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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부활 (12) -톨스토이-

카지모도 2021. 7. 15.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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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렇다. 그것은 틀림없는 카추샤였다.

네플류도프와 카추샤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네플류도프가 처음 카추샤를 본 것은 그가 대학 3학년 때, 토지 사유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기 위하여 고모집에서 한 해 여름을 보낼 때였다. 그는 여름 방학이면 언제나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어머니의 광대한 영지에서 보내곤 했었다. 그러나 그 해에는 누이가 결혼을 했고, 어머니도 외국의 온천지로 여행을 떠나 버렸다. 그리고 네플류도프는 꼭 완성해야 할 논문이 있었기 때문에 여름을 고모네 집에서 보내기로 작정했다.

고모네 집은 한적한 시골에 있었으므로 매우 조용했고, 그의 마음을 들뜨게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고모들은 조카이면서 자기들의 상속작인 그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으며 그 역시 고모들을 사랑하고 그 고풍스럽고 소박한 생활을 좋아했었다.

네플류도프는 고모 집에서 지낸 그 해 여름에 환희에 찬 기막힌 경험을 했다. 그것은 청년이 처음으로 남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인생의 모든 아름다움과 그 의미를 인식하고, 인생에 있어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의 가치를 깊이 깨닫고, 자기와 온 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아내고, 자기가 공상하고 있는 완성의 경지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뿐만 아니라 완전한 확신까지도 믿으면서, 그 일에 몰두할 때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정신적 감격이었다. 그 해, 아직 대학에 있을 때, 그는 스펜서의 <<사회정학>>을 읽었다. 토지의 사유에 관한 스펜서의 학설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특히 그 자신이 대지주였다는 사실이 그 감명을 더 깊게 해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다지 부유하진 못했으나, 어머니는 지참금으로 약 만 정보의 토지를 가지고 왔다. 그는 그 때 비로소 토지 사유 제도의 가혹함과 부당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 그는 도덕적 요구를 위한 희생이라면 최고의 정신적 기쁨으로 느끼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으므로, 토지에 대한 사유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상속받은 토지를 곧장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말았다. 그는 바로 이것을 주제로 하여 논문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해 여름, 고모네 집에서 보낸 그의 생활은 이런 궤도를 밟았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났고, 때로는 새벽 3시경에 일어나서 해가 뜨기 전 자욱한 안개가 아직도 걷히지 않은 산기슭의 개울로 목욕을 하러 갔다가 풀이나 꽃에 앉아서 논문을 쓰거나 그에 따른 참고 문헌을 살피기도 했지만, 대개는 독서와 집필 대신 집을 빠져나와 들이나 숲속을 거닐 때가 많았다.

점심 전에는 뜰 한구석에서 낮잠을 자고, 식탁에 앉으면 그의 능란한 이야기 솜씨로 고모들을 웃기고 즐겁게 해주었다. 그리고 승마를 하거나 보토를 탔으며, 저녁이 되면 또 독서를 하거나 고모들을 상대로 트럼프 점을 치기도 했다. 밤에, 특히 닭 밝은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것은 가슴이 삶의 기쁨으로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잠자는 대신 공상과 사색에 잠기면서 날이 샐 때까지 뜰을 거닐곤 했었다.

이렇듯 그는, 고모네 집에서의 처음 한 달을 행복하고 평온하게 지내는 동안, 반은 하녀이고 반은 양녀인 검은 눈동자의 동작이 민첩한 소녀 카추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네플류도프는 19세가 되도록 완전히 순결한 청년이었다. 그가 꿈속에서 그리는 여성상은 아내로서의 여성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아내가 될 수 없는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인간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해 여름의 부활절 날 아침 이웃 마을의 여자 지주가 아이들을 데리고 고모네 집을 찾아왔다. 두 딸과 중학생 한 명과 그들 집에서 기식하고 있는 농민 출신의 젊은 화가 한 사람이었다.

모두들 차를 마신 후 이미 벌초가 끝난 저택 아푸 풀밭에서 술래잡기를 하였다. 카츄샤도 끼게 했다. 몇 번인가 교대하고 난 다음, 네플류도프는 카츄샤와 짝이 되어 도망치게 되었다. 네플류도프는 카츄샤를 보는 것이 언제나 즐겁기는 했으나, 자기와 그녀 사이에 뭔가 특별한 관계가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 짝은 넘어지기 전에는 도저히 잡을 수 없겠는데."하고 술래가 된 쾌활한 청년 화가가 말했다. 그는 짧고 안짱다리이긴 했으나, 원래 튼튼한 농부였으므로 매우 빨리 뛸 수가 있었는데도 그랬다.

"당신, ...정말로 우릴 잡지 못할걸!"

"하나, 둘, 셋!"

모두들 세 번 손뼉을 쳤다. 카추샤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면서 네플류도프와 재빨리 자리를 바꿨다. 그리고 단단하고 조그만 손으로 큼직한 그의 손을 잡고 뒤도 안 보고 왼쪽으로 달려갔다. 풀을 먹인 그녀의 스커트가 버석 버석 소리를 냈다.

네플류도프는 빨리 달렸다. 그는 화가에게 잡히고 싶지 않아 기를 쓰고 달렸다. 뒤를 돌아다보니 카추샤를 쫓아오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탄력이 있는 미끈한 다리를 날쌔게 움직이면서 술래의 손에서 빠져나와 왼쪽으로 달려갔다. 앞에는 라일락이 우거진 화단이 있었는데 그 곳으로는 아직 아무도 가지 않았다. 그러자 카추샤는 네플류도프 쪽을 돌아보고, 화단 뒤에서 만나자는 듯이 머리를 까딱해 보였다. 그도 카츄샤의 뜻을 알아차리고 화단 뒤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화단 뒤에는 뜻밖에도 쐐기풀이 우거진 도랑이 있었다. 그 바람에 그는 도랑에 넘어져 쐐기풀에 손이 찔렸고, 벌써 내리기 시작한 밤이슬에 흠뻑 젖었다. 그러나 그는 벌떡 일어나서 마구 웃어대면서 곧 풀이 없는 곳으로 뛰쳐 나왔다.

