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2013년 10월 1일 포스팅
<선택>
-이문열 作-
***동우***
2013.10.1
이문열의 '선택'
장편인지라 한번에 다 올릴수 없어서 발췌 정리한 것임을 해량하여 주십시오.
작가의 말을 앞에다 놓습니다.
++++
<작가의 말>
아직 펴내지도 않는 책을 두고 그 내용보다는 오도된 반응에 먼저 마음을 써야 하는 야릇한 경우를 이번에 겪었다. 연재라는 발표 양식과 선동적인 매스컴의 속성 덕분인 줄 안다.
원래 이 작품을 구성한 의도는 우리의 삶에 한 본보기가 될 만한 여인상을 역사 속에서 발굴해 내는 데 있었다. 그런데 연재 첫회부터 반페미니즘 작품으로 낙인찍혀 그 방면의 논객들로부터 집중적인 포화를 받았다. 특히 지금은 페미니즘 문학의 선봉처럼 오해되고 있으나 실은 한 일탈이나 왜곡에 지나지 않는 이들과 내가 나란히 논의되는 것은 거의 욕스러울 지경이었다.
이 작품의 각 부 앞머리에는 틀림없이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만한 구절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선입견 없이 읽어보면 거기서 비판되고 있는 것은 저속하게 이해되고 천박하게 추구되는 페미니즘임을 알게 될 것이다. 편의주의나 개인적인 약점의 책임 전가에 내걸고 있는 그 깃발을 나는 비판했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진지하고 성실하게 추구되고 있는 페미니즘에 저항할 논리는 이 세상에 없다. 오랫동안 이 세상이 남성을 위주로 편성되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반페미니즘의 논리는 시대 착오적인 구호로 몰려 마땅하다. 페미니즘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것이 지나쳤을 때뿐이다. 한쪽으로 기운 배를 바로 세우는 길은 균형을 회복히는 일이지 모든 짐을 다른 쪽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첫회 발표 때부터 반페미니즘적인 것으로 몰아간 것은 시비 붙이기를 좋아하는 대중매체의 선동과 뭔가 요란스런 일에 편승하기 좋아하는 얼치기 논객들의 합작이다. 하지만 정작 작가로서 내가 고민해야 할 일은 그런 과장되고 쓸데없이 격양된 논의로부터 나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련된 현대 소설의 표현양식에 익숙해 있는 독자들에게 불리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얘기해야 하는 점과 요즘사람들의 근거없는 반고의적 경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불리하기 짝이 없는 얘기 방식이란 사건의 전개를 축으로 얘기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인물과 배경과 분위기를 통해 사건의 전개를 추상케 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얘기 방식을 말한다.
사건 서술도 한줌도 되지 않고 현대 소설론의 관점에서 보면 부차적 요소만 장황한 그런 얘기 방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근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사람들의 반고의적 경향, 특히 양반문화에 대한 적의에 대해 그 근거없고 비뚤어짐을 따지자면 따로이 책 한권이 필요할 정도다. 그것은 이나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부인하는 일이 되고 나아가서는 자기 정체성의 부인이 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그것이 이 시대의 엄연한 추세이다. 그런데 그 정면을 돌파해야 할 주제를 다루는 게 어찌 작가에게 주저스럽지 않겠는가.
거기다가 이 작품의 모델이 되는 실존 인물 정부인 장씨가 내게 직계 조상이 된다는 것도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자칫하면 타성들에게는 집안 자랑, 양반 자랑으로 오해받고 문중 사람들에게는 불경의 죄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펴내는 지금 가장 두렵고 걱정되는 일은 또 졸속과 불성실로 원고를 마감하는 일이다. 갈수록 큰 것과 작은 것, 급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별하지 못해 공연히 몸만 바쁘고 이룸은 적으니 절로 한탄이 난다. 다만 종아리를 걷고 꾸짖음과 가르침의 매를 기다릴 뿐이다.
1997년 3월 -이문열-
++++
***<동우>***
2013.10.01
골수 보수꾼으로 규정지어진 작가 '이문열'의 '선택'.
1990년대 말 발표 즈음, 이 소설을 공격목표로 삼아서 이른바 좌파들은 페미니즘을 코에 걸고 얼마나 이문열을 까대었던지.
조선시대 현모양처의 귀감으로 살았던 장씨부인이 현대 여성을 향하여 자신의 선택과 역정과 성취에 대하여 들려주는 사설.
이야기 속에 작가의 사유가 녹아 있을뿐더러 곳곳에 작가의 생각이 노골적으로 노정(露呈)되어 있다.
페미니즘.
역사적 제도적 피억압자로서의 여성존중 여성해방,
그 페미니즘은 백번 옳다.
'귄터 그라스'의 '넙치'의 은유가 떠오른다. (옛 포스팅을 다시 들여다 본다)
아버지날, 넙치 재판정의 논고를 담당한 검사를 비롯 레즈비언인 네명의 여자들도 남장을 하고 의식상(意識上) 남자의 자격으로 그 날을 즐기려고 나선다.
