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2011년 8월 단상>
***동우***
2011.08.07.05:31
1.
비니가 논다, 미니가 논다.
엎드려 무릎을 뒤로 바투 접고 발레리나처럼 엉덩이 위로 발끝을 쭉 뻗고서는.
제주도 물개 쑈를 흉내 내면서 까분다.
노는 아기들이 이쁘다.
이뻐서 가슴 저린다.
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할비를 놀리듯이 팽이가 돈다.
달그림자 변죽, 울려주지 않는 어미짜리 무를세라.
정빈이가 돈다, 정민이가 돈다.
이쁜 것들.
빙글빙글 돌아.
이윽고 슬픈 할비 함께 돈다.
달나라로. 달나라로.
2.
‘피아노와 이빨’이라니.
문화회관, 윤효간의 피아노공연을 관람하였다.
약여(躍如)한 괴짜의 면모.
파격으로써 자기만의 영역을 주장한다.
폭풍우 몰아치듯 힘센 터치, 한땀한땀 정성들여 뽑아내는 피아니시모.
로커처럼 거친 목소리의 노래는 싫었지만, 피아노는 참 좋았다.
피아노를 사랑하는 서른 중반 녀석.
건반 두드리기를 좋아하고 피아노 음색에 포옥 느꺼워 하는 녀석.
피아니스트가 되었더라면 행복하였을 녀석.
윤효간과 엇비슷한 괴짜 녀석.
녀석과 함께 이 공연을 보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객석에 홀로 파묻혀 피아노 음률에 젖어 들으면서 아들에 잠긴다
동경의 아들녀석.
난리를 겪고 마음 어두워진 녀석.
일본에 대한 환멸, 남들 부러워하는 회사 히타치까지도.
아비의 간절한 마음 선율에 실어 기도한다.
이 녀석, 모쪼록 마음 다잡아 안정적인 이국의 직장생활을....
3.
좋은 영화를 보았다.
‘대런 아로노프스키’감독의 ‘블랙스완’.
괴물처럼 변모한 그 옛날 꽃미남 ‘미키루크’를 내세워 만든 그의 전작 레슬러도 썩 좋았었는데 블랙스완은 더 좋았다.
치밀한 연출이었고 긴장 가득한 ‘스릴러’ 영화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자신의 본능과 욕구에 진실하지 못한 발레리나 ‘니나’.
깎아 놓은듯한 예술적 테크닉과 절제의 미학만이 지배하는 그녀에게는 인간성의 어두운 쪽으로는 군살이 없다.
카리스마와 예술적 안목 깊은 단장은 그런 니나를 통찰한다.
백조는 춤출수 있으되 흑조는 될수 없노라고, 끓어 오르는 내면의 욕구와 욕망, 그 어두운 것들을 풀어 놓아라.
강박과 초조함과 고통과 갈등과 애증과 환각을 연기한 ‘나탈리 포트만’의 아카데미 주연상 트로피는 당연하였다.
희생과 고통을 담보하여 얻어낸 ‘예술적 승화’의 그 기분은 어떠할까.
그녀의 세리프.
'나 완벽함을 느꼈어요.'
좋은 영화에는 짙은 카타르시스가 있다.
4.
도로명 주소라니.
산을 깎아내 평지를 만들고 가로세로 반듯반듯 나누어 온 국토에다 대고서 구획정리사업을 할 요량인가.
뚫리고 넓힌 길 따라 돈 되는 아파트 찾기 수월하여 그래서 길 주소란 말가.
못마땅하기 그지없다.
살住 자리所의 주소가 아니던가.
사람 사는 곳은 ‘터’이지 ‘길’이 아니다.
살이를 떠돌이의 가벼움으로 매도하려는가.
길이란 본시 부박(浮薄)한 것, 심후(深厚)함의 은유는 되지 못한다.
정착이 아니라 떠남이나 떠돎이 그 본령(本領)일 터.
주소명으로 연명하고 있는 읍면동(邑面洞) 동네마다 연연하고 고유한 호칭은 시나브로 사라져 버리고.
그나마 이름조차 사라져 버리면 스산한 길거리, 눈꼽만큼 남아있는 고향 비스무리한 의식마저도 증발해 버리고 말 것이다.
성북동 비둘기는 채석장 돌무더기 부리 부빌 곳이라도 있었다지만 우리 아이들은 그야말로 아스팔트킨트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효용과 편익?
갈수록 눈부신 GPS 등등의 시스템들의 편리함과 간편성을 내세울 것도 없다.
현재의 주소체계로서도 불편할것 호리도 없다.
선진화(先進化)라고라?
세계에서 우리만 동네주소 갖고 있으면 나라꼴 더 또렷할 것이다.
일제(日帝) 잔재의 청산?
정작 해야할꺼나 청산해라, 일제잔재.
