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불멸> 前
-밀란 쿤데라 作-
***동우***
2011년 4월 26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노벨문학상을 ‘밀란 쿤데라’에게 수상(授賞)하지 않은 것은 직무유기다.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1929~ )’가 1984년도에 발표한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을 읽어보셨는지.
‘프라하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1988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감독은 ‘필립 카우프먼’이고 출연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 ‘줄리엣 비노쉬’ ‘레나 올린’)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을 짓밟는 소련군의 침공이 우리말 제목으로 부각되었지만 이 작품의 본질은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가벼움과 무거움.
그건 우리의 삶과 죽음에도 은유되어 있고 사랑에도 은유되어 있는, 아니 우리 삶의 디테일마다에 은유되어 있는 이중성이다.
분열이 아니라 이중노출의 모습으로. 육체와 그에 깃든 마음처럼.
김훈의 소설 ‘화장’,.. 화장(化粧)과 화장(火葬)이라는 이중적 함의(含意)...
책부족의 이번 텍스트, ‘밀란 쿤데라’의 장편소설 ‘불멸’ (1988년 체코에서 씌여졌고 1990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
[-첫 번째 잡설, ‘만찬’-]
느끼건대 이 소설은 포스트모더니즘 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적확하게 꿰뚫을 깜냥이 못되지만, 여태까지의 모더니즘 소설과는 독법(讀法)이 달라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형식이 그러하였고 내용이 그러하였다.
‘불멸’에는 가공인물과 실존인물이 함께 등장한다.
심지어 작가까지도 작품 속에 등장하여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작가가 창조한 가공인물 : 주인공 격인 아녜스, 그녀의 남편 폴, 아네스의 동생 로라, 아네스의 딸 브리짓, 로라의 연하정부(年下情夫) 베르나르, 아녜스의 애인 루벤스, 작가의 친구 아베나리우스 교수 등...>
<소설에 등장하는 실존인물 : 괴테, 괴테의 부인 크리스티나, 베티나, 헤밍웨이, 나폴레옹, 랭보, 베토벤, 릴케, 로망 롤랑, 살바도르 달리, 피카소, 지스카르 테스탱, 지미 카터, 미테랑 등등...>
극적긴장을 유발하는 소설적 장치는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
인과(因果)에 의하여 진행되는 드라마트루기에 대하여 작가는 신랄하다.
작가가 소설 속에 등장하여 하는 말,
<“자기 자신의 긴장이라는 불꽃에 삼켜지고 나면 소설은 한낱 짚단처럼 소진하고 만다네.”>
역시 소설속 등장인물인 아베나리우스 교수 왈,
<“자네 얘기를 듣다보니 자네 소설이 따분해지지 않을까 염려되는군.”>
작가 왈,
<“이 맛있는 오리 궁둥이 요리를 뜯으며 자네는 따분함을 느끼나? 목표를 향해 서두르고 있나? 정반대로 자네는 이 오리고기가 가능한한 천천히 자네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네. 그 맛이 영원히 지속되길 원한다구. 소설은 자전거 경주를 닮은게 아니라 많은 요리가 나오는 향연을 닮아야 한다네.”>
‘불멸’은 가히 밀란 쿤데라가 일급 숙수(熟手)의 솜씨로 요리하여 한상 그득 차려놓은 맛있고 영양가있는 아포리즘의 만찬이었다.
문장은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사유(思惟)는 가볍지 아니 하였다,
작가의 아포리즘에는 격조와 품위가 서려있었다.
가공할 입담의 ‘귄터 그라스’의 천방지축 ‘넙치’가 떠오르기도 하였지만 ‘불멸’은 그보다 훨씬 결이 곱고 내면적이며 문학적이었다.
작가의 존재론적 통찰력 깃든 다양한 주제의 요리들.
이 푸짐한 먹거리들에게서 무슨 사상이나 지식의 칼로리를 섭취하려 하지말라.
무슨 논리의 입맛으로 다시거나, 그걸 무슨 개념어로 치환하려 하려 했다가는 작가에게 군밤 한 대 맞기 십상이다.
<“작품을 그것의 사상으로 축소시키려는 자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혐오감! 사람들이 ‘사상토론’이라 부르는 것에 이끌려 들게 되었을 때 내가 갖는 공포감! 작품과 무관한 사상들에 의해 몽롱해진 시대가 내게 불러 일으키는 절망감!”>
인간실존(實存)에 관한 주옥같은 작가의 아포리즘들은 그냥 느낌만으로 족하다.
