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김원일]]
<어둠의 혼><절망의 뿌리><연><전율>
<어둠의 혼>
-김원일 作-
***동우***
2013.02.22 05:31
소설가 김원일(金源一, 1942~ )
<나는 삶이 괴로웠다. 그래서 태어나지 않은 상태나 빨리 늙어 노인이 되기를 원했다. 노인이 되면 장남으로서의 의무도 벗고 죽는 날만 기다리며 일을 하지 않아도 아무 사람 눈흘기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가진 자나 행복해 보이는 자를 이유없이 증오했다. -김원일, '사랑하는 자는 괴로움을 안다'->
그의 동생 김원우(金源祐, 1947~ ) 역시 작가로 나와 동갑, 그를 조금 알고있습니다.
어느새 김원일도 늙고 김원우도 늙고 나도 늙었습니다.
남녘땅에서는 이념의 적(敵)으로서 아버지라는 존재의 기억을 지워야 했던.
해방과 6.25와 휴전의 세월을 유년이거나 소년으로 살아낸 아들들이 있었다.
김원일(1942년생-‘불의 제전’등), 이문구(1942년생-‘장한몽’등), 김원우(1947년생-'짐승의 시간'등), 김성동(1947년생-'만다라'등), 이문열(1948년생-'영웅시대'등)등... 그리고 우리 형제(1944생의 형과, 1947년생의 나)
어둠의 혼(魂)이란.
해방 후, 허무하게 죽어 가슴에 묻어야 했던 아버지라는 존재 그 아픈 기억의 어떤 핵을 말함일까.
도무지 알수 없는 이념이라는 것, 아버지를 매몰케 한 동인(動因)의 어떤 이미저리를 의미하는걸까.
어쨌거나, 내게도 궤적의 모퉁이마다 어두운 의식 속에서 살아 꿈틀거렸던 혼(魂)이 있었다.
아버지거나 아버지의 냄새거나.
영혼의 어느 부위가 피흘려 아파하는... 아파서 더욱 그리운 추상의 존재.
존재하지 않는 관념속 관계의 아버지
그렇지만 ‘갑해’는 아버지의 주검을 확인함으로 그 그리움은 완성되었다.
<느릅나무 밑, 거기에 가마니에 덮인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모부가 걸음을 멈춘다. 가마니 밑으로 발목과 함께 닳아빠진 농구화가 삐어져 나와 있다. 그러나 정갱이 부근부터 머리까지 가마니에 덮여 있다. 나는 숨을 멈추고 이모부의 허리를 꼭 잡는다. 온몸이 어들어들 떨린다. “이거다. 이게 니 아버지의 시체다. 똑똑히 보았제. 앞으로는 절대 아버지를 찾아서는 안 된다. 알겠제” 이모부는 말한다. 그리고는 내 손을 놓고 가마니를 휠쩍 뒤집는다. 아, 나는 볼 수 있었다. 달빛 아래 희미하게 드러나는 아버지의 처참한 얼굴을. 반쯤은 피에 가려 있고 나머지 부분은 하얗게 바래 버린 찌그러진 얼굴, 죽은 아버지의 눈은 부릅뜨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주검을 모른다.
그 이의 마지막 시공(時空), 어림이나마 할수 없도다.
예순넘은 여태까지 아버지라는 존재의 죽음은 내게는 철저한 추상이다.
갑해처럼 처참할망정 그 분의 주검을 확인하였더라면.
나의 삶은 어딘가 다른 색깔이었을까.
내 것들의 척박함과 천박함은 그렇게 몽롱하지 않아도 좋았을랑가.
나는 좀 더 강인한 사내가 되었을랑가
이 새벽, 추상의 아버지.
나는 좀 섧다.
***teapot***
2013.02.22 07:31
짤막짤막한 쎈텐스로 씌여진 소설이라 그런지 읽기가 쉽네요.
소재도 어렵지 않아서 인것도 같고요. 한편으로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이 이런 소설을 읽으면 어떻게 느낄까가 궁금 해졌어요.
동우님 연배나 조금 후의 사람들 외에는
세월이 흐르면 더 이상 읽는 독자들도 없을 것 같이 느껴지네요~
동우님은 아버님을 일찍 여의셨나 봅니다.