도로명 주소, 그 어느 것에도 도무지 화급(火急)해야 할 당위는 추호도 있지 아니하다.
숱한 공부(公簿)들과 찡(證)들과 표지들 속에서 오래도록 연연한 이름들 죄 갈아 엎는데 돈은 좀 들겠는가.
돈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인문(人文)은 안중에도 없는 이 무슨 지랄인지.
<뱀이나 기차가 그러하듯이 길이란 바닥으로 수평으로 길게 뻗은 형상으로 길이란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나 나무와 같이 위아래로 수직으로 길다란 것들은 한자리에 머물도록 만들어 진 것이야.>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앤시’의 푸념-
4.
그 예전 그녀는 적이었다.
조선소, 사(社)측의 개였던 내게.
그 때에도 조선업계에서는 유명한 김진숙이었다.
한진중공업안 담장 곁에 우뚝 서있는 85호 크레인.
그 앞을 노상 지나 다닌다.
때로 난간 짚고 먼 곳 바라보는 자그마한 덩치의 그녀를 먼 발치로 볼 수도 있다.
조선소 현장을 좀 알고 있어, 집 크레인(JIB CRANE)은 내게 익다.
반의 반의 반평도 못되는 운전실에서 내려다 보면 까마득한 높이.
오로지 중량물의 거중(擧重)을 위하여 역학적기능만 고려된 강판과 스틸와이어와 기계설비의 조립물.
그곳은 사람의 신체가 필요로 하는 신변잡사의 유별함을 수렴할 털끝만큼의 배려가 있을수 없는 공간이다.
계절에 따른 바깥의 차가움과 뜨거움은 강판의 민감한 열전도율(熱傳導率)에 의하여 한데와 같은 공간.
한 자그마한 여인이 감내하고 있는 반년 넘도록의 그 공간을 상상할수 있는가.
무슨 처연한 사연이 오십 넘은 여인을 200일 넘도록 공중 그 공간에 붙들어 놓고 있는가.
생산요소중 자본과 노동의 비대칭성.
저와 같은 극한을 연출하지 아니하고서는 오불관언인 이 자본세상에 소금꽃따위 일개 노동자의 목소리가 들릴리 없다.
본능적인 노동자의 감각, 그것은 순정함이다.
감히 그 결연함의 진정성을 폄훼하려는가.
보수꾼들은 감동해야 한다.
보수꼴통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행치 못하겠다는, 그 자의식으로 천민자본주의의 모리배들은 그녀에게 용심을 부려서는 아니된다.
한 노동자의 처연한 진정성 앞에서, 감동이 싫다면 일단은 진지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사람얼굴을 한 자본주의이다.
지엽만을 골라 들고서 그것이 본질인양 왈왈대거나, 뒤에서 수군거리고 주탁의 안주로 낄낄 거리거나, 왼편 어쩌구 운운하며 색깔론으로 호도하거나, 진짜는 간담이 서늘하면서도 짐짓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백안시의 똥폼을 잡거나, 부화뇌동이 어울어져 냅다 고함을 쳐대거나, 양비론 양시론으로 어정쩡하게 군시렁거리거나 하여서는 아니 된다.
정리해고.
가장 먼저 한진중공업의 오너 조아무개는 두 손을 들라.
그리하여 그녀를 내려오게 하라.
정리해고, 비정규직.
눈가리고 아웅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진지하고 국회가 진지해야 한다.
자본논리의 사고전환에 대하여 필경 기분 나쁠 터인 자본의 그 우월적 입장.
자본의 수익지상주의적 의식에 관하여서도 진지하게 숙고하여야 한다.
조아무개와 소금꽃을 청문회에 세우고, 국민환시리에 토론을 벌여 이 주제를 국민적 의제로서 도출하여야 한다.
그런데 두려움 때문인가.
철벽을 쌓았다.
포진한 수천명 경찰과 첩첩이 에워 싼 버스차벽.
그것이 85호 크레인을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그 공중의 소금꽃은 등대가 되었다.
그 등대의 빛에게로 생각들이 모여들었다.
볼 부운 생각, 바르고자 하는 생각, 빌붙어 힘을 얻고자 하는 생각들...
그해서 철벽은 더욱 두려운가.
그 공고함으로 85호 크레인을 더욱 고립된 섬으로 만들라.
소금꽃등대를 시대의 상징, 노동운동 불멸의 기호로 만들라.
아, 이로써 그만 소금꽃 내려오게 하라.
내년이면 총선과 대선이다.
여태 목에 힘들어간 체면과 자존심있을 터이니.
궁구하고 궁구하여 가장 멋진 방법을 생각해 내어 은근짜하게 항복하라.
보수꾼들마저 등대빛에 눈 부시기 전, 더 늦기 전에.
좋은 말할 때 말이다.
5.
두루 어수선하도다.
세상아, 마음 안정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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