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청수(淸水)>
-히라노 게이치로-
***동우***
2017.07.25 04:25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平野啓一郞, 1975~ )'<명색 일본 소설을 좋아한다면서, 내 독서력(歷)이라는게 고작 이렇습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1999년도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미시마 유키오의 재현이라고 회자(膾炙)되는 소설가라고 합니다.
淸水.
감각적인 문체, 그러나 그 내용은 상당히 철학적입니다.
의식의 흐름에 투영되는, ‘존재’라는 의미를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존재’ 역시 시간에 따라 흐릅니다.
그러니까 존재함이란 흐름에 대한 자의식을 말하는 것인지요.
존재함의 연속성, 그 실존인식의 알맹이는 그러니까 기억인가요
아, 존재의 본질은 과연 기억일까요.
그렇다면 기억을 잃은 사람의 존재방식은 어떠한 것일까요.
에컨대, 지독한 치매를 앓는 사람의 존재방식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요.
서사기억 따위는 잃었지만 가냘프게 남겨진 정서기억 한줄기가 그 사람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는건 아닐런지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삶은 한사람이 살았던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를 기억하시나요?
기억을 단 10분도 지속시킬수 없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의 복수극.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몸에 문신을 해가면서 끊임없이 복수를 꾀하지만. 과연 기억을 잃어버린 그의 감정모체의 진실은 무엇이었던지.
++++
<그리고, 이것 역시 하나의 기억이었다. 참으로 하잘것없는 하나의 기억일 뿐이었다. 이 기억을 회상하면서, 나는 다른 많은 기억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이 기억을 살아보았다. 강둑을 따라 북쪽을 향해 올라가 계속 거리를 걸었다. 부디 이 기억이 오늘의 기억이기를, 바로 조금 전까지의 기억이기를 믿으려 했다. 넘쳐나는 수많은 기억 속에서 이 기억이야말로 지금의 내게 가장 가까운 과거의 기억이기를 믿으려 했다. 물론 무모한 노력이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가령 그렇게 믿을 수 있다 해도 그 믿음에 대체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오늘의 기억이건 어제의 기억이건, 백 년, 천 년 전의 기억이건, 얼마나 먼 옛날인지도 알 수 없는 저 태양의 기억이건. 그것은 모두 같은 기억들이다. 더구나 시간 속에서 허망하게 표류를 계속하는 고독한 기억이다. 그렇다, 어쩌면 이 순간조차도.
북산대로로 나와 서쪽으로 향하다 호리가와(堀川)에 들어서기 전에 남쪽으로 꺾어져 주택가로 들어가 동쪽으로 향하고, 북쪽으로 향하고, 서쪽으로 향하고… 그러기를 끝없이 거듭하다 도중 어딘가에서 시바타케(柴竹) 거리로 나가고 그리고 다시….
어리석은 방황이 나를 조금씩 무엇인가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였다. 그것은 물론 구체적인 장소 따위가 아니었다. 차라리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고 계속 걷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인가'의 존재를 내게 열어 보여주고 있었다. 귓전에 조그만 소리만을 남기고 시계에서 사람들이 사라져갔다. 세계는 빛의 색채를 부여받고 막 허물을 벗은 한여름 매미처럼 무구(無垢)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존재가―그렇다, 이제는 더이상 의심할 것도 없이, '나라는 존재가' 점점 과거로 방출되어가는 것이었다. 이 순간의 나의 존재, 아아, 그렇게 말을 떨구자마자 이미 그것은 하나의 위험한 기억이다. 생각을 미처 마무리하기도 전에 기억이 되어 멀어져가는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아니 의식하는 것조차도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다. 나의 존재, 포착조차 할 수 없는 존재. 나는 그저 조각조각 흩어진 한 무리의 기억에 쫓겨 다니는 무엇인가이다. 실 끊어진 구슬들처럼 과거로 산산이 흩어져가는 무엇인가이다. 그것들을…… 그렇다, 그 기억이라 이름 붙여진 내 존재의 단편을 허망하게 모아들여 어떻게든 이어붙여보려 하는 무엇인가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줍지 못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잘못 주워들었는가.
맑은 물은 수없이 떨어지고 점점 그 간격을 좁혀간다. 떨어졌다. 다시, 뚝 떨어졌다.
잎을 떨군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걷는 걸음이 다시 북산대교로 돌아왔다. 거기에서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중앙 가로수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불가사의와 만났다. 가모가와 강변의 고요하게 이어진 벚나무 가로수 속 한줄기 가느다란 나무 아래, 조그맣게, 네모 반듯하게, 계절 잃은 벚꽃잎이 떨어져 쌓여 있었던 것이다.
분명 나는 그렇게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꽃잎이 아니었다. 다가가 보니, 누군지 모를 여인의 복숭앗빛 손수건이었다. 급히 다가든 내 발길이 일으킨 바람이 아주 조금 그 가장자리를 스치자, '언젠가 보았던' 비둘기 시체가 얼핏 깃털을 내보였다. 손수건은 다시 천천히 펄럭이며 그것을 덮었다…….
태양은 아직도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 가만히 흔들리는 손수건을 바라보면서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아래, 지금도 쓰러져 누운…… 쓰러져 누워 있을 터인 비둘기의 시체를 생각하며.
맑은 물은 이제 쉴새없이 내 등뒤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흐음, 삶이란 액체인 채로 조그맣게 팽창하여 정체되어 있는 상태라...
표면장력에 의하여 일상 어딘가 부착되어 존재하는 맑은 물방울...
그 물방울이 터지면서 조그만 소리가 되어 맑은 물로 떨어지는 순간, 말하자면 그것이 죽음인가요.
그러나 죽음은 어느 순간 한 점에서 응고되어 우리 삶 속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존재란 기억의 집적물일진대, 기억 속에 또한 무수한 죽음이 있을법 합니다.
기억이 용해된, 우리 범상한 일상 속에서도 생성과 소멸이 명멸할듯도 싶습니다.
기억의 내용물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실제로 겪었던 경험과 체험들, 상상하였던 것들, 꿈으로 나타났던 것들, 사유하였던 것들, 몽상하였던 것들, 읽었던 것들, 영화로 연극으로 보았던 것들, 신문 방송의 기사로서 느꼈던 것들....
실재(實在)나 부재(不在)를 포괄하여 지금의 존재를 조각하였던 것들.
그런데 시간과 더불어 기억의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몽롱해집니다.
그러나 지금 자아의 현장은 기억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제 살인자의 기억은 지난 날의 기억일 뿐입니다.
그를 처단한다는 것.
그건 자아 속에 용해되어 있는 어떤 기억의 부분에 대한 처단일 뿐 진정한 징벌이 아니지 않는가...
작가의 철학적 사유가 형상화한 문학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니까 엉뚱한 상상이나 합니다그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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