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황순원]]
<소나기> <목넘이 마을의 개>
<소나기>
-황순원 作-
***eunbee***
2012.12.14 01:43
'소나기'는 술술 읽히는데, '금시조'는 왜 그리도 읽혀지지가 않는답니까?
서너날을 드난하며 읽어도 못읽고 오늘은 그냥 반쯤에서 포기했습니다.
머리 새겠어요. 그거 잘 읽어내려다가....ㅠㅠ
참으로 좋은 문장도 많던데, 원, 뭔소린지 머리에 콕콕와서 박히질 않으니.
그리고 그 한자는 토 좀 달아주세욤~ ㅋㅋ
읽지도 못하는 글자도 있으니...ㅎㅎㅎ
秋水라는 아이의 탄생비화(?)의 그 진부한 스토리에서는 슬몃 웃었어요.
꼭 그런 대목에서 애가 생기고...낳고...서러운 인생이고...ㅋㅋ
이렇게 구시렁대고 갑니다.
좋은 꿈 꾸세요. ^*^
***┗동우***
2012.12.14 06:31
이문열 투, 이문열의 선비 연(然)하는 품격.
말씀처럼 부분부분 서걱거리는 그의 클리세에 불편함 없지 아니합니다.
그의 의고적(擬古的) 폼잡기가 그러하니 은비님, 읽히지 않으면 안읽으면 되지 무어. 하하
그래도 은비님이여.
내 딴에는, 이 금시조는 이문열의 작품 기중(其中) 훌륭한 쪽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들은 풍월 곁들여 몇마디 잡설을 진설하오니 해량을..
듣자하니, ‘뉴 크리티시즘’이라는게 있었다 합디다.
이를테면 문학에 있어서도 오로지 문학 작품의 내적질서에만 주목하는 태도라지요.
무슨 사상이다, 철학이다, 시대정신이다 하는 따위는 죄다 배제하고 문학자체의 예술성에만 참된 가치를 찾으려는.
음악에 있어서 절대음악이라는 것처럼.
은비님.
참여문학이다 순수문학이다하는 논쟁이 이것에 관련되어 있달까.
비약하여, 객관과 주관... 집단과 개별... 논리와 직관 같은 그런 거? (淺學의 나로서는 대충...)
그것이 서술적 매체인 문학보다는 하나의 도상(圖上) 미디어로서의 미술에 있어서 더 뚜렷한 논쟁꺼리가 아닐까 합니다.
이를테면 은비님이 좋아하시는 샤갈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읽고 느끼고 즐겁고 감동하나요?
그냥 그 구도와 색채와 포름들에게서 행복하고 좋은 감정이 솟아나는 건지, 아니면 어떤 시대적 상황이나 색감이 만들어낸 공통의 객관적 행복한 요소가 어려있어 그러는 건지.
혹은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무의식적 기억의 편린이 만들어 낸 하나의 ‘풍크툼 (다른 사람은 별로라고 하더라도 ’무언지는 도무지 모르지만‘ 내게는 감동적이야하는 감정상태를 이르는 말이라지요) 인지.
하하, 은비님. 나는 서예를 잘 몰라요.
표의문자인 한자(漢字), 아무 뜻도 모르는 외국사람이 그걸 베껴 쓴 그 글자는 그림일까, 글씨일까.
추사와 석파(대원군) 그리고 이문열의 금시조에서의 석담(가공인물이겠지요)에 이르는 필맥(筆脈).
글씨에 선비정신의 기개와 절지가 어려야 하는가, 하나의 독립된 아름다움으로서만 추구하여서는 안될 것인가 하는 고죽(이 역시 가동인물이겠지요)...
그리하여 결국 고죽은 제 흔적을 불태워 없애버리지요.
그 순간 금시조를 보면서 숨을 거두는데...
순수한 아름다움의 허무성....
순수한 허무함의 절대미...
필경 멸망하는 인간임으로 아름다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아름다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지사적(志士的)의 삶도 아름답지만 무릇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지극히 개별적인 어떤... 한세상 존재하다가 그냥 스러져 버림으로써 아름다운.