사랑의 내밀한 에너지와 사랑이라는 미명(美名)의 허무함에 대하여.
멸하고야 말 인간이 갖고 있는 불멸에의 욕망에 대하여.
실존적 자아와 타인에게 끼치는 ‘얼굴’과 ‘몸짓’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데올로기와 이마골로기에 대하여.
존재의 가벼움에 대하여.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요리에는 파라독스의 독한 비애가 씹힌다.
‘불멸’이라는 외피 속에 들어있는 ‘소멸’, ‘희극’속에 숨어 있는 ‘비극’, ‘존재’가 내포하고 있는 ‘비존재’ 따위의 슬프디 슬픈 맛.
내 혀에는 ‘시계태엽 오렌지’의 맛과 ‘설국’의 미각도 느껴졌다.
밀란 쿤데라는 다이제스트적 개념화를 혐오하는데, 그 느낌을 축약하여 두서없이 지껄이려 하는 나는 작가에게 무색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어쩌랴, 책부족의 숙제인걸.
[-두 번째 잡설, 이데올로기 혹은 간결문(쁘띠뜨 프라즈) 그리고 이마골로기(imagologie), 불멸 혹은 소멸-]
<“오늘날, 사람들은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혹은 만화로 바꿀 목적에서 씌어질수 있었던 것에 달려들고 있네. 소설에서 본질적인 것은 오직 소설에 의해서만 말해질수 있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개작되었건 각색에서는 비본질적인 것만 남게 되기 때문이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설을 쓸만큼 미친 작가라면, 그리고 자신의 소설을 보호하고 싶다면, 그는 사람들이 그것을 각색할수 없는 방식으로, 달리 말해서 그것을 이야기할수 없는 방식으로 써야만 한다네.”>
간결문 (쁘띠뜨 프라즈)이라는 것.
베티나가 만들어 낸 나폴레옹과 괴테와의 조우시의 에피소드.
황제를 알현하기 위하여 괴테가 들어서자 나폴레옹이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 왔군.”
이 한마디는 나폴레옹이 전장을 누비면서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항상 지니고 있었으며 괴테를 숭배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간결문의 대표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나폴레옹은 부관들이 베르테르 따위 감상물 나부랭이 읽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소문과 같이 그토록 괴테를 숭배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정치술은 정치를 경영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는 그 모호하고 통제불능의 자기 매카니즘 논리에 따라 스스로 경영된다), 간결문 (쁘띠뜨 프라즈)들을 발명해 내는데 있다. 정치가는 그 간결문을 통해 보여지고 이해되며 여론조사에 당락여부를 심판받는다.”>
<간결문의 대표선수는 바로 사진이다.>
사진은 회화와나 문장과 달리 피사체의 거짓없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
사진이야말로 지능적인 가공물이다.
작금의 ‘뽀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한정성과 시간의 비연속성으로 얼마든지 의도하는 바대로(간결문의 그림으로) 아웃풋이 가능한 것이 사진이다.
직정적(直情的) 호소력을 갖고 있는 것이 사진이므로 그것은 더욱 교활하다.
파파라치는 오히려 순박하다.
공간이나 시간을 거두절미하는 사진의 특성, 배경의 선택,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포착등등으로 한 근엄한 인간의 이미지를 죽 쑤게 만드는 것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이미지화의 경박성 또는 불멸에 대한 욕망.
‘괴테가 한 소녀와 주고받은 편지’라는 방대한 서간문집을 써서 사후 괴테의 이미지를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베티나 폰 아르님’.
노년에는 진보적인 정치투사로 이름을 떨쳤다지만 그 책의 베티나는 괴테를 끊임없이 연모하는 한 젊은 여자였고, 그 서간집은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괴테의 부인 크리스티안느는 영혼의 이상팽창으로 괴로워 한 적이 없으며 역사의 위대한 무대 위에 자신을 전시하고자 하는 욕망 따위는 전혀 없었지만 베티나는 그야말로 ‘이상팽창된 영혼’을 소지한 불멸에 대한 욕망의 화신이었다.
물론 여기서 의미하는바 불멸은 영혼불멸의 믿음따위와는 상관없는 불멸로서, 말하자면 ‘세속적인 불멸’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불멸이란 살아있는 자들에 남아 있는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 추억이다.
그것에 실존의 진정한 모습이 있을리 없다.
이미지이고 다이제스트이고 간결문이다.
