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대단원> <추방당한 자>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作-
***동우***
2013.09.12 05:12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고도를 기다리며'(1952년 발표).
네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이 희곡으로 사무엘 베케트는 1969년도 노벨상을 수상하였지요. <수상을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상금이 얼만데? ㅎ) 시상식 참석도 하지 않았고 노벨상 따위 심드렁한 포즈였다지요?>
이 작품이 노벨상 받기 전, 1967년 봄 부산의 우리 극단(나야 말단으로 껍죽대던)에서는 이 연극을 기획하였는데 (대본도 만들고 배역을 정하여 독회까지 하였는데) 무산되고 말았었지요.
무대에 올렸더라면 우리나라 초연이었을텐데... <몇년후 극단 '산울림'에서 우리나라 초연, 산울림의 주요 레퍼토리로써 관객을 끌어 모았지요. 지금도 여전히 관객이 끊이지 않는답니다.>
무식한 채로 연극사에 대하여 좀 지껄입니다.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인간의 의식은 혼란에 빠져 버렸지요.
‘견고한 기초가 있을것 같았던 인간과 자연과 사회’를 충실하게 묘사하여 무대에 올렸던 자연주의 연극은 내부로 부터 궤멸하였습니다.
세상과 문명과 인간은 그닥 믿을만한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었던게 아니었지요.
반사회적, 아나키즘, 자비나 정의나 애정 따위의 부정. 기괴, 추악 ..
다다(dada)가 탄생하였고,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실존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다다의 영향을 받은 부조리극은 본격연극에 편입됩니다.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극작가가 바로 '사무엘 베케트'.
1953년 파리에서 초연한 <베케트는 파리에서 불어로 문필생활을 한 아일랜드인> '고도를 기다리며'는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읽어 보시면 느끼실 터이지만, 입센(헨릭 입센)적 드라마 트루기를 염두에 두었다가는 참으로 당혹스러우실 겁니다.
무슨 플루트가 있기를 하나, 대사에 일관된 맥락이 있기를 하나, 어떤 주제가 또렷하게 만져지기를 하나....
초현실주의랄까, 철학적이랄까, 형이상학적이랄까, 추상화랄까..
몽롱한 어떤 상황이 느껴지기는 한데, 그 알맹이가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수가 없습니다.
부산과 서울에서 이 연극을 몇번 보았습니다만, 어느 극장에서나 나는 중간중간 낄낄거리면서 관극하였습니다.
내가 낄낄거리는 대목, 나뿐 아니라 어김없이 공연장에는 폭소가 만발합니다.
나 뿐 아니라 모두 슬랍스틱 코메디, 우스운 상황극으로 보는 재미가 없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무슨 의미를 찾으려고 끙끙댔다가는 머리에 쥐납니다, 연극 재미 놓치고 입장료가 아까울겁니다. <요즘 연극티켓 좀 비쌉니까? 옛날 내 연극은 거의 공짜였는디...ㅎ>
관극(觀劇)도 그러려니와 여기 리딩북, 어떤 망연한 분위기에 잠긴채 그냥 술술 읽어 주십시오.
생각 따위는, 천천히.. 나중에.. 시시때때로.. 하고 싶을 때.. 하기로 합시다.
나도, 4회 마지막 포스팅 마치고 좀 지껄이지요.
틀림없이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의 되도못한, 모자란 소리일테지만 말입니다.
***eunbee***
2013.09.12 08:43
교단에서 물러나고, 이런저런 공연을 열심히 보러 다니던 어느해 가을,
처음 찾아가는 소극장 산울림은 내 앞에 쉽게 나타나질 않았지요.
홍대입구역인지 어딘지에서 부터 한참을 걷고 물어서 그 극장 문에 들어설 수 있었답니다.
임영웅 씨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그 감동에 관람후기를(그 때는 관람후기를 적어내는 프린트물 용지가 각자에게 주어졌어요. 지금도 그런가 모르지만...)정성스레 적어 주었던 기억이 있네요.
올 가을도 '고고'와 '디디'의 독백같은 대화를 만나러 그곳엘 가야겠습니다.
동우님 블방에서 읽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되읽고 되새기며 감상할 수 있어 고맙습니다.
수다를 풀어놓을까요?ㅎㅎㅎ
언젠가 우리 큰딸과 큰사위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음악카페를 하나 갖고 싶어.
