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죽음의 공포와 임종의 과정>
***동우***
2008. 10. 31
죽는다는 건 두렵다.
생각하는 것마저도 몹시 불쾌하다.
죽음의 공포는 죽음에 대한 선입관(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이러한 인식이 없다면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과 또한 그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는 생물학적 존재는 인간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이와 같은 인식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후천적으로 습득한 인문적 지식에 의하여, 또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하여 알게 된 경험적 인식일까.
그게 아니라면 인간의식의 선험적 구조로서 내재하는 집단무의식과 같은 근원적 인식일까.
전자(前者)가 옳다면 태어나자마자 무인도에 버려져 동물의 젖을 먹고 자란 사람에게는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인식은 없을 것이다.
후자(後者)가 옳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천학비재(淺學菲才)한 나로서는 이를 궁구할 계제는 아니고.
다만 우리는 죽음 자체에 대한 관념적 두려움, 즉 단말마(斷末魔)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익숙하였던 세상과 영원히 단절된다는 사실이 이중적인 공포로서 분명히 내재하고 있음을 안다.
스스로의 죽음이 두렵고 다른 사람의 주검이 혐오스럽다는 감정은 어쩔수가 없는 것이다.
‘죽음의 극복’이라는 명제는 무릇 종교의 궁극의 신학적 과제일 터.
나로서는 ‘죽음의 극복’이란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의 극복’의 다른 말이 아닐까하는 정도의 사고에 머무르는게 고작일 뿐이다.
육십성상(六十星霜), 나는 많은 죽음을 겪고 보았다.
6.25, 포연 자욱한 서울 동대문 어름의 거리를 외할머니(젖엄마였던지?) 손에 끌려 뛰어가던 기억, 골목 어귀에서 포탄 파편에 맞았는지 쓰레기통에 기대앉은 피투성이 남자의 모습도 내 기억속에는 아슴한 그림으로 인화되어 있다.
익사, 동사, 감전사, 연탄가스 중독사, 사고사..
하 어수선한 한 시절, 사람들은 고종명(考終命)을 못하고 참 여러가지 형태로 죽어 나갔다.
통학 길, 사람들 웅성웅성 둘러 서있는 틈새로 보이는, 거적 밑에 드러난 맨발은 섬찟하면서도 천연덕스러웠던 느낌이 새롭게 떠오른다.
그렇다.
다른 이의 주검은 혐오스럽거나 또는 무섭다.
1.21 사태 직후 삼엄한 군대 속에 던져진 새까만 이등병.
어느 보충대의 첫날밤, 북쪽 철조망의 보초근무명령, 한겨울 진눈깨비 몰아치는 칠흑같은 밤중에 벌거숭이 능선에는 삭풍을 피할 엄폐물이라고는 창고같은 독립가옥 한 채뿐이었다.
삐걱이는 나무문을 밀고 들어서자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깨닫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후랏쉬 불빛 아래 흰 시트에 덮여있는 물체는 입관도 하지 아니한 시신.
거기는 돌연사한 병사의 시신을 후송하기 전 잠시 안치하여 놓는, 이를테면 임시 영안실이었나 보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잠시, 도무지 너무나 무서워서 그곳을 벗어나 내무반을 향하여 도망치기 바빴던 나.
빳다로도 극복지 못한 그 두려움은 당직사관의 배려로 복초로 근무형태가 바뀐건 후일담.
어머니의 주검을 알콜 솜으로 닦아 드릴때의 촉감도 새롭다.
표정은 눈만 감고 있을뿐 당신 생전과 여일하여 심장은 술픔에 겨워 오열이 터져 나오는데, 푸르딩딩하게 부어 오른 피부의 감촉.
흐느끼는건 심장일 터이지만, 손 끝에 전해져 오는 피부의 저항은 벌써 산 것의 탄력은 아니어 너무나 생경스로운 그 선뜻한 느낌.