하하 은비님.
횡설(橫說)에 수설(竪說)에 지껄이는 나도 무슨 객설을 지껄이는겐지 어지럽습니다.
무식한대로 그냥 올립니다. ㅎㅎ
은비님, 우리 따위 凡夫凡婦 (凡婦아닌 은비님께는 실레의 말씀일꺼나..).
지는 해 바라보면서 중얼거립니다.
“이제 내 가슴에 남겨진 건 극단적인 허무뿐이고, 그리고 그 허무 속에서 끝끝내 되찾고 싶은 건 인간적인 낭만뿐이야. 그리고 나머진 아무것도 없어....”
은비님의 파리가 아마 이러할런가...
시의(時宜)에도 맞을듯 하여 위 문장이 나오는 소설 한편 올립니다.
박상우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eunbee***
2012.12.28 21:26
동우님의 응원에 힘입어, 기어이 내가 '금시조'를 읽어내고 말거야요. 우~c ㅋㅋ
몇번을 다짐하다가 이제 결행하러 들어왔는데, 어머? 동우님 댁에는 심수봉도 있고, 어머님의 애창곡도 있고....난 눈뜬 장님인가봐. 맨날 뭘보고 다니는거얌? ㅎㅎㅎ
그래서 우선 그 포스팅부터 읽고는(읽다보니, [애창곡 잡설 1]은 언젠가 읽은 글과 비스무리 하던데.ㅋ) 이시각까지 흘러왔네요. 이제 자정이되어 EBS의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문열을 붙잡고 열공하다보면 뭐가 돼도 되겠지요?
읽어 내기가 끝나기라도 하겠지요?
이렇게 누구처럼 발걸쳐놓고 (공표하고)시작해야 맘 변치않고 중도포기하지 않고
그 좋은 글을 읽어내겠지요. ㅎㅎㅎ~ 열공모드 돌입합니당~^&^
완전 오기로 읽을 참이에요.ㅋ
EBS금요영화, 좋은 영화 많이 보여줘요.
보시와요~~~
***홍애(虹厓)***
2013.10.13 10:53
찾았어요.
복사를 아주 어렵게 하다가 ㅎㅎㅎ
오른쪽 마우스 눌러 전체복사 기능 써서 좀 편하게 하다가
이번에는 스크랩을 해 갑니다 ^^
더 편하게. ㅋㅋ
***┗홍애(虹厓)***
2013.10.13 11:06
블로그 스크랩이 안 되는 이유란? 안 되네요 ^^
***홍애(虹厓)***
2013.10.14 07:13
이거 읽다가 좀 이상해서 다시 읽고 했어요
문장이 여러 개 빠지고
문단이 몇 개 뒤죽박죽 된 것 같아요
대추를 받을 때 알이 굵다 하는 표현 앞에는
지금 저 위에 있는 문장이 아니구요
그래서 좀 들여다 보다가 너무 많이 틀렸다 싶어서
제 블로그에는 비공개로 담아 두었어요
마침표 쉼표 등등, 오자도 많고
고쳐서 옮기다가 문단 배치도 원문과 다른 것 같아서 일단 교과서로라도 읽어 보고
고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저 위에 획--> 홱 이런 거..
화면에서 보면서 이상해도 화면에 나오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게 틀린가 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국어 선생인 딸에게 물어 봤어요 ㅎㅎㅎ
***┗동우***
2013.10.15 06:17
홍애님.
여기저기서 파일들 업어 오다보면, 오탈자 수두룩 합니다.
일일히 수정하는 것도 한 일이랍니다.
황순원의 이 아름다운 소설 ‘소나기’
그런데 문장이 완전 뒤죽박죽인 모양입니다그려.
홍애님 말씀듣고 알게 된 것이지만. (스토리야 기억 속 그것이니 나는 올바른 것인줄 알지요.ㅎㅎ)
다음에 이 소설 완전한 것으로 다시 올려야겠습니다. (독자들의 해량을..)