돈이야 벌리건 말건, 그냥 현상유지만 하면되는, 분위기 있게 꾸며놓고 음악 들으며, 그곳에 오는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는...그런 곳. 그 카페 이름은 'GODOT'로 하고 싶어'했더니 우리큰사위 껄껄 웃으면서 '아무리 기다려도 손님이 하나도 안와요?'하더라고요.ㅎㅎㅎㅎ
'고도'하면 그 생각도나요.ㅋ
아침 안개가 자욱합니다. 먼 산이 아슴아슴 안개 속에서 기지개 켜는 뽀얀 아침이에요.
오늘도 멋진 하루 되세요. 동우님.
***동우***
2013.09.13 05:52
스테이지에는 종장의 음악이 흐릅니다..
무용전공 은비님께 마지막 파트너로서 춤을 청할까요? 몸치인 주제에 감히. ㅎ
보셨군요, 이 연극.
황량한 무대, 앙상한 나무 한그루와 창백한 달.
고고와 디디와 뽀조와 럭키의 때로는 웃기고 때로는 불쌍하지만 그저 지리멸렬한 모습들.
그들이 은유하는 바 인간이라는 캐릭터의 진면목은 어떤 것들인지.
저 공연한 짓거리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것인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 고도는 누구인지. 저 멍멍한 삶을 압도하여줄 어떤 영웅인지, 구원의 신인지, 심판하는 신인지, 자유인지, 희망인지, 빵인지..
사람들은 왜 이 부조리한 연극에 끌리는건지, 왜 웃고 나중에는 왜 쓸쓸해지는건지.
'내가 고도가 누군지 알았다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는, 작가도 모르는 그 고도.
산울림의 임영웅씨는 '고도'에 관하여서는 극작가 보다 오히려 그 오의에 이르지는 않았을까.
40년 넘어 이 연극을 만들어 왔으니 고도의 해석에 있어서는 아마 세계적인 권위가 있을듯 합니다.(이 연극을 들고 국제연극제에도 여러번 참가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큰 따님 음악카페 이름을 '고도'라고 지었으면 큰 사위님 말씀이 맞는듯.
아무리 기다리고 둘러보아도 정작 '고도'라는 정체를 모르는데 다른 손님들 올까...
혹 모르지요. 카페 저 구석 자리에 폭 파묻혀 음악 듣는 뉜가(은비님이거나..)를 사람들 고도인가 하여 몰려 올런지.ㅎ
늘 멋진 은비님의 날들이지만, 오늘도 '인생이여 고마워요'하는 날이시기를.
***동우***
2013.09.14 05:34
디디: 회개를 하면 어떻게 될까?
고고: 세상에 태어난 것을 말인가? 우리는 매인 몸이 아니겠어?
뽀조: 못 떠나겠군.
고고: 그게 인생이랍니다.
디디: 그렇다고 맨발로 갈 순 없잖아.
고고: 예수도 맨발로 걸었는 걸.
고고: 우리가 제대로 헤어지려면 날 죽여야 할꺼야. 먼저번 사람처럼.
디디: 누구처럼?
고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디디: 우리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거야.
디디: 오늘 저녁 안 오신다지?
소년: 예, 선생님.
디디: 그렇지만 내일은 오신다지?
소년: 예, 선생님.
디디: 틀림없겠지?
소년: 예, 선생님.
디디: 그분 무얼하시지? 고도 씨 말이야.
소년: 아무것도 안하십니다. 선생님.
디디: 네 동생은 좀 어때?
소년: 아프답니다, 선생님.
디디: 어제 온게 아마 동생이었지?
소년: 모르겠어요, 선생님.
디디: 그분 수염 달렸지? 고도 씨 말이다.
소년: 예, 선생님.
디디: 황금색이냐, 아니면....아니면 검은색이냐?
소년: 흰색 같은데요, 선생님.
소년: 고도 씨한테 무어라구 전할까요? 선생님.
디디: 그분에게..그분에게 네가 날 보았고 그리고...
고고: 우리가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디디: 그렇게 되면 그는 우릴 벌 줄거야. (침묵. 그는 나무를 쳐다본다) 나무는 혼자서 사는 데.
고고: 이리 와 봐. (그가 블라디미르를 나무 있는 쪽으로 끌고 간다. 나무 앞에서 우뚝 선다. 침묵) 목매다는게 어때?
디디: 무엇으로.
고고: 무슨 끄나풀 없어? 나 이런 생활 계속 못하겠어.
