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울음 헤픈 사내 (1,4,3,3)

카지모도 2019. 9. 26.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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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울음 헤픈 사내]]

 

***동우***

2006년 7월 10일

 

공중화장실의 소변기 앞에 붙어 있던 경고문이 나를 실소케 하였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사내의 덕목에 관한 무슨 철학적 은유(隱喩) 깃든 아포리즘 같지만, 변기에다 오줌 싸는 사내들은 죄 직유적(直喩的)으로 알아듣는 경고(警告)의 글이다.

이를테면 소변기에 바싹 다가서서 정조준으로 발사하여, 소변기 밖으로 질질 흘리지 말라는 것이다.

오줌줄기 쎈 젊은이들이야 해당 사항 무(無)일 것이고 그 경고의 대상은 태반 배설이 시원치 않은 낫살 든 남자들일터.

그런데 거기에다 어째서,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남자'라는 공갈성 덕목이 비교전제(比較前提)로서 갖다붙였느냐 말이다.

오줌은 그렇다치고, 남자가 울어서는 아니되는 근거가 무엇이냐.

 

나는 눈물이 헤픈 사내다.

비극적인 영화나 드라마나 문학을 접할 적.

느낌이라거나 생각이라는 추상의 어떤 심리적인 것들이 작동하기전, 자율신경계가 먼저 감응(感應)하여 먼저 눈물부터 쏟아낸다.

내 눈물샘은 지나치게 비대하고 예민한 모양이다.

가끔, 수요일 KBS의 아침마당 ‘그 사람이 보고싶다’에 눈길을 주면서 질질 눈물을 짜는 사내가 바로 나다.

오래전 KBS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

그때 나는 날밤을 새우며 무척이나 울었다.

6.25 전쟁중 나름들 기막힌 사연으로 헤어졌다가 상봉한 핏줄들...

어떤 남매의 상봉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흑흑 엉엉 흐느끼면서 눈물을 쏟아냈던 것이다,

6.25라는 역사적 거대 담론따위가 내 울음의 질료(質料)는 아니었을 것이다.

생사불명으로 아버지를 잃은 나 자신이 투사(投射)되어 동일시에 기인한 한스러움과 자기연민에서 우러난 울음도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의 거대한 발굽으로부터 어찌어찌 고물고물 비껴나 살아난 작디작은 개미새끼들, 그리움과 한에 겨워 생사도 모른채 살아온 핏줄이 실로 우연적으로 맞부딪쳐 울부짖는 그 부르짖음의 현장.

그 현장 어디에, 역사를 생각하고 원인을 유추하고 비극을 생각하고, 또한 개별적 나의 감정을 투사할 겨를 있었으랴.

생사를 모르게 헤어졌다가 살아 다시 만나는 객체들의 슬픔과 기쁨, 그 현장을 지배하는 것은 슬픔과 기쁨을 초월하는 한덩어리 순정(純正)한 눈물 이외 무엇이 있을런가.

나는 여동생과 연년생인지라 한분 젖엄마의 젖을 빨면서 유년의 한 때를 보냈는데, 내 나이 서른이 훨씬 넘어 젖엄마를 상봉하였을 적에는 또 얼마나 울었던지.

아마 그때 술이 얼큰하여 고양된 감정이었을 테지만 정말 흑흑 느껴가며 되게 울어댔다.

그런데 울음 헤픈 사내인 나는, 9년전 어머니와 영결(永訣)할 때에는 그다지 울지를 아니하였다.

오히려 장의(葬儀)의 요식에 마음이 기울어,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언성 높여 꽃집사람과 전화로 싸우기까지 하였으니.

심지어 모처럼 만나는 문상객과 소주잔 마주하며 껄걸 웃기도 하였다.

여든에 고종명(考終命) 하신 어머니, 불효 자식놈에게는 스스로 호상(好喪)이라는 의식 한줌 있지나 않았을런지.

가신 다음 시리도록 그리웁고 안타깝도록 후회되는 바 있으니... 옛사람 말 틀린거 없도다.

 

‘울음을 운다’고 말한다.

‘운다’라는 동사(動詞)의 용언(用言)의 어미(語尾)를 변형시켜 ‘울음’이라는 명사(名詞)로서 체언(體言)을 만드는 것이다,

‘웃음을 웃는다’, ‘꿈을 꾼다’도 마찬가지.

우리는 울음을 우는 것이다.

깊숙한 곳에 울음이라는 놈이 있는데 그것을 끄집어 내어 비로소 우는 것이다.

그러니 울지 않는 울음이 있을 것이고, 울지 않는 ‘울음’과 드러내 우는 ‘운다’는 그 성질이 다를 법도 하지 않을까 싶다.

‘꿈을 꾼다’라는 표현을 생각해 본다.

심층심리 즉 무의식의 세계는 리비도라는 원시적 욕망의 도가니, 그것이 집단무의식이나 현재의식의 도덕,체면,억압,사회,풍습,제도,법률,전통,습관의 검열을 거쳐서 변형되고 왜곡되어 수면중에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이 꿈을 ‘꾸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울음’ 역시 원시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무엇인데, 변형되고 혹은 왜곡되어 외부의 입맛에 알맞게 당의정을 입혀 표현되는 것이 동사로서 용언을 이루는 ‘울다’가 아닐런지.

 

우리 민족은 특히 눈물이 많다고 한다.

울음을 빼고서는 한국을 말할수 없다고 이어녕씨가 말하였던가.

우리는 저절로 소리나는 것이면 무엇이나 운다고 표현한다.

서양의 새는 노래하지만 우리나라의 새는 운다.

슬퍼서 울고 굶주려서 울고 억울해서 운다. 심지어 기뻐서도 운다.

우리는 천래적으로 비극을 사랑하는 민족이라서 그런가.

그럴 리가 없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비극을 자기 것으로 사랑하는 인간이란 있을수 없다.

그러므로 혹여 울음을 즐긴다하면 말이 되는겐지 모르겠다.

아마 그럴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이 설파한 카타르시스.

감정의 정화작용.

타인의 인간실존의 고통스런 진실을 대면하면서, 그를 속죄양의 희생을 삼아 자아내는 카타르시스.

 

그런데 얼마전.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읽다가 실로 장쾌한 한구절을 접하고는 홀연 가슴이 시원스레 뚫려졌다.

<“참으로 그럴듯한 울음터로다. 정말 한번 울만하도다.”>

요동벌을 눈 앞에 둔 연암의 탄성이다.

끝간데 없이 펼쳐져 있는 너르고 너른 광막한 자연 속에 퍼질러 앉아, 장쾌하게 통곡하고자 하는 연암.

거칠 것 없이 끝간데 없이 드넓은 벌판.

그 자유로움을 향한 연암의 헌사(獻辭)는 바로 울음이었던 것이다.

 

캄캄한 엄마 태중에 갇혀있던 아이가 돌연 환한 자유를 맞닥뜨려 비로소 터뜨리는 최초의 울음.

그것은 시원함의 울음이다.

그 울음은 자기 앞의 생에 대한 긍정의 찬가이다.

그 고고성(呱呱聲)을 누가 감히.

인생의 고해 속에 내동댕이 처진 실존의 비극성(悲劇聲)이라 하는가.

 

울음 헤픈 사내인 나는 부끄럽지 않다.

앞으로도 울고 싶을 때 거침없이 울 참이다.

 

아아, 정말 그럴듯한 울음 한번 실컷 울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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