어머니일지언정 그 생경한 주검의 감촉은 써늘한 무서움이었다.
자신의 죽음은 두려움 그 자체이고 타인의 주검은 혐오와 무서움의 대상.
구약에서는 시체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접촉하여서는 안될 것으로 간주한다
인디언은 주검이 악령으로 된다하여 그를 쫓기 위해서 허공에다 활을 쏘았고 조포(弔砲)는 여기에 연유한 것이라 한다.
묘석이라는 것도 원혼이 지하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꾸욱 눌러두는 것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인간 무의식층의 감정모체는 결코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들일수 없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다만 피살될 뿐이다.
산업사회에서의 죽음.
농경사회라 할 것도 없을 불과 한 세대전 까지만 하여도 사람들은 주로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서는 집에서 임종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내 조부모는 서울 서교동 숙부 댁에서 운명하셨는데, 그 후 부세대(父世代)에 이르러서는 집에서 임종하신 분이 없다.
한 이십여년 전쯤이 되었을까. 마지막으로 개인 가정집으로 문상을 갔던 적이.
도농(都農)을 불문하고 세태가 그러한듯 하다.
동네마다 보이던 장의사 간판도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
요즘 사람들은 주로 병원의 응급실 쯤에서 최후를 맞는다.
한 인간의 최후는 지극히 고독하고 사뭇 비인격적이다.
급박해지면 응급실로 실려간다.
들것에 실려 구급차에 태워지고 싸이렌 소리로 질주한다
응급실은 번쩍거리는 조명과 기계와 사람들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는 곳.
그리고 중태에 빠진 환자는 자기 의견을 말할 권리가 전혀 없는 사람처럼 다루어진다
모든 것은 제3자가 결정한다.
휴식과 편안과 인간다운 품위의 의사표시가 가능한 환자도 있겠지만 묵살 당하거나 적당히 어르면서 포도당주사, 수혈, 인공심장기 또는 기관절개가 시술된다.
그를 둘러싼 의사들은 그의 맥박, 심박도, 심전도, 폐동맥의 기능, 분비물과 배설물에 정신이 팔려있지 인간으로서의 환자의 심리적 사정에는 관심이 없다.
파이프로 음식물을 주입하고 정맥주사를 놓고 심장에 압박을 가한다.
현대의학이 급박한 환자를 다루는 정당성 내지 합리적 근거는 오로지 이것이다.
“인격이니 환자의 심리니 하는 것들은 나중 문제이다! 일단 살리고 나서의 볼일 일 뿐이다!
그런걸 따지다가는 생명을 구할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다!“
이와 같은 죽음에 대한 결사적 방어의 태도가 바로 죽음을 대하는 산업사회의 현대적 성격이다.
의료진의 감정모체에는 이러한 진실이 숨어 있는 것이다.
“죽음은 오로지 두렵고 불쾌한 것이다! 이 불쾌한 죽음을 절망적으로 기피하여야 한다! 단말마로 괴로와 하는 한 인간의 얼굴보다는 의료기기의 신호나 눈금을 들여다보는 것이 편하다! 그 인간의 얼굴은 우리에게 전능한 힘이 없음과 우리의 한계점과 실패를 너무도 노골적으로 상기시키며 죽음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기계적인 매카니즘에 맡겨버리면 우리의 마음이 편하다!”
그리하여 환자는 아무도 없는 고독한 상황에서 비인간적인 기계에 둘러싸여 최후를 맞는다.
이어서 그 주검은 일사불란하게 장례식장에서 효율적으로 매카니틱하게 처리된다.
사람들은 텅 빈 제단이나 병풍 앞에 영정사진에다 대고 곡을 하고 절을 한다.
죽은 이의 실체는 냉동실 쯤에 안치된채 전문 기술자만이 대면하고 손질할 뿐이다.
특히 어린 아이들, 주검이 있는 곳은 접근금지의 영역이다.