디디: 그런 얘긴 누구나 하지.
고고: 서로 헤어지는게 어때? 좀 낫지 않을까?
디디: 내일 목 매달기로 하지. (잠시 후) 고도가 오지 않는다면 말이야.
고고: 오면 어떻허구.
디디: 우린 구원받게 되는거지.
그가 바지를 올려 입는다.
침묵.
디디: 자, 떠날까?
고고: 떠나지.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막이 내린다 -
'고도를 기다리며'
마치 무의미함만이 이 연극의 주제인 듯 하지만 이 연극에 내재된 리얼리티라던가 연극적 앙상블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등장인물의 캐릭터, 디디의 진지함이라던가 고고의 시인기질, 그리고 뽀조의 권력성이라거나 럭키의 의존성.... 모자와 신발이 은유하는 바.. 나무와 달만이 배경인 황량한 무대...슬랍스틱 연기의 우스꽝스러움... 맥락없는 대사들이지만 기교적이고...
그러나 기승전결(발단도 크라이막스도 결말도) 없는 드라마는 참으로 허황합니다.
처음과 동일한 상황, 아무런 변화도 진전도 없이 연극은 끝납니다. <참, 나중에 뽀조가 장님이 되어있군요>
루프(무한반복회로)의 함정에 갇힌듯 합니다. <이런 걸 연극용어로 원형순환구조라고 한다더군요. 부조리극에서 곧잘 써먹는.>
오늘도 고도는 오지 않습니다.
내일을 기약하지만 내일 역시 고도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디디도 고고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필경 고도는 ‘근원적’으로 不在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어쩌면 고도를 기다리는 그 상황 자체가 바로 고도를 말하는게 아닐까요?
희망도 肯定도(否定 또한) 변화도 출구도 구원도 없는 듯한 상황.
그런 상황을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그림으로 표현한듯 합니다. <본문에 올려놓은 그림을 보세요>
이 연극이 우리에게 주는 무드가 있다면 그것은 슬프고 고독하고 불행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이같은 심각한 무드에도, 낄낄거리게 만드는 코믹함 또한 없지 않습니다.
존재의 가벼움, 존재에 스며있는 우리를 살게 하는 어떤 삶의 희극성이랄까.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말이 떠오르는군요..ㅎ
그러나 이 작품 속에는 분명 우리의 현실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코자 하는, 우리의 진짜배기 실존적 현실을 경험하게 하는바 없지 않습니다.
아, 우리의 실존이 그러합니다.
존재의 무력감이라거나 삶의 무의미함.
행동의 무익함이라거나 언어의 무용함.
소통의 불능함.
존재함이란 철저하게 홀로라는...
'실존주의'(사르트르), 내게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철학사상이 쬐끔은 만져지는듯도 합니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라는 개념이 어느만큼 느껴지기도 합니다.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고 싶다는 강한 생각이 드는군요 <조만간 포스팅 할터이니 함께 읽어요>
이 희곡에 카뮈적 반항은 별로 뵈이지 않는듯 합니다.
반항대신 절망적 유모어인가....
모두 나름의 고도를 기다리고 있을테지요?
나는 나의 고도를 기다립니다.
오지 않을줄 뻔히 알지만 어쩌겠습니까?
한세상 사람살이가 바로 그러한걸.
'그렇게 한세상 살랍지요'라고 베케트가 말하고 있는듯 합니다.
환상을 갖지 말라고.
실존을 직시하라고.
고독하지만 강하게 우뚝 서라고.
개별적 그 실존을 견뎌야 한다고.
그것이 생명과 화해하는 방법이라고.
세상과 화해하는 길이라고.
구원이라고.
주말,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대단원' 한편을 더 소개합니다.
아주 짤막한 것이니까 한 눈에 읽어 보시기를.
<<<대단원>>>
-사무엘 베케트 作-
***동우***
2013.09.14 05:59
사무엘 베케트가 '바클라프 하벨'(1936~2011)에 헌정한 희곡입니다. <당시 공산정권에 박해받고 있는 하벨에게>
'바클라프 하벨'은 체코의 극작가이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였지요.
그는 '프라하의 봄'의 영웅이었어요. (으흠, 밀란 쿤데라가 생각납니다.)
이 희곡이 표현하여 얘기코저하는 바는 비교적 뚜렷합니다.