따님, 선생님인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국어 전공인줄은 처음 듣습니다.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엄마의 재능과 기질 고대로 물려받은 딸.
***┗홍애(虹厓)***
2013.10.15 18:29
오늘 소나기 중2 교과서에 실린 거, 화일로 받았습니다
손 빠르게 자기 다니던 학교 도서관에서 화일로 보냈더라구요.
이 소나기 소설을 가지고
저는 오늘 새로운 모의작당을 했습니다.
한글 배우고 있는 일본인 여성 셋이서 가끔 만나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떠는데
이번 겨울 12월 말까지 주말에 한 번 만나면 10회 만남이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이걸, 만날 때마다 일본어로 번역해 보기로 했습니다
동우님의 소나기 작업이, 이곳에서 색다르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
***┗홍애(虹厓)***
2013.10.15 18:30
특별히 과를 구분해서 나가지는 않지만 아들도 지금 교대에서 국어전공입니다
딸은 교원대 국어교육 전공이구요, 우연히 ^^
***┗동우***
2013.10.16 05:47
홍애님.
국어전공의 따님과 아드님.
우연히가 아니지요.
소나기 원본과 더불어 소나기 일본어 번역.
완성되면 포스팅 해 주세요. 꼭.
<목넘이 마을의 개>
-황순원 作-
***동우***
2014.01.10 05:13
황순원의 '목넘이 마을의 개' (1948년 발표)는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지요. (우리 때는 없었는데)
내가 태어난 1947년도.
북에서는 김일성이 등장하고 남에서는 이승만과 김구가 분열되고 좌우갈등과 대립이 극심하였던 시기였지요.
그리고 이 소설이 발표된 다음해, 1948년에는 국민보도연맹이 조직되었습니다.
유년의 내게 그 시대적 체험 있을리 없지만 아버지로 인하여 그 시대에 대한 관심은 남과는 다른바 있지요.
박완서의 '누가 그 많던 싱아를 먹었을까'가 생각납니다.
보도연맹은 이를테면 좌익사상으로부터 전향한 자들을 가입케 한 관제조직인데 전쟁이 발발하자 보호는 커녕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황순원도 이 조직에 가입되었지요.
알다시피 황순원은 직설적으로 현실의식을 표출하는 작가가 아닙니다.
그는 향촌에 설화처럼 떠도는 떠돌이 개 '신둥이'와 토박이 개들의 수난의 이야기를 미친 시대의 알레고리로 들려줍니다.
동네사람들, 부회뇌동한 집단의 눈에는 개들이 눈에 회를 켠 미친개로 보이지요.
미친 눈은 정작 그들이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다른 세 사람의 벗은 등과 가슴에서는 개기름 땀이 번질거렸으나 모두 차차 저녁 그늘 속에 묻히어 들어가고 있었다. 절가가 남포등을 내다 밤나무 가지에 걸었다. 남포 불빛 아래서 개기름 땀과 괸돌 동장의 포마드 바른 머리가 살아나 번질거렸다. 그리고 겔겔이 풀어진 눈들을 하고 둘러앉아 잔을 돌리고 고기를 뜯고 그러다가 모기라도 와 물면 각각 제 목덜미며 가슴패기를 철썩철썩 때리는 것이란, 흡사 무슨 짐승들이 모여 앉았는 것 같기도 했다.]
신둥이의 방황과 고통은 우리 민족의 고난을 상징하는걸겝니다.
그러나 필경, 목숨은 시대를 관통하여 원시적 강인함으로 살아남습니다.
[이런 이야기 끝에, 간난이 할아버지는 지금 자기네 집에 기르는 개가 그 신둥이의 증손녀라는 말과 원체 종자가 좋아서 지금 목넘이 마을에서 기르는 개란 개는 거의 다 이 신둥이의 증손이 아니면 고손이라고 했다. 크고 작은 동장네 두 집에서까지도 요새 자기네 개가 낳은 신둥이 개의 고손자를 얻어 갔다는 말도 했다. 이런 말을 하는 간난이 할아버지는 이제는 아주 흰서릿발이 된 텁석부리 속에서 미소를 띄우는 것이었다.]
