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조성윤 作-
<숙명전환의 선물> -김미정 作-
***동우***
2013. 3. 20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은 조성윤 박사가 쓴 연구서(硏究書).
‘숙명전환의 선물’은 김미정님이 쓴 일종의 대담집(對談集).
속표지에 저자의 친필인사가 씌어 있는 책을 증정받는다는건 큰 기쁨이다.
조성윤과 김미정은 부부, 그리고 두 분 모두 내 친구들이다.
사회학을 전공하는 학자의 전문연구서와 문학을 전공하는 여성의 문학적 대담집.
두 권의 책은 당연히 다르게 읽혔다.
‘종교사회학’을 주(主)연구분야로 천착(穿鑿)하는 사회학자 조성윤교수가 많은 책을 출판하였음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그의 아내 김미정님은 저작물을 세상에 내 놓는 것이 처음이다.
김미정님은, 예전에 교직(敎職)에 있었지만 지금은 전업주부이다.
학자의 연구에는 귀납(歸納)과 연역(演繹)으로 자신의 가설을 도출하거나 입증하기 위한 많은 에비던스(자료)가 필요하였을 터.
조교수의 아내 김미정은 대단한 독서가이고 글쓰기를 즐겨하는 사람(책부족)인지라 그런 아내를 자신의 연구조수로 활용하였다.
이들 부부는 수시로 건너가 동경 오사카 코베등 한동안씩 일본에 체류하여 함께 작업하였다.
재일(在日)한국인에 관한 자료들을 탐색 발굴하였고 많은 ‘재일 한국인’을 면담하여 자료를 축적하였던 것이다.
50명에 이르는 녹음기록은 방대한 분량(한번에 서너시간씩 잡더라도)이었고, 그 녹취록의 선별 정리 작업은 온전히 아내 김미정에게 맡겨졌다.
재일한국인, 그들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익숙한 일본어나 또는 서툰 한국어로 주저리 주저리 쏟아내는 한맺힌 사연들.
그들 삶의 역정에는 마디마디 눈물겨운 신산(辛酸)한 삶의 리얼리즘이 점철(點綴)되어 있었다.
그 많은 사연들 속에 어디, 학자가 필요로 하는 학문적 엑기스만 담겨 있었겠는가. <조교수도 책에서 그 느낌을 썼거니와 그들의 사설(辭說)은 학자의 질문보다 ‘깊고 무거웠다’>
사회과학자의 명징한 분석적 틀 속에 가두기에는 그 삶의 표정이란 너무도 다양하였을 것이다.
깊게 내쉬는 한숨소리, 미묘한 어투에 스며있는 섬세한 감정의 결, 때로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깔깔대는 웃음소리... 그와 더불어 토해내는 가지가지 사연들...
그 리얼리즘을 무슨 수로 수치와 분류와 유형화의 통계 속에 담아 낼수 있으랴.
학자의 규격적 틀로부터 버림받은 것들은 온전히 김미정님의 몫이었다.
김미정님은 그것을 감동으로 수용하였고, 그리하여 또 한권의 책이 되었다.
조성윤교수의 연구서와 더불어 부록처럼 또 하나의 책이 출판되게 된 소이(所以)가 이러하였던 것이다.
‘숙명전환의 선물’에서 김미정의 후기.
<재일한국인의 얘기를 세상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꿈을 꾸는 일은 행복의 땅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꿈꾸기에는 터무니없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절실하게 이루어진다는 것...>
<그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성실한 사람들이었고 운명에 도전하였던 사람이었다는 것...>
<그들이 재일한국인이라는 운명과 식민지의 국민이었기에 불리했던 인생을 변화시킬수 있었던 것은 자기 마음을 바꾸면서 사회도 변화시킬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꿈을 꾸고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 힘을 나누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에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는 것을 인간혁명이라고 표현하였다.>
조성윤 교수님과 김미정님.
연구와 취재를 통하여 두 분이 쓴 일본종교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이라는 주제의 얘기들.
두 분의 창가학회에 대한 호의(好意)는 여실(如実)하였고 또한 매우 진지(眞摯)하였다.
허지만 조교수의 책은 사회과학자의 학문적 연구서이고, 김미정님의 책 또한 순전히 일종의 종교적인 측면에서 어프로치한 책은 아니다.
부언(附言)하면 두 분의 종교는 창가학회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내 알거니와 조교수는 기독교인(종교학자의 리버럴함으로)이고 김미정님은 가톨릭이다.
일본.
나는 스스로, 일본이라는 나라에 비교적 익숙하고 일본문화에 친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 재일한국인의 현실에 대하여는 전혀 미지의 세계였다.
두 책을 통하여 나는 재일한국인에 관한 새로운 여러 사실을 알게 되었고, 창가학회라는 일본의 신흥종교에 대한 느낌을 새롭게 하였다.
그런 나의 생각들을 쓰려한다. (문장의 허술함이나 논조의 엉성한 비약은 오로지 내 것이다)
재일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일본에서는 자이니치(在日), 조센징(朝鮮人-비하적 호칭)으로 불리는 그들을 우리는 흔히 재일동포 혹은 재일교포라고 호칭한다.
그들 1세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치하의 기간 동안.
수많은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살이의 시간들이 그 기간이라고 박제된 시간이었겠는가.