전체주의적 통제, 그 상황을 무대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치고는 참 쉽죠잉~ ㅎ
한가위 낼모렌데 늦더위가 심합니다.
그래도 좋은 주말을.
***동우***
2013.09.14 06:12
참, 며칠전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 포스팅하였지요?
거기 나오는 '아그림의 처녀'라는 노래.
'lass of aughrim'
아, 내 머리에 비가 내리고
살은 이슬에 젖었는데
내 사랑 싸늘히 누워 있네
이 노래는 아일란드의 고대 가요라고 합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가브리엘의 아내가 눈물을 흘렸지요.
옛날 죽은 한 소년을 생각해 냅니다.
이 노래를 마분지님이 소개해 주었어요.
노인 한분이 기타반주(이 기타는 제임스 조이스의 기타였답니다)를 하고 다른 한 분은 담담하게 부르는 노래. 너무 좋아요.
애잔하여, 정말 가슴 먹먹하게 들었습니다.
요 아래 URL주소 찾아서, 꼭 들어보시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5AN9YRPPIWY
아래 '제임스 조이스'의 아름다운 문장을 다시 읽어 보시면 그 느낌 더욱 사무치실겁니다.
본문을 베껴옵니다.
++++
"떠나기 전날 밤, 난즈 아일란드의 할머니댁에서 짐을 싸고 있는데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소리가 났어요. 유리가 젖어 보이지 않았으므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뒤뜰로 나갔더니 그 애가 저편에서 덜덜 떨고 있었어요."
"그래서 돌아가라고 했소?"
가브리엘이 물었다.
"곧 집으로 가라고 애원하며, 그러다간 비를 맞고 죽게 된다고 했으나 그 애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요. 그때의 그 눈이 보이는 것 같아요! 담 밑에 나무 있는 거기에 서 있었어요."
"그래 그 아이는 돌아갔나요?"
"네, 돌아갔지요. 제가 수도원에 와서 일 주일만에 죽어, 그의 고향인 우타라드에 묻혔지요.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그레타는 말을 그치고 흐느껴 울며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침대에 묻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중략-
가브리엘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그는 어떤 여자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가져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 느낌이 사랑이란 걸 알았다. 눈물이 더욱 글썽여지고 어두컴컴한 방에 비에 젖은 나무 아래 선 소년의 형상이 보이는 듯했다. 다른 형상들도 보였다. 그의 영혼은 많은 다른 죽은 사람들이 사는 그 세상에 가까이 온 느낌이다. 그들이 헤매며 명멸하는 것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의식할 수는 있었다. 자신도 같이 형체 없는 회색의 세상으로 사라져가며 죽은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의 현실 세계가 허물어지고 사라져갔다.
사각사각 유리창에 부딪치는 소리에 창가를 바라본다. 다시 눈이 내리고 있다. 은빛과 검은 빛깔의 눈송이가 가로등 불빛에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서쪽으로 길을 떠나야 할 시기가 왔다! 그래, 신문이 맞았어. 눈은 아일란드 전역에 내리고 있었다. 검은 중부평야의 모든 곳과 나무 없는 산들에 눈이 내린다. 애런 호수와 그 서쪽에 있는 검고 거친 사뇬 강물결에도 내린다. 또한 마이클 퓨리가 땅 속에 누워 있는 산, 쓸쓸한 묘지의 모든 구석에도 내린다. 꾸부러진 십자가와 비석들 위에도, 묘지 입구의 작은 대문에 달린 작은 창끝에도, 쓸쓸한 쑥덩쿨에도 수북히 쌓이리라.
온 세상에 희미하게 내리며, 그와 그레타의 종말인 것처럼, 모든 산 것과 죽은 것 위에 내려 덮는 눈소리를 들으며 그의 의식은 살며시 이지러졌다.
++++
***eunbee***
2013.09.14 23:30
올가을,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 만날 생각에
여기 올려진 희곡 눈여겨 마음모아 읽었습니다.
하벨에게 헌정된 '대단원'도 뭔가 딱히 잡혀지는 것을 건져올리지는 못했지만(동우님은 쉽다하시는데 ㅠ)
검은 주인공이 점차 모자가 벗겨지고 까운이 정강이위로 올라가게 되고 머리는 하얗게 칠해지는 과정의 그들의 대사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나중에는 조명조차 머리에만....ㅎㅎㅎ
들려오는 박수세례. 참 묘한 재미가 있네요. 조연출의 '적어 놓겠습니다.'도....^^
바츨라프 하벨이 쓴 '프라하의 여름'이란 책이 내 책꽂이 어딘가에 있어요. 읽었지만, 지금은 기억이 가물~
프라하에 다녀온 그해에 사서 읽었던 책이지요.