집단의 구호.
때려잡아라, 미친개.
때려잡아라, 빨갱이.
개별의 右가 미친개로 보이는 左의 집단.
左, 그들이라고 다를리 없지요.
때려잡아라, 보수반동 수구꼴통.
황순원을 황석영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얀 한지에 짙은 묵으로 찍혀진 난의 잎새처럼 그의 세계는 섬세하고 부드럽지만 비바람에 시달린 기개가 엿보인다.]
-독서 리뷰-
[[황순원]]
<학> <곡예사> <소리 그림자> <사마귀>
<학(鶴)>
-황순원 作-
***동우***
2013.12.25 09:04
황순원(1915~2000)
동경(하치오시)의 홍애님은 시방 황순원의 '소나기' 일역(日譯) 그룹(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일본여성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서사적인 묘사의 디테일보다 함축적이고 서정적 직관으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황순원의 문체를 일본어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을거에요.
두루미를 단정학(丹頂鶴)이라 한다지요.
어휘 그대로 학은 천비(賤婢)하지 않습니다.
딴 소리.
붉은 옷입고 떼지어 '대한민국'을 합창해대는 무리의 모습은 아무래도 귀격(貴格)있다고 할수는 없을 듯.
거대한 집단적 창조행위를 함께 한다는 격앙된 감정, 개별로부터 벗어난 이념이란 필경 그런 집단에의 함몰이겠지요.
그런말 하면 남들 눈 흘기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홀로 고고히 서있는 학.
집단보다는 개별이 아름다워요.
군인보다는 농사꾼이, 명목보다는 우정이, 구호보다는 추억이...
이 소설의 주제를 벗어난 엉뚱한 사설 늘어놓았습니다.ㅎ
메리크리스마스.
벗님들.
***Mary Kang***
2014.12.16 13:35
아름답네요...
천비하지 않은 학 그리고 일본의 그분들도...
우정..추억..
그렇지요, 동우님.
군대보다는 농사꾼이 아름답지요
<곡예사>
-황순원 作-
***동우***
2014.10.02 04:46
6.25 전화(戰禍)를 겪지 않은 남녘 피난지, 대구와 부산.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허위허위 몰려온 피난민들.
영남사람 인심이 본시 저리 고약하지는 않은데. (있는 놈들이 더한가 봅니다)
평안남도 고향을 버리고 내려온, 여섯 가족을 거느린 가장 황순원(1915~2000)의 피난살이 설움이 저러하였었구나.
한칸 방에 목 매단 어릿광대들의 슬픈 곡예.
황순원 곡예단.
그 무대, '부민동' 개천둑에서도 뱃고동 소리 들렸을까.
'보수동'에 있는 통신사 지국 사무실의 책상붙여 만든 잠자리, 중구(김동리)의 귀에 아득하게 맷고동소리 들렸던것처럼.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 시대-
부민동과 보수동은 이웃동네, 남포동 앞바다와 相距함이 비슷한데..
나 또한.
척박한 날의 내 어린 피에로들이여.
서로 바투 붙어앉았던, 오히려 그 따스함들이여.
여적 가난한 내 나날의 그리움들이여.
<소리 그림자>
-황순원 作-
***동우***
2015.01.17 04:41
평소 그리도 사나웠던 놈(개)이 질질 끌려다니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개의 교접광경.
그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종탑위에 올라서 내려다보는 두 아이의 깔깔거림은 얼마나 천진스러운지요.
그러나 암수 짓꺼리의 연상으로 스스로 부끄러운 어른은 그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괘씸합니다.
어른은 노기에 차서 사다리를 치워버려 그만 한 아이는 떨어져 꼽추가 되었습니다.
그 후 두 아이는 40년 동안이나 서로 교류가 끊긴채 살아갑니다.