지사(志士)의 삶을 살았던 분들의 일생은 모르겠으되, 이 땅의 서민들 삶의 세월은 그대로 목숨살이의 시간들이었다.
그들이 살아 낸 내선일체(內鮮一體),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 황국신민(皇國臣民)이라는 세계관의 삶.
그 세상을 실존으로 살았던 그들의 ‘삶의 자리’를 폄훼해서는 안된다.
자의 타의에 의하여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정착한 반도인(半島人)들은 대부분 돈도 빽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육체 품을 파는 직업에 종사하였고, 노무자이거나 영세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현해탄 건너 일본 땅, 모순적 이중성을 가진 일본인 틈바귀에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뛰어나며 유순한 듯 하면서도 화가 나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며 성실하면서도 성실하지 않으며 용감하면서도 겁이 많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베네딕트 ‘국화와 칼’->
그리고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패전으로 1945년 종전(終戰)이 되었다.
짧은 사이, 어제까지 ‘덴노헤이카반자이’, 옥쇄(玉碎)를 부르짖던 일본은 표변하였다.
대일본제국의 군국주의는 자취없이 사라져 버리고 홀연 민주주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히로히토는 온전하게 그대로 천황(天皇)이었다.
민주주의도 아미테라스의 자손들의 순혈주의를 훼하지 못하여, 혈연이데올로기의 단일민족국가론이라는 보수적 가치체계는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노상 뇌어왔던 내선일체(內鮮一體)는 어디로 갔는가.
그건 그야말로 헛된 구호로서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을수 없었다.
일본정부는 조선인들을 한반도로 몰아내기 위한 정책의 일황으로 재일 조선인들에게서 일본국적을 빼앗아 버렸다.
지금도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않고서 일본인이 된다는 게(歸化) 가장 어려운 나라가 일본이라고 한다. <일본은 속지주의(屬地主義- 부모의 국적과 관계없이 아이가 출생한 지역에 따라 국적을 정하는 주의)의 나라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어쨌거나 종전후, 60 여만명의 조선인은 일본에 잔류하였다.
그들은 번듯한 직장이나 공무원 교사등은 꿈도 꿀수 없었고, 여전히 일본사회의 하층민으로서 생계를 꾸려나갈수 밖에 없었다. (그들 1세대는 현재 10%도 생존해 있지 않다고 한다.)
그 다음 2세대.
1세대의 자손들과 밀항(密航)하여 일본으로 흘러 들어 온 사람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밀항이 성행하였다)
그리고 3세대, 2세대의 자손들과 1980년대 이후 일본으로 온 이른바 ‘뉴 커머(New Comer)’.
그들 2세대와 3세대는 1세대와는 다르다.
극심한 차별은 그들에게는 피상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직도 집을 빌릴때라던가 취직할 때 불편함을 느끼는 정도)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지만 노력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한반도가 고향(故鄕)이라는 감정도 그닥 남아 있지 아니하고 민족적 자의식도 별로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의 일본인으로서 일본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피팍한 삶을 살아야 했던 1세대.
그들에게 조국(祖國)은 없었다.
당시 한국정부는 재외동포나 재외동포의 자녀 교육을 위한 지원과 투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럴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쪽에는 총련(朝總聯)이 있었다. (당시 북한의 지엔피는 남한보다 월등히 높았다)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총련(總聯)은 재일한국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곳곳에 조선학교(민족학교라고 하였다)을 설립하였고 한글과 한국문화를 보금할뿐더러 금융기관까지 설립하여 경제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조총련에 속한 재일한국인들의 결속력과 민족적 자긍심은 드높았다.
여러 일본영화에 등장하는 총련에 속한 조선인들을 보라. <치마 저고리를 입은 조선인학교 여학생들..일본인에게 조금도 꿀리지 않는 당당함.. 조국 조선인민공화국을 향한 불타는 애국심.. 소명감..>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존감은 결코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하였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그들이 일본종교 따위에 눈길 돌릴 이유는 호리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작금에 이르러 총련은 형편없이 쇠(衰)하여 졌다.>
그러나 당시에 총련과 대립적 위치에 있던 민단(民團)은 버림받은 자식 취급이었다.
총련에 속하지 않은 그들은 일본사회의 마이너리티, 외로웁고 서럽지만 어디 기댈 곳이 없었다.
어쩌다 한국에 들어와도 반쪽발이라고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었다.
일본인인가 한국인인가..그들은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이런 차별과 소외와 외로움이 오히려 민족정체성을 지키게 한 측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제사..명절..일본인에 비하여 친척들 간의 강한 유대.. 요리도 한접시 그득 담아 함께 먹는 문화..)
호적에 기재된 한국식 이름은 제쳐두고 보통은 통명(通名)인 일본식이름으로 불리던 그들.
디아스포라의 삶. <그들은 자식들에게 집착하여 언제나 실력을 키울 것을 강요하였다.>
작금에 이르러 재일한국인은 세가지 분류로 나뉘어 진다.
첫째, 한국국적을 지닌 사람.
둘째, 귀화해서 일본국적을 취득한 사람. (귀화 절차나 과정은 무척 힘들다. 보통 1-2년이 소요된다고 한다.)