동우님,
한가위가 다가오네요.
행복한 명절 지내세요.
***동우***
2013.09.15 04:56
이 연극 매니아들은 가을을 '고도의 계절'이라고 하더군요.
임영웅의 디디와 고고는 그저 고도를 기다릴터이지만, 40여년 기다리는 포즈들은 조금씩 달리 하지 않을까.
은비님처럼 이 연극을 다시 관극하는 관객들의 시선도 옛같지 않을듯.
대단원.
이 연극 스틸 사진을 보니까, 연출역은 치렁치렁하고 두툼한 모피코트를 입은 살찐 사나이, 조연출은 키작고 왜소한 사나이 <극작가는 나이와 체격은 무관하다고 했지만>
주연배우의 외피는 검은 까운, 내피는 회색 잠옷, 노출된 곳은 허연 회칠. <작가의 지문, 주연배우 그림은 못보았어요>
무슨 알레고리.. 스탈린이거나 관료주의거나 개별적 인간일까요.
무얼 대입하여도 좋을겁니다.
조명은 점점 좁아져 결국 주연배우의 정수리만이 클로즈업 되지요. 허옇게 회칠한 정수리만이.
변형된 존재.
존재의 지엽.
그 지엽에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
그러나 존재는 표정을 갖고자 합니다.
주연배우는 얼굴을 들어 관객을 뚫어져라 바라봅니다.
눈물이 쏟아질듯 슬픈 눈망울...
내가 관객이라면 그 때, 갑자기 심장이 써늘해질 것 같습니다.
은비님.
한가위는 아직 나흘이나 남았어요.
그동안 블로그 아니 들여다 보려우?
한가위 인사는 좀 있다가 하십시다. ㅎ
<추방당한 자>
-사무엘 베케트 作-
***동우***
2017.11.01 01:51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의 '추방당한 자'
밝혀두는 바, 내가 이 소설을 완벽하게 이해하여 올리는게 아니라는 것.
어지러운 플룻, 이야기의 맥락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로테스크한 추상화를 보는듯 합니다.
부조리하고 불안한 배경 속에 한 인간의 어지러운 의식의 흐름으로 그려진.
부조리 문학.
2차대전후, 인간의 이성이 구축한 제반 논리(logic)는 궤멸되었습니다.
견고한 기초 위에 존립하였다고 여겨졌던 인간성과 윤리관과 가치관의 모습은 실은 불안하고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소통의 부재, 구조의 해체, 인간성의 소외, 불안, 부조리...
다다이즘, 실존주의에 이은 부조리 문학, 그 선두그룹에 사무엘 베케트가 있었지요.
<고도를 기다리며>
창백한 달, 앙상한 나무 한그루.
"회개를 하면 어떻게 될까?"
"세상에 태어난 것을 말인가? 우리는 매인 몸이 아니겠어?"
"우리가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렇게 되면 그는 우릴 벌 줄거야."
"목매다는게 어때?"
"그런 얘긴 누구나 하지."
"서로 헤어지는게 어때? 좀 낫지 않을까?"
"내일 목 매달기로 하지. 고도가 오지 않는다면 말이야."
"오면 어떻허구."
"우린 구원받게 되는거지."
"자, 떠날까?"
"떠나지."
그러나 그들은 떠나지 못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릴 뿐입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되도록 빨리 햇볕에 쬐이고 싶다고 생각하고 무턱대고 해뜨는 동녘을 향해 갔다. 수평선이거나 사막의 지평선이었으면 좋았을걸. 아침에 바깥에 있을 때 나는 태양을 마중하러 간다. 그리고 저녁 때 밖에 있을 때는 태양의 뒤를 따라간다. 사자(死者)들이 있는 곳까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으련만. 아마 다음 기회에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리라.
인간들이여, 이것들이 서로 잘 닮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리라.>
부조리한 상황.
인간은 그 속에 갇힌채 그저 몸부림 칠 뿐입니다.
나는 요즘 생각합니다.
그들, 신이 죽었다는 성급한 선언에 대하여.
존재의 나약함과 공허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고, 낫살 들수록 자주 하나님하고 중얼거리게 되는군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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