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2015년 2월 21일 포스팅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作-
<영화 : 리스본행 야간열차>
제작년도 : 2013년
감독 : 빌 어거스트
출연 : 제레미 아이언스, 잭 휴스턴, 크리스토퍼 리, 샬롯 템플링, 마티나 게덱
'리스본행 야간열차(독일어: Nachtzug nach Lissabon, 영어: Night Train to Lisbon)‘
‘빌 어거스트' 감독의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2004년에 빌표한 ‘파스칼 메르시어(Pascal Mercier,1944~)’의 소설을 읽었다.
동일한 서사구조인데 색감을 달리하여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짙은 여운을 남긴 좋은 소설이었고 좋은 영화였다.
스위스 '베른'의 예순 줄 라틴어 선생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 (영화에서는 제레미 아이언스 粉)
그레고리우스는 변화를 싫어하였고 독신생활(이혼,무자식)의 고독을 나름 사랑하였으므로 그의 일상은 단조롭고 경직되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라틴어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문장들이 과거의 모든 침묵을 자기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었고, 뭔가 대답하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언어는 온갖 소란스러움을 비켜나 있었고, 확고부동하며 아름다웠다. 그레고리우스는 라틴어를 죽은 언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위인들이었다>
어느 날 아침의 출근길, 그레고리우스는 강에 투신하려는 어떤 젊은 여인을 몸을 던져 막았다.
여자는 외투를 남긴채 황급하게 사라져 버렸는데 외투 주머니에는 얄팍한 책 한권과 책갈피에는 리스본행 야간열차표가 들어 있었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제목의 책 한권과 리스본행 열차티켓.
그것이 고리타분한 샌님을 난생 처음 일상으로부터 일탈케 하는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이 문장 때문인지, 한창 수업이 진행되던 교실을 내팽겨처 버리고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움직이는 기차에서처럼, 내 안에 사는 나.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조차 모른다. 먼 옛날의 언젠가 이 기차 칸에서 잠이 깼고, 바퀴 소리를 들었다. 난 흥분했다. 덜컥거리는 바퀴 소리에 귀를 귀울이다가 머리를 내밀어 바람을 맞으며 사물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속도감을 즐겼다. 기차가 멎지 않기를 바랐다. 영원히 멈추어버리지 말기를, 절대 그런 일이 없기를. 나는 코임브라의 딱딱한 강의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 기차에서 절대로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는 포르투칼의 의사이며 시인인 '아마데우 드 프라두', 그는 그레고리우스와 더불어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또 한사람의 주인공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에 있는 아마데우의 집을 찾아가지만 아마데우는 이미 40여년전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다.
'언어의 연금술사'는 아마데우가 죽은 후 그의 누이동생 아드리아나가 오빠의 글들을 모아 100권 한정판으로 출판한 책이었던 것이다.
오라비에 대한 아드리아나의 사랑은 혈육을 벗어나 한 인간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대한, 어쩌면 이성을 향한 지극한 사모였다. (4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오라비의 추억 속에 사는 영화 속 늙은 아드리아나役의 '샬롯 템플링', 검은 상복을 입은 차갑고 기품있는 꼿꼿한 단정함이 인상적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의 책 속에 담긴 사유(思惟)를 곱씹으면서 그의 주변 사람들과 그가 남긴 자취를 더듬는다.
포르투칼.
'아멜리아 로드리게스'가 부르는 ‘검은 돛배’를 들어보라.
포르투칼의 노래(파두)는 얼마나 사람의 심금을 자아내는지.
한때 스페인과 세계를 나누어먹었던 왕년의 제국이라는 정도의 단편적 지식만 있을뿐인 이베리아 반도 서쪽 끝에 자리잡은 낯설고 먼 나라 포르투칼.
스크린 속 리스본의 거리 건축물 골목 카페 바다의 모습은 참으로 고풍스러웠다. (좁은길을 전차가 오르내리고)
그러나 아마데우가 살았던 포르투칼의 시대적 상황은 살벌한 것이었다.
40년이상 계속된 살리자르 독재정권의 공포정치.