셋째, 이른바 조선적(朝鮮籍)을 갖고 있는 무국적자 (국적란에 조선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놓아두고 있지만, 총련에 소속되어 있어 북한국적을 취득하고 싶지만 북한과는 국교가 없어 조선적을 북한국적으로 바꾸지 못한 사람)와 총련에서 탈퇴하였으나 한국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
이러한 면에서, 조교수의 '재일한국인 연구'와 '일본신종교 연구'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제 창가학회 얘기를 좀 하자.
나 사는 곳 부산시(釜山市) 영도구(影島區)는 인구 15만여명이 사는 자그마한 섬이지만 팡테옹(만신전)의 고장이다.(목사님의 비유적 설교에 의하면)
해발 300미터도 안되는 봉래산 곳곳에 크고 작은 사찰이 들어서 있고, 많은 교회와 성당.
그리고 특히 일본종교가 가장 성한 곳이 영도가 아닌가 한다.
천리교의 우람하게 지어진 성전(大韓天理敎元南星敎會)이 30년도 넘게 버티고 있으며, 몇년 전 부터는 창가학회(創價學會)의 웅장한 석조건물이 <한국 SGI 영도희망문화회관>이라는 이름으로 동삼동 해변가 매립지에 자리잡고 있다.
김미정님에게도 학창시절 우연히 접한 창가학회는 매우 이상하고 무서운 사이비종교로 받아 들여졌던가 보았다. <창가학회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던 건 통일교였다고. ㅎ>
30대 무렵, 나 역시 다니던 직장의 현장직 반장의 아내로부터 처음 접한 ‘남묘호렌게쿄’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실제로 목격하였다고 주장하는바 죽은 사람에게 ‘남묘호렌게쿄’라는 염불을 외면 사안(死顔)에 화색이 돌았다나 어쨌다나.>
내게도 역시 창가학회는 다만 유치하고 요상스런 사이비 종교였던 것이다.
통일교 역시 내게 그러하였는데, 40대 무렵의 어느 날 시내 지인의 사무실에서 낯 선 방문객을 맞아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상당한 미인에다가 고상한 취미의 의상을 갖추어 입고 교양미 가득한 중년의 두 여인은 일본인이었다.
통일교 신도였던 것이다.
'원리강론'인가 하는 소책자를 건네주면서, 그들의 서툰 한국어와 더욱 엉터리인 나의 일본어로 나눈 대화는 구약성경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무렵 기독교(무교회주의)에 나름 빠져있었던 터라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니 피가름이니 하는 내용은 귓등으로 흘렸으나 그토록 열성적으로 전도하는 그녀들의 모습에 나는 정말 감탄하였다.
무엇이 저 교양있는 여성들(더구나 일본인,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는 까마득한 공업 선진국으로 무엇 하나라도 배우기 위하여 굽신거리며 엔지니어들은 일본을 드나들었다)을 저토록 신앙에 헌신하도록 만든다는겐지.
그 두 여인의 인상때문인지 통일교는 창가학회만큼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이 두권의 책을 읽기 전까지 내게는 통일교보다는 창가학회가 몇배나 더 요상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종교였던 것이다.
으흠, 종교는 무엇을 가지고 낯 선 사람의 성정(性情)에 작용하여 그 신앙을 영혼에 스며들게 하는 걸까.
우선은 어떤 정서적(情緖的) 감성을 자극함에 의해서일 듯 싶다. <찬송가의 은은한 화음이나 성스러운 수녀님의 자태나 절집의 그윽한 향내..>
30대 때 내게 처음 접수된 창가학회.
그때 창가학회가 ‘남묘호랑겡쿄 어쩌구’하는 주문 대신 통일교처럼 교양넘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게 어프로치하였더라면 어땠을까.
조교수 부부의 책처럼.
어쨌거나.
일본 땅에 상륙하여 50만 신도를 거느리고 있다는 통일교도 놀랍지만, 한국 땅에 150만 신도를 만들어 낸 창가학회의 한국침투는 더욱 놀랍지 않은가. <반일(反日)의 나라에 왜색(倭色) 쪽발이 의식 깃든 종교가...>
더구나 창가학회의 우리나라 포교는 일본인 본토박이 신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죄 재일한국인 창가학회 회원들의 자발적인 열성에 의한 것이었다니.
창가학회는 무엇을 가지고 이국 땅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외롭고 고단한 조센징들에게 어필하고 스며들어 그들을 매혹시켰던 것일까.
창가학회(創價學會).
그 이름의 취지(趣旨)는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배움의 모임’이라는 말 뜻 그대로이다.
잘 알다시피 일본은 신불(神道와 佛敎)의 나라다. <한국 도회의 십자가 숲은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소수이지만 일본 기독교인의 고품질(?)은 한국 크리스찬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창가학회 역시 불교의 일파이지만 오소독스한 불교와는 많이 다르다.
법당을 마련하여 불상을 모셔 놓지고 않고 부처를 숭앙하지도 않는다.
창가학회의 뿌리는 일련정종(日蓮宗正)이다.
일련정종은 니치렌(日蓮) 대성인이라는 13세기 일본 승려의 가르침으로 창시된 종교라고 한다.