그러다 꼽추가 된 아이는 종지기로 외롭고 가난한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의 무덤을 찾은 다른 한 아이(어른)
어렸을적 동무의 불행하였던 생애를 보고들어 접하고는 고통으로 뒤덮였던 한 어린이의 핼쑥한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 옛날 아무 허물도 없는 어린이의 일생을 망쳐버린 한 중년사내의 어이없는 징계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종지기친구가 남겨 놓은 그림들을 봅니다.
목탄지에 연필로 그린 그림들에도 온통 분노와 고통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무 뿌리에서도,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들의 입에서도, 울퉁불퉁 바위에서도, 어굴함과 분노의 불티가 활활 이는듯 합니다.
시간이 지난 후.
터미널의 다방 안에서, 문득 그 옛날의 종소리를 떠올립니다.
<옛날 그 종소리는 나 혼자 간직하면 족한 것이다. 그러는 내 가슴속에 불현듯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다시 그림을 펴들어 봅니다.
아, 이게 왠일입니까?
그림이 바뀌어 있는겁니다.
<그림의 붓놀림이 어쩌면 이렇게 즐거울 수 있을까. 불꽃처럼 보였던 선 하나 하나가 실상은 어쩔 수 없는 즐거움에서 우러나온 율동이었던 것이다. 킬킬킬 티없는 웃음이 연필 자국마다 스며있다가 되살아 오는 것이었다.>
이제 그의 눈에는 종지기친구가 그린 그림은 분노와 고통에 찬 그림이 아니라 삶의 즐거움과 기쁨에 넘친 그림으로 변모되어 있었던 겁니다.
40년전 한 순간의 기억과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의 한 인간의 삶.
옛 친구의 불행하였던 생애를 접하자 전자의 기억은 관념적 형식논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 관념이 후자를 추론하여 일으킨 시각적 해석의 오류였습니다.
한살이.
긴 세월 동안의 액추어러티한 궤적이 우리의 내면을 어떤 색감으로들 꾸미고 있는지요?
모쪼록 기쁘게들 삽시다.
***eunbee***
2015.01.18 00:47
아침에 '소리 그림자'라는 소설 제목을 보는 순간 놀랐답니다.
'소리 그림자'라는 말은 내가 만들어낸 나혼자만의 언어인줄 알고 있었거든요.
워낙 소설읽기에 어둔 사람이었으니 황순원의 이소설을 만날리가 없었지요.ㅎ
소설속에서 화자는 어릴적 동무와 함께 듣던 그 종소리를 가슴에 되살려내게 되면서
그림의 느낌까지 달라지게 보게 되었네요. 불꽃같은 선이 즐거움에 넘치는 율동으로...
'소리 그림자', 나의 소리 그림자와 다른 소리그림자를 만나서 놀랍기도 했고,
묘하기도 했습니다. 더러더러 이런 경우를 만나기도 하지요? 결코 표절하지 않았는데
내가 쓴 글귀나 문장들을 유명인에게서 발견하고는, 당혹스럽기도 억울하기도 서운하기도 한 그 심사.ㅎㅎㅎ
몇해전 내 블로그에 올려둔 나의 '소리 그림자'를 소개할게욤~^^
<소리 그림자>
햇빛 소리 들어 보셨나요?
권태로운 한여름 햇빛에는 소리가 있답니다.
잉잉대는 그 소리는 그림자처럼 와요.
햇빛 그림자처럼...
그러면 햇빛 그림자를 보셨나요?
눈이 뱅글뱅글 돌고
아지랭이처럼 아른대는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기절할 것같은.
그것이 햇빛 그림자예요.
한여름 한낮에 신기루 같이 다가 오지요.
그럼, 소리 그림자는 보셨겠죠?
소리가 사라진 한참 뒤에
우리네 마음 속을 딩~딩~ 울리는
동굴속을 한바퀴 휘돌아 그제서야 귓바퀴를 스치는
봄날 꽃내음 같은 소리 그림자...
아~~
나는 이런 것들과 얘기하며 살아요.
-음력 칠월 염천炎天에..속리에 간 은비를 생각하는 오후-
강마을의 한여름 땡볕은 참으로 권태로웠지요.
