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마슬로바는 이쪽으로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면서 낯익은 침착한 표정으로 두 여죄수 사이를 뚫고 철망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네플류도프를 알아보지 못하고 의아한 듯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녀는 그의 옷차림으로 보아 그가 돈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생긋 웃어 보였다.
"저를 만나러 오셨나요?"하고 그녀는 미소 띤 사팔눈의 얼굴을 철망 쪽으로 가까이 대면서 말했다.
"만나소 싶었소." 네플류도프는 '당신'이라고 해야 할지, '너'라고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지만 곧 '당신'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을 만나고 싶었소....... 나는......."
"우물쭈물하지 마!"그의 곁에서 남루한 옷을 입은 남자가 소리쳤다.
"훔쳤어, 안 훔쳤어?"
"이젠 다 죽게 됐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하고 저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마슬로바는 네플류도프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그가 말을 건넸을 때 그의 표정으로 문득 옛날의 그를 생각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졌고, 이마에는 고뇌의 빛이 깊이 어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들리지 않는군요." 카추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점점 더 이마에 깊은 주름을 지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온 것은......."
'그렇다, 지금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참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하고 네플류도프는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목이 메어서 철망을 붙잡은 채 복받치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느라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죄가 없다면 여기 왜 들어왔어?" 누가 한쪽에서 소리쳤다.
"당신도 하느님을 믿으세요. 나는 절대로 모른다니까요."하고 또 다른 쪽에서 여죄수가 소리쳤다.
네플류도프가 흥분한 것을 보자 마슬로바는 그를 알아보았다.
"어디서 뵌 것 같긴 한데 누구신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그를 보지도 않으면서 외쳤다. 갑자기 붉어진 그녀의 얼굴은 더욱 침울해졌다.
"나는 당신한테 용서를 빌러 왔소." 그는 마지 무슨 과목을 암기라도 하듯 큰 소리로 거침없이 말했다.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나자, 불현듯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부끄러운 게 당연하므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다기 큰 소리로 말했다.
"용서해 주오. 정말 내가 잘못했소."하고 스는 다시 외쳤다.
카추샤는 꼼짝도 않고 서서 그에게서 사팔눈을 떼지 않았다.
네플류도프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솟구쳐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철망 곁을 떠났다.
아까 네플류도프를 여죄수 면회실로 데려다 준 부소장이 그에게 흥미를 느낀 듯이 면회실로 왔다. 그리고 네플류도프가 철망 곁에 떨어져 서 있는 것을 보고 왜 면회하려는 여자와 말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네플류도프는 코를 풀고 몸을 부르르 떨고 나서 애써 침착한 태도를 가지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철망 너머로는 도무지 얘기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군요."
부소장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 여자를 잠시 이리로 데려오겠습니다."
"마리야 카를로브나!"하고 그는 여간수에게 말했다. "마슬로바를 밖으로 데리고 가요."
잠시 후 옆문에서 마슬로바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가벼운 걸을걸이로 네플류도프 바로 옆에까지 걸어오더니, 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저께와 마찬가지로 곱실곱실한 까만 머리가 똘똘 말려 있었다. 병색을 느끼게 하는 얼굴은 새하얗고 부어 있었으나 역시 귀엽고 침착해 보였다. 다만 윤기 있는 까만 사팔눈만 부석부석한 눈까풀속에서 유난히도도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서 말씀하십시오."부소장은 이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마슬로바는 뭔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부소장을 흘깃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네플류도프를 따라 벤치로 가서 그와 나란히 앉아 스커트를 만지작거렸다.
"나를 쉽게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문을 열기 시작했으나 또다시 눈물이 솟아올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비록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소. 제발 말 좀 해봐요."
"어떻게 저를 찾으셨어요?" 그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는 그를 보는지 안 보는지도 모를 사팔눈으로 이렇게 물었다.
'아, 하느님! 저를 도와 주소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십시오.'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추하게 변해 버린 카추샤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저께 당신이 재판을 받을 때 나는 배심원으로 법정에 나갔었소."하고 그는 말했다. "그 때 나를 알아보지 못했소?"
"네,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럴 겨를도 없었고 또 보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아기가 있었다는데?" 네플류도프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금방 죽어 버렸어요." 카추샤는 그에게서 시전을 돌리며 화난 듯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니, 어째서 죽었소?"
"저까지도 병으로 하마터면 죽을 뻔한 걸요." 그년는 눈을 내리깔고 말을 했다.
"그런데 왜 고모님들은 당신을 내보냈지요?"
"누가 애 밴 하녀 따위를 집에 두겠어요. 탄로난 즉시 쫓겨났지요. 지금 와서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죄다 잊어버렸어요. 옛날에 다 끝난 일이예요."
"아냐, 아직 끝나지 않았소. 나는 당신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소. 이제라도 내 죄를 속죄하겠소."
"속죄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건 모두 다 지나 버린 일이니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니 뜻밖에도 갑자기 눈을 들어 유혹하듯, 호소하듯, 불쾌한 듯 야릇하게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슬로바는 이런 곳에서 그를 만나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므로, 처음 그를 대하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여태껏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들을 부득이 회상해야만 했다. 카추샤는 먼저 옛날 서로 사랑을 주고받던 시절에 아름다운 청년이 보여 준 새롭고 오묘한 감정과 사상의 세계를 막연히 회상해야만 했다. 그 다음 그 청년의 이해할 수 없는 무정함과 그 꿈같은 행복에 뒤이어 몰아쳐 온 너무나 많았던 굴욕과 고민을 상기했다. 그러자 가슴이 아팠다.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전처럼 이런 아픈 추억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타락한 생활의 독특한 안개 속에 애써 덮어 버리려고 애썼다. 그를 처음 볼 때에는 자기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나이를 한때 사랑했던 청년으로 연관시켜 보려고도 해보았으나 그것은 너무나 괴로웠기에 곧 단념해 버렸다. 이제 이 말쑥하게 차린, 턱수염에서까지 달콤한 향수 냄새가 풍기는 이 신사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한때 자기가 사랑했던 청년 네플류도프가 아니라 필요할 때면 언제나 자기와 같은 여자를 이용하는 사나이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이런 사나이는 또한 자기로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유리하게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유혹하는 듯한 미소를 보냈던 것이다. 카추샤는 이 남자를 어떻게 이용해야 좋을까 하는 궁리를 하며 잠시 동안 잠자코 있었다.
