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한무숙]]
<감정이 있는 심연> <돌>
<감정이 있는 심연>
-한무숙 作-
***동우***
2014.07.08 05:07
한무숙(韓戊淑, 1918~1993)의 소설은 처음 올리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한무숙을 본적이 있는데 어린 눈에도 상당한 미인이었어요. 동생인 작가 한말숙 보다 훨씬. ㅎ)
그녀의 대표작 '감정이 있는 심연'.
발표 당시(1957년) 세간에 다소 충격을 주었다지요.
<그러면서 무엇에 씌우기나 한 것처럼 자꾸 그 길을 걸었다. 전아도 역시 한 번도 와 본 일이 없는 그 길을 무엇에 씌우기나 한 것처럼 자꾸만 나를 따라 걸었다. 그 길이 닿는 곳에서 우리는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보았던 것이다.>
그 시절, 여성작가가 섹스에 관한 내용을 정면으로 다룬다는건 좀 거시기했던가 봅니다.
그래 그런지, 소설의 제목 '감정이 있는 심연'이라는 제목에서 여성에 대한 모종의 메타포가 느껴지기도 하려니와, 이 소설은 행간에서 함축된 의미를 읽어낼 눈썰미가 필요할듯도 합니다.
유서깊은 대가집의 외동손(孫) '전아'와 빈천한 출신의 '나'와의 사랑이 서사의 주축입니다만.
과부만 사는 '전아'의 집안은 삼엄한 기독교 근본주의자 큰고모가 강요하는 캘빈주의적 죄의식(성적욕망을 원죄로서 다스리려는) 분위기로 가득 차있습니다. (아름다운 용모의 작은 고모의 부정으로 인하여 더욱)
'나'는 전아의 집안에 대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그 컴플렉스 해소를 위한 돌파구로 미국유학에 진력하는 남자구요.
어린시절, '전아'는 큰고모에 끌려 '작은 고모'(부정하게 낳은 아기를 유기)가 재판받는 법정에 끌려갑니다.
포승줄에 묶이고 용수를 쓴 작은 고모의 죄악과 징벌, 그 현장을 목격한 '전아'는 연약한 나비처럼 하늘하늘 힘없이 쓰러집니다.
성장하여 미술학도가 된 '전아'는 어느날 '나'의 하숙에서 섹스를 나누고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겪습니다.
천당이란 신의 축복(성숙한 남녀의 교합)이고 지옥이란 신의 징벌(죄의식의 발호)이겠지요.
그들이 사랑을 나눈뒤 차를 타고 오는 도중, 교통사고로 정체된 거리에서 호송되는 여죄수의 무리를 목격합니다.
'전아'는 어린 시절 목격하였던 작은 고모의 징벌현장을 떠올립니다.
자신도 섹스를 하였으므로 징벌을 받을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힙니다.
'죄악망상', 그로 인하여 전아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것입니다.
큰 고모의 험한 얼굴이 "뉘우쳐라, 뉘우쳐라."하고 소리칩니다.
그때문에 죄의식으로 고통받는 그녀의 정신이지만, 그녀의 감수성은 순결하고 고상한 것입니다.
본시 그녀는 육체(섹스)란 정신(사랑)이 의미로써 구현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백제관음(百濟觀音)은 만든 사람이 하나의 의미(意味)를 그렇게 구상시킨것 처럼.
<"나두 어떤 의미가 되고 싶었는데……선생님헌테." "나헌테? 그야말로 무슨 의미지?" "글쎄, 사랑일 것이라구 생각해 봤어요.">
전아의 감수성에 깃든 자궁과 사랑의 의미.
섹스를 넘어선, 죄의식을 넘어선, 정신병 따위를 넘어선 그곳에 진정한 의미와 가치.
사랑.
이를테면 미국은 전아에게는 죄의식으로부터의 도피처였다면 '나'에게는 열등의식의 도피처였을테지요.
전아의 '비자'는 정신병원 입원으로 좌절되었지만 '나'는 드디어 비자를 획득하였습니다.(전에는 가슴의 병으로 좌절되었는데)
그러나 비자라는 허영의 표상을 넘어선 그곳에 '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섬세하고 지극히 심약한 전아의 기질.
그것이 나는 이쁘고 신비합니다.
육체로서 복잡하고 정신으로서 애련한 여성성.
그것이 나는 애틋하고 어여쁩니다.
가슴이 아립니다.
내게.