그들은 남성으로부터 받은 성적학대의 기억이 있으나 성적으로 지극히 정상적인 생리(生理)와 성벽(性癖)을 지니고 있지만, 멍청하고 재미없는 남자들을 지겹도록 접하고는 마침내 의식적으로 동성애 쪽으로 도망친 사람들이다.
<"우리 넷은 아버지날 수십만명의 남자들 틈바구니에 끼어 자발적이고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길을 나선 것이다. 우리는 밑에서 덜렁대는 물건 없이도 아무 문제없이 잘 해낸다. 우리는 그러한 물건에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로운 새로운 성이다.">
그들은 (그녀들은) 호숫가 숲속에서 아궁이를 만들고 불을 지펴 야외의 만찬을 즐기고 맥주와 소주(?)를 마신다.
‘이제 페니스 선망같은건 없다. 쪼그리고 오줌을 누는 굴욕적인 일은 안한다.’고 외치면서 기구를 사용하여 남자처럼 다리를 쫙 벌리고 서서 오줌을 갈긴다.
그날 저물녘에 한 여자는 강간 당하고 살해되었다.
여성의 자각이란게 고작 남성의 덜렁대는 생식기를 극복하는 것이라면 그건 창조의 질서를 한참이나 오도한 변태적인 것이다. (오로지 무찌르자 오랑캐로서의 남자라니...)
저 '노라의 가출'은 지나쳤다.
억압되었던 용수철의 반작용으로서는 기형적이고 엽기적으로 반발하는 응력의 해소이다. (남성연대 故 성재기씨가 싸웠던 대상도 그와 같이 오도된 페미니즘이었을 것이다.)
말콤엑스가 미국의 흑백문제의 해결방안으로 흑백분리를 설파하였듯, 남자들은 죄 금성으로 가 살고 여자들은 모두 화성으로 가서 살수는 없지 않은가.
차타레이 부인과 멜러즈를 떠올려 보라.
서로의 제인부인(여성생식기)과 토마스경(남성생식기)를 찬미하여 이룩하는 그 아름다운 조화로움을.
자웅(雌雄)이란 각자 지닌 천부적 기능에 맞추어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라고 만들어진 양성(兩性)이다.
이 본질을 회복하여야 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명제가 아니겠는가.
'선택'
나는 이문열을 최상의 작가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은 결코 고리타분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내게 지극히 아름답다.
의고체(擬古體)의 유려한 문장도 아름답거니와 장씨부인의 삶의 형식 또한 아름답다.
스스로 예속하여 스스로 엄숙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아름답다. (삼종지도를 예찬함이 아니다, 삶의 기품...흐음, 날더러 야만이라 할터인가.)
뭐라해도 감히 말한다.
장씨부인과 같은 한살이야말로 '실존'이 아름다운 삶이다.
저런 기품을 지닐수 있다면, 아름다움의 내면성에 있어서는 남성인 나도 다름있으랴.
저처럼 나도 나의 한살이를 살아날수 있었다면.
통재라. 그러나 내게는 형식이 없구나.
***홍애(虹厓)***
2013.10.02
이 책 읽을 때 저는 별다른 반감이 없었지만, 그 당시는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학을 중심으로 해서 굉장히 열렬했었던 때였어요.
그래서 다시 이 책에 대한 반론을 좀 읽어 보면, 내가 뭔가 잘 알아차리지 못하였나 반성도 해 봤지만...
몇 년 더 살아보고 느낀 건데, 저도 30대 시절에 여성학 책 읽으면서 여성의 권리 어쩌구 해봤건만
원래부터 신사임당의 생의 모델이었던고로, 생각이 고리타분했었던 것 같아요
요새는 좀 낡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도 되고 말이에요.
앞부분만 좀 읽다가 다 읽지 못하고 댓글 달아요
오래 컴퓨터 대신 스마트 폰으로만 동우님 새글 포스팅 소식 보다 보니 읽지 못하겠더라구요'
근데, 이 댓글 글자는 왜 이렇게 작아요?
와, 힘들다, ㅠㅠ. 이렇게 작은 글자를 다 볼 수 있으세요? 동우님?
음, 제가 눈이 안 좋긴 한 거군요.ㅎㅎ
요새는 여기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고 있는데, 신간도 읽고 10년 전 15년 전 책도 읽고 있어요
그러면서 떠오른 사람이, 이문열이었는데요
어째서 요즘은 이 작가의 글이 새로 안 보이는 거죠?
동우님이 대답해 주실 수는 없지만요.
한창 글 쓰다가 도중에 글이 안 보이는 한국의 작가들, 그중에도 한 떄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이들에 대한 불만은.
일본의 작가들이 끊임없이 쓰고 있는 것을 본 다음에 생긴 것 같네요.
***동우***
2013.10.02
홍애님.