니치렌은 불경 팔만대장경 전부를 존숭(尊崇)하는게 아니라 그 중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는 경전이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니치렌은 현실을 외면한 채 내세(來世)만을 꿈꾸는 신앙을 비판하였다.
민중이 현실의 혼란과 괴로움을 정해진 숙명으로 여기는 것은 불교의 못된 가르침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기득권자와 지배층을 위한 종파, 현실을 외면하고 죽은 뒤의 구원을 강조하는 종파를 모두 비판하고 불교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말법의 시대에 구원의 빛을 제시할 상행보살이 등장해서 새로운 진리를 전파할 것이라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새 시대의 상행보살이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서양 기독교 메시아 출현과 비슷해 보이지만 자신이 상행보살이자 동시에 민중 하나하나가 모두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함이 다르다>
자기 속의 부처를 불러내면 현세가 바로 극락.
주장자를 내리치며 ‘만유불성(萬有佛性)이노니 너희 속의 부처를 이루어 현실의 행복을 누리라.’고 설파하였을 니치렌 대성인을 상상한다.
일련종정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러나 창가학회는 근세에 들어 창립되었다.
1930년대, 일련정종의 신도였던 교육학자 ‘마기구치 쓰네사부로’에 의하여 ‘창가교육학회’가 설립되었다.
그는 ‘창가교육학회를 일련정종의 '재가신도(在家信徒)단체'로 만들었다.
쓰네사부로는 근대교육학과 전통신앙을 결합하여 교육혁신을 일으키고자한 개혁자로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투옥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48년(종전후) 그의 제자 ‘도다 조세이’ (2대 회장)에 의하여 '창가교육학회'는 ‘창가학회’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도다는 법화경을 읽다가 새삼 ‘생명론’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도다의 창가학회 출범 당시 3000세대의 신도가 1957년 도다 사망시에는 75만세대로 신도가 증가하였다.
그 후, 도다의 제자였던 이케다(현 3대 회장)에 의하여 1960, 70년대 더욱 조직적인 절복(折伏:창가학회의 포교를 말하는데 주로 하층민이나 영세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하였다)운동에 의하여 지금은 천만명이 훨씬 넘는 거대한 종교단체로 성장하였다.
이 사회가 행복해 지려면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현실 속에서 적극적인 생명실천활동을 위하여>는 도다회장의 주창으로 1964년에는 공명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공명당은 보수적인 색채와 진보적인 색채를 동시에 가진 정강정책(政綱政策)을 주창하여 자민당과 연대하여 일본 제3당이 되기도 하였다. <군국주의 반대, 반공, 핵금지선언, 평화, 교육, 복지등...>
1975년 창가학회는 SGI <Soka Gakkai International- 창가학회(創價學會)의 일본어 발음 ‘소카 가카이(Soka Gakka)’의 영문 이니셜 ‘SG’에 ‘International’의 ‘I’를 붙여서 SGI 라고 한다.>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여 광선유포(세계를 향한 포교활동)하여, 1990년대 초에 이르러 148개국에 창가학회를 조직하여 해외 회원수가 17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때 일본에서도 창가학회는 최대 최악의 사교집단으로 매도된 바 있었다. <한 때는 드라큘라 컬트 교단이라고 손가락질..>
그것은 논리적 비판이 아니라 거의 일방적 저주와 비난이었고, 지금도 폄훼의 눈초리는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종교는 핍박 속에서 더욱 번성하는겐가, 그런 비판 속에 수십년 동안 그 수많은 신도를 확보할수 있었는지..>
창가학회의 기본적 의례는 근행과 창제이다.
근행은 매일 아침저녁 불단에 모셔 놓은 본존(본존이라 불리는 만다라의 부적-복사본)를 향해 법화경의 일정부분을 읽고, '남묘호렌게쿄'를 '음송'하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내 귀에 익은 우리 할머니의 염불신앙<경전을 몰라도 참선과 염불만 반복하여도 깨달음을 얻는다는>이었는데 창가학회도 염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듯 하다.
염불이란 바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묘법연화경의 진리에 귀의하겠다는 뜻)라는 주문(呪文)인데 이 주문을 제목(題目)이라 하고 이것을 음송하는 것을 창제(唱題)라고 한다. <일곱글자인데 여섯음절로 발음하는게 이상하다. 순 일본식 발음은 아닌가보다..>
주문의 효험에 대하여는 전에 ‘칼 융’이 서문을 쓴 ‘티벳사자의 서’라는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임종인의 귀에다 어떤 주문을 들려주면 죽은 자의 의식이 작용하여 좋은 곳으로 인도된다는...>
하나의 신념에 기반한 주문은 몸 속의 생명 에너지가 소리의 파장으로 활성화 된다고 한다.
‘남묘호렌게쿄’라는 주문은 분노와 긴장과 부정적인 생각들을 사라지게 하고 긍정적인 마음과 행복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절복(포교) 한다.
"일단 믿어보라. 본존을 앞에 두고 남묘호렌게쿄를 봉창하라. 이것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삶이 전개될 것이다. 병이 낫고 가난을 벗어나고 가정의 불화를 해소하면서 즐거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창제를 시작하면 점점 믿음이 커질 것이다."
창가학회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현세적 행복이다.