옛 여성작가에게는 독특하고 정겹고 아릿한 에스프리가 있습니다.
<돌>
-한무숙 作-
***동우***
2017.02.16 04:38
박경리, 손소희, 박순녀, 한무숙, 한말숙 etc...,
예전 여성작가들에게서는 독특한 에스프리가 끼쳐집니다.
나 즈음의 연배만이 맡을수 있는.
허긴 반세기 이상 세월이 흘렀으니 요즘 세태에게는 좀 생경한 분위기의 것일테지만.
그렇지만 요즘 작가에 비하여 문학적 웅숭깊음은 조금도 뒤지지 않습니다.
인상깊게 읽었던 그녀들의 소설들 올리고 싶은 마음 굴뚝이지만 업어올수 있는 텍스트 파일 많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지요.
한무숙 (韓戊淑, 1918~1993)의 '돌'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잡설은 내일.
***동우***
2017.02.17 04:42
혈연이 아닌, 명목상의 외삼촌과 조카딸.
그윽한 사모와 애잔한 사랑의 감정.
<사실 삶이란, 허멍한 하나의 과제(課題)이고, '나'라는 것이 없어져도, 결코 공간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 내가 사라진 후에도, 해는 빛나고, 바다는 출렁거릴 것이라는 것, 말하자면 '나'라는 것은, 있어도 없어도 좋은 존재라는 것, 그런 상념이 참기 어려웠었다. 그러기에 지난 몇해를 텅빈 꺼풀 같이 살아 왔던 것이 아닌가. 사실 어두운 재같이 식어버린 가슴에는, 절망에 필요한 만한 정열도 없었고 보니 공백만이 진실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나는 이미 인간으로서, 실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죄의식과 허무감으로 허깨비처럼 살아오던 '나'
옥수암을 다녀 온 후 그 헛헛한 가슴에 무언가 내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체험했다는 것은, 목숨을 체험한 것이고, 주체스러운 '나'를 모아 완전한 '나'를 갖추는 것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무도 완전하게 자기 자신이었던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 앞에서 완전히 '나'였었고, 또한 그 '나'는 상기, 내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이기에 이제 와서 허망한 것을 허망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선(善)도 역시 악(惡)과 같이 벌(罰) 받는 것이라는 역리(逆理)를, 몸부림치는 일 없이 따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 벅찬 번뇌를, 나는 이 두 여인 -하나는 시간을 초월한 연화대 위의 불상이고 다른 하나는 덧없는 비린 육신을 지닌, 길 잃은 여인이었지만 그녀들의 우러르며, 내려다보며, 하는 얼굴에서, 꼭 같이 느껴 받았던 것이다. 이윽고 그녀들의 번뇌는, 또 한 내 자신의 것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나'를 가지는 것이라는 말은 진담인가보다. 그러기에 그 순간 나는 분명히, 영란이에게 '나'를 느꼈던 것이고, 그녀가 외우는 염불소리를, 그녀의 그 애절한 음성을, 내 것으로 알았던 것이 아닌가.>
<공백감 이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패잔의 사나이와, 무의미한 희생에 목숨을 깎아가는 여인을, 이 외진 산절에 쓸어붙인 것은 무엇이었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어쨌든, 혈연적으로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할지라도, 그녀와 나와의 관계는 속세의 척분으로 따져, 숙질이 되는 것이었고, 그런 속병(續炳)이, 다른 남녀들 사이 같으면, 주목을 받을 만한 행동까지도 어물어물 놓쳐주어 그것이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서로가 사랑을 자각하였을 때는, 이미 그녀는 내 자신조차, 거기까지는 보지 못한 내 내부 깊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진실로 몇 해만에, 나는 살 의욕을 가진 것이었고, 또한 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그녀와 더불어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서에도 있거니와, 돌아보면 돌이 된다는 설화.
사랑은 논리의 당위가 아닐지라도 어떤 이성적 영역이 있습니다.
결코 서로 다가갈수 없는 두 사람, 돌이 되어버린 사랑일지라도 '나'는 충만합니다.
<무수한 가지로 노을이 타는 하늘을 조각지고 있는 늙은 느티나무 밑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여, '돌' 에 기대어 앉은 여인의 모습을, '돌' 속에 몰아 넣기나 한 것처럼, 이쪽에서 보는 눈에는 '돌' 만이 호젓이 서 있는 것이었다.>
불교적 분위기도 엿보이는 호젓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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