하늘나라, 좋은 곳, 먼 곳... 운운하며 죽음에서 도외시켜 버린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느낀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까닭이다.
죽음은 영정사진, 병원, 영결식, 화장장, 무덤등에 은유로서 존재시킬 뿐, 구체성을 띈 죽음의 모습을 정면으로 대면하기를 한사코 꺼린다.
죽음은 상징과 은유로 포장되고 추상으로서 얼버무려 지는 것이다.
과학과 인지의 발달은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를 키우고 죽음의 현실성을 부정하려는 경향을 짙게 만들어 버렸다.
나는 요즘의 영화에서도 이를 느낀다.
요즘 영화에서 죽음이란 심플하고 쿨하고 쌈빡하고 짧아서,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시퀜스의 이포크 포인트적 아이콘으로 처리된다.
그러나 옛 영화에서의 죽음은 질척거리고 느리면서 길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멜라니의 죽음, ‘폭풍의 언덕’ 히스크리프에 안겨 죽는 개서린..뇌리에 떠오르는 영상 너무나 많다만...
농경사회에서의 죽음, 그러한 죽음.
운명하기 전까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여 가족에 둘러 싸인 죽음.
아이들까지도 임종하는 이와 이야기를 나누게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함께 겪는다
평소 즐기는 술한잔, 좋아하는 음식 한숟가락.
죽음이란 단말마는 반드시 혼자 겪는게 아니라는 안도감.
비탄을 당해도 슬픔과 책임을 함께 나눈다
이것은 가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안도감과 연대감이 아니다.
보내는 이에게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체험을 통하여 인간을 한층 성장하고 성숙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죽음을 삶의 일부로 보게 만든다.
오래전 출간된 한국아카데미총서 ‘죽음과 목회’를 꺼내어 쿼블러 로스의 논문 한편을 다시 읽었다.
죽음은 한 인간의 리얼리즘의 극점이다.
뉘 죽었다 살아나서, 뉘라 죽음의 현실을 우리에게 들려줄수 있으리.
그리스도와 나자로의 부활은 신학적 명제로서의 관념적 무엇일뿐 죽음의 리얼리즘은 그곳에 있지 아니하다.
망자(亡者)는 자신이 죽어가는 외피의 모습을 통하여 남아있는 우리에게 그 리얼리즘의 일단을 알려 줄 뿐이다.
퀀블러 로스는 수많은 임상을 통하여 임종인(臨終人)의 심리적 궤적을 관찰하였다.
그녀가 구분한, 죽음에 이르기 까지 거쳐야 하는 다섯 단계의 심리적 과정은 지금은 거의 인증된 정론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길고 짧음의 시간적 차이는 있으나 죽음을 맞는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은 심리과정을 겪고서 이윽고 죽음에 이른다.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는 어린아이에게도 동일하게 이러한 심리적 과정을 겪는다고 한다.>
‘잠자는 동안 잠자듯 죽었으면’
필경 도래할 자신의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하기가 두려운 심리의 소회를 우리는 흔히 이렇게 토로한다.
그러나 이것은 따지고 보면 사고사(事故死)를 꿈꾸는 것과 동일하다.
죽음의 과정을 맞닥뜨리지 않고 찰나적으로 숨이 멎는 경우는 돌연사 이외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과 고립, 비통과 분노, 타협, 우울...
그리하여 이르게 되는 아케론의 강.
아아, 인간은 외부적 겁박에 의하여, 고문에 의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섭리의 손길에 의하여 한계단씩 한계단씩 인도되어 이윽고 죽음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임종의 다섯과정.
마지막 과정에서 망자(亡者)는 생자(生者)에게 축복과 같은 선물을 남겨 놓고 숨을 거둔다.