***동우***
2013.02.22 09:16
50년대 초 무렵.
우리나라 전후의 현실, 그에서 형성되었을 사람들의 어떤 정서.
티팟님은 연배가 나보다 아래인지라, 그런 기억 그닥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알게 모르게, 직접 간접적으로 그 상흔을 가족사적으로 간직하지 않은 사람들 또한 한반도 태어난 사람으로서 드물겁니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적어도 70년대 이후)에게는 이런 소설 어떻게 읽힐지 나 역시 궁금하군요. 티팟님 말씀처럼,
오래전 역사소설이나 영화의 픽션을 보듯 피상적으로, 리얼하게 읽히지는 않을겁니다.
여러 곳에서 얘기한바 있습니다만, 내 아버지는 좌익 사상을 가지고 월북한 사람입니다.
6.25 발발 직전 생이별하였지요.
이 소설의 작가 김원일의 아버지 역시 남로당 간부로 전쟁 발발 직전 월북하였다지요.
하하, 그래서 이런 소설들은 내게 새삼스레 읽히는 소설이랍니다.
***teapot***
2013.02.25 13:32
그러시군요!
***송현***
2013.02.22 11:09
아린 역사의 회오리를 보여줍니다
어느분은 아버지가 동경 유학생이시고 화가를 하셨다는데
북한 그림을 사서 아버지 영정인 양 거실에 걸려있었습니다
***동우***
2013.02.23 05:49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생존사적으루다 규정지었을 근대사의 회오리, 6.25전쟁.
위 티팟님도 말씀하셨지만 요즘 아이들 이런 소설을 어떻게 읽을런지.
그 의미를 일깨울 필요는 없을겝니다만... ㅎㅎ
<절망의 뿌리>
-김원우 作-
***동우***
2017.05.23 09:52
김원일 (1942~ )의 '절망의 뿌리'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조화롭고 긍정적인 삶의 뿌리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경험의 축적이 자아의 주요한 한부분이 형성된다고 할때,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라던가 기억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가 그 뿌리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운 기억의 명징한 해석은 불행입니다.
기억의 몽매(蒙昧).
잉그릿 버그먼은 '행복은 건강과 나쁜 기억력'이라고 하였습니다그려,ㅎㅎ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전쟁의 기억.
빨갱이 삼촌, 빨갱이의 대검에 찔려죽는 아버지,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 어머니, 월남전 살상의 기억들....
트라우마, 긴 세월에도 벌겋게 화농된 채로 피흘리고 있는 상처.
이문희의 소설 '흑맥'이 떠오릅니다. (이만희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었습니다. 신성일, 문희주연의)
마지막 대목.
용산패 왕초 독술이(독수리)는 결코 온전한 양아치가 되지 못합니다.
전쟁의 기억.
그의 귀에는 누이를 산산조각 찢어 죽인 작렬하는 폭탄소리가 들립니다.
독술이는 경찰서 복도를 네 굽을 놓고 달리면서 부르짖습니다.
"미순아! 개쌍년아!"
미순이는 그가 위악적으로 학대하면서도 사랑하였던 소녀의 이름이었지요.
***동우***
2017.05.24 03:39
우리 근세사.
해방, 남북 분리, 6.25 전쟁, 분단 고착, 개발독재. 근대화 자본화 도시화, 월남 용병...
가치관의 급변적 전도(顚倒)였으며 압축적 왜곡이었던 격랑의 역사.
김원일 연배, 1940년대 즈음 태어난 우리 또래집단.
목격한 先代와 경험한 當代의 기억이 의식속에 고약처럼 눌어붙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志士로써 일제에 참수된 할아버지, 좌익삼촌, 눈 앞에서 빨갱이의 대검에 찔려죽은 아버지,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 어머니, 다른 나라의 전장 월남에서의 이유도 명분도 없는 살상....
그에게 공동체적 가치는 허망한 것입니다.
그의 정신은 분절된 의식 속에서 신음합니다.
절망의 뿌리, 그의 의식 속에서 도무지 쫓아낼수 없는 '어둠의 魂'(김원일의 대표작)일 테지요.