모임의 장소도 십자가를 걸어놓은 예배당이나 불상을 모셔놓은 법당이 아니라 그냥 회관(會館)이다. <우리 동네는 ‘한국SGI 영도희망문화회관’이라는 이름의 웅장한 석조 회관이 있다)
모임의 이름도 무슨 ‘예배모임’이나 ‘미사’같은 것이 아니라 ‘행복좌담회’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창가학회에는 승려나 목사나 신부와 같은 성직자가 없다는 점이다.<그래서 이름이 學會인가>
조직의 상하가 없이 모두 평등한 위치에서 회원들의 자발적인 활동에 의하여 운용된다. <민족이나 빈부나 계급에 따른 모임이라던가 하는 것이 없다>
얼마나 매혹적인가 자발적 결사체, 사제없는 신앙공동체라니. <내가 존경하는 우치무라 간조의 홋카이도 학창시절 그 순정한 신앙공동체가 생각난다>
건축헌금 감사헌금 십일조.. 눈 감으라 해놓고 신발 뚱쳐 가더라는..언제나 시끄러운 교회나 절집의 재정문제.
창가학회에서는 재무라 불리는 헌금을 1년에 한번만 한다고 한다. <없을 때는 1만원도 했다가 여유있는 해에는 10만원도 했다가.. 직책이나 직위의 하이라키가 없으니 경비의 유출도 크지 않을듯..>
아웃사이더 종교 창가학회는 아웃사이더 재일한국인을 매혹시킬만한 요소가 듬뿍 담겨 있었던 것이다.
가난하고 외로운 재일한국인에게는 하나의 종교적 구원의 손길이 되었다. <교우들과의 동류의식으로 그들의 소외의식은 해소되었고 사회적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는 회관 내부에서 충분하게 만족되었다.>
대부분 가난과 신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는데, 현실적으로 그들은 그 달콤한 변화를 맛보았다. <신념과 긍정적인 삶의 자세로 인하여 인생관이 바뀌었고 그것이 현실 속에서 효험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창가학회는 삶에 사명이 있다는 것으로 기쁨을 느끼고 자신을 성장시킬 동기를 마련해 주었다.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서도 나름 만족케 하였다. <매일 근행을 하기 때문에 따로 제사는 지내지 않지만 본존 앞에 부모 사진을 모셔놓고 물과 밥 두 개를 올려놓고 절을 하는등 조상숭배의식도 여일하게 지킬수 있었던 것>
창가학회는 마음 안이 따뜻해 지는 건강한 종교라고 그들은 서슴없이 말한다.
그들은 근행과 창제 뿐 아니라 조직활동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직적인 힘이 아니라 자발적 적극적 절복으로 재일한국인의 신도수는 늘어났다. <한국으로 까지 진출하여>
조성윤교수에게 재일한국인 연구와 일본 신종교 연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연구는 민족이라는 측면과 종교라는 측면에서 궁구되고 있다.
생각건대 조교수는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듯 하다.
조교수는 재일한국인의 내일에 대하여 얘기하는데, 앞으로 하나의 민족집단으로 재일한국인은 존속할수 없을 것이라고, 필경은 민족적 색채는 사라지고 일본화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조성윤교수가 후기에서 인용한 문장이 있다.
그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는 사람이 사회학자의 글쓰기에 관하여 한 말이라고 하는데, 바로 <"프레드 드 뮈세의 ‘위대한 예술가에게는 조국이 없다’라는 말에 주목하라">는 문장이다.
내 주제로서는 이 문장의 오의(奧意)를 헤아리기는 난망하다.
허지만 연이어 쓰인 다음의 글에서나마 대충 어림할 뿐이다.
<애국주의.. 오만하고 호전적인.. 단일한 법.. 단일한 언어.. 단일한 세계관.. 단일한 역사.. 단일한 미래를 가진 민족국가.. 민족정신.. 민족전통......민족주의로서는 사회학연구는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하기 난망.. 그러한 점에서 사회학자의 글쓰기는 한중일 국가적 경계를 넘어 나아가야 한다.. 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삶의 터전으로 보고.. 나아가 아시아인을 근대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로 보아 이들이 서로 어떻게 교류하고 얽히는지 세밀하에 분석하면서 사회학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우만이 우리에게 지적하는 바.. 일본종교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이라는 용어에 이미 바우만이 지적한 민족성향이 그대로 드러나 있음.. 그러나 필자는 국가와 민족에 갇힌 이 용어를 사용해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는 종교와 인간의 삶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
‘동아시아 종교문화학회’
5년 전인가, 조성윤교수가 발기인이 되어 한중일 유명대학의 유수한 학자들이 모여 <동아시아 종교문화학회>라는 국제학회를 출범시켰다.
부산의 모 대학에서 열렸었는데 나는 그 때 조성윤교수와 김미정님을 처음 상면하여 광안리에서 술잔을 나누었다.
조교수도 지적한 바 작금 지정학적으로 얽혀있는 한중일(韓中日), 세나라는 바야흐로 민족적 색채(쇼비니즘)가 짙어지고 있다.
이러한 때, 제3의 길을 모색하는 학자의 노력을 나는 주목한다.
이만 쓰련다. 내 횡설수설은.
논지도 무엇도 없는 어줍잖은 느낌의 아전인수적 지껄임.
