하거나 울고있는건 아닌가.

 

오사무의 절망과 허무, 그리고 자의식과잉.

자의식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어떤 소년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이 떠오른다.

과잉된 자의식.. 열등감, 수치심, 외로움, 소외감, 결핍감, 부끄러움. 대인기피.

오사무의 죄의식, 자기부정과 자학(自虐)이 똑 자기 것처럼 느껴졌던.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레 가지고 있는듯한 보편적인 사고방식과 생활감각에 적응하지 못하여 짓는 피에로의 웃음.

뻔히 들여다보이는 상대의 ‘혼네(本音)’를 대하는 나의 리액션은 어떻게 해야하냐하는 문제는 실로 고민중의 고민.

‘다테마에(建て前)’에 맞추어 대응해야 하느냐 혼네에 맞추어 대응해야 하느냐...

그 이중구조(二重構造)의 인간성이란 내게 참으로 난해(難解)한 것이었다.

그런 경우의 내 어릿광대는 어쩔수 없는 나의 방어기제인 것이다.

 

<저는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는 만족스럽게 말도 하지 못할 만큼 나약한 성격이고, 따라서 생활력도 제로에 가깝다고 스스로 느끼며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염세주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삶에 그다지 의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생활의 공포에서 도망치고 싶다,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고 싶다는 등의 일만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온 성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저의 성격이 저로 하여금 문학에 뜻을 두게 한 동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저것 생각을 떠올리다보면 저는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제 문학관이나 작품이 술에 좌우될 것이라 여겨지지는 않지만, 단지 술은 제 생활을 상당히 흔들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사람을 만나도 만족스럽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걸, 저렇게도 말했으면 좋았을 걸 하며 분해합니다. 언제나 사람과 만날 때면 대부분은 어질어질 현기증이 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성격이기에 끝내 술을 마시게 됩니다. 잠자리에 들어서 여러 가지로 그 개선책을 기도(企圖)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죽지 않으면 고치지 못할 정도로까지 되어버린 듯합니다. -수필 중에서->

 

<이웃사람의 고통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어느 정도의 것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밥을 먹기 위해 사는지, 돈 때문에 사는지. -인간실격->

 

<결국 나는 인간의 영위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 자신의 행복과 관념과 온 세상 사람들의 행복과 관념이 전혀 딴판으로 어긋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불안, 거의 발광상태에 이를 것 같은. -인간실격->

 

아래 글은 다름아닌 바로 나의 내면을 오사무가 대신하여 얘기하고 있는듯 하였다.

 

<나는 화를 내고 있는 인간의 얼굴이 동물 야수의 본성을 보는 것 같아서 너무 무섭다. 이를테면 소가 풀밭에 조용히 누워 있다가 돌연 꼬리를 치면서 뱃가죽에 붙어있는 등에를 후러쳐 죽이는 것 같은, 갑자기 인간의 무서운 정체를 분노에 의해서 폭로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언제나 머리카락이 거꾸로 서는듯한 전율을 느끼며, 이 본성도 인간이 살아가는 자격의 한가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나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을 느꼈던 것입니다. -인간실격->

 

슬픈 위악(僞惡), 혹은 슬픈 어릿광대.

피에로가 되어서 가장하는 미소, 기묘하게 찡그리며 웃고 있는 피에로의 얼굴.

 

<그것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하나의 수단이며, 믿을 수 없고 두렵기만 한 인간에 대한 사랑할 의지를 버리지 않으려는 어린 요조의 ‘익살의 윤리’>

 

오사무의 슬픈 귀족(貴族), 그 한 조각 내게도 없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처럼 세련되고 아름다움에 이르기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것이었지만.

기품과 오만함,

자존(自尊)과 나르시시즘.

고아한 감성과 세련된 기교.

그리고 역설의 미학.

퇴폐스러운듯 순결함.. 화려한듯 소박함.. 수락된 허무와 절망이 주는 따스함 같은,..