외숙모네집에 놀러가서 며칠 묵고있는 은비를 기다리며 끄적였던 글이에요.
여기에 올리기는 부끄럽지만, 내 '소리 그림자'라는 특허품의 명성이 허물어진 기념으로.ㅋㅋㅋ
***동우***
2015.01.18 04:27
소리 그림자.
나는 은비님의 오리지널리티 학고하게 인정하구말구요.
은비님의 시를 읽으면 그 사실 너무나 확연합니다.
황순원의 소설과는 이미지의 소스가 전혀 다른걸요.
은비님 것이 훨씬 감각적인 리얼함으로 어필합니다.
황순원은 소설인지라, 아무래도 좀 상투적이고 관념적인데가 있는 반면..
그러나 소설과 동일한 라이트 모티프.
40년 후 소리 그림자의 여운의 그 파문이랑..
동굴 속을 한바퀴 휘돌아 그제서야 귓바퀴를 스치는, 소리 그림자랑.
소리가 사라진 한참 뒤에
우리네 마음 속을 딩~딩~ 울리는
동굴 속을 한바퀴 휘돌아 그제서야 귓바퀴를 스치는
봄날 꽃내음 같은 소리 그림자...
p.s 감기몸살은 여하?
***eunbee***
2015.01.19 00:45
처방에 따르니, 완전 쾌청~^^
***동우***
2015.01.19 04:55
나보다 백배 탄력있는 은비님의 건강.
Good !~
***송명숙***
2015.01.20 17:29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저 기쁨의 마지막 장을 사랑합니다
비록 불구의 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했던 성일이의 하루하루는 늘 기쁨의 도가니였던가 봅니다
그림의 불이 혹시 하나님의 성령이 아닌지 난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주를 품은 삶은 외롭지 않고 늘 즐거웠을겁니다
세상에서 봤을때 찌들리고 외롭고 가난하지만, 성일이는 이미 부자이고 천사가 벗하여 늘 환희의 날이 아니었을까.
교인이라 해서 장로님이라 해서 다 사랑이 가득하지는 않아...
결국 한사람을 신체적인 불구를 만들고....
그러고보니 혹여 내가 부지불식간에 어떤 사람에게 이런 불구를 만들지는 안했는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상처가 더 많음을..
나 자신도 그 장로가 된 적은 없었을런지.
은은한 종소리와 함께 그 은혜의 기쁨이 그 동네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해졌을거라는 확신과 함께 기쁨으로 글을 맺습니다.
아멘.
***동우***
2015.01.21 04:37
독실한 크리스찬 송명숙님의 면모가 엿뵈입니다.
한 순간의 인상으로 관념지어진 다른 이를 향한 관념.
흔히 보지요, 외견상 조건이 가장 행복할 것 같은 사람의 불행한 속살.
가장 불행할 것 같은 사람이 영위하는 기쁜 나날들.
으흠, 신앙이 주는 희락 옛날 나도 좀 알았더랬는데.
***송명숙***
2015.01.21 06:07
독실한?
지금은 탕자이옵니다
그러나 여전히 믿음의 씨앗은 아직도 중심에 남아있음을 고백합니다.
여건과 시간이 주어지면 언젠가 고향처럼 다시 돌아갈 것 같은 .
그렇지만 요즘 종교란 내 삶의 일부분이지 전체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있는건 사실이고. 기독교의 완벽한 헌신의 요구가 저를 힘들게 해요.
완벽을 요구하는 믿음의 부담.
그래서 자꾸 세상이 편해요.
그래서 전 늘 탕자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맘이 편해야 하는데 갑갑함이 먼저니 무슨 은혜가 되겠어요 ㅎㅎ
<사마귀>
-황순원 作-
***동우***
2016.04.19 04:30
황순원 (1915~2000)의 '사마귀'
작가의 어떤 실험정신이 있었을런지, 황순원의 다른 소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릅니다..
느끼건대 인간심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탁월한 미학적 감수성으로 씌여진, 정신분석적 어프로치로 묘파한 지극히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소설입니다.
지극히 어브노멀한 어린아이의 모습들.