"옛일은 다 끝장이 났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젠 벌써 유죄 판결이 내렸으니까요."
이 무서운 말을 핼 때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도 당신의 무고함을 알고 있소. 절대로 확신하고 있소."
"그야 물론이지요. 난 도둑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에요. 죄다 변호사 탓이라고들 하더군요."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상소를 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돈이 많이 든다니......."
"돈을 아끼지 마시고 좋은 변호사를 좀 대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데까진 하겠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다시 아까와 같이 유혹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부탁이 있는데요...... 괜찮으시다면 제게 돈을 좀 주시겠어요? 조금만...... 한 10루블 가량...... 그 이상은 필요 없어요." 갑자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 그러지."
네플류도프는 당황하여 지갑에 손을 댔다.
카추샤는 면회실 안을 왔다갔다 하는 부소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 사람 앞에선 꺼내지 마세요. 저 사람이 저쪽으로 갔을 때 꺼내세요. 그렇잖으면 빼앗겨요."
네플류도프는 지갑을 꺼내서 부소장이 돌아섰을 때 10루블짜리 지폐를 건네 주려고 하자 부소장이 다시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돈을 움켜쥐었다.
'이 여잔 이미 죽은 여자나 다름 없구나.' 과거에는 사랑스러웠지만, 지금은 더럽고 부석한 그 얼굴, 까만 사팔눈을 흉측맞게 번득거리며 부소장과 지폐를 움켜쥔 그의 손을 번갈아 보고 있는 카추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그는 망설였다.
간밤에 그에게 속삭이던 그 유혹의 소리가 또다시 네플류도프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것은 평상시처럼,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그를 이끌어 가려는 마음의 소리였다.
'너는 지금 이 여자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하고 그 소리는 말했다. '다만 자기 목에 돌을 매다는 격이다. 너를 물 속에 가라앉게 하고 네가 세상에서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그러니까 지금 갖고 있는 돈을 몽땅 이 여자에게 주어 버리고 영원히 인연을 끓어 버리는 게 상책일 것이다.'하고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동시에 그의 내적 생활은 지금 이 순간 흔들리는 저울대 위에 놓여 있듯이 조금만 힘을 가해도 어느 한쪽으로든 기울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에 느꼈던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새롭게 노력을 해보았다. 그러자 그 신은 곧 그의 마음에 호응했다. 그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카추샤! 난 용서를 빌러 온 거야. 그런데 넌 한 마디도 용서한다든지 또는 언제 용서하겠다든지 하는 대답을 안 해 주는구나."하고 그는 갑자기 호칭을 바꾸어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은 들은 체도 않고 그의 손과 부소장만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소장이 저쪽으로 돌아서자, 그녀는 재빨리 네플류도프쪽으로 손을 내밀어 지폐를 빼앗아 허리띠 밑에다 감추었다.
"참 이상한 말씀을 다 하시네요."하고 방긋 웃으면서(그것이 그에게는 모욕적으로 생각되었다.) 그녀는 말했다.
네플류도프는 그녀의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그를 미워하는 감정이 있어서, 그것이 현재의 그녀를 우지케 하려 하고 동시에 자기 마음속을 틈입해 들어가려는 그의 노력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야릇하게도 그 사실은 그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엇인가 더 한층 특별하고 새로운 힘으로 그녀에게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그녀를 정신적으로 눈뜨게 하지 않으면 한 된다고 느꼈다. 그것은 한없이 어려운 일일 것이지만 그 어렵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자기에게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지금 그는 그녀에 대하여 여태껏 그녀에게는 물론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은 이기적인 면이란곤 전혀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그녀에게서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현재와 같은 상태를 떨쳐 버리고, 반성하고 예전의 그녀로 되돌아가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카추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너를 잘 알고 있어. 파노보 마을에 있던 옛날의 너를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단 말이야."
"과거를 되살려 무엇해요?"
그녀는 냉담하게 내뱉었다.
"난 옛날에 지은 내 죄를 속죄하려고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카추샤."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할 생각도 있다고 말하려 했느나 그녀의 시선과 부딪치자 그 속에서 무엇인지 무섭고 난폭하고 반항적인 것을 읽었기 때문에 그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면회자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부소장이 네플류도프 곁으로 다가와서 면회 시간이 끝났다고 일러 주었다. 마슬로바는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는 듯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안녕! 아직 더 할 말이 많지만 보다시피 오늘은 안 되겠어." 네플류도프는 이렇게 말하고 손을 내밀었다. "다시 오겠어."
"이젠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실 것 같은데요."
그녀는 손을 내밀었지만 꼭 쥐지는 않았다.
"아니야, 난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에서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어. 그리고 그 땐 꼭 해야 할 매우 중대한 이야기를 하겠어." 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러시다면 또 오세요." 그녀는 사나이들의 마음에 들고 싶을 때 언제나 짓곤 하던 그런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는 내게 있어서 누이동생 이상으로 가까운 사람이야."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재미있는 말씀이네요!"하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철망 저쪽으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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