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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네플류도프는 9시에 잠을 깼다. 주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젊은 사무원은 그가 일어난 기척을 알아채고, 이제껏 그렇게 해본 적이 없을만큼 번쩍번쩍하게 닦아 놓은 구두와 차고 깨끗한 샘물을 떠가지고 들어와서 농부들이 벌써 모이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네플류도프는 정신을 차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지를 농부들에게 분배하여 자기 재산을 없애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던 어제의 마음은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그는 간밤에 후회하던 일을 되새겨 보니 퍽 놀라웠다. 지금 눈앞에 닥쳐오고 있는 일에 기쁨을 느끼고, 무심결에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창 밖으로는 민들레가 무성한 테스트 코트가 보였는데, 그 곳에는 관리인의 지시대로 농부들이 모여 있었다.
어젯밤 개구리가 요란하게 울어 대더니 날씨는 잔뜩 흐려 있었다. 아침부터 바람 한 점 없고 가랑비가 소리 없이 내려 나뭇가지와 잎사귀와 풀잎에 빗방울이 대롱대롱 맺혀 있었다. 창으로부터 신록의 향기와 더불어 비를 재촉하는 듯한 향긋한 흙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테니스 코트에 모여드는 농부들을 여러 번 창 밖으로 내다보았다. 농부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어서는 둥글게 서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면서 서로 모자를 벗어 인사를 주고받았다. 큰 단추가 달리고 짧고 푸른 깃을 세운 신사복을 입은 육중하고 체격이 좋은 관리인이 네플류도프에게 와서, 농부들이 모두 모이기는 했으나 조금 더 기다리게 해도 상관없으니 미리 마련해 놓은 커피를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아니, 그리로 먼저 가서 곧 그들을 만납시다."하고 네플류도프는 말했다. 그러나 막상 농부들 앞에 나가서 이야기할 생각을 하니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그는 농부들이 꿈에도 그려보지 못한 그들의 희망을 실현시켜 주려고 했다. 싼값으로 그들에게 땅을 빌려 주려고 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왠지 자꾸 부끄러웠다. 네플류도프는 농부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갔을 때, 모자를 벗은 연한 황갈색의 머리, 곱슬머리, 대머리, 백발의 머리들을 보고, 어리둥절해져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랑비가 계속해서 내려 빗방울이 농부들의 머리카락이며, 턱수염이며, 긴 외투의 보풀 위에 방울방울 맺혔다. 농부들은 주인을 바라보고 그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네플류도프는 몹시 당황했기 때문에 얼른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 같은 불안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침착하고 자신만만한 독일인 관리인이었다. 그는 러시아 농민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를 정확하고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기름기가 흐르고 단단한 체력을 하고 있는 관리인과 네플류도프의 모습은 농부들의 파리하고 주름 투성이의 얼굴과, 그들의 외투 밖으로 삐죽 나온 말라빠진 어깨뼈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번에 공작님께서는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토지를 나누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네들은 그럴 만한 가치조차 없지만."하고 관리인이 말했다.
"왜 우리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거요. 바실리 카롤로비치? 우리가 당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우린 돌아가신 마님한테 큰 은혜를 입었습죠. 마님의 명복을 빌고 있습니다! 젊은 공작님께서도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니 고맙습니다." 수다스러운 붉은 머리의 농부가 말했다.
"그래서 오늘 당신들을 모이게 한 것입니다. 당신들이 원한다면, 토지를 전부 당신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플류도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농부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어떻게 토지를 나누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하고 소매 없는 긴 조끼를 걸친 중년의 농부가 네플류도프에게 물었다.
"싼값으로 토지를 쓸 수 있도록 빌려 주려는 겁니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하고 노인 한 사람이 말했다.
"빌려 주신다는데 뭘 그래."
"당연한 일이지. 우린 땅 없이는 살 수가 없으니까!"
"지주님에게는 그 편이 안심일 겁니다."
여러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단지 땅값만 거둬들이면 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귀찮은 일이 많습지요."
"귀찮은 일은 언제나 당신들 때문에 일어나."하고 독일인이 말했다. "당신들이 일을 잘해 주고 질서 있게 규칙을 지켜 주기만 한다면야......"
"말이야 쉽지요. 바실리 카롤로비치." 하고 날카로운 코에 말라빠진 작은 노인이 말했다.