그 선물이란 죽음에 이르는 최후의 길이란 결코 단말마(斷末魔)의 고통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필경 도래하고야 말 나의 그 때를 위하여 이와 같은 심리과정을 예견해 둔다는 것은 평화로운 최후를 맞기 위하여 지극히 유익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또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마음에 있어서도 임종인의 행태(行態)를 진심으로 이해하여 그에 대응하는데 있어서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임종인(臨終人)을 문병하여 보면 여러 행태의 환자를 접하고는 한다.
어떤 이는 발광적으로 분노하고, 어떤 이는 절망에 빠져 신음하고, 어떤 이는 다변하고, 어떤 이는 침묵에 빠져있고, 어떤 이는 맑은 눈으로 문병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이는 환자의 개성에 따른 행태가 아니라 그 시점에서 환자의 심리적 상황이 어떠한가에 연유하는 것이다.
쿼블러 로스는 1956년 출생한 스위스의 여성 정신병리학자로서, 수많은 임상 경험을 연구하여 임종에 관한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순간의 심리적 과정을 예리하게 관찰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에게 권고한다.
죽음의 진실을 정면으로 면대하기를.
필연코 도래할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피상의 심리적 도피,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최후의 순간을 추상화로 얼버무리지 말라고.
그것에 대하여 얘기하려 한다.
죽음에 이르는 첫 번째 과정은 바로 부정(否定)과 고립(孤立)의 단계라고 한다.
최후를 맞아야 한다는 첫 맞닥뜨림은 실존의 뿌리를 강타 당하는 엄청난 쇼크.
그 충격적인 심리상태를 감히 상상하여 본다.
곧 죽어야 한다는 그 사실을 어찌 쉬 인정하고 받아들일수 있을 것인가.
부정하고 울부짖는다.
“뭐라구? 내가 죽는다고? 설마! 나는 아니야! 뭔가 잘못되었을 거야!”
“오진(誤診)일꺼야. 돌팔이의사 같으니. 다른 큰 병원에 가 다시 검사해봐야 해!”
그러나 이 과정은 오래 가지 않는다고 한다.
어쩔수 없는 삶과 죽음 사이의 단애를 건너는 그 엄청난 공포에 대한 완충작용으로서 필경 겪어야 할 감정상태이다.
임종인(臨終人)으로 하여금 스스로 혼란을 수습하여 자신을 가다듬게 만들고, 시간이 흐르면서 좀 덜 강경한 방어수단으로 대체하는 여유를 준다.
두 번째 과정은 비통(悲痛)과 분노(忿怒)의 단계.
비통과 분노를 넘어서 때로 발악(發惡)하기도 한다고 한다.
“왜 하필 내가 죽어야 해!”
가족(家族)과 의료진(醫療陣)으로서는 가장 힘든 상대가 바로 이 단계의 임종인이다.
이 비통과 분노는 특정 사안(事案)이나 어떤 개인(個人)을 향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불안(不安)과 곤혹(困惑)을 표현하는 것이다
임종인은 자신이 잊혀지지 않음을 확인하고 싶기도 하여 목청을 돋구고 무리한 요구를 하고 불평을 터뜨려 관심을 붙들고자 한다
어머니의 임종을 후일 상기하니, 독실(篤實)하였다고는 할수 없으나 그래도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였던 집사(執事)인 어머니였는데 둘러선 자식들에게 ‘나 예수 믿지 않아!’라고 소리를 지르시기도 하였다.
예전 나와 친한 직장동료였던 술친구는 40대 후반의 나이에 식도암 판정을 받아 불과 한달 남짓만에 운명하였는데, 암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며칠 후 고신의료원의 한 병실에서 문병 간 내게 터뜨리는 의사(醫師)를 향하여 또는 어쩔줄 모르는 자신의 아내를 향하여 터뜨리는 분노는 실로 대단하였다.
그 대상은 물론 의사나 아내는 아니었다.
자신을 데려가려는 저 검은 망또를 향하여 비통해 하고 분노하는 것.