우리의 역사, 치유의 과정이 있어야 했습니다.
저 개별들에게 존엄과 의미를 부여해주어야 했습니다.
조부와 부모의 죽음과 용병의 싸움에 대하여.
저 개별들이 public enemy가 되지 않도록.
공동체적 상호작용으로.
'빅터 프랭클' 박사의 '로고테라피'
고통 속에서도 살아내게 하는 것은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하지요.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는 것은 로고테라피의 기본신조 중의 하나이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시방, 일흔넘은 내게도 로고테라피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그려. ㅎ
***솔솔솔***
2017.05.24 15:03
그냥 막 읽었습니다
짬날때 다시 한번 더 읽어 보도록하겠습니다
로고테라피를 생각하면서요~
***┗동우***
2017.05.25 03:56
솔솔솔님.
로고테라피에 대하여 생각하시는 분이시라 더욱 반갑습니다.
닉네임 클릭하여 방문하였는데, 혹 부산사람이신지...ㅎ
자주 들러 주십시오.
***┗솔솔솔***
2017.05.26 16:25
예.
부산이 고향이고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살고 있습니다
***┗동우***
2017.05.27 04:18
아, 부산갈매기.
더욱 반갑습니다, 솔솔솔님.
난 영도에 살고 있습니다만. ㅎㅎ
<연(鳶)>
-김원일 作-
***동우***
2013.10.09 08:11
김원일의 연.
정능의 산마루에서 나도 연을 날렸다.
나는 여기 있는데, 연은 너무나 까마득하게 높고 멀어..
그 아득함이 나는 좀 무서웠다.
연.
물레에 물려 자유롭지 못한 자유, 실을 끊으면 연은 절대자유를 얻는가.
슬픈 역마살..
실의 관계 또한 슬프다.
***홍애(虹厓)***
2013.10.21 14:30
연이 인연으로 읽힙니다.
말이 글로 되면서 만들어내는 한국어만의 느낌
가난하던 시절엔 지방마다 갖고 있던 정서가 말 속에 녹아있어 이런 소설도 나왔겠지만
요즘은 우리 소설에서 글맛을 느끼기가...
점점 오락적인 개그콘서트식 말놀이만
소설에도 그리 이용되고 있는 것 같네요.
며칠 글이 안 올라와 궁금해 들렀습니다
어디 몸이라도 편찮으신가해서요.
블로그에도 사람마다 글 올리는 리듬이 있는데
동우님 한 박자만 아니라 한 구절 쯤 빠진 것 같습니다.
안부궁금
블로그의 연이 이렇습니다.
ㅎㅎ
***동우***
2013.10.22 04:32
정말 그렇군요.
鳶은 緣...
나와 창공에 까마득한 저 연.
연결된 실이라는 인연이 없다면 연은 나와는 상관없는 자유.
이 소설이 은유하는바도 鳶과 緣에 있을듯 싶습니다.
홍애님.
내 블로그 리딩북 포스팅은 하루에 하나씩은 올리고 있답니다.
읽어주시는 분 적지 않아 책임감도 없지 않지만, 스스로를 위하여도.
처음 읽는 것이든 다시 읽는 것이든 하루에 한편씩 그나마 책을 읽는 것인지라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지요. ㅎㅎ
홍애님의 블로그질(? 하하 실례)이 게으르시지,무어.
블로그 뜨아하실적이라도 SNS로 홍애님 근황이야 부처님 손바닥이니 안부 궁금할리 바이 없지만.. ㅎㅎ
<전율>
-김원우 作-
***동우***
2015.04.01 05:14
김원일(1942~ )의 '전율'(1969년 작)
김원일은 나보다 오륙년 앞 선 연배이지만, 1960년대후반의 저 무렵 젊은날의 절망적인 정서는 또래로서 엇비슷할것이다.
학교 또는 공부에 있어서의 열등의식, 늘 젖어지냈던 현실에 대한 열패감. 도무지 자신없었던 불확실한 장래.
여자는 설레이는 로망의 대상이면서 격렬한 성적욕망이 혼재된 요상스럽게 신비한 미지의 오브젝트.