<불멸은 죽음이다, 낭만주의자들은 바로 죽음, 사람을 홀리는 죽음, 시에 절여진 죽음.... 삶의 종말, 아니 그너머 비존재의 무한을 향해 뻗은채 그렇게 초월 속에서 자기 초극속에서 살고 있었다. 뻔뻔스럽게도 낭만주의자들은 언제나 친밀감을 과시하듯 경칭없이 불멸에게 말을 건냈다. 베티나가 괴테에에 그렇게 하였듯이.>
언니 아녜스는 소멸을 꿈꾸지만 여동생 로라는 베티나처럼 불멸을 꿈꾼다.
<로라-꿈으로 가득찬 머리가 하늘을 쳐다보고 있지. 허지만 그녀의 육체는 땅으로 끌리고 있어.>
<아네스-그녀의 경우는 육체가 불꽃처럼 위로 올라가네. 하지만 머리는 언제나 살짝 수그러져 있어. 땅을 바라보는 회의에 찬 머리랄까.>
아네스는 소멸을 바라보면서 옛 추억의 사진들을 찢어버리는 아버지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였지만 여동생 로라는 죽은 어머니의 사진을 찢어발기는 아버지와 언니를 용서할수 없었다.
아아, 장황하게 말하지 말자.
소멸을 바라볼줄 아는 자만이 진정으로 사랑할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소설 '불멸'의 핵심일 것이다.
불멸을 꿈꾸는 자의 사랑이란 ‘의지의 사랑’으로서 가짜배기이다.
베티나가 괴테에게 보낸 편지의 문구.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려는 굳고 견고한 의지를 갖고 있답니다.>
작가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베티나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바로 불멸>이었다고.
<공산당원 소년이 게릴라와 합류하기 위하여 권총을 들고 산 속으로 입산한다. 그는 혁명단원이라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에 매혹되어 있다. 그를 다른 사람과 구분짓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 이미지이다. 그것이 바로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인 것이다.>
이것을 작가는 자아의 불꽃에 소진되는, ‘이상팽창된 영혼’이라고 부른다,
베티나는 괴테뿐 아니라 베토벤에게도 매료되었었는데, 괴테가 젊고 어여쁘고 교양과 재능 가득한 베티나 자신보다, 못생기고 무식하고 뚱뚱한 아내 크리스티안느 편을 들었다는 사실에 대한 복수의 감정으로 괴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하나를 만들어 냈다.
늙은 괴테와 젊은 베토벤(베토벤이 먼저 죽었다)이 함께 산책을 하다가 황녀 무리와 마주쳤을 때 모자를 벗고 길 옆으로 비켜선 괴테와 모자를 쓴채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친 베토벤.
굴종적인 괴테와 베토벤의 반항인으로서의 이미지.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실제의 편지들이 발견되어 드러났지만 베티나의 책은 조작된 이미지로 가득찼다는 것이 밝혀졌다.
괴테가 그러했다면 베토벤 역시 그 시대와 무수히 타협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었음을.
베티나는 불멸을 소중히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죽음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걸 까맣게 잊어 버리고 원본을 없애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비록 불멸을 단장하는 일이, 사전에 그것을 다듬고 임의로 조작하는 일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결코 그것은 미리 계획해 둔대로 실현되지만은 않는 셈이다.>
필경 베티나는 이마골로그적 재능 넘치는 정치가이고 저널리스트였던 것이다.
이마골로기는 작가가 만든 조어로서 이데올로기에 대비되는, 인상이나 이미지 혹은 간결문으로 설명될수 있는 무엇인데, 아아 현대 우리 사는 세상 이마골로기 아닌 것 있으랴.
아이콘, 기호, 명령어, 아이돌, 티브이, 광고...
<정치가는 저널리스트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럼 저널리스트들은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가? 이마골로그들에게 달려 있다. 이마골로그란 확신과 원칙의 인간이다.>
프로파간다는 이마골로기의 대표주자다.
