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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걸어오느라고 완전히 지쳐버린 마슬로바가 호송병들과 같이 지방 재판소 건물 가까이 이르렀을 무렵, 때마침 그녀를 유혹하여 타락의 길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자 대모의 조카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네플류도프 공작은 아직도 자기 집에서 보료가 깔린 폭신폭신하고 두툼한 스프링이 아주 좋고 높직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앞가슴에다 주름이 잘 잡힌 깨끗한 흰 리넨 잠옷 깃을 펼친 채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었다. 그는 무심히 허공을 바라보면서 오늘 해야 할 일과 전날에 있었던 일들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부호이고 사회적 명망이 높은 코르차긴 일가의 딸과 결혼하리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일과, 그 집에서 지낸 간밤의 일을 곰곰 생각하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 탄 담배 꽁초를 내던졌다. 그리고는 반짝거리는 은담뱃갑 속에서 또다시 한 개비를 꺼내 몰려다가 언뜻 생각을 돌려 미끈한 두 다리를 침대 밑으로 천천히 내려 슬리퍼를 찾아 신은 다음, 떡 벌어진 어깨에 비단 실내복을 걸치고 잰 걸음으로 성큼성큼 침실 옆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엘릭시르 약 냄새와 오데콜롱과 머릿기름 등의 인공적인 향기가 가득 배어 있는 화장실에서 그는 특제 치분으로 군데군데 금으로 때운 이빨을 깨끗이 닦고, 향로를 탄 물로 양치질을 하고는 몸을 구석구석 말끔히 씻은 다음, 몇 가지 다른 타월로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향기 좋은 비누로 손을 씻고, 길게 기른 손톱을 여러 가지 브러시로 정성스럽게 닦고 커다란 대리석 세면대에서 얼굴과 굵은 목덜미를 씻고 나서, 이번에는 샤워기가 마련되어 있는 침실 옆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기름지고 건장한 흰 몸뚱이를 찬물로 씻고, 커다란 목욕 타월로 몸의 물기를 없애고, 곱게 다리미질한 속옷을 입고 거울처럼 반짝반짝 광을 낸 구두를 신은 다음, 화장대에 앉아 두 개의 브러시를 양손에 나누어 쥐고 짧고 곱슬곱슬한 검은 턱수염과 관자놀이에서 좀 성겨지기 시작한 곱슬머리를 빗어 올렸다.
그가 평상시에 사용하고 있는 장신구는 셔츠, 양복, 신발, 넥타이핀, 커프스 단추 할 것 없이 모두가 최고급품으로써 점잖고 수수하고 견실한 값진 물건들뿐이었다.
한 다스나 되는 훌륭한 넥타이와 핀 가운데서 손에 잡히는 대로 골라 맸다. 하나같이 지금은 대수롭지 않으나, 전에는 새롭고 진귀해서 마음에 들었던 것들이었다. 네플류도프는 미리 깨끗이 손질하여 의자 위에 걸쳐 둔 옷을 입고 산뜻하게 차린 다음, 어제 세 하인들이 나무쪽으로 모자이크한 마루를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은 길쭉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에는 커다란 참나무 찬장과 역시 같은 커다란 식탁이 있고, 흡사 사자의 발처럼 조각된, 널찍이 벌려진 식탁 다리들이 육중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모노그램(이름의 머리글자를 합해서 만든 글자)이 유난히 크게 새겨져 있고 빳빳이 풀을 먹인 식탁보가 깔려 있는 식탁 위에는 향긋한 커피가 들어 있는 은제 커피 잔과, 역시 은으로 만든 설탕 그릇, 끓인 크림이 든 주전자와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롤빵과, 살짝 구운 빵과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는 빵 광주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릇들 옆에는 갓 배달된 편지와 조간 신문과 <르뷔 데 되 몽드(두 세계 평론)>지의 최근호가 놓여 있었다. 네플류도프가 편지를 집으려고 했을 때, 식당에서 복도로 통하는 문으로부터 레이스가 달린 모자가 앞가르마를 감추다시피 눌러 쓴, 상복 차림을 한 몸집이 뚱뚱한 중년 부인이 미끄러지듯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바로 이 집에서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네플류도프의 어머니의 하녀였던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라는 여자였는데, 지금도 가정부로서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네플류도프의 어머니를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외국에서 10년간이나 지냈기 때문에, 그 모습이나 태도에 귀부인 같은 데가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네플류도프와 함께 살았고, 그가 소년이었을 때 미첸카(드미트리의 애칭)라고 불리던 무렵부터 알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잘 잤소,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 뭐 새로운 뉴스라도 있소?" 네플류도프는 농담조로 물었다.