분명하게 말하지만 내 글에서 두 분의 책의 내용을 유추하여서는 안된다.
조교수 논거의 반의 반의 반도 드러내지 못하였을뿐 더러, 또한 김미정님의 감성에도 반의 반의 반걸음에도 미치지 못한 글이다.
두 분께 해량을 구한다.
***동우***
2013.03.17 05:51
조교수님의 연구서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은 건조한 재미(?)로 진작 읽었지만 '숙명전환의 선물'은 흥미롭게 오늘 새벽 완독하였다.
두 책의 독후감, 일단 운을 떼었다. (요즘 마음 번잡하여 글 몰입도 형편없어..ㅎ)
이른바, 발걸치기 수법 (스스로에게 부담 짊어지우기)이다.
정다운 이웃 블로그에도 좁은 모바일 화면으로 눈팅만 하는 나날..
곧 봄바람 들리다. 하하
***┗홍애(虹厓)***
2013.03.26 17:09
저는 요새 매일 남양군도 어떤 사람의 글을 옮기는 작업 중입니다.
그래서 책이 고파지고 있어요.
얼른 작업을 마치고 4월에는 레미제라블을 읽으려 합니다.
그외, 여기서도 티비에서 독후감 방송이 있어서 소개해 볼게요.
4월 책은 나쓰메 소세끼의 " 마음"에 관한 것이라 일본어 원서로 읽어 보고자 합니다.
우선 3월 안으로 작업을 마친 후의 희망입니다. ㅎㅎ
***┗동우***
2013.03.27 05:40
홍애님.
가마쿠라로 어디로, 일본에서 더욱 미모를 뽐내면서 봄을 만끽하시는 모습.
카카오스토리에 활짝 피었습디다. ㅎ
이왕 일본어로 읽으시는 것, 나쓰메 소세끼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어떠할지.
전의 '설국'도 그러하였지만 오늘 새벽, 그의 단편 '서정가'를 다시 읽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었습니다.
눈으로 읽는게 아니라 마음으로 읽혀지는듯.
번역문이 그럴진대, 일본어 원문의 맛은 어떻겠어요?
참, 나는 아직 홍애님 댁 세식구 함께 1년동안이나 일본 체류하게 되신 연유를 모르겠다오.
조교수님이야 그렇다지만, 홍애님과 지훈군은.
무슨 공부를 하시는거예요?
SNS 글에 언뜻 무슨 대학교 얘기가 있는듯..
3월까지의 작업이시라니, 그 또한.
또 무슨 책을 쓰시나.... ㅎ
***┗홍애(虹厓)***
2013.03.27 17:39
남편 가는 데 저 따라 온 거구요
아들은 9월 복학이라 가족이 함게 움직인 거에요.
아들 마저 따로 있으면 제가 안정이 안 되잖아요. 비용면도 그편이 좋다는 계산으로다가. ㅎ
올해 조교수 또 한 권의 책을 준비중이고.
저와 아들은 자료 정리 돕고 있어요. 4월부터는.책 읽을 시간 날 것 같아요.
온 김에 제자리 퇴보 하던 일본어.
소설 읽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며 생각만 하고 있어요.
외국어란 노력없인 유지도. 발전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네요. ㅎㅎ
***teapot***
2013.03.19 08:41
한국 젊은이들 요새는 공공 장소에서 쎌폰 안 들여다 본다면서요?
하도 나이든 분들이 모두 열심히 들여다 보는 바람에....ㅎㅎㅎㅎㅎ
동우님도 저기 계시네요~~
***┗동우***
2013.03.20 05:17
하하, 티팟님.
나, 앉으나 서나 스마트폰 들여다 보는 편 아니에요.
주로 화장실에서 나의 스마트폰은 유용하지요.
내 독수리잡기는 유별나게 길답니다. 하하
전에는 신문이나 책을 들고 앉아있었거든요. (아내가 질색..어떤 때는 좀 얇다란 책같으면 완독하고 나오기도 예사였지요.ㅎㅎ)
그런데 이제는 스마트 폰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정도이지요.
***홍애(虹厓)***
2013.03.26 17:07
동우님의 글.
학생들, 그리고 제 달리기 카페 회원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퍼 갑니다. ^^
***┗동우***
2013.03.27 05:41
어이구, 못난 글로 책에 누나 끼친건 아닌지..
***하지만***
2013.03.21 14:38
SGI 는 왜색 종교의 이미지를 벗기 힘들 듯 합니다.
니치렌에게서 배울것은 그가 수행했던 불법이지 그의 발음을 따라하는게 아닐진데...
섬나라 제일주의에 빠져 일본 발음을 고집하는 모습이 지속되는 한은 이 나라에서 SGI 는 왜색종교 일 겁니다.
***┗동우***
2013.03.22 10:17
하지만님.
일본 역사에서 생겨나 일본의 문화풍토에서 형성된 종교.
일본색을 왜색이라 한다면 SGI는 왜색종교. 맞습니다, 맞구요. ㅎ
위에서도 말했지만 근행과 창제는 SGI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남무묘법연화경'이라고 부를수는 없겠지요.
주문이란 음운과 발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나의 신념체계입니다.
종교에 있어서의 문제는 주문의 발음으로 인한 왜색종교 운운이 아니라 종교의 사이비성입니다.