계집아이와 벙어리 사내아이의 동심(童心)은 불구가 되어버렸습니다.
부모들로 인하여, 어린아이들의 무구(無垢)함은 위악적(僞惡的)으로 데포르마숑되었습니다.
모정결핍의 계집아이, 애증(愛憎)의 감정은 인형과 고양이와 벙어리 소년에게 가학적으로 투사됩니다.
부모의 학대로 벙어리가 된 사내아이의 저 피학성, 아이의 슬픈 욕구는 톱밥집과 죽은 토끼새끼에게 투사됩니다.
두 ‘앙팡 테리블’의 처절함.
가엾어서 내 가슴이 서늘합니다.
<구석에 쌓인 검은 통나무들을 다 켜기 전에 참말로 톱밥보다도 흰 눈이 내리리라.>
주인공 사내 '현'역시 그 감정모체는 매우 불안해 보이는군요.
이상(李箱)과 같은 자의식 과잉도 엿보이고 모종의 섹슈얼한 갈등도 느껴집니다.
‘개가 아니면 소변보지 마시오’라고 쓴 곁에 또 '개의 변소' 라고 쓴 벽.
썩은 쥐며 똥이며 깨진 그릇이 마구 내버려져 있는 빈터에 고양이를 내다 버리는 사내.
이 대목, 나는 남성의 배설(射精)이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고양이, 죽은 토끼새끼, 붕어, 파리, 개미...
교미가 끝나면 숫컷을 잡아먹는다는 사마귀,
근데 사마귀라는 제목은 무엇을 은유하는 것 일까요.
<뒤에 자기가 서 있는 것을 사내애가 깨닫기 전에 그곳을 떠나려는 순간, 난데없이 뒤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달려오면서 사내애가 미처 손쓸 새 없이 토끼 새끼를 물고 달아난다. 현이 있는 집 고양이다. 뒤이어 사내애가 윽 소리를 지르며 저녁 그늘 속으로 고양이를 쫓아간다. 그 뒤를 현도 같이 고양이를 쫓아 달리기 시작한다.>
관계(關係)의 비정함으로 인한.. 자아의 트라우마랄까.. 갈망이랄까...
좀 난해합니다만, 견강부회로 소설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바는 짙습니다. ㅎ
-독서 리뷰-
[[황순원]]
<물 한 모금> <기러기> <별>
<물 한 모금>
-황순원 作-
***동우***
2016.05.30 06:20
월요일.
마음 따스해지는 풍경화 한점.
마가을(늦가을이라는 뜻) 쏟아지는 비 그을(피할) 자리 찾아 몰려든 남의 집 헛간.
그래도 앞개울 휘청거리는 외나무다리를 우스꽝스럽게 몸을 비틀면서 건너는 사람들의 꼴은 구경스럽습니다.
따끈한 물이 담긴 주전자와 찻종을 가지고 온 헛간 주인인 목자(目子) 사나운 중국사람.
<먼저 수염 긴 노인이 마시고, 노파가 마시고, 그리고는 옆 사람 순서로 마신다. 한 모금 마시고는 모두, 에 도타, 이제야 속이 풀리눈, 하고들 흐뭇해 한다. 단지 그것이 더운 맹물 한 모금인데도. 그러나 그것은 헛간 안의 사람들이나 밖에 무표정한 대로 서 있는 주인이나 모두 더운 물에서 서리는 김 이상의 뜨거운 무슨 김 속에 녹아드는 광경이었다.>
뜨거운 물 한 모금.
뼛속 깊이 스며드는 한기가 녹습니다.
한 줌의 인정.
세상 살맛나게 하는 것들..
***하늘의소리***
2016.05.30 18:04
겉만 보고 모르는게 사람이죠.
그것을 깨닫지 못하니.
동갑의 같은 목회 직분을 가진 사람 때문에 가슴이 아프네요.
사람을 가지고 놀리고 하다니.
7살 먹은 우리 손자도 카드놀이 하면서 놀리면 기분나빠 방으로 들어가는데.