'여자 따먹은(?) 무용담'에 키득거리는 설익은 수컷들, 그것은 여자라는 존재가 겁나고 선망스럽고 안타까운 대상이므로 과장과 허세로 점철된 거짓이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요즘 젊은애들의 개방적인 성의식과는 달리 여자를 어찌어찌하였으면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게 사회적 의식으루다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이었나.
암울한 청춘 앞에 건너야 할 늪처럼 앞을 가로막는 군대가 그나마 탈출구였을지.
동시상영의 극장에서 만난 외모도 교양도 보잘것 없는 다만 손 만이 이뻤던 여자.
여자는 그의 못생긴 여름이었다. (김승옥 '내가 훔친 여름)
못생긴 여름이 몸을 빼앗기고 숨죽여 울고 있다.
아름다운 손.
신문지에 쌓인채 문 앞에 버려진 그것은 무엇의 메타포인가.
<누렁이 앞에 신문지 뭉치를 던진다. 먹어라, 먹어치워. 남김없이 몽땅 먹어치워. 누렁이가 앞발과 주둥이로 신문지를 헤집자, 나는 벽으로 돌아선다. 눈을 감는다. 누렁이의 다급한 비음과 비닐 봉지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를 혼란 속에 빠뜨린다. 누렁이의 이빨에 뜯길 잘린 손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나는 어깨를 들먹이며 운다. 내가 울다니, 바보처럼 울고 말다니. 결코 속죄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눈물은 스스로 바보짓을 한다. 일각대문이 흔들린다. 그냥 던지면 신문이 비에 젖는다고 신문배달원이 투덜거린다. 누렁이가 맹렬히 짖는다. 나는 어렴풋한 잠결에도 빗소리와 누렁이가 짖는 소리를 듣는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은 채 나는 베갯가로 눈물을 흘린다. 엷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며 소리 죽여 운다.>
아름다운 손.
개에게 던져 먹히우는 나의 '페티시즘'
그 페티시즘은 육체의 것이었을까, 정신의 것이었을까.
욕망이 좌절이 열등감이 죄의식이 소리죽여 울고 있다.
전율이다. 청춘 포비아 (phobia)
이 소설 독법(讀法) 맞건 안맞건, 책읽는 느낌이야 엿장수 마음대로. ㅎㅎ
***eunbee***
2015.04.02 05:36
동우님
나는 이소설을 읽고, 이상스레 구역질이 났어요.
자꾸만 목구멍이 불편한 것이, 뛰어나가 무언가를 뱉어내든, 아니면 시원한 무언가를 한모금 마시든...하고 싶은 욕구가.ㅎ
못생긴 여자의 이쁜 구석, 아름다운 손.
정조를 지키려는 여인의 슬프고 처연한 순수와 순결함일 수도 있을까요?
그 순결을 짓밟은 남자에게 달라붙은 죄의식으로, 신문지에 싸여 따라온..ㅋㅋ
이렇게 엿장수 가위질을 해봤어욤~ㅎ
오늘 아침, 아니 어제 만우절날 아침,
아들이 태블릿 PC를 선물하기 위해 왔어요.
소설 편하게 읽으라고, 읽는 동안 화면이 꺼지지 않게 조정해 왔대요.
울 아들 착하죠? 헤헤~
이제 리딩북 더 잘 읽을 수 있게 됐어요.
***동우***
2015.04.02 09:08
고맙고 착하고 기특한 아드님.
여름이 겨울이 거두는 마음을 보면 보기드문 심성의 아드님인데(며느님도) 어머니를 향하여 어쩌면 당연한 지극함...
리딩북이 또한 고마워함..
아름다운 손.
좌절과 죄의식과 자기혐오와 자기연민과 절망이 투사된 페티시즘.
은비님과 나, 우리 엿장수 가위는 비교적 장단이 맞는 편 아니우? ㅎㅎ
은비님 파리 가실날 얼마 남지 않았네.
한참 상거한 대륙, 통화합시다그려.
-계속-
-독서 리뷰-
[[김원일]] -2-
<미망><세월의너울><바라암><어느여름..><전율><오누이><시골 여인숙><미망>
<미망>
-김원일 作-
***동우***
2016.12.12 05:12
삼엄하였던 연좌제(緣坐制).