<공산주의 국가들의 선동 선전문구들은 자본주의의 광고와는 성격을 달리 하는가. 하나는 시장에서 쓰이고 하나는 이데올로기에 소용되는 것이라고? 이데올로기의 내용을 단순화시킨 것이 프로파간다이다. 간추러진 내용을 다시 간추리고 간추려 문구와 구호를 만든다. 이윽고 프로파간다에서 이데올로기는 증발하고 없어져 버리고 만다.>
<마르크스주의가 마침내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보기 어려울만큼 전체적 연관성이 빈약한 여섯 내지 일곱 개의 슬로건 모음으로 축소될때까지 그렇게 그것들을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유산 전체가 그 어떤 논리적 사상체계를 형성하기는커녕 단지 일련의 이미지와 암시적인 도상들 (망치를 들고 웃고있는 노동자, 황인과 흑인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백인, 비상하는 평화의 비둘기등)을 이룰 뿐인만큼,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의 점진적이고 총체적이며 전세계적인 이마골로기(imagologie)의 면모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광고업체들, 위정자들, 디자이너들, 패션창조자들, 재단사들, 미용사들, 쇼비지니스계의 스타들.. 모두 이마골로기의 분과가 이들에게서 영감을 얻는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패배 당했다. 현실은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강했다. 그러나 이마골로기는 현실보다 훨씬 강하다.>
<여론조사는 이마골로기적 권력의 완벽한 도구, 이 권력이 대중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여론조사들 덕분이다. 이마골로기는 사람들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이데올로기는 역사에 속해 있으나 이마골로기는 역사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고.>
<“인간은 자기 이미지 외에 아무것도 아냐. 인간들이 우리를 보는 모습이 우리일거라구.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늘 신경쓰고, 가능한한 호감을 주려 노력하지. 나의 자아와 타인의 자아 사이에 눈이라는 매개를 통하지 않는 직접적인 접촉이 있을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 속에 비칠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불안한 탐색을 빼고서 사랑을 생각한다는게 가능한 일인가? 타인이 우리를 보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구.”>
<“우리의 이미지란 단순히 하나의 겉모습이고 그 뒤에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독립된 우리 자아의 진짜 실체가 숨겨져 있을거라고 믿는건 순진한 착각이야.”>
<“그래, 사람들이 점점 정치에 무관심해지고 타인의 이익에 무관심해질수록 더욱 자기 얼굴에만 홀려 있게 되지. 그것이 우리 시대의 개인주의요.” “개인주의라구요? 타인의 소유로 전락한 것이지.”>
<“이마골로그들은 철저한 냉소주의로서 그 역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어. 즉 우리의 자아가 포착할수 없고 묘사할수 없으며 혼동스런 하나의 단순한 외관에 지나지 않는 반면, 유일의 실체는 지나칠만큼 포착하기도 쉽고 묘사하기도 쉬운 타인의 눈에 비친 바로 우리의 이미지라는 걸세. 그런데 더욱 끔찍한 사실은 자네가 자네 이미지의 주인이 아니라는거지.>
-계속-
<불멸> 後
[-세 번째 잡설,. ‘존재의 무거움’ 또는 ‘존재의 가벼움, 참을수 없는’-]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쓰기 6년전에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을 썼다.
작가는 소설 ‘불멸’에 대하여 <“이 소설이야말로 ‘불멸’대신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을 달았어야 하는데.”> 하고 이미 써먹어 버린 그 제목을 아쉬워 한다.
나 역시 동감하여,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내가 읽었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불멸’보다는 재미 없었고, 당시 프라하라는 장소적 의미도 내게는 다소 무거웠었다.
존재의 가벼움이란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디테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그 순간이라도 똥을 싸면서 배변의 쾌감에 진저리를 치고, 날아가는 새의 무엇을 보면 킥하고 웃음도 나오는 것이 삶이란 것이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거창한 이념 따위가 아니라 바로 삶의 구체성이다.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야말로 인생의 모습이고 한목숨이 한바탕 세상을 살아가는 실존의 본질적 영역, 본얼굴이다.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무수한 에피소드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실존적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인류와의 비연대성.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오직 한가지, 즉 어떤 구체적인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만이 이 일탈로부터 그녀를 구해줄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실내풀장에서 어떤 노부인의 몸짓을 접하고는 그로부터 비약하여 상상 속의 아녜스를 소설 속으로 불러냄으로써 이 소설은 시작한다.
<나는 심장이 졸아들었다. 그 미소, 그 손짓은 바로 스무살 아가씨의 것이 아닌가! 그녀의 손은 눈부시도록 가볍게 날아올랐다. 마치 장난으로 울긋불긋한 풍선을 연인에게 날려 보내기라도 하는 듯이. 비록 얼굴과 육신은 이미 매력을 상실했다지만 그 미소와 손짓은 매혹으로 가득했다.>
<우리 자신의 어떤 일부를 통하여 시간을 초월하여 살기도 한다. 나는 감동하였다. 그때 나의 뇌리에 아네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는 지금까지 이런 이름의 여자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아녜스의 몸짓, 로라의 몸짓, 교수인 아버지를 사모하는 비서의 몸짓.