1974년 4월에 무혈혁명(카네이션 혁명)의 성공으로 리스본의 봄이 찾아왔는데 그에 맞추듯 아마데우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아마데우의 아버지는 귀족으로서 독재정권하에서 판사였는데, 열렬한 가톨릭인 그는 아들에게 변명처럼 얘기한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의 중요성이란 생각만큼 큰 것은 아니라고. (교회에서는 자연사로 취급하였지만 아마데우의 아버지는 아들이 죽고 열흘 후 치사량의 약을 삼켜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마데우는 영원이라는 관점을 믿지 않는다.
아마데우는 동맥류라는 병을 앓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죽었는데 아마데우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현재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성당학교의 졸업행사에서 행한 아마데우의 연설 (좀 변형하여 축약)
<나는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신성한 단어들과 장엄한 구절들이 필요합니다. 독립적인 사색이 경멸 당하고 마치 죄인인양 비난 당하는 세계, 독재가 암살자 압제자에게 사랑을 강요받는 세계, 언어의 부패와 독재의 쓸모없는 슬로건에 맞서싸우기 위해서 성경 구절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생을 가르치는 종교는 부조리합니다. 무엇보다 부조리한 것은 영생을 빙자하여 이런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도록 강요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누가 원합니까? 오늘이 중요하지 않다면 누구도 영생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생의 천국은 현실의 지옥입니다, 죽음이 있으므로 우리의 시간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은 자유로와야 합니다. 이 세계에 잔인한 모든 것에 대항하여 저항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레고리우스가 찾아간 아마데우의 무덤에는 이런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었다.
<독재가 현실이라면 혁명은 의무이다.>
그러나 아마데우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저항군의 동지인 '주앙'의 말처럼 혁명가가 되기에는 ‘아마데우 프라두’라는 인간의 영혼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여렸던 것이다.
귀족의 자식인 아마데우는 정신적으로도 고귀한 귀족, 외모와 영혼 모두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영화에서는 '잭 휴스턴'이 粉하였는데, 필모그래피를 보니까 그는 왕년의 명감독 존 휴스턴의 손자라고 한다)
어느날 밤 리스본의 도살자라 불리우는 독재정권의 하수인 '멘딜스'는 아마데우의 응급처치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아마데우는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 지탄과 배척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한 반작용으로 저항군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가 베른의 다리에서 막았던 투신하려는 여자는 바로 멘딜스의 손녀였다. 그녀는 그토록 인자하고 사랑하였던 할아버지가 '리스본의 도살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살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아마데우의 병원은 저항군의 연락처가 되었고, 멘딜스는 생명의 은인을 비호할 수밖에 없는 입장)
저항군의 주요 멤버인 조르지(아마데우의 죽마고우)와 스테파니(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는 여성).
그런데 아마데우와 스테파니는 그만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질투에 눈이 먼 조르지.
아마데우와 스테파니는 도피행각을 벌이지만, 그녀는 아마데우의 순정한 영혼을 사랑할 자신을 잃고 그를 떠난다.
<그의 삶은 나를 갈망했어요. 허지만 그가 원했던 것은... 그 여행은 스스로의 영혼을 향하는 것이었어요... 그가 원하는걸 아무도 줄수 없을거에요.>
그레고리우스가 꿈꾸지 못하였던 청춘의 열정과 좌절과 질투와 삶과 죽음.
그는 40여년 전 아마데우의 살았던 흔적들을 조합해 가면서 그의 생각을 사유한다.
아드리아나, 스테파니, 주앙, 조르주...
이제는 모두 늙어버린 그들의 현실적 삶을 만나면서 오래전 죽은 아마데우의 액추어리티를 절절하게 느낀다.
<"아마데우 프라두, 그의 삶의 세계는 엄청나요, 내 삶을 사소하게 보이도록 해요.">
그레고리우스가 새롭게 인식하는 인생관.
그리하여 그레고리우스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고 도착한 리스본 여행은 그레고리우스 자신의 삶에 대한 사유와 각성을 동반한 여행이었던 것이다.
"나의 일상은 절대적인가, 반드시 이대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인가."
근시와 난시로 형편없는 내 시력(視力), 중2때 처음 안경을 맞추어 끼었을때 갑자기 주위의 풍경이 명료하게 눈에 들어오는 경이로움.