어둠의 신 에레보스와 밤의 여신 닉스 사이에서 태어난 카론은 망자(亡者)를 배에 싣고 하데스에 이르기 전‘비통의 강 아케론’에 이른 것이다.
나의 그 때, 이 두 과정의 터널은 빨리 통과하기를.
세 번째 과정은 타협(妥協)의 단계이다.
평정의 모습을 보이지만 이 감당할수 없는 불가피한 기정사실을 어떻게든 연기하려는 것이다
아아, 그 불가사의하지만 절대적이고 확고한 단애(斷崖)의 존재를 필경은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는.
대개 무언가 죽음을 관장한다고 여기는 대상, 흔히 하나님과의 타협이다.
“기도하면 될것이다. 내 삶의 태도를 바꾸면 절대자는 늦추어 줄것이다. 앞으로 착하게 살겠다”
“일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문제를 도덕적으로 해결하고서 가겠습니다.”
이런 말이나 간원을 무시하면 안된다
이 언약은 결국 죄의식과 관계가 있을 것이고, 그 죄책감에 대한 심리학적 배려가 요구된다
이 단계에서 주위 사람들의 마지막 역할이 주어진다
유언을 하게 하고, 가족사(家族事)나 신변사(身邊事)등을 정리하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거들어 주어야 한다
또는 기력이 괜찮다면 평생 미루어오던 여행을 다녀 오게 할수도 있고, 만나고 싶어하였던 사람들을 만나거나 방문토록 할수도 있을 것이다
단둘이 있는 병실에서 밤을 세우며 어머니는 스스로 폄하기도 하면서 내게 참으로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누워 두 손을 모은채 눈을 꼬옥 감은 어머니의 입술에서는 수도 없이“믿습니다. 믿습니다”하는 기도 소리가 흘러 나왔다
네 번째는 의기소침한 우울(憂鬱)의 과정이다.
남겨 지는 것들에 대한 반동적(反動的)우울과 가야 할 곳을 향한 예비적(豫備的)우울이 교차하여 임종인을 지배한다.
질병으로 인한 육체의 망가짐, 막중한 경제적 부담, 꿈의 포기, 가족사, 신변사등에서 오는 우울과 다가오는 이 세상을 영원히 하직하는 준비로 미리 겪어야 하는 예비적 비탄으로서의 우울
이 단계부터는 말이 거의 필요 없어, 격려나 위안은 그다지 소용이 없다
오로지 홀로 감당하여야 하는 임종인의 그 우울 속으로 타자(他者)는 들어 갈수가 없다
슬퍼 말라느니, 어쩌느니 하기 보다는 오히려 말없이 곁에서 지켜주는 사람이 그에게는 고마운 사람이다
말없이 손을 토닥거려 주거나 머리를 쓸어주거나 조용히 곁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
이제 임종인은 임박하는 자신의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 보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이제 임종인은 죽음의 강가에 이르렀다.
장엄하고 위대한 과정.
대개 지치고 쇠잔(衰殘)하여 자주 졸며 선잠을 자고 깨어있는 시간도 짧은 상태이지만 이제 임종인은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분노하거나 우울해 하지 않는다
이 때의 수면(睡眠)은 현실기피의 잠도 아니고 고통이나 불편이나 초조감을 해소시키는 수면도 아니다
머나 먼 여정을 떠나기 전에 취하는 마지막 휴식이라고 할수 있다
관심세계는 좁아져서 세상의 소식 따위는 관심이 없고 혼자 있고 하고 싶어 한다
이때에는 무언의 대화가 필요하여 잠자코 곁에 앉아 있는 것으로 족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뜻만 전해진다면 된다
아아, 어쩌면 임종인은 지금 기쁨에 벅찬 기대를 갖고 다가오는 최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임종인은 완숙(完熟)된 평화(平和)의 감정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여실하게 보여 준다.
죽음의 순간이란 결코 끔찍하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산자(生者)에게 보여주고 가르쳐 주고 떠나려 하는 것이다
아무도 그 의식 속으로는 들어 갈수가 없지만, 이윽고 우리는 깨닫는다.