빨갱이 아버지거나 빨갱이 남편이거나 빨갱이 자식.
김원일 김원우 형제, 이문구, 이문열, 김성동...
아버지의 광혈(鑛穴)을 가슴에 묻어 끙끙 속앓이로 한세월을 살았던 사람들.
잊으려해도 잊을수가 없는.
저 할머니의 未忘, 저 어머니의 未忘.
그리하여 저 손자의 未忘은 어떤 색감일런지요.
아, 내게도 그 미망 없으리오마는.
未忘은 未亡의 迷妄이리이다.
김원일(1942~ )의 '미망(未忘)'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하늘의 소리***
2016.12.12 22:10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2장 11-12절)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장 1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
밖으로 들어나는 장애나 아픔은 아니지만 나 자신만이 삭여야 했고 이겨야 했던 허전함과 아픔, 화장실에 앉아 울 수 밖에 없었던 슬픔과 실패들, 그런것들을 통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과 모든것을 맡기고 살아 갈 수 있는 믿음...
얼마남지 않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얼마나 감사한지, 감사 감사 감사.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0
***┗동우***
2016.12.13 04:49
좋은 말씀들, 고맙습니다.
***동우***
2016.12.13 04:47
체구도 식성도 성격도 서로 판이하게 다른 고부(姑婦)간의 갈등.
그러나 개성이나 기질의 차이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아버지에 기인한 것입니다.
부재(不在)하는 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애틋하게 그리운 자식이고 어머니에게는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린 남편입니다.
자식이거나 남편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세월을 살아 온 두사람.
할머니 미망(未忘)의 질료(質料)는 한(恨)일 터이고 어머니의 미망은 원망과 미움일테지요.
<그날 저녁 고모가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할 때, 사십 여년을 차고 다닌 낡은 비단 꽃주머니 속에서 동전 삼백원과 닳은 증명서 한 장이 나왔다. 그 증명서는 누렇게 색바랜 아버지의 손톱만한 사진이 붙은 ‘보도연맹 가입증’이었다.>
보도연맹 가입증, 할머니는 꿈에서라도 돌아올 빨갱이 아들의 면죄부로서 죽을때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때.
보도연맹 사람들을 예비검속으로 얼마나 많이 죽였습니까?
미친 시대의 수레바퀴에 치인 슬픈 삶들.
6.25, 그 아픔도 아마 내 세대까지일 것입니다.
이제 호랑이 담배피던 이야기나 역사 속의 추상으로 남겠지요.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들고 온 비닐 봉지 속에는 할머니가 그리도 좋아하시는 갈치 두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작가는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을 소설 속에서나마 화해시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하는군요.
김원일의 '미망'
참 잘 쓴 소설입니다.
***하늘의 소리***
2016.12.13 22:07
손자와 손자 며느리의 효심.
참 아름답구나.
내 세 누님 위의 20년 연상인 형님은 일제때 철도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역에서 근무하다 일제패망 후 일본인 상관들이 다 없어지는 바람에 졸지에 20초반의 나이에 부산역의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전무로 근무하다가 가입도 하지 않은 철도연맹사건으로 서북청년단에 끌려가 초주검이 되어 가마니때기에 실려 나왔었다.
똥물까지 먹는등 온갖 약을 써 겨우 살아나서 군에 입대, 그리고 영도소재 훈련소에서 훈련받고 장교로 입관된 후 그 형사를 찾아가서 권총으로 쏘아 죽이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어릴적에 들은 일이 있었다.
얼마나 분하고,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런 생각까지 했겠나?
일제말과 해방과 6,2...
그 시대를 살았던, 지금 80대 이상의 사람들 중에 누가 자기 뜻대로 꿈꾸는대로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서북청년단' 그들의 대부분이 함경도나 평안도 출신으로 북한에서 부모처자가 공산당 손에 다 죽고, 남한으로 내려 와 반공에 앞장 선 사람들이었지.
이제 다시는 "미친 시대의 수레바귀에 치인 슬픈 삶들"이 없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조그마한 불만들과 자기중심적 생각 때문에 미친 시대가 닥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동우***
2016.12.14 04:13
정목사, 아니 길채, 너의 형님, 그리고 내 아버지...