카추샤는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윤기 있는 까만 두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 와락 손을 마주잡았다.

"어머나, 손을 찔리셨군요."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 흩어진 머리채를 매만지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미소 띤 얼굴로 네플류도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쪽에 도랑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 그 역시 미소를 띠면서 여자의 손을 꼭 쥔 채 말했다.

카추샤는 살며시 그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 쪽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카추샤도 몸을 피하려고 하지 않아서 네플류도프는 더 힘있게 그녀의 손을 잡아 쥐면서 그 입술에 키스했다.

"어머나!"하고 그녀는 재빨리 손을 빼고는 그에게서 도망쳤다.

라일락 숲으로 달려가자, 그녀는 벌써 하얀 라일락 꽃이 지기 시작한 두 가지를 꺾어서 그것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자기 얼굴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그를 돌아본 후, 힘차게 두 팔을 흔들면서 다른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되돌아갔다.

이 때부터 네플류도프와 카추샤의 관계는 일변해서, 서로 마음이 끌리는 순진한 청년과 순결한 소녀 사이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카추샤가 방에 들어오거나 그녀의 하얀 에이프런이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네플류도프는 모든 것이 햇빛이 내리비추는 것처럼 황홀해 보였고, 모든 일이 전보다도 한층 즐겁고 재미있게 느껴지고 인생 자체가 보다 의미있고 행복하게 여겨졌다. 그녀도 역시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네플류도프에게 이런 기분을 일으키게 한 것은, 카추샤가 눈앞에 있거나 가까이에 있을 때만이 아니었다. 그저 카추샤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식만으로도, 또한 그녀 역시 네플류도프가 존재하고있다고 생각만 해도, 두 사람은 행복했다. 네플류도프는 어머니로부터 불쾌한 편지를 받거나, 논문이 잘 되지 않거나, 또한 청년에게 흔히 있는 이유 없는 우수를 느끼거나 할 때에도 그저 카추샤가 가까이에 있고 언제든지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러한 모든 근심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카추샤에게는 집안 일이 무척 많았지만 그녀는 모든 일을 척척 해치우고 나서 틈이 나는대로 책을 읽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가 다 읽고 나면 곧 그녀에게 도스토예프스키나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빌려 주었다. 그 중에서도 그녀는 투르게네프의 <<정적>>을 좋아했다. 그들 사이의 대화는 복도나 발코니나 뜰에서 우연히 부딪쳤을 때를 이용하여 잠시 동안 조급하게 주고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때로는 카추샤와 함께 자는 고모의 늙은 하녀 마트료나 파블로브나의 방에서 얘기할 때도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가끔 그 방으로 가서 사탕이나 차를 대접받았다. 그런데 마트료나 파블로브나 앞에서 주고받는 대화는 그지없이 즐거웠지만, 단둘이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 할 때는 어쩐지 어색했다. 이윽고 눈과 눈이 서로 마주칠 때마다 둘은 이심전심이 되기 시작했다. 입이 이상하게 떼어지지 않아 어쩐지 까닭을 알 수 없는 쑥스러움 때문에 두 사람은 어색하게 헤어지곤 했다.

네플류도프가 첫 번째 고모네 방문을 마칠 때까지 그와 카추샤 사이의 이런 관계는 줄곧 계속되었다. 고모들은 이런 관계를 눈치채고 펄쩍 뛰었다. 그리고 외국에 가 있는 네플류도프의 어머니 옐레나 이바노브나 공작 부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마리야 이바노브나 고모는 드미트리가 카추샤와 깊은 관계를 맺지나 않았을까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고모의 걱정은 완전한 기우였다. 네플류도프는 스스로 의식은 못했지만 순결한 사랑을 카추샤에게 쏟고 있었다.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나 그녀에게 있어서나 타락을 막아 주는 중요한 방패였다. 그는 육체적으로 그녀를 소유하려는 욕망같은 건 추호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란 생각만 해도 두려워질 정도였다. 그것보다도 로맨틱한 작은 고모 소피야 이바노브나가 걱정하고 있는 일-과감하고 외곬으로만 생각하는 드미트리가 일단 젊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녀의 가문이나 사회적 환경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결혼할 생각을 하면 큰일이다 하는 걱정이 훨씬 더 심각했다.

만일 네플류도프가 그 때 카추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었더라면, 더욱이 남이 그를 보고, 너는 그 처녀와 평생의 운명을 같이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을 했더라면 그는 고지식하고 외고집인 성격대로 자기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상 그녀가 어떤 여자이건 결혼하지 못할 이유는 절대로 없다고 단정해 버릴 수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모들은 자기들의 걱정을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으므로 그는 카추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대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는 카추샤에 대한 자기의 감정이 그 당시 모든 존재를 충만시켜 주고 있던 삶에 대한 기쁨의 한 표현일 뿐, 그 감정을 쾌활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와 함께 나누고 느낀 데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떠날 때가 되어 카추샤가 고모들과 함께 현관 앞 층계에 서서 눈물이 가득한, 약간 사팔뜨기인 까만 눈동자로 자기를 전송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다시는 얻을 수 없는 아름답고 귀중한 무엇인가를 버리고 가는 느낌에 사로잡혀 몹시 우울했다.

"안녕히 가세요,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그녀는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면서 언제나처럼 상냥한 목소리로 기분좋게 말했지만 현관 안으로 뛰어들어가 실컷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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