인간성의 왜곡, 윤리풍속의 파괴, 도그마의 날조와 허황성등.... 부정적인 측면.
이점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eunbee***
2013.03.21 19:54
어제 저녁엔 은비엄마랑 '중용'과 '금강경'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도올 교수님이 쓴 책을 내가 지난해 이곳에 올때 공수해 왔거든요.
그런 이야기 나누며 4대성인의 나이비교를 해보며 한참 웃고..종횡무진 아무렇게나 이론 늘어놓았다우.ㅋㅋ
홍애님이 쓰셨다는 책, 그 책속에 담겨진 내용 대강 읽어보니, 내겐 정말 낯선 세상이에요.
4대성인 중 석가 이후의 성인도 모두 석가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하던 은비엄마 말이 삼삼이네요.ㅋㅋ
각설하고,ㅎㅎ
옛날 옛적에 읽었던 기억이 아슴아슴하는 단편 찾아 주실래요?
크리스마스 날, 그간의 자기 행동을 반성하고 착하게 살려고 맘먹은 순간, 경찰에게 쇠고랑 찬다는 오 헨리의 단편, 잘 곳 먹을 것이 걱정되는 홈리스? 어느 남자가 별별 소소한 범죄를 저질러 봐도 하룻밤 재워줄 철창에 못가게 되더니, 교회에서 들려오는 성가에 뉘우침이 생겨 잘 살려했더니 그제서야 순경나으리가 잡아가는....
이렇게 설명해도 동우님은 잘 잡아 오던걸요.ㅎㅎㅎ
어린애처럼 요즘 그 단편이 읽고 싶어져요. 요즘 심사가 그 비슷한가 봐요.ㅋㅋㅋ
***┗동우***
2013.03.22 10:26
은비님.
예수가 佛子였다는 주제는 오래 된 것입니다.
'예수 인도로 가다'라는 책도 있지요.
인류 문화사적으로 불교는 알게 모르게 후대의 종교에 영향을 끼친바 있지 않겠어요? <신라 불상에서 알렉산드로스를 읽을수 있는게 문화의 흐름...간다라미술.. ㅎㅎ>
불교 역시 인도의 우파니샤드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을터이고..
근데 은비님.
요즘 심사가 어떠시길래, 오 헨리의 그 소설이 읽고 싶으실까.
'경관과 찬송가'
여기저기 찾아보니 텍스트 파일 있기는 있는데, 드래그하여 훔쳐 올수 없는 것들.
은비님이 잡아 오라 하시는데 도리 있나요?
아까 책 펴놓고 30여분 자판 두드렸다우.
늦잠에다, 모처럼 오전시간 탱자탱자하기로 하여..ㅎ
어제 아들놈과 음악회 갔다가, 늦도록 술마셨지요.
***┗eunbee***
2013.03.22 19:41
아르카익 미소~ 간다라 미술하면 생각나는 단어예요.ㅋ
나의 지식이라는 것이 4지선답에 길들여진 것이라, 들어도 배워도 읽어도 맥이 잡히질 않아요.
그 무엇이되었든간에. 그래서 동우님의 해박함과 깊이를 알게 되면
슬퍼지고 부끄러움이 일고...에혀~내팔자야. ㅎㅎㅎㅎ
은비네는 초딩때부터 철학에 입문하고, 신들에 대해서 자기 견해를 넣어 몇페이지를 써가야하고
중학교에서는 철학을 학문답게 배우고, 5-6개 국어를 익히고.... 이나라 교육엔 깊이가 있어요.
그러나 이상스러운 것은 교사가 결근을 하면 땜빵 수업조차 없고 그냥 집으로 보내요.ㅎㅎ
오늘도 아침 첫시간 선생이 결근이라고 10시에 등교하라는 문자가 학부모에게 전달되더군요.
툭하면 결강으로 집에 돌려보내고, 툭하면 노는 날, 잊을 만하면 방학, 뭔뭔 이름의 방학이 그리도 많은지.
그러나 매일 노는 것같아도, 연간 수업일수가 180일쯤(정확하진 않는..ㅠ) 되니,
배울만큼은 배우고 가르칠만큼은 가르치나봐요.
교과서도 없어요, 정해진 교실도 없어요, 정신없어서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ㅎ
각세워서 테두리안에서 공부하던 우리네 머리로는...ㅠㅠㅠㅠ
그나저나, 동우님!! 30여분 간의 타이핑으로 손목 아프지 않으셨나요?
가까이 있어야 술한잔 사지요.
이렇게 공짜 글에, 툭하면 잡아다 달라, 업어다 달라, 하는 내가 참 염치가 없습니다요.
언제 우리에게 시절인연이 닿는날 온다면 술한잔 거하게 때리겠습니다.
아드님이랑 대작하시는 동우님, 멋지세요.
나 또한 딸 아들 제자..구별않고, 가리지않고, 주거니 받거니 술타령 잘 벌이지만요.ㅎ
음악회 다녀왔으니 와인으로 무드잡으셨을까나?
아들 곁에 계신 사람 부럽습니다.