오! 임종이란 평화롭다는 것을.
성 프란치스코처럼 임종인(臨終人)은 우리에게 말한다.
“바로 문 뒤에 서 있는 죽음의 형제여, 인류를 용서하시오. 사람들은 당신의 그 고상한 뜻을 이해 못하는군요. 그러니까 그들은 당신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도 이반 일리이치를 통하여 말한다.
“죽음대신 광명이 왔어!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 다 끝났어. 죽음이 끝장났어”
오, 비옵나니 나의 그 때가 진실로 그러하기를.
그 순간에 비로소 나의 죽음을 끝장내기를.
모쪼록 편안하고 담담하고 아름답게.
++++
***에필리아***
2008.11.03 23:39
말씀하신 것처럼.... 죽음이라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통이 첫째 두렵고
죽음 그 자체로는 사라짐에 대한 끝모를 공포가 두려울테지요.
무의식 차원까지를 포함시킨다면 모르지만 학습에 의한 선입견이라고 하기엔 또다른,
엄마 품에 매달리는 그런 절박함 같은 것이 우리 안에 새겨져 있는듯 싶네요.
그런데, 동식물도 실은 죽음 앞에서 부들거리며 떨지 않을까요?
그리고 또, 그들도 예견이란 것을 하기에
필사적으로 도주를 하거나 숨을 죽이거나 거칠게 저항하는 것은 아닐까요?
의식이 저급하다면 인간처럼은 아니겠지만
아마 동식물도 생체에너지의 상당부분은 죽음을 회피하는 궁리에 쏟지 않을까 상상해보네요.
어쩜 그래서일까요?
사는 현실이 외곬로 틀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요?
피아니스트가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과는 달리,
서로 다른 것을 균형있게 취하지 못하는 그런 편벽됨 같은 것 말이지요.
인간이란 사는 동안엔 오로지 삶의 의지로만 똘똘뭉쳐 살아가는 존재라지만
치우친 욕망은 오른손잡이거나 왼손잡이 뿐이네요.
때문에 중용은 너무나 요원한 일이 되버렸네요.
해탈이라면? 覺이든 悟든 결국 일평생 修하다가만 가야할 뿐인 인생이건만
우익과 좌익은 몸통에 붙은 것이니 고르게 날개짓을 할 것 같지만 '당장'에 쏟는 힘은 그렇지가 않네요.
쓰신 글 제목은 <죽음의 공포와 임종의 다섯단계>이지만
읽고 든 생각은 여러갈래로 줄달음질치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동우님.
저는 이만 총총총.... <^
***후니마미****
2008.11.01 17:07
10여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주검을 입관 전에 손수 만져본 적이 있었어요
병원에서 이제 도무지 가망이 없다 한 후에 할머니 주무시던 방으로 돌아와
12시간 쯤 방문객을 맞으면서 눈을 감으셨는데,
입관하는 날 새벽에 만져 본 할머니의 손과 다리는 그저 추운 겨울 밭에서 돌아왔을 때의 손처럼
차갑기만 하지 도저히 돌아가시고 이제 땅으로 들어갈 것이란 건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땅에 묻히고 귀양풀이를 그 저녁에 하면서 모두 울고
1년 동안 하루 세끼를 밥을 올리는 일을 그건 오로지 어머니가 할머니와 화해처럼 하시는 일같아 보이더군요.
그러나 그 후 몇 년 있다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작은 아버지 돌아가셨지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듣고 가 보니, 입관 전에 꺼내온 건 냉동된 할머니더군요
외숙모들에게 괜히 화가 났었죠.
간편을 도모하는 두 며느리는, 치매가 아주 심해졌을 때도 네가 할 일 이다 아니다 싸웠던 장본인.