그리하여 오사무는 내게 하나의 '쁘띠뜨 프라즈' (일종의 이미지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 나오는 개념)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건대 인간성의 원형질이 희구하는 진짜배기 아름다움이란 ‘적극적인 불사의 욕망’에는 있지 않은 듯 하다.

허무와 멸망과 불쌍함이 내포되지 않은 ‘삶의 욕망’은 내게 아름답지 않다.

랭보, 고호, 슈베르트. 제임스 딘, 오자키 유타카...들은 왠지 아름답다.

흐음, 요절한 예술가들이라 그런가.

 

 

15

 

 

<선택된 황홀과 불안 이 두가지 내게 있으니.>

의미심장하고 현란한 아포리즘으로 직조(織造)한 단편 ‘잎’의 서문(序文)으로 오사무가 차용한 ‘베를레느’의 시(詩)다.

 

선택된 황홀, 선택된 불안.

당디의 황홀과 실존의 불안을 말하는가.

 

불안.

오사무에게 있어서 자신의 내면(內面)과 지극히 부조화(不調和)스러운 바깥세상은 불편함을 넘어 불안 그 자체였을 것이다.

불안한 세상속에서 헐떡이는 자신의 생명, 스스로 생경(生硬)하여 마냥 낯설었을게다.

그리하여 존재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 같은게 싹이 터서 불안과 죄의식은 그의 영혼에 실존적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영혼은 깊은 우울(憂鬱)에 잠겼다.

 

<그렇다면 나는 평생 이런 우울과 싸우다 죽게 되겠구나 생각하니 자신의 처지가 애처로웠다. 초록빛 논이 갑자기 뿌옇게 변했다, 운 것이다. -잎->

그의 위악(僞惡)은 그러니까, 그의 우울이 세상을 향하여 내지르는 패러독스의 주정(酒酊)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수 있는가? 타인들의 기쁨과 괴로움을 제 것으로 하지 못하면서, 그들과 한 통속이 되지 못하면서 어찌 그들과 함께 살수 있는가? 인생에서 참으로 견딜수 없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그렇다면 오사무가 가납(嘉納)할 세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했을까.

 

오사무는 때로 고전적 그리스를 꿈꾸었나 보았다. (고대 그리스가 그토록 순수하고 낭만적 세계관에 합당한 세상이었는지 천학(淺學)의 나로서는 모르겠다.)

<낭만적 완성 또는 낭만적 질서라는 개념은 우리를 구원한다. 아 고전적인 완성, 고전적 질서, 그러나 그리스를 동경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분명 세상에 두번 다시 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단념해야 한다. 나는 너에게 죽을만큼 괴로운 연정을 담아 경배한다. 그리고 말한다. 안녕이라고. -수필 중에서->

 

좀 시니컬한 유모어를 곁들여 이렇게도 썼다.

<완전히 새로운 사조의 대두를 열망한다. 그 말을 하려면 먼저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지금 꿈꾸는 경지는 프랑스의 모럴리스트들의 감각을 기반으로 하고 그 윤리의 의표를 천황에 두고 우리 삶은 자급자족하는 아나키즘풍의 도원경이다. 나는 새로운 윤리를 수립하는 거야. 미와 예지를 기준으로 하는. 아름다운 것은, 영리한 것은 모두 옳다. 추함과 우둔은 사형이다. -수필 중에서->

 

어쨌든 오사무는 개별적 욕망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사회의 이기적 인간성을 못견뎌 하였음은 분명하였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의 이념지향적 인간성에 동조하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사무와 같은 영혼이 아이디얼(ideal)한 이념가치가 지배하는 집단사고의 현장에서 어찌 숨을 쉴수 있었겠는가.

 

<하나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헌과 아홉의 부르주아에 대한 공헌이라고 넌 말했지? 뭘 가리켜 브루주아에 대한 공헌이라고 말하는지? 자본가의 호주머니를 살찌우게 하는 점에서는 우리든 프롤레타리아든 마찬가지야. 자본주의 경제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배반이라면, 투사는 어떤 신선이 되는 거냐구? 그런 말이야말로 극단주의라는 거야. 소아병이라 부르는거다. 하나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공헌, 그걸로 충분해. 그 하나가 소중한거야. 오로지 하나를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살아 가야 하는거야.>

 

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적 실패를 예견(豫見)하였을까, 이런 아포리즘도 남겼다.