우리 또래중 해방후 남북 분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아무도 없을걸세.
간접적으로라도.
이제는 먼나라 신화같은 이야기들....
<세월의 너울>
-김원일 作-
***동우***
2018.02.19 04:13
김원일의 '세월의 너울'
설 명절.
몸서리치게 고독한 실존을 벗어나려고, 한사코 관계의 자리를 찾아가야만 하는 한반도에 연연한 집단무의식.
그러나 많은 설움 있으리, 우리의 설날은.
세월의 너울.
예수를 믿고부터 우리 집안은 유가적 덕성을 잃어, 명절 절사(節祀)를 지낸지 언제인지 기억이 까마득합니다.
그렇다고 예수적 덕성의 형식을 올곧게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두 손주에게 <관계>를 훈도할 그 어떤 형식도 가지고 있지 아니합니다.
祖孫이 교합하는 가치관은 오리무중, 디지털세대 손주들을 디지털적으로 귀여워 하는 방도 이외에는 할비로서 나는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많지두 않은 집안이 이럴 때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게 무어 그리 어렵누. 집이 좁다면 모르지만 자구 갈 방과 이부자리두 넉넉허지 않느냐. 애들두 그렇다. 하룻밤 조금 늦게 재운다구 이튿날 공부에 지장이 있다면 그만한 손해가 과연 얼마만큼 손해겠누. 돌아가신 조상님을 기리는 정성이 학교 공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게 이 할미 생각이다. 너들은 어디서 생겨나 이렇게 뿌리를 내렸구 이 다음에 어디루 가서 뉘 혼백을 만나게 될 거냐."
김원일의 아름다운 소설, '세월의 너울'
네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동우***
2018.02.20 04:21
요즘 세상(소설은 1980대 라지만)에 행랑아범을 두고, 가족 모두 안돈하여 저리 복을 누리는 집안 흔치 않을겁니다.
그렇지만 어느 집안이나 어지러운 우리나라 근세사로 인하여 어긋난 돼지 발톱같은 식구 있어 한조각 근심거리는 있게 마련이지요.
월북한 동생과 구속된 운동권 조카...
그러나 삶의 자리는 이데올로기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설령 그 말을 뱉는다 해도 나는 그 말에 책임질 입장이 아니다. 만약 그애들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기성세대로서 나라는 존재 역시 이 땅에서는 삶의 가치가 퇴색되고 만다. 그 애들의 눈에는 내가 이미 썩어버린, 정신개조가 불가능한 부르주아요 타락한 보수주의자로 보일 테니깐, 그렇게 취급당해도 나는 발끈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치가도, 매판 자본가도, 기회주의자도 아니다. 오직 나는 그 애들이 추켜세우는 민중의 일원은 못되지만 내 자신의 삶만큼은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 애들도 그렇겠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에는 그만큼 타당한 이유가 있고, 그 삶이 불의나 비도덕이지 않다면 어느 계층으로부터든 그 삶의 몫은 존중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는 사람이 죽었을때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탄생을 선조의 허리에서 나왔다로 한다던가...
조상숭배 사상이라기보다 삶의 자리와 죽음의 자리의 근원이 핏줄이라는 암시가 아닐런지요.
물론 근저에는 창조주에 대한 신앙이 깔려있을테지요.
전에 나도 '갈매빛 그늘'이라는 잡설을 지껄인적 있습니다만..
***동우***
2018.02.21 04:16
책부족 정춘수님은 그의 저서 '논어를 읽기 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학(儒學)은 삶의 논리학이라기 보다 삶의 美學이노라고.
'제사'라는 형식을 우상숭배라고 배척하는 기독교가 나는 좀 못마땅합니다.