<하지만 아네스가 곤혹스러웠던 것은 그 몸짓이 그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것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
몸짓은 자아의 표출이 아니라 몸의 기억이고 표출되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이 가벼움에서 소설속 인물 아녜스와 로라와 그녀들의 부모와 폴과 브리짓과 루벤스가 태어났다.
이베라니우스 교수까지, 심지어 작가 자신까지.
<사실 어느 누구도 어떤 에피소드적 사건이 어느 날 문득 되살아나 갖가지 결과들의 행렬을 유발할수 있는 그런 인과적인 잠재성을 갖고 있다.>
존재의 가벼움이 우연과 만나서 문자반(文字盤) 위에서 춤을 추면서 운명을 전개시킨다.
인생의 문자반.
<조물주는 프로그램이 든 디스켓을 넣어두고 떠났다. 신의 자리에는 가차없이 하나하나 실행에 옮겨지는 프로그램만이 남았다. 그 무엇도 이것을 변경시킬수는 없다.>
<워털루전쟁과 프랑스의 패배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인간은 천성이 공격적이어서 전쟁이란 그에게 동질적인 것이며 기술적 진보가 갈수록 전쟁을 참혹하게 만들거라는 것만 명기되어 있을 뿐.>
<상세한 역사적 사실은 단지 일반 프로그램의 갖가지 변이작용이거나 치환작용에 불과하다. 이 일반 프로그램은 미래에 대한 예견과는 전혀 무관하며 단지 여러 가능성의 한계만을 결정해 두고 있다.>
<그 한계들 사이에서 조물주는 모든 힘을 우연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다음 대목에서 나는 퀀블로 로스 박사의 ‘임종에 이르는 다섯단계’를 떠올렸다.
<인생의 어느 순간까지는 죽음이라는 것이 근심을 하기엔 너무나 먼 어떤 일로 머물러 있다. 죽음에 대한 전망도 없고 죽음이 눈에 뵈지도 않는다, 그것이 바로 가장 행복한 인생의 1단계이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우리는 우리 목전에 다가선 죽음을 보며 그것을 우리 시야에서 떼어내기가 불가능해 진다. 불멸이 죽음과 찰싹 달라붙어 있는 이상, 불멸 역시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는 열심히 불멸을 보살피기 시작한다, 우리는 불멸에게 야회복을 주문해 주고 넥타이를 사주며, 행여나 옷과 넥타이가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하여 잘못 골라질까봐 두려워 한다.>
<잠시도 죽음에서 눈을 뗄수 없는 인생의 2단계가 지나면 가장 짧고 가장 은밀한, 그리하여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얘기도 하지 않는 그런 제3의 단계가 온다. 기력이 쇠하고 무장해제된 피로가 삶을 사로잡는다, 피로. 사람을 삶의 기슭에서 죽음의 기슭으로 나르는 침묵의 다리, 죽음이 너무나 지척에 있으므로 이제 그것을 바라보는것조차 따분해진다. 그리하여 예전처럼 죽음에 대한 전망도 없고 죽음이 보이지도 않는다, 어떤 대상들에 너무나 친숙하고 너무나 그것들을 잘 알 때, 그것들에 대한 전망은 없어지는 법이다. 피로에 지친 인간이 창문을 통해 나뭇잎사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머리 속으로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마로니에, 포플러, 단풍나무. 그 이름들은 존재만큼이나 아름답다, 키 큰 포플러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올리고 있는 운동선수를 닮는다, 혹은 화석처럼 굳은 긴 꼬리 불꽃을 닮기도 한다, 포플러, 아, 포플러. 불멸은 덧없는 환상이요, 깨어진 말(言)이며 나비채를 들고 쫓는 바람의 숨결이다. 불멸, 피로에 지친 노인은 이제 더 이상 그것을 생각지 않는다.>
존재.
<일단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에 보내진 이상, 우리는 우선 이 주사위던지기, 신의 컴퓨터에 의해 마련된 이 우연한 사건에 우리를 동화시켜야만 한다.>
<이것, 거울 속에 마주하고 있는 나, 이것이 바로 자아라는 사실. 우리의 얼굴이 우리의 자아라는 사실을 납득하지 않는다면, 이 최초의 근본적인 환상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을 영위할 수가, 적어도 삶을 진지하게 영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우리 자신과 동일화시키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삶이나 죽음에 대해서 열정적인 동일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눈에 인간 모형의 단순한 한 변이체로 비치지 않고 상호 교환이 불가능한 고유의 본질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아, 존재.