리스본의 거리에서 자전거와 부딪쳐 깨어진 구닥다리 안경대신 새로운 안경을 맞추어 끼는 그레고리우스의 은유(隱喩)가 그러하였을 것이다.
새로운 자아의 발견.
반복되는 진부한 일상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만나기 힘든 새로운 나.
평소에는 느낄수 없는 내면에 숨겨져 있던 아주 작은 어떤 부분.
살아 온 궤적으로부터 축적된 추상의 것들.
그 촉수를 건드려 소스라치는 깨우침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
소중하고 고귀한 것들.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조차 모른다. 먼 옛날 언젠가 이 기차 칸에서 잠이 깼고, 바퀴 소리를 들었다. … 내 칸에 가끔 손님이 오기도 한다. 문이 닫히고 잠겨 있는데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방문객은 있다. 거의 언제나 나에게 맞지 않는 시간에 손님이 온다. 대부분 현재라는 시간의 손님들이지만 과거에서 온 손님도 많다. 이들은 자기 형편에 따라 마음대로 오가며 나를 방해한다.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구속력이 없으며, 잊힐 운명이다. … 여행은 길다. 이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때도 있다.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소중한 날들이다. 다른 날에는 기차가 영원히 멈추어 설 마지막 터널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무엇이 일어 날 수 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시간들과 함께 열려 있으며 완성되지 않은 자유 안에서 깃털처럼 가벼운 그리고 납처럼 무거운 불확실성 안에서 무슨 소망일까. 마치 꿈같은 향수적인 삶의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일어선다는 것이. 그리고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준 방향으로.>
<우리가 어느 장소를 떠날때 우리가 가버린다해도 우리는 거기에 머문다, 거기에 다시 가야만 우리가 찾을수 있는 우리 안의 물건들이 거기 있다. 어느 장소에 간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여행을 간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얼마나 짧은지는 상관없다. 허지만 스스로에게 여행하는 것은 스스로의 고독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고독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것이 우리가 왜 삶의 마지막에서 후회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이유가 아닐까.>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질문이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엇을 달성하고 경험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데 대한 생각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설명될수 있다. 계획할수 없다는 것에 대한 공포. 만약 우리가 달성할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갑자기 모르게 된다. 더 이상 전체 삶의 한부분이 될수 없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은 방향이 영원히 바뀌어질때 항상 드라마틱하거나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사실, 드라마틱한 삶의 순간들은 가끔씩 믿을수 없을만큼 이목을 끌지 않는다, 혁명적인 결과를 펼쳐 놓을때 그리고 새로운 빛에 비추어진 삶을 확신시켜 줄때는 조용히 진행된다. 그리고 이 환상적인 침묵 안에 특별한 고결함이 있다>
<어릴적에는 마치 우리가 불멸인양 살아간다. 불멸의 지식이 우리 주위에서 춤을 춘다.>
아드리아나가 말한다.
<"난 가끔 오빠의 영혼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언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어요.">
'시니피에'와 거리가 있더라도 인간은 언어로 사유할수 밖에 없다.
<사유의 바깥쪽에는 설 자리가 없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다시 '베른'의 일상 속으로 돌아가려는 리스본역 플랫홈.
그레고리우스가 말한다.
<"제 삶은 어디 있는가요? 요 며칠을 제외하고선.">
마리아나가 말한다.
<"이제 다시 돌아가시네요. 왜 그냥 여기 머무르지 않으세요?">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는 머뭇거린다.
곧 열차가 출발한다는 호각 소리가 들린다.
마리아나가 다시 묻는다.
<"왜 그냥 머무르지 않으세요?">
그레고리우스는 여전히 머뭇거린다.
스크린은 암전(暗轉)되고 엔딩 크레딧이 흐른다.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다면적인 동물인가.
내가 간과한 인생의 다른 측면들, 지금 안주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 내 삶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내 꼬라지가 혐오스럽고 부아가 치밀어 오를때마다 그 모습을 인식은 하는겐지.
낫살의 통찰력으로 혹여 그럴런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용기가 없다.
내 나이, 전혀 다르게 사는 삶이 가능할까.
다른 나를 만나 이제 어찌하려는가.
낯선 여행을 두려워하는 내 존재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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