할머니 집이 엄연히 있는데도 시골로 가서 3일장을 하려면 음식 준비다 뭐다
꽤 번거로우니 시내 장례식장에서 해치워버리는 꼴.
영정 사진 앞에서 슬퍼야 하지만 저는 몇 분 더 걸어가야 있던 영안실
냉동고에 할머니가 있는데, 왜 이 사진 앞에서 아무 것도 없는 이 앞에서
울어야 하는지 .. 안 울었어요
그렇게 익숙해져서 작년에 작은 아버지 돌아가실 때는 덤덤했는데
그야말로, 병원에 목숨 줄을 맡겨놓은 상태였죠
숨쉬기 곤란한 상태로 며칠을 보내는동안
어떻게든 숨을 일부러 끊어 버릴 수는 없다고 병원측은
가슴에 이것 저것 장치를 하고 꼼짝없이 환자를 눕혀놨었어요.
죽음이 내게 오지 말았으면 할 때 상상하는 광경이란
냉동고에서 꺼내져서 장의사 사람들에게 아무렇게만 맡겨지는 몸을 상상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저로서는 어릴 때 비명횡사한 사람들이라든지 어려운 시기에 함부러 죽은 몸을
본 적이 없이 어떤 젊은 죽음에 대해서도 멀리 건너 들었던 것 때문에
무서움은 없어요. 그렇지만 꺼림은 있지요.
죽은 다음에 벗겨질 몸이라든가. 남에게 보이기 싫은 내 몸이
전혀 내 의도와 상관없이 처리 될 상황이라든가...
내 친구는 젊어서 아내를 잃었는데 화장을 했다네요
화장장에서 구멍으로 태우는 모습을 보게 했는데
죽은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턱 하게 앉더래요
너무나 놀라서 뒤로 나자빠질 뻔했는데 그게 불타면서 뼈가 오그라들면서 그랬다네요.
그래서 저는 화장 하는 것도 무서워요
죽은 다음에 내 몸의 처리..
죽는다는 건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요
***송현***
2008.11.01 22:55
얼마전 조계사 극락전에서 어떤 의식이 있었습니다
스님의 구성진 염불소리에 엄숙하게 다가와
오래전 살다간 영령을 아주 잠시 위로하였지요
잠시 눈을 돌리니
애띤 아기 여중생 젊은 숙녀분 회사원같은 분 모두 젋은 이들의 사진이 안치되어있어서
마음이 안스러웠습니다.
메카니즘 편리주의 뒤에 엄청난 인간성이 참혹하리만큼 희생되고 있습니다
얼마전만이라도 임종을 앞둔 집의 행사는 아주 많았습니다
손을 치룰 준비에서부터 그집의 전통으로 보여주는 행사이지요
우리 문중은 아렇게한다는
어려운 집은 아주 바뻣던것 같습니다
물론 망자의 유언을 제일로 따르는 것이 가장 큰 효이고
고종명에 따르는복운이 아주 크다지요
저도 친정어머니의 돌아기심과 함께 맞이해야하는 마음의 회한과 갈등을 많이 격었습니다
5년이지나도 생각나는 어머니
진오귀굿으로 마음을 푼적이 있습니다
무당의 공수를 통해 마치 어머니가 살아오신것같은........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
갑자기 맞게될 경우
다 두고가야 되는 일상앞에 마음이 엄숙해 지기도 하네요
***후니마미***
2008.11.12 09:51
남편은 오늘 친구가 화장되어 재가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산 채인 것 같은 몸을 불에 태우는 게
싫습니다.
저로서는 무덤을 보며 큰 탓인지 흙에서 살이 녹아 내린 다음에
꼭 해야겠으면 그때 태워 재로 만들어, 납골당이니 뭐니 하는 것도 하지 말고
그를 아는 자손이 있으면 더욱 좋고 그래서 두 세대 넘지 않은 그 시간에
화장을 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납골당도 몇 세대 지나면 또 상업이 끼어들어 말이 많은 장소가 될 것이고..