<남의 집에서 잉크를 엎질러 양탄자를 더렆혔다면 미안할지언정 부끄럽지는 않을터인데 여성은 월경으로 시트를 더럽히면 왜 부끄러워 하는가? 여성의 기관들을 만들어낸 게 여성의 책임인가? 책임감은 부끄러움과는 전혀 무관하다. 수치(羞恥)는 우리가 범하는 어떤 실수에 바탕을 두고 있는게 아니라. 우리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현재의 우리가 되어 있다는 데서 느끼는 모욕감, 더구나 그 모욕이 도처(到處)에 보여진다는 데 대한 견딜 수 없는 느낌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자이 오사무는 왜 ‘태어나서 미안하다’고 하였는가.
아마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모욕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인생에서 참으로 견딜수 없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수 있는가? 타인들의 기쁨과 괴로움을 제 것으로 하지 못하면서, 그들과 한 통속이 되지 못하면서 어찌 그들과 함께 살수 있는가?>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이며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영원성이 무거움이라면 이 일회성은 가벼움이다. 그러나 이 대립이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가치고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만 한다" 즉 필연과 우연도 마찬가지이다.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사건과 직면하여, 과연 그래야만 하는가 하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감정.
<감정이란 우리 몰래, 그리고 대개 우리의 육체를 거역하면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싶어하는 순간부터 감정은 더 이상 감정이 아니라 모방이며 감정의 과시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흔히 히스테리라고 부른다. 그래서 (감정을 가치로 정립시킨 자)인 호모 센티멘털리스는 사실상 호모 히스테리쿠스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감정을 모방하는 인간은 감정을 느끼지도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늙은 리어왕 역을 하는 배우는 무대위 관객들 앞에서 버림받고 배반당한 한 사나이의 진짜 슬픔을 느낀다, 그러나 그 슬픔이란 연극 상연이 종료되는 순간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다. 그래서 호모 센티멘털리스는 자신의 그 위대한 감정이 우리를 사로잡은 뒤 금방 돌변하는 그 설명할길 없는 무심함으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이다.>
자아.
<자아는 사유에 의해서는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누가 발을 밟는다면 아픈 것은 밟힌 사람이다.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제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것이다. 고통에 있어서는 고양이조차도 상호교환 불가능한 자신의 우일한 자아를 의심할수가 없다.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세상은 자취없이 사라지며 우리들 각자는 자기 자신과 홀로 남는다,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인 것이다.>
<당신은 몹시 괴로워하고 있군요. 이 말은 마치 그녀의 영혼의 요동을 쓰다듬어 주는 것과 같다. 그런 상황에서는 모든 여자는 이렇게 말할 채비를 갖추게 된다. ‘당신은 나의 몸을 갖지는 않았지만 나의 영혼은 이미 당신 거예요!’>
<여기 있는 자아와 저기 아득히 먼 곳의 수평선, 자아라는 절대와 세계라는 절대, 오로지 두 개의 개념만이 있다. 따라서 이 몸짓은 사랑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왜냐하면 자아와 세계 사이에 있는 모든 인간은 사전에 배제되었고 간과되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두 개의 개념만이 존재하였다.>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을 통해 자신의 고통스런 자아를 나르는 것일뿐. 하지만 존재,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샘으로, 이 우주가 그 속에 따뜻한 비가 되어 내리는 돌 수반(水盤)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는 아베라니우스를 이해했다. 우리가 만약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세계에 대해 중요하다고 동의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세계에서 웃음에 대한 어떤 메아리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그 세계를 하나로 뭉뚱그려 우리들 유희의 대상으로, 하나의 노리개로 삼아 버리는 것. 아베나리우스는 유희를 즐기고 있으며 그 유희는 중요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그에게 중요한 유일의 것이다.>
소설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자동차들이 클랙슨을 울렸고, 성난 외침소리들이 들려왔다. 예전에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아네스는 물망초 한 가지를, 물망초 오직 한 송이를 사고 싶어했다. 눈에 잘 뵈지도 않는, 아름다움의 마지막 자취로서 그것을 두 눈 앞에 간직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불멸’속 밀란 쿤데라의 아포리즘들은 마냥 베껴쓰고 싶은 욕망을 마냥 불러 일으킨다.
책장에 침묻혀가며 베껴 쓰자니 이제 팔이 아프다.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자아로서 존재하는가.
