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1)
톨스토이
이철 譯
제1부
1
아무리 많은 사람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인 지구 어느 한구석에 몰려서 일부러 기름진 땅을 못 쓰게 하려고 해도, 또 땅 위에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돌을 깔아 덮어 씌운다 해도, 또한 그 돌 틈새로 비집고 싹트는 풀을 깡그리 뽑아 버린다 해도, 아니면 석탄이나 석유의 매연으로 그 땅 위의 공기를 탁하게 오염시킨다 해도, 그러고도 모자라 온갖 나무를 모조리 잘라내고 거기 깃들인 새나 짐승을 샅샅이 찾아낸다 해도-북적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도 역시 봄은 봄일 수밖에 없다. 싹튼 초목이 정말 송두리째 뽑혀 버리지 않는 곳이면 햇볕이 따사로이 비쳐서, 가로수 옆 잔디밭이 있는 좁은 길은 물론 보도에 깔린 포석 사이사이에 파릇파릇 싹이 돋아 마냥 푸르렀다.
자작나무와 포플러, 야생 벚나무에도 향기롭고 촉촉한 새잎이 트고, 보리수에도 이제 막 순이 튼 새잎을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까치와 참새, 비둘기도 정녕 즐거운 듯 봄맞이 준비로 벌써부터 둥지를 틀기 시작하고, 봄볕을 받아 따스한 벽에는 파리까지 윙윙거렸다.
이처럼 산천 초목도, 새와 짐승, 곤충까지도, 그리고 천진한 아이들마저도 저마다 봄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어른들-여전히 자기 자신을, 또는 서로 남을 속이거나 괴롭히기만 했다. 사람들에게 신성하고도 중요한 것은 화사한 봄날 아침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를 위해 베푸신 조물주의 아름다운 은혜-평화와 친목과 사랑으로 마음을 바치는 미덕-를 거역하는 일투성이였다. 오직 그들에게는 서로 상대를 지배하기 위해 어떤 생각을 궁리해 내느냐 하는 것이 신성하고 중요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현청 소재지의 교도소 사무실 안에서도 신성하고 중요한 일로 치부되는 것은 모든 생명, 동물이나 인간에게 새봄의 감동과 환희에 있는 것이 아니라, 4월 28일 오전 9시까지 현재 예심중인 미결수 3명-2명의 여죄수와 1명의 남자 죄수를 법정에 출정시키라는 내용의 날인된 통고서가 전날 밤에 접수됐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주범으로 몰린 여죄수 1명은 따로 특별 호송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 명령에 따라 4월 28일 오전 8시, 악취가 물씬 풍기는 어두컴컴한 여죄수 감방 복도로 간수장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희끗희끗한 곱슬머리에다 수척하고 소매에 금빛몰을 두른 재킷을 입고, 가장자리에 푸른 파이핑 장식이 달린 허리띠를 맨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여간수였다.
"마슬로바에게 용무가 있으십니까?" 복도 쪽으로 난 감방문 중의 하나로 당직 간수와 함께 걸어가면서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간수장은 덜거덕거리면서 자물쇠를 풀고 감방문을 열었다. 복도보다 더욱 심한 악취가 풍겨나왔다.
그는 곧바로 호명했다.
"마슬로바 출정!" 그러고는 다시 문을 닫고 그녀가 안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비록 교도소이기는 하나 바깥 뜰에는 시내로부터 바람에 실려온 상쾌하고 싱그러운 들판의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복도에는 분뇨와 콜타르와 부패물 따위의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악취가 배어 장티푸스균이 득실거릴 것 같은 공기가 가득 차 있어서 처음 들어오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우울하고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평소 이런 악취에 젖어 있을 여간수조차 밖에서 들어오면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복도에 들어서자 갑자기 피로가 느껴지면서 졸음이 밀려오는 듯했다.
감방 안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것은 여죄수들이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와 발구르는 소리였다.
"마슬로바, 빨리빨리 하란 말이야!" 간수장이 감방문을 향해 소리쳤다.