"왜 밀밭에다 말을 들여 놓았느냐고 야단이지만, 누가 그런 짓을 일부러 하겠습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1년을 하루같이 낫자루나 무슨 연장을 휘두르며 일하고 나면 밤에 말을 감시할 땐 그만 곯아떨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말이 당신네 밀밭에 들어갔다고 해서 마구 들볶으니 말이에요."
"그러니까 규칙을 지키란 말이요."
"규칙! 규칙! 말로는 쉽지만, 우리 힘엔 겨운 일입니다." 하고 털북숭이의, 머리카락이 검고 별로 나이가 많지 않은 키가 큰 농부가 반박했다.
"그러니까 울타리를 하라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재목을 주십시오." 하고 몸집이 조그마한 초라한 모습의 사내가 끼여들었다.
"나는 여름에 울타리를 하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당신은 3개월 동안이나 나를 감옥에 가두어서 이의 밥으로 만들지 않았어요? 울타리를 만들려면 이런 꼴이 된다니까, 글세!"
"저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네플류도프가 관리인에게 물었다.
"저자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도둑놈입니다." 하고 관리인이 독일어로 대답했다. "매년 숲속에서 잡혀오는 녀석입니다. 너는 남의 재산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부터 배워야 해." 관리인이 말했다.
"그래, 우리가 당신을 소홀히 대했다는 말이오?" 하고 한 노인이 말했다. "우리는 당신 손에 꽉 쥐여 있으니 당신을 소중히 모시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라면 우리들을 엮어서 밧줄이라도 만들 수 있는 신분이 아니냐고요."
"무슨 소리야! 당신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당신들을 괴롭힌단 말이야. 제발 당신들이나 나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뭐라고요? 괴롭히지 않았다고요? 작년 여름, 나를 때리지 않았소? 그래도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어요. 돈을 가진 사람하고는 겨룰 자격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규칙대로 하란 말이야."
이렇게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다투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다투고 있는지, 또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뚜렷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한편에는 공포에 억눌린 원한이 있고, 또 한편에는 우월감과 권력이라는 의식이 있다는 것 뿐이었다. 네플류도프는 그 같은 입씨름을 듣고 있는 것이 괴로워서, 본론으로 말머리를 돌려 보려고 했다. 그래서 땅값과 지불 기한을 결정하려고 했다.
"대체 토지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들은 내가 말한 대로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토지를 전부 빌려 드린다면 땅값은 얼마로 하면 좋겠습니까?"
"지주님의 땅이니 가격도 정하시지요."
네플류도프는 가격을 말했다. 그러자 네플류도프가 부른 가격은 이 고장에서 부르는 가격보다 훨씬 싼값이었지만, 농부들은 늘 하는 식으로 비싸다고 값을 깎기 시작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의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었지만, 농부들에게서는 조금도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네플류도프는 다음의 이유에서 그의 제안이 그들에게 유리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누가 토지를 빌리느냐, 다시 말하면 전체의 농부의 이름으로 빌리느냐, 그렇잖으면 조합을 만들어서 빌리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지불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제외하자는 농부들과 제외당하는 농부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관리인의 중재로 땅값과 지불 기간이 결정되었다. 농부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언덕길을 내려가 마을로 돌아갔다. 네플류도프는 관리인과 같이 계약서의 문안을 만들기 위해 사무소로 갔다.
모든 것이 네플류도프가 원하고 기대했던 대로 되었다. 농부들은 그 지방일대의 땅값보다 3할이나 싼 값으로 토지를 빌려 쓰게 되었다. 영지로부터 나올 수입은 반감되었으나, 그래도 네플류도프에게는 충분했다. 특히 산림을 판 대금과 농기구를 팔아 들어올 금액을 가산하면 오히려 남아돌아갈 정도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잘되어 가는데도 왠지 네플류도프는 그 무언가가 양심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농부들 중에는 고맙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으며, 뭔가 좀더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결국 그는 많은 재산상의 손해를 보면서도 농부들이 기대했던 것을 채워 주지 못한 셈이 되었다.
이튿날, 가계약서에 서명한 네플류도프는 마을의 대표로 뽑혀 온 노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무엇인가 불쾌한 마음으로, 전날 정거장에서 타고 올 때 마부한테서 들은 관리인의 잔뜩 뽐낸 삼두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뭔가 미완성으로 떠나는 불유쾌한 감정으로 정거장으로 마차를 몰았다.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선 채 불만족스러워 머리를 흔드는 농부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출발했다. 네플류도프 자신도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어떤 점이 만족스럽지 못한지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으나, 그는 시종 뭔가 서글프고 수치스러운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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