<밖은 진눈개비, 무엇 때문에 웃고 있나, 레닌 동상은...>

 

분명한건 그가 변증법적 역사발전 따위를 믿었을 리가 절대로 없다는 점이다.

 

거듭, 오사무가 동경한 것은 순수(純粹)였다.

 

<나는 순수를 동경했다 무보수의 행위. 전혀 이기심이 없는 삶. 내가 가장 증오한 것은 위선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지난한 일이었다 나는 그저 홧술을 마실 뿐이었다. -수필 중에서->

 

그가 말하는 순수란 무엇일까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련다.

‘과거의 마른 뼈’에 오염되지 않은 착(善)한 마음, 이를테면 ‘마태복음 5장과 6장’의 ‘예수의 마음’이다,

조직신학(組織神學)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예수의 마음'.

사랑, 연민, 친절, 가난, 무욕, 온유, 화평, 기쁨,...

 

다시 말하건대, ‘과거의 마른 뼈’는 더께를 더할수록 탐욕스럽고 추악해 진다.

그것이 ‘삶의 방식’의 도그마(dogma)가 되어 시대(時代)를 사는 인류를 장악한다.

도그마는 ‘늘 새로운 예수’의 ‘안터(오사무의 언어유희, 대의어)’이다.

‘예수 마음’의 적(敵)이다.

그 적을 향하여 ‘비둘기의 순결함과 뱀의 지혜’를 가지고 나아가라고 예수는 말씀하였다.

 

아뿔사, 그런데 오사무는 비둘기의 순결함은 지녔으되 뱀의 지혜가 결여되어 있었구나.

좀 더 교활하였으면 좋았을걸.

 

소신공양(燒身供養).

그리하여 오사무는 스스로 번제물(燔祭物)이 되었다.

 

오사무의 자아가 꿈꾸었을 혁명(革命).

그것은 에고이즘, 인색함, 위선(僞善)과 허위의식(虛僞意識) [일본인의 다테마에(建て前)는 얼마나 장식적(裝飾的)이면서 치명적인가, 그들은 ‘다테마에’로 스스럼없이 자기 배(腹)를 가르고 죽는다] 을 타파하려는 도덕혁명이었다.

전후(戰後), 엄청난 비극과 희생을 겪고서도 조금치도 변치 않는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인간성의 모습.

 

혁명은 낡은 가치관의 멸망과 새로운 도덕관의 도래(到來)를 꿈꾼다,

그리고 혁명에는 희생이 따른다.

<사생아와 그 어머니. 그러나 우리는 낡은 도덕과 끝까지 싸우면서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입니다. 혁명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깝고 고귀한 희생이 더 많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지금 세상에 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희생자입니다. -사양->

 

‘사양’은 낡은 것의 멸망을 그린 아름다운 엘레지였다.

그러나 ‘인간실격’은 아름답지 아니하였다.

오사무는 철저하게 자아(自我)의 밑바닥까지 내려갔고, 처절하게 내면과 격투(格鬪)를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구원은 찾지 못하였다.

 

오사무는 자신의 자아를 탐구하여 도저히 개선(改善)될수 없는 인간성의 추악한 보편성(普遍性)을 발견하였을까.

또는 자신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이 추악한 세상을 살아 낼수 없는 사람임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던 것일까.

나는 후자(後者)로 생각하련다.

 

오사무는 세상에 드문 착한 심성의 사람이었다.

‘축견담(畜犬談)’이라는 단편에서 자신에 대하여 짐짓 외면여보살(外面如菩薩) 내면여야차(內面如夜叉) -겉으로는 보살같은 사람이지만 안에는 야차가 들어앉아 있다-라고 하였는데 아니다, 오사무야 말로 그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외면여야차(外面如夜叉)’라고 한다면 그것은 위악(僞惡)의 레토릭일 터이다.