"공작 마님한테서 아가씨한테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댁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하녀가 가지고 왔는데 아까부터 제 방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편지를 내주면서 의미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았어. 곧 읽어 보지."
편지를 받아 쥐며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는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의 미소의 뜻을 알아채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미소는 이 편지가 지금 네플류도프와 혼사 말이 있는 공작 영양 코프차기나로부터 온 게 틀림없다는 눈치였다. 미소로 나타난 그녀의 상상이 네플류도프의 기분을 자못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럼 좀 기다리라고 이르겠습니다." 그리곤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는 식탁 위에 잘못 놓여져 있는 빵가루 터는 솔(식탁용)을 제자리에 옮겨 놓고는 살며시 식당에서 빠져나갔다.
네플류도프는 아그라페나 페트로브나가 갖다 준 향수 냄새가 풍기는 봉함 편지를 뜯어 읽기 시작했다.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저의 책임을 다하려고 말씀드립니다.
가장 자리가 고르지 않은 두꺼운 회색 편지지에 또렷하고 여유 있는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오늘 4월28일, 당신은 배심원으로 재판소에 나가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제 당신이 여느 때처럼 경솔하게 약속하신, 저희들이나 콜로소프 일가와의 미술 전람회 구경은 못 가시게 되었습니다. 만일 제시간에 출정하지 않으시면 말을 사는 데도 아까워하시는 300루블이란 돈을 벌금으로 지방 재판소에 바치셔야 한다면서요. 저는 어젯밤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이 일을 생각해 냈어요. 그럼 아무쪼록 잊지 마시기를.
M.코르차기나
편지 뒷면에는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은 추신이 있었다.
오늘 만찬회에서 밤늦게까지라도 당신의 자리는 따로 잡아 두시겠다고 하신 어머니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아무리 늦더라도 꼭 와 주세요.
네플류도프는 못마땅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편지는 벌써 두 달에 걸쳐서 공작 영양 코르차기나가 그에게 씌우고 있는 교묘한 올가미 수법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요컨대 그녀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점점 더 강하게 자기에게 옭아매려 하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그리 젊지 않은 사람들이나 서로 열렬히 사랑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결혼에 대해서 망설이는 법이지만, 네플류도프에게는 그러한 이유 외에도 설사 결혼할 결심을 했다손 치더라도 당장에 구혼을 할 수 없었던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10년 전에 순진한 카추샤를 유혹하고는 내버린 데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자기의 결혼에 방해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바로 그 이유라는 것은 그 무렵 그가 어느 유부녀를 우연히 알게 되어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자기는 이미 그 부인과의 관계가 끝난 줄로 알고 있었으나 그 부인은 아직 그렇게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네플류도프는 여자에 대해서 몹시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이런 성격이 그 유부녀로 하여금 그를 정복하려는 욕망이 생기게 하였다. 그 부인은 네플류도프가 선거 때마다 찾아가는 그 군의 귀족 회장의 부인이었다. 이 부인이 그를 유혹해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그녀 쪽에서 나날이 깊은 욕정으로 네플류도프를 빠져들게 했으나 이쪽에서는 점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처음에 이 유혹을 물리칠 수 없어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는 부인에게 죄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그 부인의 승낙 없이는 도저히 관계를 끊을 수가 없었다. 바로 이것이 네플류도프가 공작 영양 코르차기나에게 구혼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손 치더라도 구혼할 주게가 못 된다고 생각하게 된 원인이었다.