***동우***
2016.05.31 03:17
누군가로부터 불쾌한 꼴을 당하셨나 보지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목사님.
***하늘의소리***
2016.05.30 19:35
그래도 전화번호에 스팸 관리 걸어 놓은것이 마음에 걸리네요...
<기러기>
-황순원 作-
***동우***
2016.07.07 04:45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박경리의 이 詩가 반가웠다는 친구.
'그라시아스알라비다'를 구가하는 그이지만 그 역시 이 땅의 여인네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팔자 뒤웅박이라 했던가.
이 땅 여인네의 삶.
삼종지도란 아버지에 치이고 남편에 치이고 자식에 치이는 삶에 다름 아니다.
언젠가 제주 여인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섬의 풍토는 육지의 여인네들의 것보다 엄청 가혹한 것이었다.
아까 어떤 내 친구의 글을 읽고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스스로 호칭하는 쇤네....
저런 것들, 비니미니의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설레임***
2016.07.09 02:18
맘이 저려옵니다
엄마의 모습이고 나의 모습 또한 비쳐집니다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그 시절, 노름이라는 것은 왜 생겨서 사람 속을 그토록 불편하게 했는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똑 같을텐데, 그래도 여성상위 운운하기도 하는 시대인지라 저렇게 쇤네처럼 무시 당하지는 않겠지요.
여인이라는 이유로 참아야 함.
저 역시도 겪고 놓아버리고 싶을때도 있었지만 어너미라는 이름으로 차마 놓지 못했습니다
바로 여자이기 때문에 ㅎ
앞으로 살아 갈 여인들은 또 다른 미래 모든게 평등하고 보장된 성숙한 사회에서 편안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에 위안을 받아봅니다
여인 쇤네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머니 아내
핏줄로 묶여진 하나의 공동체 한식구라는 끈끈한 정이
용기백배 할것 같습니디ㅡ
***┗동우***
2016.07.09 21:15
여자팔자 되웅박팔자..
전세기까지만 하여도 무릇 여자의 팔자란 동서(東西)가 다름 없었지 싶습니다.
남자에 종속된 삶.
테스를 읽어보아도,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어보아도.
이제는 달라졌을겁니다만.
아니, 반드시 달라야 하지요.
<별>
-황순원 作-
***동우***
2016.09.05 00:21
황순원(1915~2000)의 '별'
소년에게는 아주 어렸을적 죽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소년이 인식하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궁극의 아름다움, 이를테면 하나의 이데아의 세계일테지요.
누이를 향한 저 미묘한 양가감정(兩價感情),
못생긴 누이가 어머니를 닮았다는 사실이 소년은 견딜수가 없습니다.
이유없이 누이가 미워서 소년은 어깃장만 놓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처럼 자신에게 무한의 사랑을 베푸는 누이.
방종한 듯한 누이(사실은 아닐것), 어머니의 순결한 이미지에 대한 모독감으로 누이를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 누이가 시집가 얼마 아니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소년의 감정모체.
어머니는 영원히 살아있지만 누이는 죽은 것입니다.
이제 누이도 소년에게 별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누이는 어머니와 같은 아름다운 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머리를 옆으로 저으며 눈을 감아 눈 속의 별을 내몰았습니다.
영원한 이데아(관념)의 별과 현실적 한계인식의 별.
그러나 소년의 눈에는 차츰 어머니 별자리를 누이의 별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소년은 성장할테지요.
어머니와 누이.
이데아와 액추어리티와의 간극.
그 인식에 따른 당혹감과 고통스러움...
나는 소년의 저 심리적 성장통을 십분 이해할듯 싶습니다.
영원히 청결하고 아름다운 여성성의 이미지.
어머니 누이 마돈나...
내 마음 어딘가 혹여 남아있나 뒤져봅니다.
프로방스 밤하늘의 별무리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진 스테파네트 아가씨.
행여 깰세라 꼼짝않고 자신의 어깨를 빌려주면서 목동이 올려다보았던 별떨기들..
밤하늘 가득 그레고리안 성가가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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