<천,지,일,월,성신,산,천에 모두 신령이 깃들여 있다는 생각으로 신의 재앙이 없는 안락한 생활을 기원하는 마음가짐에서 제사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우주의 더 넓은 이치와 생명을 건사하는 신묘한 능력과 천재지변의 놀라운 위력을 가늠하다 보면 인간의 한 살이는 티끌과 같이 보잘것없고, 자신도 모르게 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거기에 의지하게 됨이 사람의 항심이다. 고래로 부여의 영고, 고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이 다 그렇게 시작된 제사라는 문헌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조상을 숭모하여 하늘에 드리는 제사 역시 그 뒤를 이어 시작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인간이 짐승과 달리 예를 생활의 바탕으로 삼았을 때, 조상을 숭모하는 이치야말로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과 마음으로써 얻는 평안이 과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오직 현시적인 것만이 대접받는 시대에 당도하니 세상의 이치도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건대 古今 如히 저 형식은 우리 '삶의 자리'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동우***
2018.02.22 10:20
김원일 '세월의 너울'의 저 어머니.
<어머니 경우는 시아버지가 시할머니의 가계를 꾸몄음에도 이를 넉넉한 마음으로 감쌌음은 물론, 이를 넘어서서 스스로 본이 된, 그 생애가 아름다운 삶이었다. 그 아름다움이란 스스로를 겸손으로 감추는 가운데,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눈부심이다. 어머니는 바깥으로 널리 퍼지는 밝은 빛이라기보다 가까이 있는 혈육에게만 깜깜한 밤의 등불과 같이 주위를 밝혀주는 희망과 안식의 빛이다. 어머니는 다른 누구보다 후손에게만은 엄격한 스승이요 존숭의 의연한 모습으로 살아오셨다....그러므로 어머니는 오래 전부터 내게 종교와 같은 절대적인 그 무엇이 되었다. 그 그늘이 아니고선 우리 집안은 물론 나라는 존재도 너울 센 바다에 떠도는 가랑잎이었으리라. 내가 그런 생각을 갖기는 오래 전이고, 나는 다시 한번 그 고마움을 마음 깊이 새긴다.>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 장씨부인.
그녀가 페니스중심주의 사회에서 굴종적이고 예속적으로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허비한 헛된 여성상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시 천박한 페미니즘(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닌)이 그리도 까대었듯이.
생각건대 자웅(雌雄)이라는 兩姓은 천부적 기능에 맞추어 생산하고 양육하여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라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쪼그리고 오줌 누는걸 모욕으로 느끼는 따위가 페미니즘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저 삶의 형식은 내게 지극히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예속하여 스스로 엄격하고 스스로 엄숙하고 스스로 기품있는.
고조(高祖) 할머니의 비천한 출신성분을 알고나서 할머니를 다소 비웃음 띤 눈길로 바라보는 건욱이.
할머니가 조상에 대하여 그리도 꼿꼿하고 삼엄하게 단속하는 형식을 위선으로 생각했을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건 화무십일홍의 섭리를 모르고 하는 잘못입니다.
當代도 아닌 四代 前의 것을.
도요툐미 히데요시는 빈농의 자식이었고, 작년의 대통령 박근혜는 감옥에 갇혔고, 그전의 대통령 이명박의 탐욕스런 면모는 양파껍질처럼 하나하나 벗겨지고, 어제까지 황제처럼 군림하였던 어느 연극인은 추악한 성범죄자로 까발려지고...
세상사, 세월의 너울이 그러하거니와...
<바라암>
-김원일 作-
***동우***
2017.08.18 04:26
김원일(1942~ )의 '바라암'
1975년 현대문학상을 받은 단편입니다.
6.25, 아버지의 鑛穴을 가슴에 묻고 살아낸 아픔의 세월.
불교적 세계관으로 그 迷妄 벗어났는지.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동우***
2017.08.19 07:40
푸른 눈의 사생아 납자(衲子)는 거듭 사생아를 만들고 어미가 또 佛心에 의탁하는 그 緣...
카르마, 業...
전생에 지은 인연의 고리인가요.
인연(因緣).
인(因)이 있어 연(緣)을 이룰진데, 그 因이란 그닥 삼엄한 것이 아닙니다.
色의 이끌림, 그 내용이사 얼마든지 色卽是空일지라...
橫의 관계와 縱의 관계.
암과 숫이 서로 끌려 이루어진 관계는 무상할지라도 어미 자식 관계는 피의 리얼리즘입니다.
밭과 씨는 다를진대, 그러나 살이의 리얼리즘은 더욱 삼엄합니다그려.