죽은 몸의 친구와 그를 떠나 보내는 주변 사람들을 상상해 보는 아침입니다
그의 고운 부인은 이제 자식도 없이 남은 집에서 어떻게 보내게 될까요.
가 버린 사람도 남은 부인도, 짝을 잃은 이들이니
이렇게 멀리 있는 저나 제 남편은 그저 안타까울 뿐
그들과는 또 다른 입장이고...
남편은 말하대요
그 친구는
"뭐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나 먼저 간다 잘 살다 와라!" 했을 거라네요.
언젠가는 올 이별의 날..
이제 우리가 그렇지요. 이별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되었어요
이별은 도처에 있으니.
***꿈의섬***
2009.01.10 10:21
좀 무겁지만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죽음이란 누구에나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겠지여.
시기가 문제일뿐.....
죽음을 두려워 하기보단 담담이 받아 들이는 것이 행복할것 같습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 졌습니다.
동우님 방에 처음 찾아 뵙지만 왠지 친근감이 드네여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또 찾아 뵙겠습니다.
***송현***
2009.01.11 11:44
누구나 가야 할 길....
어느날 밤 촛불 뒤로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굽은 모습은 굽게 곧은 모습은 곧게 허상이 나타나더군요.
자칭 걸레스님은 자 지금부터 나는 지옥행이다! 라고 떠나셨다는데 과연 그럴지...
몽떼뉴는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기를 공부하는것이다라고 말했다지요.
***별과달***
2009.01.12 14:48
인도네시아에서는 무덤을 <미래의 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알고 나면 부정하고도 싶을....
다음 편을 기다릴게요.
***후니마미***
2009.01.13 00:36
동우님,
100 세까지 건강하게 사는 법이 아니고
왜 죽음에 관해 생각하게 되셨는지요?
늙음, 죽음,
버림, 떠남.
곁에 늘 있건만 외면하는 단어를 손에 꼭 붙들고 있는 이유가 뭘까 궁금해집니다 문득.
***동우***
2009.01.24 17:25
후니마미님, 그건 아마 내가 누구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일겝니다.
그 미지의 것에 내 감성 길들여져 그 단절의 감각에 익숙해 지지 않고서는 그 순간을 어이 맞을까하는.. 하하.
조셉 헬러가 이런 말을 하였답니다. ㅎ
"다들 그거 잘 넘기는 것 같아요. 그러니 그게 내게도 어렵지 않겠지요."
일본 시인 ‘무라노 시로’의 시.
<사슴은 숲가의 석양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작은 이마에 총이 겨누어 진 것을.
그러나 그에게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
그는 단아한 자세로 서서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는 시간이 황금처럼 빛나는 그의 집.
커다란 숲의 밤을 배경으로 하여.>
내가 좋아하는 詩랍니다. ㅎ
꿈의 섬님, 송현님, 별과달님, 후니마미님.
안그래도 적막한 블로그가 너무 격조하였습니다.
흐음... 불원(不願)의 여행도 다녀왔고 경제살이의 휘두름에 좀 바쁜척 하였고.
내일은 까치설, 모레는 우리우리 설날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설을 맞는 별과 달님, 모처럼 일본서 설을 맞는 후니마미님, 서울의 송현님, 제주의 꿈의섬님.
복되고 즐거운 설 쇠십시오.
저승을경험한남자
2009.02.05 12:51
유체이탈 전에 벌써 고통은 사라진답니다. 그러다가 잠시후 유체이탈이 일어나고 저승사자를 따라가는 과정을 겪는데, 유체이탈을 하고나서는 심적으로 엄청난 괴로움을 느낀답니다. 그후 저승사자를 따라갈 때 쯤엔 글로서는 표현이 안될만큼 편안하구 사방이 엄청 밝아요. 이게 바로 천국인가 싶을정도로요.
주인과 글쓴이만 볼 수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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