요즘 맹렬하게 일본소설 읽고 있는거 알고 있지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일본에 계시니 당연..(이번 1년여 체류하시는 동안 홍애님의 일본어는 거의 원어민 수준일터..)
일본작가들 작품 생산하는거 보면 우리나라 작가들 게을러 빠졌어요. 정말. ㅎ
댓글 폰트 관리모드 들어가 고쳐 보겠습니다. (그런 기능 어디 있었더라)
블로그 포맷을 요리조리 알뜰하게 꾸미려 하는 편이 아니라서, 우리 홍애님 눈에 부담을 주는구나. (노안 운운, 나이 탓 하지마시기..ㅎㅎ)
그 때, 이문열의 이 소설에 대한 들끓는 논박들.
반페미니즘의 전형으로 매도되었지요.
그러나 홍애님.
홍애님 전혀 고리타분한 바 없고 홍애님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코드 이 소설에 없어요.
물론 페미니즘 부르짖는 여성들을 향하여 타이르는 듯 노정(露呈)된 작가의 생각, 노골적으로 만져지기는 하였지만.
그런데, 이문열이 아니었다면 그런 논란은 없었을 거예요.
당시 나는 좀 우스웠습니다.
이 소설에서 강력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찾아내는 그 좌파 논객들의 눈썰미가.
이문열의 소설에서는 무슨 보수적 이데올로기 한줌 찾아내 떠들지 않으면 마치 그 대열에서 낙오라도 되는양.
여자의 삶.
그 방식이나 원리에 무슨 사조(思潮)나 이념 따위로 재단되는 요소 있겠습니까?
모든 여성의 진지한 삶의 방식은 아름답지요.
신사임당도 황진이도 봉단이도 나혜석도 김지미도 캐서린도 제인에어도 버지니아 울프도 로자 룩셈부르크도...
이 땅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의 아내인 홍애님이지만, 신사임당을 숭모한다고 무에 대수리까.
여하튼 좁아들 터졌어요. ㅎㅎ
***홍애(虹厓)***
2013.10.12
글씨가 시원해졌어요
제 눈도 시원해요 ^^
***고향***
2013.10.03
귀하신 분, 참 좋은 표현^^^,
제게있어 남편도 아이들도 그 아이의 아이들도 다 귀하신 분(?)이거든요.
장씨부인은 참 지혜롭고 아름다운 분이군요.
감사하게도 마음에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동우***
2013.10.04
호주 땅에서 느끼시는 장씨부인의 아름다움.
고향님이나 나같은 사람은 장씨부인에게서 지혜와 아름다움을 읽었지만, 이 소설에서 '굴종적 여성상'만을 읽어내는 사람도 있는가 보아요.
생각 나름이라 어쩔수 없지만...
***저녁산책***
2013.10.18
동우님,,,언젠가 여성학자들의 맹공격으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 뒤늦게나마 덕분에 잘 읽어보았습니다.
이렇게 고결하고 숭고한 사대부집안의 한 여인의 선택을 폄하할 이유는 도통 찾을수 없지만,
하지만 한편으로 페미니스트들의 격앙된 목소리의 한 빌미가 될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자신은 집안의 '효율성'을 위해 가정주부로 눌러앉는 선택을 했지만...
딸들은 조금 달라진 세상(요즘은 남녀 평등이란말보다 양성평등이란 말을 쓰더군요..이 용어가 적확한 용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에서 조화롭게 살아갔으면 한답니다.
투쟁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동우***
2013.10.19
하하, 저녁산책님.
이문열의 '선택'
이 소설에 페미니스트들의 격앙된 목소리를 유발케 하는 요소 없지 않겠지요.
작가 딴에는 조심스럽게 피력하였지만 장씨부인의 입을 빌어 이른바 보수꼴통 이문열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부분 없지 않았습니다.
저녁산책님 말씀하시는 '효율성 측면에서의 선택'으로서의 가정주부.
곱씹어 볼만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저녁산책님의 두 따님은 영재들, 얼마던지 시대의 날개가 되어야지요.
그것은 전혀 페미니즘이라거나 반페미니즘운운할 영역의 문제가 아니지요.
남녀평등이거나 양성평등이란 용어는 내게 근본적으로 잘 못 된 것으로 들립니다.
性적 평등이란 있을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 댓글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귄터 그라스의 '넙치).
기회와 권리와 역할과 그런것의 평등이지, 성의 평등은...
또한 여성성이라는 특질이 남성성으로 발현되는 그것 또한 평등이 아니지요...
채털리부인의 사랑.
산지기 멜러니와 채털리부인이 도달한 그 성의식. (사람들은 이 소설을 나와는 참 다르게 읽는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양성평등이 아니라, 성의 다름, 상대의 성에 대한 찬미의 경지에 이르는...ㅎ
음악애호인 저녁산책님의 백번 옳으신 말씀.
성의 조화로움.
앙상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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