울 아들은 내일 뒤셀도르프로 며칠간 출장이라는데, 이웃나라로 온다해도 볼 수 없으니
섭섭하기 그지없답니다. 멀리있으면서 볼 수 없는 것과 가까이 있는데 만나지 못하는 심정 차이는
대단하지요. 가까이 있어도 보고싶은 큰딸. 그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늙은 엄마의 세월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툭하면 뭔가를 잡아다 달라는 블친 때문에 건강 해치지 마시고(병 주고 약은 못드려욤~)
더구나 세월 어수선한 작금의 한국현실 속에서 건강, 건강, 건강하게 지내세요. 동우님!!
이제 나는 쁘띠팔레~ 그 우아한 카페가 있는 작은궁궐로 향하겠어요.
언제부터 벼르던 그곳 나들이거든요.
차 한잔 주문해 두고 동우님 부르겠습니당~ ^*^
오헨리~ 30여분의 타자, 고마워요.
***┗동우***
2013.03.23 06:18
은비님.
내 까마득한 기억 속의 어휘 '아르카익 스마일'을 금새 떠올리시고.
정작 슬퍼지고 부끄러울 쪽은 나인데, 왠 팔자타령?
정말 그래요.
은비님의 적확한 지적.
각 세워 테두리 안에서 공부하던 우리네 머리, 이 나라(우리나라) 교육에는 깊이가 없어요.
깊이는 커녕 思惟의 방법론, 그 가리사니도 잡을수 없을 지경이니.
전에, 신문에서 프랑스 바카로레아 문제를 본 적 있는데, 어휴 나 따위는 족탈불급.
무슨 철학 전공자 대학원생에게 묻는 수준입디다.
교과서도 없고 정해진 교실로 없는 학교.
그런 환경에서의 가르침과 배움. 감히 상상할수 없습니다.
가르치는 이에 따라 얼마나 다양할까, 공부하는 학생에 따라 얼마나 적성의 자유로움을 구가할까.
정말 공부가 공부다웁고 스승이 스승다울 것 같습니다.
연간 수업일수 180일 정도면 적은 일수가 아니잖아요?
일주 5일 x 4주 x 9개월쯤 잡으면 180일.. 결코 우리나라보다 적지 않을듯 한데.
하하, 은비님.
우리에게 상면이라는 시절 인연 오지 않으면 또 어떻습니까? 하
음악회는 지방문화회관(문화환경 후진 우리 동네지만 그나마 하나 있다우)의 '뉴 프라임 오케스트라'라는 지방 관현악단이었어요.
레퍼토리는 로시니 윌리엄 텔 서곡, 쌩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비제의 칼멘 모음곡,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스페인 기상곡'
일류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생음악으로 듣는 관현악인데 귀가 황홀하지 않을리 없었지요.
와인의 깊은 맛 모르는 촌놈이 와인은 무신 와인.
치맥(치맥이 무언지 아실라나? 은비님은)이었다우. 치킨과 맥주.
맥주라면 정확하지 않구나, 쏘맥이었다우. (쏘맥이 또 무언지 아실라나? 은비님은.) 맥주에 소주 섞는 것. ㅎㅎㅎ
지방 오케스트라에 치맥..은비님 생각하시는 우아 고상과는 좀 거리가 있지만 아들 놈과의 이런저런 잡설들은 제법 엘레강스 하였지요. ㅎ (은비님 얘기도 있었지, 아마..)
좌우간, 은비님.
우리 연배, 말씀처럼 건강 건강을..
그리고 은비님의 좋은 주말.
***┗eunbee***
2013.03.23 06:52
아드님과의 음악회나들이..좋으셨네요
나도 귀익은 표제음악들이네요.함께들었다치고 싶네요.
치맥이면 어떻고 쏘맥이면 어떠하며 베를린필하모닉 아닌들 어떠할까요. 듣는 귀들이 마시는 영혼들이 로코코궁전인걸요.
이제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폰타가 조금씩 속도 붙어요 덕분에...ㅋㅋㅋ
동우님 수줍은 미소가 아마도 아르카익 스마일에 가깝지 않을까....
어맛! 까마귀가 울어요. 이밤중에.. 열시 반인데.
저까마귀ㅡㅡ왠일이래요. ??
오늘 일찍 자려구요.
왜냐구요?
나도 몰라요. 내가 누으니 모두 자기방으로 가면서
"잘자ㅡㅡ"하네요.ㅎㅎ
멋진 주말 보내세요
나는 꿈속에서 우리큰애 시험문제나 선몽할래요.
시험이라고 주말 엄마보러도 못온다니...ㅠㅠ 에구구
***홍애(虹厓)***
2013.06.20 15:59
동우님의 글.
스크랩 해 갑니다
***홍애(虹厓)***
2015.04.26 14:18
동우님의 글.
당산서원 카페(사회학공부모임 카페)에 스크랩해 갑니다
'내 것 > 잡설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등어>>> (1,4,3,3,1) (0) | 2020.12.16 |
---|---|
<<<청수(淸水)>>> (1,4,3,3,1) (0) | 2020.12.16 |
<<<그대 하늘을 맛보았기 때문에>>> (1,4,3,3,1) (0) | 2020.12.13 |
[[악당들이 너무 많다 外]] (1,4,3,3,1) (0) | 2020.12.11 |
[[바리 돌아오다. 뚱바우 영감]] (1,4,3,3,1) (0) | 2020.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