다른 사람의 눈길로서 존재하는가
모쪼록 그러지 말자.
얼마 후, 내 것인 물질이 소멸할지라도 당신속의 나는 죽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말자.
2011년 4월 27일, 수요일 새벽.
잔득 흐린 하늘, 창밖 저 멀리 바다는 칙칙하게 누워 있다.
종일 비나 쏟아져 내렸으면 좋겠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
그만 쓰련다.
++++
***후니마미***
2011.04.26 22:55
이 소설의 체코 처녀 이야기와 어떤 남자 이야기(기억 안 남, 하여간 있는)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생각나게 하였는데 뒷편으로 오면, 이미 나와 있는 책 <농담>이 이런 식이 아닐까 궁금해지더군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읽었고 농담은 안 읽은 때문에 소설 뒷편의 교수와 작가의 대화 부분은 추정만 그리 했을 뿐 확인은 못했어요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지 않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부분에 저도 밑줄을 그었는데 여러 모로 느끼는 바가 많아서 저도 독후감을 잘 쓸 수 없었습니다.
좀 어디 좀 잘난척을 해 볼 수가 없더군요.
쁘띠뜨 쁘라즈는 현대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게 많았는데 독후감 쓸 때는 잊어 버렸어요
또 그걸 잡고 독후감이랍시고 할 말도 궁색했구요.
정치와 광고 편은 사랑과 기억 편과 다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도 같았지만 또 어떤 점에서 한 물결이지 않는가 하는 의심도 들었고 그걸 파헤질 사유는 안 되어 그만 두어 버렸습니다
저도 오늘 독후감을 올렸고 이불공주님은 벌써 올렸습니다
^^
***┗동우***
2011.04.27 06:37
추장님과 이불공주님의 독후감.
나중에 꼼꼼히 읽겠습니다.
마감일 남겨놓고 숙제 마쳐서 후련하다는 말씀드리면서.
***hohoya***
2011.04.28 07:19
동우님이 독후감을 읽으니 벌써 책을 다 읽은 느낌입니다.
전 아직이고요,그것도 아주 초반입니다.
부지런히 읽어야 다음 달에도 밀리지 않을텐데하는 걱정으로 한장 한장 넘기고 있습니다.
책을 다 읽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다시 오겠습니다. *^^*
***┗동우***
2011.04.28 16:28
집수리.. 온통 어질러진 집안.
책이야 잠시잠깐씩 붙들고 있을 겨를이야 없을까마는, 마음밭이 그걸 가능하게 할리가 없지요.
우리 살이의 구체적인 의식주의 것들이야 본시 유물론적인 것.
부지런히 읽으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추장님도 봐주실 것...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지요. 하하하
위의 내 독후감. 내 입맛에 맞는거만 골라 입맛 다시는거지요.
이 소설은 작가도 말하였듯 잘 차려진 구첩반상이랍니다.
입맛대로 먹기.
나의 입맛이야 뻔 한것.
호호야님의 입맛이 더 기다려진답니다.ㅎ
***민욱아빠***
2011.04.28 10:37
쉽지 않네요.. 역시나..
불멸은 쉬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제겐..^^
어쨌든 다 읽어가니 부족하나마 몇 자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우님의 글을 읽으며 일말의 힌트를 얻어갑니다. 컨닝인가?^^
***┗동우***
2011.04.28 16:40
외과의인 민욱아빠님은 이성적 자연과학의 영역의 사람...
더구나 평소 사회과학부문의 인문학을 천착하시는 민욱아빠님.
밀란 쿤데라의 '불멸'
철학적 사유들이 레토릭 질펀한 문학적 모호성으로 채워진 소설인데, 쉬이 다가올리 없다는... ,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지요. ㅎ
내 입맛 컨닝하신다니 은근히 불안합니다그려.
함께 낙제점 받으리다, ㅎ
작가의 말마따나,
잔뜩 차려 놓았다니 입맛대로 골라 먹읍시다그려.
***이불공주***
2011.04.29 00:34
안녕하세요? 이번달부터 책부족 모임에 합류하게 된 신참,이불공주라고 합니다. 많이 부족한 제 독후감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우님의 독후감을 읽으면서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정말 이렇게 세련되고 우아한 독후감을 올리시는 동우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졌어요.'소멸을 바라보는 줄 아는 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라는 말씀에 저도 공감합니다. 아직 마음 구석에서 '소멸'에 대한 미련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는 저에게는 아주 따끔한 충고이기도 하고요. 이번에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또 작가의 다른 책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동우***
2011.05.17 07:00
이불공주님.