때마침 공교롭게도 식탁 위에는 그 부인의 남편한테서 온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 필적과 소인을 보자 네플류도프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위험이 닥쳐올 때마다 느끼곤 하던 힘의 솟구침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흥분은 공연한 것임을 알았다. 왜냐하면 네플류도프의 중요한 영지가 있는 그 군의 귀족 회장인 그 부인의 남편이 5월 말경에 열릴 임시 지방회의에 꼭 출석하여 이 회의에서 학교와 철도 지선 부설 문제에 대하여 반대파의 맹렬한 저항이 있을 것이 확실하므로 적극적인 협조를 바란다는 것이 서신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귀족 회장은 도량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약간의 동지를 규합하여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와 함께 대두한 반동 세력과의 투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가정 생활의 불행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언젠가는 치러야 할 모든 괴로운 순간들을 상기했다. 언젠가 남편이 눈치채게 되었을 때의 결투를 각오하고, 그럴 때 자기는 허공에다 대고 총을 발사하겠다고 생각한 일과, 부인이 절망한 나머지 정원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지려고 뛰쳐나간 것을 자기가 뒤쫓아가서 말리는 무서운 장면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금은 갈 수가 없다, 그녀로부터 회답을 받기 전까지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네플류도프는 번민했다. 그는 1주일 전에 그녀에게 자기 죄에 대한 대가로서 무엇이든 감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며 '부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영원히 끊어 버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정적인 편지를 써서 보냈었다. 그러고는 그 회답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으나 여지껏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회답이 오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좋은 징조이기도 했다. 만일 그 부인이 결별할 생각이 없다면 벌써 회답을 보냈거나 전처럼 몸소 달려왔거나 했을 것이다. 네플류도프는 요즘 그 지방의 어느 장교가 열심히 그 부인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런 소문은 질투심을 일으켜 그를 가슴 아프게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를 억누르고 있던 책략으로부터 가까스로 해방된다는 희망 때문에 기쁘기도 했다.
또 한 장의 편지는 영지 관리인한테서 온 것이었다. 토지 상속권을 확정하기 위해서 네플류도프가 직접 영지의 마을로 와주어야 하겠다는 것과, 그 밖에 토지는 공작 부인의 생존시와 같이 관리할 것인지, 또는 돌아가신 공작 부인에게 관리인이 이미 권했고 또 현재 젊은 공작께도 권하고 있는 방법, 즉 농기구를 확장해서 여태까지 농민에게 빌려 주었던 모든 토지를 이쪽에서 직접 경작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관리인의 편지에 의하면 이런 경영 방법이 훨씬 유리하다고 했다. 그리고 예정대로 초하룻날에 보내야 할 3천 루블의 송금이 약간 지체될 것에 대하여 사과했고, 돈은 다음 번에 틀림없이 보내 드릴 예정이며,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농민들이 점점 약아져서 당국의 힘을 빌려 강제 수금이라도 하지 않는 한 돈을 거두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이 편지는 네플류도프를 한편으로는 즐겁게도 했고 또 한편 불쾌하게도 했다. 막대한 재산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즐겁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젊었을 때 스펜서의 열렬한 숭배자였고, 특히 자기 자신이 대지주였기 때문에, 정의는 개인의 토지 사유를 허용치 않는다는 스펜서의 이론<사회정학>에 감동된 그로서는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년 시절의 솔직성과 결단성 때문에 그는 그 때 토지가 사유 재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 졸업 논문에서도 이에 관해 논술했고, 실제로 그 당시 자기의 이런 신념에 배반하면서까지 토지를 소유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토지의 일부분(그 토지는 어머니의 것이 아니고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것으로 그 자신에 소속되는 토지였다)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속받은 유산으로 대지주가 된 지금 일찍이 10년 전에 아버지의 유산 2백 정보에 대해서 단행한 것처럼 자기의 사유 재산을 포기해 버리든가, 아니면 과거의 자기 사상이 모두 그릇된 것이라고 인정하고 침묵을 지키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토지 이외에 그에겐 아무런 생활 수단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를 택할 순 없었다. 관청에 들어가기는 싫었고, 더군다나 사치스런 생활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어서 그것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젊었을 때 갖고 있던 굳은 신념도, 과단성 있는 결단력도, 세인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야심도 희망도 이제는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를 택하여 그 스펜서의 <사회정의학>에 대하여 감명을 받았고, 훨씬 뒤의 일이긴 하지만 헨리 조지의 저서중에서도 그 확실한 논거를 발견한 그로서는 토지 사유의 부조리에 관한 명백한 사실을 부정한다는 것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관리인의 편지는 그에게 불쾌감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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