 

오사무는 겉은 물론 속까지도 실로 보살과 같은 사람이었다.

뉘에게나 다정하고 유머러스하고 취향이 아름다운 보살(菩薩).

 

<“그 사람 아버지가 나빴어요.”마담은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짱은 정말 솔직하고 재치있는, 그런데 술만 마시지 않았으면... 아니, 술을 마셔도 하나님같이 좋은 사람이었어요.”-‘인간실격’의 마지막 대목->

 

인간의 자격을 잃어버린 폐인(廢人) ‘오바 요조’.

<아버지의 별세를 알고 나서 나는 더욱 쓸개도 없는 멍청이처럼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이제는 없다. 나의 가슴 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저 그립고도 무서운 존재가 이제는 없다, 나의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고뇌의 항아리가 무던히 무거웠던 것도 그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던가 생각되었습니다. 평생에 맞서는 상대가 없어져서 맥이 풀렸습니다. 괴로워 하는 능력조차 상실했습니다. -인간실격->

 

생각건대 ‘인간실격’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하나의 메타포이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진부(陳腐)한 어떤 것들’, 말하자면 ‘과거의 마른 뼈’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진부한 것들의 ‘진부하게 긴장(緊張)하는 삶’.

그 통속성과 그 던적스러움과 그 헛된 무거움을 생각해 보라.

진부하게 긴장(緊張)하는 삶은 인간성의 추한 면을 드러낸다.

오사무의 소설 ‘뷔용의 아내’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의 진부함같은...

저 아버지에는 오사무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오사무가 말한 ‘가정의 행복은 제악(諸惡)의 근원’이라는 의미에 대하여 좀 지껄이고 싶지만 그만 두련다.]

 

<이제는 나에게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다만 모든 일체의 것은 지나갑니다. 내가 이제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하나 진실처럼 느낀 것은 그것 뿐입니다. 다만 모든 일체의 것은 지나갑니다. 나는 금년 27세가 됩니다. 흰 머리가 많기 때문에 대개의 사람들이 40세 이상으로 보나 봅니다. -인간실격->

 

창작집 ‘만년’을 발표한 27세 즈음 이미 오사무는 죽음을 앞둔 늙은이였다.

그의 의식은 언제나 죽음을 수락(受諾)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사무는 ‘인간실격’의 집필을 마치고, 39세때인 1948년 6월13일 밤 ‘야마자키 토미에’와 타마가와 죠스이(玉川上水)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아, 오사무의 죽음은 자연사(自然死)였다.

 

오사무의 혁명은 무망(無望)한 것이었을까. 실패하였을까.

허무로 스러진 허망한 존재, 한 예술가의 얘깃거리만이 문학으로 남았는가.

 

<인간은 살고 타락(절망)해야 한다. 타락 할 때까지 타락해서 자기를 발견하고 구원되어야 한다.>

 

'과거의 마른 뼈'로 우리의 내면은 위장(僞裝)되어 있다.

자아(自我)의 ‘다테마에(建て前)’에 우리의 인식(認識)은 속고 있는 것이다.

모래성(어중간한 타락,절망)은 파도(과거의 마른 뼈)에 의하여 금새 휩쓸려 사라지고 만다. (타락이 타락이 아니고, 절망이 절망이 아니고, 악이 악이 아니게 되고 마는 것이다.)

'모래성'정도로 절망해서는 아니된다. ‘벽돌성벽’으로 절망하라.

철저하게 타락하고 철저하게 절망하라.

그런 연후에 자아를 헤집어 들여다 보아라. 그곳에 무엇이 보이는가.

인간의 자격을 박탈 당하고 나서 보라, 그래야 비로소 보일 것이다.

인간성 원형질에 깃든 그 순수(純粹)가.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

그것은 순수(純粹)에 꽂히는 비수(匕首).

아픔.

그것으로 족하다.

 

오사무의 혁명은 실패하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