약 2분쯤 지났을 때, 하얀 웃옷과 스커트 위에 회색 죄수복을 입은, 그다지 키는 크지 않으나, 가슴이 풍만한 젊은 여자가 활달한 걸음걸이로 나와서 휙하고 재빨리 몸을 돌리더니 간수장 곁에 와 섰다. 발에는 삼베로 만든 긴 양말에다 죄수용 장화를 신었으며, 머리는 흰 수건으로 싸고 있었으나, 그 밑으로 멋을 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듯싶은 곱슬곱슬한 새까만 머리칼이 삐죽 나와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오랫동안 햇빛을 못 보고 지낸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움 속의 감자싹을 연상케 하는 유달리 창백한 모습이었다. 조그맣고 도톰한 손도, 죄수복의 높은 깃 사이로 드러난 희고 포동포동한 목덜미도 역시 창백한 빛이었다. 그 얼굴에서 유달리 반짝이는 새까만 두 눈동자는 비록 눈두덩이 약간 부어오른 듯했어도 유난히 생기가 있어 보였고, 한쪽 눈이 약간 사팔뜨기였지만 윤기 없는 창백한 살결과는 두드러지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풍만한 가슴을 앞으로 내밀다시피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복도로 나오자, 그녀는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고 명령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는 듯한 자세로 간수장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 옆에 섰다. 간수장이 감방문을 닫으려고 할 때, 갑자기 안에서 허옇게 센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창백하고 깡마른 주름투성이인 노파의 얼굴이 불쑥 나타나더니 마스로바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간수장이 문짝으로 노파를 밀어넣는 바람에 노파의 머리는 안으로 사라졌다. 감방 안쪽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웃어 댔다. 마슬로바도 따라 웃으며 감방문에 달려 있는 조그마한 쇠창살문 쪽을 돌아보았다. 맞은편에서 있던 노파는 그 창살에 들어붙어 쉰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면 못써. 그게 무엇보다도 중요해. 그저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면 된다고."
"어떻게든지 결판이 났으면 좋겠어요.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없을 테니까요." 마슬로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결판은 한쪽이지, 두 가지일 리가 있나?" 간수장은 자기의 재치있는 말을 자랑하듯 관리답게 내뱉었다. "자 따라와, 어서!"
쇠창살문으로 내다보고 있던 노파의 눈은 사라지고, 마슬로바는 감방 복도 한가운데로 나와 총총걸음으로 간수장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돌층계를 내려와 여자 감방보다 더욱 냄새가 고약하고 소란스런 남자 감방 옆을 지났는데, 모든 쇠창살문에서 많은 죄수들의 눈이 두 사람을 뚫어지게 좇고 있었다. 그들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앉아 있던 서기는 담배 연기가 밴 서류를 한 병사에게 건네주고, 여죄수를 가리키며 "데리고 가!"하고 말했다.
병사는 곰보에다 벌건 얼굴을 한 니주니노브고로드 출신의 농부였는데 그는 그 서류를 두툼한 외투 소매에다 쑤셔넣고 여죄수를 흘끗 훔쳐보면서 광대뼈가 튀어나온 핀란드 태생의 동료에게 넌지시 눈짓을 해 보였다. 두 사람의 병사는 여죄수의 양 옆에 서서 층계를 내려가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정문은 조그마한 샛문만 열려 있었다. 샛문의 문턱을 넘어서 밖으로 나온 두 병사는 여죄수와 함께 시내의 포장된 도로 한복판을 걸어갔다.
마부, 장사치, 요리사, 노동자, 관리들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중에서 고개를 흔들며, '행실이 나쁘면 저런 꼴이 된다고. 우리와는 딴판이지.'하고 생각하는 삶도 있었다. 아이들은 여죄수를 보고 무서워했으나, 그래도 두 사람의 병사가 뒤따르고 있었으므로 나쁜 짓을 못하려니 생각하고 가까스로 마음을 놓았다. 숯을 판 뒤, 선술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시골서 온 농부는 여죄수 곁으로 다가와 성호를 긋고는 1코페이카짜리 동전 하나를 건네주었다. 여죄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 쪽으로 쏠리고 있음을 느끼자, 그녀는 자기가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는 사실이 유쾌하기도 했다. 감옥 안과 비교해 볼 때 싱그런 봄날의 대기는 그녀의 마음을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해주는 것이었지만, 오랫동안 걸어보지 않은데다가, 딱딱한 죄수화를 신고 포도 위를 걷는다는 것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발등만 내려다보며 될 수 있는 대로 가볍게 발을 옮겨놓도록 조심했다.
어느 밀가루 가게 옆을 지날 때, 아무에게도 해를 입힌 일이 없었던 비둘기 몇 마리가 그 앞에서 아장아장 걸어다니고 있었는데 얼떨결에 하마터면 그 중 한 마리를 밟을 뻔했다. 암청색 비둘기는 푸드덕 날개를 치며 그녀의 귓전을 스치고 날아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빙긋이 웃었으나 곧 자기의 처지를 생각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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