<손금을 바꿀 수 없듯 팔자에 없는 복을 어찌 불러들이리오. 태어날 때 지니고 나온 쪽박, 어떤 이는 귀인 후사고 큰 쪽박을 지니고 태어나고, 어떤 이는 미물 후사로 작은 쪽박 지니고 태어나 ,그 쪽박에 담을 만큼 현세의 업을 담다 끝내 빈손으로 내세에 들긴 마찬가진데 무엇을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리오. 장 사공은 그런 생각을 엮으며 측은한 눈길을 흐느끼는 딸에게 보낸다. 박덕한 아비 만나 남 다 가는 초등학교 문조차 못 들어가본 불쌍한 것, 동무 없이 혼자 크며 허구한날 귀래천 흐르는 강물만 보며 살아온 꽃 같은 한 청춘이 자기에 못지않게 가련하다. "봉녀야. 참자, 모든 걸 참구 살어보자. 시상사가 부처님 뜻인디 말이여, 그것을 넌들 어쩌겄느냐.">
인과 연, 모두 거두는 화엄(華嚴)의 덕이여.
<어느 여름 저녁>
-김원일 作-
***동우***
2018.07.12 06:39
김원일(1942~ )의 '어느 여름 저녁(1986년 작품)'
천민자본주의 냄새 물씬한 부잣집 세 젊은이들(형제와 형의 여자친구), 그리고 그 집에 고용된 젊은 운전기사.
저 시절 시대정신은 어떤 것이었을까.
회억하니 이듬해인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전두환의 5공이 종식되었었지요.
그로써 정치적 민주주의가 정착되었을랑가 모르겠지만 경제적 양극화의 갈등은 작금에 이르기까지 연연합니다.
이 소설 속, 부잣집 아이들의 갑질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데 저 기사의 노여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무더운 여름철, 초장부터 설설 끓고 있었겠지요.
상대적 박탈감.
경제적 양극화는 사회적 의식을 지배합니다.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사회적 컨센서스로 용인될수도 있을테지만, 그 임계점 또한 있을겁니다.
요즘 회자되는 두 항공재벌의 갑질은 정말, 쯧쯧.
<오누이>
-김원일 作-
***동우***
2018.06.06 00:08
김원일 '오누이'
알다시피 김원일(1942~ ) 문학의 근원은 '어둠의 魂' (참살 당한 좌익 아버지)이었습니다.
현실 속에서도 연좌(連坐)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나마 환경이 괜찮고 심지가 굳은, 저 오누이는 다행한 경우입니다.
나 역시, 80년도 들어 연좌제 폐지된 후에야 직장에서 해외출장이나마 가능하였었지요.
어렸을 적 고모님으로부터 귀 따갑게 들었던 말. (당시 고모부님은 고위 공직자)
"낯선 사람이 네게 접근하면 반드시 고모한테 먼저 알려야 한다."는.
내게는 <월북한> 아버지가 아니라 <부재>하는 아버지가 더 큰 트라우마였지만.
6월 12일 싱가포르.
70여년 동안 얼어붙은, 順歷史에 대한 한반도의 이 반동적 상황, 풀리기 시작해야 할텐데.
모쪼록.
<시골 여인숙>
-김원일 作-
***동우***
2019.04.28 04:32
'김원일(1942~ )'의 '시골 여인숙'
그 시절 시골 차부(시외버스 터미널) 부근의 풍경화에 색주가를 겸한 목노와 여인숙은 빠질 수 없었지요.
도회보다는 세련되지는 않았을지라도.
포탄에 부모를 잃고 발을 동동 구르며 열네살 짜리 오라비 세이타를 부르는 네살 짜리 세츠코.
어떤 목숨들에게 산업사회의 그늘은 전쟁의 그늘과 진배없습니다.
그 습하고 치운 골목 처마 밑에서 삶을 이어가는 저 어린 목숨들.
천지 간에 어디 한 곳 기댈 데없는 아이들...
이모저모 상상 속 애긍(哀矜)함 들이 내 가슴을 아리게합니다그려.
저로부터(1980년대) 많은 세월 흘렀으니 지금. 저 절름발이 아이는 정례와 더불어 아들딸 낳고 알공달공 자알 살고 있을겝니다.
좋은 휴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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