이불공주님의 '불멸' 또한 다른 분들의 독후감과 더불어 내게는 놀라움이었답니다.
일본서 태어나 일본서 성장하신 젊은 일본여성, 이불공주님의 우리말 구사는 진작의 놀라움으로서 차치하고서.
밀란 쿤데라를 읽으신 그 감수성이랄까, 느낌의 그것..
진솔한 어투로 조근조근 말씀하셨지만, 깊이의 감회는 사뭇 깊고 그윽하여 그것 또한 놀라움이었답니다.
그래서 훔쳐다 내 블로그에다 얹어 놓았던 거랍니다.
이불공주님, 이사하셨지요?
좀 전 공주님 댁 들여다 보았지요.
이사라는게 어디 보통일이랍니까?
분당에서 수지로 수지에서 신제주로, 신제주에서 구제주로... 일년새.
두꺼비님과 두더지님.
이제, 아무쪼록 새 둥지에서 오래오래 행복하셨으면...
***향편***
2011.05.12 12:17
저는 다 못 읽어 놓고도 이렇게 마감을 하고 마음 편키는 처음입니다.
언제고 읽으리라 다짐하였기 때문만은 아닌거 같아요. 중도지폐하는 모든 일에 그런 다짐을 하고 있으니...
다이제스트의 혐오. 저 또한 같은 이유 때문에 다이제스트에 대해 터부시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사실 이 책 전체가 불멸에 대한 다이제스트인건 아닐까 생각도 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루었구나라고 생각했었다가도 문득 그 모든 것이 하나도 기억 안나곤 하고.. 불멸에 대해 다루었구나라고 말하는 것이 참 부끄러운데(불멸이 무엇이냐 되생각해보니 기억이 안나니...)
불로의 생만이 불멸이 아니고 (그렇다고)허물어지지 않는 가치가 불멸을 독점하는 것도 아니고, 불멸이 무엇인지 모름서 불멸을 입에 담으니 ㅋㅋ 부끄럽네요.
불별이 곧 박제인가라는 생각도 해 보았었어요.
이것 참 독후 나눔도 어려운 책이네요^^ 하지만 유익했었습니다.
동우님 글 한 번 더 읽어보렵니다.
***┗동우***
2011.05.17 06:52
불멸은 '박제'다.
야아, 향편님. 밀란 쿤데라가 향편님의 이 표현을 진작 느꼈더라면 죽은 것의 '박제'뿐 아니라 산것들의 박제에 대하여 길게 썰(?)을 풀었음직..
아무래도 향편님.
민욱아빠님 댁 답글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밀란 쿤데라의 '불멸'이라는 제목은 아무래도 과대포장된 이마골로기라는 느낌 없지 아니하답니다. ㅎ
***서민정***
2011.05.17 03:44
이 책에서 짧게 등장하는 인물이었지만, 베토벤과 같은 클래식 음악을 작곡했던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불멸의 주인공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었답니다.
언어로 이루어진 것들 혹은 이미지는 끊임없이 소멸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만 언어가 없는 음악은 오히려 더 긴 생명력을 가진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저에게는 역시 책이 복잡하다보니, 밑줄 그었던 아포리즘을 충분히 음미할만큼의 여유를 못누렸는데,
역시 동우님은 다르십니다~! ^^
***┗동우***
2011.05.17 06:48
하아, 그럴수도 있겠군요.
언어라던가 그림과 같이, 일종의 도상기호에 의하여 해석 여과되어 자아에 접수 되어야 하는 기호학적 이마골로기이지만.
언어 이전의 음악이라는 것.
표제음악은 일종의 이미지랄수 있겠지만 절대음악은 아무런 여과없이 곧바로 자아에 접수될수도.
몸짓의 무용 또한 그러할수도.
슬픔의 오열은?
기쁨의 고함은?
하하, 서민정님,
이렇게 따지다보니 추상화라는 것. 팝 아트, 전위음악, 현대예술...
예술이라는 것들이 추구하는 바 본질이 그런거 아닐까요?
기호의 해석을 비껴서서 원시적인 어떤 욕동이나 감성에 소구하고자 하는.
서민정님의 답글에서.
밀란 쿤데라의 불멸 또한 그런 쪽으로의 접근이 가능할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의 비약을 해 봅니다그려.
버지니아의 봄, 즐기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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